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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법어집] 염화인천(拈花人天)
법문장소 admin (법문일자 : 1970.02.01 / 조회 : 8188)

염화인천(拈花人天)


차례

 ■ 서문(序文)
 ■ 자서(自序)

1. 삼처전심
2. 활구참선법
3. 불기 2541년 4월 8일 부처님 오신 날 - 38
4. 제일구 법문
5. 백척간두
6. 신심도원
7. 불조정안
8. 실중사관
9. 양구
10. 앙굴마라와 산모난산
11. 산심수한
12. 단하소불
13. 능행파 거량
14. 삼성 보수 호환지기
15. 기사회생
16. 홀우금시조
17. 위산 삼부자의 해몽
18. 남전 주암시
19. 천수천안 중 정안
20. 파조타 선사의 신 제도
21. 투자 선사의 기봉
22. 오백나한 변작수고우
23. 서경 수검마
24. 임제 사료간
25. 위산의 수고우
26. 일일호일
27. 청원 행사
28. 운암 대비수안
29. 태전 선사의 관색관공즉색공
30. 설봉의 삼처상견
31. 기림의 목검
32. 석공의 살활전
33. 여래어
34. 장사 선사의 유산(遊山)
35. 보화 존자의 시성(是聖) 시범(是凡)
36. 불진법신(佛眞法身)
37. 앙산의 마설
38. 만리무촌초거
39. 현자 화상의 신전주대반
40. 용아의 선판
41. 무위진인(無位眞人)
42. 위산의 체와 용
43. 임제 보화의 공양청
44. 대수의 수타거
45. 위산의 노자우(老牸牛)
46. 동산의 한명(閑名)
47. 황벽의 주조(酒糟)
48. 암두의 말후구
49. 동산의 과자 공양차
50. 삼성의 불위인(不爲人)
51. 조과 선사의 포모(布毛)
52. 반야위체
53. 임제 선사와 왕 상시의 문답
54. 정법안장
55. 백의 재상
56. 조주의 바자감파
57. 조주 끽다거
58.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 추대법어
59. 대매 선사 즉심즉불
60. 기초선원 법어
61. 부산불교연합회 유등법회
62. 부처님 오신 날 봉축 법어
63. 참선하는 법
64. 법보신문 기자회견 내용
65. 영조의 차수
66. 연등대제
67. 조사(弔辭)
68. 남원의 일 방
69. 무정설법
70. 천상천하 유아도존
71. 석가 달마도 다시 참구해야 옳다
72. 본래신
73. 파초 주장자
74. 호리유차 천지현격
75. 만상지중 독로신
76. 풍혈 혈우지기
77. 일러도 삼십 방 이르지 못해도 삼십 방
78. 불조의 행리

■ 후기

서문(序文)

진제야시비진제(眞際也是非眞際)
금오야반천외비(金烏夜半天外飛)
철가독표도열한(鐵舸獨飄渡列漢)
할하동해령도류(喝下東海令倒流)

진제는 또한 이 진제가 아니니라.
금까마귀는 밤에 하늘 밖을 낢이로다.
철 배는 홀로 나부끼며 열한(列漢)을 건너가고
할(喝) 아래 동해는 거꾸로 흐름이로다.

古佛叢林
方丈 西翁 謹識


자서(自序)

千聖의 頂額上一句는 千聖도 也不知로다.
頂額上一句를 透過하여야만 諸佛諸祖의 甚深用心處를 一串에 穿却하고 提掇正令하여 秉佛祖之鉗鎚하야 截斷衆流하고 東湧西沒하며 逆順縱橫하여 與奪自在라. 所以로 照用同時며 卷舒並行이라.
大用現前에 不存軌則이라.
有時에는 將丈六金身하여 作一莖草用이며, 有時에는 將一莖草하여 作丈六金身用이라. 吹毛劍在手에 殺活臨時요 死中得活하고 活中得死하야사 轉身自在라.
運出自己家珍하여 高低普應하고 前後無差하여 各各現成이라.
恁麽田地라사 參學事畢이라.

천성의 정액상 일구는 천성도 또한 알지 못하도다.
정액상 일구를 투과해야사 제불 제조의 깊은 용심처를 한 꼬챙이에 꿰어 정령을 잡들이고, 불조의 겸추를 잡아 중류를 절단하고 동에서 솟고 서에서 잠기며 역순종횡하여 주고 빼앗음에 자재함이라. 그러므로 조용동시며 걷우고 폄을 병행함이라.
대용이 현전함에 궤측을 두지 않음이라.
어느 때는 장육금신을 가져서 한 줄기 풀을 지어 쓰며, 어는 때에는 한 줄기 풀을 가져서 장육금신을 지어 씀이라.
취모검이 손에 있음에 죽이고 살리는 때에 당하여 죽는 가운데 삶을 얻고 삶 가운데 죽음을 얻어야만 온 힘을 굴려 자재함이라. 자가의 보배를 운출하여 높고 낮음에 널리 응하고 전후에 어긋남이 없어서 각각 현성함이라.
이러한 전지라야만 참학사를 마침이라.

불기2542년 3월 16일 장수산 해운정사
금모선원 조실 진제법원


1. 삼처전심(三處傳心)

상당(上堂)하시어 주장자(拄杖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불기섬호수학심(不起纖毫修學心)하면
 무상광중상자재(無相光中常自在)라.
 무한낙화수류거(無限落花隨流去)하고
 석양춘색만강호(夕陽春色滿江湖)로다.

 털끝만큼이라도 닦아 배울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상(相)이 없는 빛 가운데 항상 자재(自在)함이라.
 무한한 낙화(落花)는 흐름을 따라가고
 해 저문 봄빛이 강호(江湖)에 가득하도다.

세존께서 영산(靈山)에서 설법하시는데 하늘에서 네 가지 꽃이 내리거늘, 세존께서 그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니 가섭이 빙그레 웃었다. 이에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있는데 마하 가섭에게 전해 주노라.”하셨다.

대중은 부처님께서 꽃을 드신 뜻을 알겠느냐?

양구(良久)하신 후 이르시되,

 지만상 갱생지만(枝槾上 更生枝槾)
 나뭇가지 위에 다시 나뭇가지가 생기도다.

세존께서 다자탑 앞에서 인간과 하늘의 무리에게 설법을 하시는데 가섭이 늦게 도착했거늘, 세존께서 자리를 나누어 앉으시니 대중이 모두 어리둥절했다.

대중은 세존께서 자리를 나누어 앉으심을 알겠느냐?

양구하신 후 이르시되,

 로(露)
 드러남이라.

세존께서 49년 설법을 다 마치시고 사라쌍수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7일이 지나서 가섭 존자가 늦게 이르러 관(棺)을 세 번 도니, 세존께서 관속에서 두 발을 내어 보이시거늘 가섭 존자가 예(禮)를 올리니 대중이 어리둥절했다.

대중아!
세존께서 말후(末後)에 곽시쌍부(槨示雙趺)하시니, 도리어 알겠는가?

 시십마시절(是什麽時節) 임마래(恁麽來)?
 간각하(看脚下)

 이 무슨 시절이관대 이렇게 옴인고?
 다리 아래를 보소서.

하루는 부처님께서 설법을 마치시자 청법(聽法) 대중이 모두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는데, 한 여인이 부처님 근좌(近座)에서 좌정한 채 자리를 뜰 줄 몰랐다. 문수 보살이 그 광경을 보고 부처님께 여쭙기를,
“대중들이 모두 돌아갔는데, 어찌하여 저 여인은 자리를 뜨지 않고 저렇게 앉아있습니까?”하니, 부처님께서 이르셨다.
“저 여인이 정(定)에 들어 있으니, 문수 너의 신력(神力)으로 저 여인이 정에서 나오도록 한번 해 보아라.”
말씀이 떨어지자 문수 보살이 신통으로 백천 문수를 허공중에 나투고, 위요삼잡(圍繞三匝)을 하고, 탄지(彈指)를 해보았는데, 여인은 정에서 나오지 않았다. 부처님께서 그 광경을 지켜보시고는,
“문수야, 네가 비록 백천 신통묘용(百千神通妙用)을 나투어도 너의 신력으로는 저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 할 수 없다. 하방(下方) 42국토를 지나가면 망명(罔明)이라는 초지 보살(初地菩薩)이 있는데, 그이라야 저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 할 수 있다.”라고 하셨다.
그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망명 보살이 땅에서 솟아나와 부처님께 예배를 올렸다. 부처님께서 입정(入定)한 여인을 가리키시며,
“저 여인이 정에 들어 있으니, 망명 네가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 해 보아라.”하시니, 망명 보살이 여인을 향하여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여인이 바로 정에서 나왔다.

이 ‘여자출정화(女子出定話)’ 법문은 세존의 삼처전심(三處傳心)의 법문 외에 특별히 고준(高峻)한 공안(公案)을 제시함이로다.
이 공안을 투과하면 백천 삼매(百千三昧)와 무량 묘리(無量妙理)를 알아 얻어서 천상(天上) 인간에 만인의 진리의 사표(師表)가 될 것이다.

대중아!
문수 보살은 과거 칠불(七佛)의 스승이어늘 백천 신통과 무량한 방편을 다해도 그 여자를 정에서 나오게 하지 못하였는데 망명 보살은 초지 보살로 손가락 한 번 튕기는 사이에 여자가 정에서 나왔으니, 이 어찌된 연고냐?

대중은 도리어 알겠는가?

양구하신 후 이르시되,

 해고종견저(海枯終見底)니와
 인사부지심(人死不知心)이로다.

 바다는 마름에 마침내 그 밑을 볼 수 있으나
 사람은 죽어도 그 마음은 알지 못한다.

주장자로 법상(法床)을 한 번 치시고 하좌(下座)하시다.

병자년(1996년) 하안거 결제일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


2.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우리가 출가(出家)한 본래의 뜻은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그러면, 견성성불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정진해야 되느냐?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야 된다. 고인(古人)네들, 명안종사(明眼宗師)들도 활구(活句)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다.
“다만 활구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는 말라.” 또,
“활구를 참구하면 부처님과 조사(祖師)의 스승이 된다.”는 등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그러면, 사구를 참구하면 어떠하냐?
견성성불은커녕 자기 자신도 구제하기 어렵다. 이렇게 활구와 사구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활구참선은 어떤 것이 활구참선이냐?
일천 성인(一千聖人)의 정액상(頂額上)의 일구(一句)를 투과(透過)해야만 활구가 된다. 일천 성인의 그 이마 위의 일구를 투과하지 못하면 활구의 세계를 전혀 모른다는 뜻이다. 활구의 세계를 투과할 것 같으면 불조(佛祖)의 스승이 된다고 했다. 그러니 일천 성인의 정액상의 일구를 투과할 수 있도록 참구 할지어다. 정액상 일구를 투과한 자는 살활종탈(殺活縱奪) 기용제시(機用齊示), 즉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주기도하고 빼앗기도 하고 기(機)와 용(用)을 가지런히 쓰는 수완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구(死句)는 도저히 이러한 자재의 수완을 갖출 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도 구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기초선원의 모든 대중은 이러한 법문을 듣고 천성(千聖)의 사표(師表)가 될 수 있도록 혼신의 정력을 쏟아야 한다.
다겁 다생 동안 중생 놀음만 익혀 왔기 때문에 이 견성법, 화두법을 처음 참구하려고 하면 화두가 천리 만리 가 있어서 화두 잡기가 어렵다. 과거 생에 익혀온 습기(習氣)와 혼침, 망상이 자리잡고 있으니 평범한 발심으로는 이 공부를 지어나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늘을 찌를듯한 대장부 용맹의 기틀을 가진 자만이 다겁 다생에 익혀온 습기를 모두 놓아버리고 이 견성법을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용맹과 대신심(大信心)이 없는 사람은 이 화두 공부를 할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대용맹과 대신심을 가지고 공부를 지어나갈 것인가 하면, 오직 눈밝은 지도자인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서 바르게 참구하는 법을 배워 화두를 간택(揀擇)한 뒤 일상생활 속에 자나 깨나 혼신의 정력을 화두에 쏟을 것 같으면 자연히 습기는 잠자고, 간절한 한 생각이 물 흐르듯이 도도히 흘러가게 되는데 화두가 도도히 흘러가서 깊이 들어가면, 의심삼매(疑心三昧)가 현전(現前)해 가지고 밤이 되는지 낮이 되는지 모르고 나중에는 몸뚱이까지 잊은 상태에서 홀연히 보거나 듣거나 하는 찰나에 화두가 타파된다.
우리도 제불제조(諸佛諸祖)와 똑같은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는데 대용맹, 대신심을 자진다면 못할 것이 없어. 그래서 옛 도인네들이 말씀하시기를,
“의심이 크면 클수록 깨달음도 크다.”고 하셨는데 의심이 크다보면 진의(眞疑)가 발로(發露)되어서 온 천지가 의심덩어리가 되는 것이지. 그렇게 되어야만 화두가 해결이 되는 것이다.
요즈음 참선하는 이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화두를 챙기고 있는지 잠을 자는지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어. 화두를 들고 뼈골에 사무치는 의정(疑情)을 지어가는 사람이 없단 말이지. 그만큼 생각이 죽었다는 거지.
부모 형제를 어느 산적이 와서 한 칼에 다 베어버리고 혼자만이 그 광경을 보는 심정이 어떻겠어? 그러한 심정에서 화두를 챙길 것 같으면 혼침 망상이 어른거리지 못한다.
이렇게 화두를 챙길 것 같으면 3년 이내에 다 화두가 타파된다.
공부 한 철 지어 가는데 있어서 지겹다는 생각이 있으면 출가인으로서는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어서 석 달이 지나갔으면, 어서 또 바랑을 짊어지고 산천(山川) 구경을 같으면, 이런 등등의 생각들이 있다면 납자(衲子)로서는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 모든 반연을 놓아버리고 오로지 일념삼매(一念三昧)에서 화두가 지속이 되어나가도록 정진하고 또 정진해 나간다면 시절 인연을 따라 홀연히 화두가 타파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화두가 타파 되면 앉은 그대로 여래지(如來地)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최고의 견성법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깨달은 후에 ‘삼칠일 동안 사유(思惟)해도 내가 법을 설하지 않고 열반에 드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셨다. 참으로 부처님의 첫 살림살이로서 위대한 말씀인 것이다. 천성 만불(千聖萬佛)도 토하지 못하는 말씀이지.
이때에 문수보살이 옆에 있다가,
“부처님이서여, 깨달으신 법은 그러하나 방편으로서 하근(下根) 중생을 위하여 얕은 법을 설하여 주옵소서.”하니, 할 수 없이 그 수순을 밟기 위해서 사십 구 년 동안 설법을 하셨는데 마지막 열반 당시에 대중을 모아놓고 하시는 말씀이,
“내가 사십 구 년 동안 사람의 그릇을 따라, 분(分)을 따라 법을 설하였으나 실로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하셨거든. 이 멋진 일성(一聲)을 바로 들을 줄 알아야만 사십 구년 설법이 어린아이들 울음달래기 위한 방편설인 줄로 이해가 될 것이야.
그러면,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것은 어디로 쫓아 형성이 되었느냐?
부처님으로부터 28대 보리 달마(菩提達磨)를 좇아서 중국의 오조(五祖) 홍인(弘忍) 선사에 이르러 법을 전해 줄 지음자(知音者)를 찾기 위하여 어느 날 대중에게,
“모두 그 동안 공부하여 깨달은 바를 글로 지어 오너라.”하시니, 신수(神秀) 스님이 며칠 동안 계교(計巧)를 하고 계교를 해 가지고 글을 지어 바쳤다.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요
 심여명경대(心如明鏡臺)로다.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하야
 물사야진애(勿使惹塵埃)어다.

 몸은 이 보리(菩提) 나무와 같고
 마음은 명경대와 같다.
 때때로 부지런히 텉고 닦아서
 먼지, 티끌이 앉게끔 말지어다.

‘시시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밝은 거울에 먼지가 앉게끔 말지어다.’라고 한 이것이 점수 사상이다. 돈오 견성과는 거리가 멀거든.
그래서 오조 선사가
“이 게송을 외우고 열심히 닦는다면 삼악도(三惡道:지옥,아귀,축생)에 떨어짐은 면하리라.”하시니, 모든 대중들이 신수 스님의 게송을 외우고 있었다. 그때에 어느 사미(沙彌)가 외우고 다니는 것을 노 행자(盧行者)가 듣고는 사미에게 부탁하기를,
“나도 한 게송을 지을 테니 나를 대신해서 하나 써서 붙여다오.”했거든.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요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라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어니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리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
 밝은 거울 또한 대(臺)가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어느 곳에 티끌, 먼지가 있으리오.

오조 선사께서 이 게송을 보시고는 흡족하셨지마는 대중들이 시기를 할까 염려하시어,
“이것도 견성구(見性句)가 아니다.”하면서 그 게송을 지워버렸다. 나중에 아무도 모르게 노 행자가 방아를 찧고 있는 곳을 찾아가서 아주 기특하게 여기시면서,
“방아는 다 찧었느냐?”하고 한 마디 말을 건네니,
“방아는 찧은 지가 오래 됩니다마는 아직 택미(擇米)를 못했습니다.”
누구든지 깨달으면 이렇게 바른 진리의 문답이 상통되는 법이다.
그래서 주장자를 가지고 방앗대를 세 번 치고는 돌아와 버렸거든. 삼경(三更)이 되면 아무도 몰래 찾아오라는 신호지.
그래서 밤중에 노 행자가 찾아 들어오니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가사(袈裟)로 휘장을 쳐서 은밀하게 금강경을 설하는데,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니라.
 응당히 주(住)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낼지니라.
하는 여기에 여지없이 대오(大悟)를 했거든.

 하기자성본자청정(何期自性本自淸淨)이며
 하기자성본불생멸(何期自性本不生滅)이며
 하기자성본자구족(何期自性本自具足)이며
 하기자성본무요동(何期自性本無動搖)이며
 하기자성능생만법(何期自性能生萬法)이리오.

 자성이 본래 청정한 줄 어찌 알았으며
 자성이 본래 생멸이 없는 줄을 어찌 알았으며
 자성이 본래 만법이 구족함을 어찌 알았으며
 자성은 본래 동요도 없는 줄 어찌 알았으며
 자성을 좇아 만법이 나는 것을 어찌 알았으리오.

이렇게 게송을 지어 바치니 여기에서 오조 선사께서는 노 행자가 크게 깨달은 것을 아시고 의발(衣鉢)을 전하여 육대조(六代祖)로 봉(封)하셨다.
오조 선사는 신수 스님의 게송을 보고는 문외한(門外漢)이라고 하셨거든. 진리의 문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뜻이지. 법을 전해받은 육조(六祖) 선사가 시절 인연이 도래하여 무수한 납자들을 제접하면서 어느 날 법문을 하시기를,
“가사(假使)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위로는 하늘을 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받치고 밝기로는 일월(日月)보다도 밝고 검기는 옻칠보다도 검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되 일상 동용(日常動用) 중에 가고 오고 말하는 가운데 쓰고 있으면서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 무엇인고?”
이렇게 물으니 하택(荷澤) 스님이 일어나서 답을 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신회(神會)의 불성(佛性)입니다.”하니,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다고 했는데 무슨 소리냐?”하고 호통을 쳤어.
그 후 7년 만에 회양(懷讓) 선사가 찾아와서 답하기를,
“설사 한 물건[一物]이라도 맞지 않습니다.”하니, 육조 선사가 말씀하셨다.
“그러면 닦아 증득하는 법은 어떻게 생각하는고?”
“닦아 증득함은 없지 아니하나 오염될 순 없습니다.”
육조 선사가 말하기를,
“다만 이 오염되지 않음은 모든 부처님께서 호념(護念)하시는 바라, 네가 벌써 이러하고 나도 또한 이러하니라.”하니, 흡족하시어 제자로 봉한 것이거든.
그래서 돈오 돈수와 돈오 점수는 오조 선사와 육조 선사가 이렇게 분명히 선을 그어 놨어.
점수를 주장하는 이는 오조 선사 회상에 신수 스님, 육조 선사 회상에 하택 스님이 있는데, 견성을 하지 못한 지해 종도(知解宗徒)들이 모두 점수를 정법(正法)이라고 주장해서, 그 법 오늘날까지 전래되어 있다. 견성을 하지 못한 스님들이 그렇게 그릇되게 지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정안(正眼)의 법을 면밀히 이은 종사(宗師)는 돈오돈수, 즉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를 다 제창했다. 중국에서 선종(禪宗)이 크게 흥행할 적에도 그 오종가풍(五宗家風)이 모두 돈오돈수 사상으로 만 중생을 접인(接引)했지 점수는 꺼내지도 않았다. 점수는 견성법 앞에 도저히 어른거릴 수도 없는 얕은 진리의 법이다.
그래서 마조(馬祖) 선사 밑에 84인의 도인(道人) 제자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천성(千聖)의 정액상(頂額上)의 안목을 갖춘 도인이 두서너 분 계신다. 남전(南泉), 백장(百丈), 귀종(歸宗) 이런 유명한 분들인데 어느 납자가 귀종 도인을 찾아가서
“어떤 것이 보임(補任)입니까?”하고 물으니,
“눈에 한 티가 가리면 허공 꽃이 어지러이 떨어진다.[일예재안 공화난타(一瞖在眼 空花亂墮)]”라 하셨거든.
이러한 안목을 갖춰야 비로소 선지식이라고 할 수 있지. 천하 사람들의 눈을 안 멀게 하거든. 보통 정안이 바로 열리지 못한 분들에게 ‘보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토굴에 가서 습기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지 귀종 선사처럼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모든 눈 먼 선지식들이 헛된 소리를 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일천 성인의 이마 위의 일구를 투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리 나라의 태고 보우(太古普愚) 선사 같은 분은 중국의 석옥(石屋) 선사를 찾아가서 당당히 겨루어 살림을 주고받고 하여 법을 받아온 것이다. 그 주고받은 살림살이가 온 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달마 조사와 같은 위상으로서 존경받고 그 아손(兒孫)이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그러니 모든 대중은 삼년 혹은 십 년 이내에 견성대오를 해야되겠다는 각오로서 정진에 몰두해야 된다. 조석(朝夕)으로 예불할 때마다 큰 발원을 세워 ‘화두가 일념으로 지속되어 활연대오(豁然大悟) 하여지이다.’하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심으로 정진해 나간다면 하루하루가 새로워진다.
이러한 신심과 용기를 갖추지 아니하면 태풍이 조금 불어도 다 쓰러져 버린다. 그러니 견성을 하려고 출가하여 절집에 왔으니 새로운 각오를 가져야 된다. 이 몸뚱이에 집착하여 먹고 자고 하는 일에 마음을 쓴다면 공부를 지어 나갈 수가 없어. 사문(沙門)으로서는 절집에서 불평이나 하고 잘 먹고 잘 자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지. 그저 앉으나 서나 화두와 씨름해가지고 견성해야겠다는 생각 이외에는 다른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니 우리 기초 선원 대중은 못난 소견부터 버릴지니 옛날 백장(百丈) 선사께서는 수도인의 일상생활 가풍을 내린 법문이 있는데 오늘날 수도인(修道人)에게 적절한 법문이다.

 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이라.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밥을 먹지 아니한다.

이 경구(警句)는 우리 수도인에게 귀감이 되리라고 본다.

이 참선 공부는 동정(動靜)에 일여(一如)하게 지어가는 데 있는 것이지 앉아 있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대중은 각자 소임에 성실한 가운데 화두를 또록또록 들어서 일념이 지속되게끔 노력할지어다.
사람마다 심성(心性) 가운데 제불 만조사(諸佛萬祖師)와 더불어 똑같이 갖추어져 가지고 있는데 단지 알지 못하는 고로 쓰지 못하고 있거든. 그러니 자재(自在)하게 쓰기 위해서는 이 공부를 일생을 걸고 열심히 지어나가야 된다.
화두와 씨름을 하다가 보면 무르익어져 바보처럼 되어 버리는데, 사람들이 옆에서 볼 때 저 사람이 혼이 나간 사람이다 하게끔 그렇게 일념에 푹 빠져야 한다. 거기서 타파되면 사자후(獅子吼)가 나오는 법이지. 사자후가 나오면 석가모니 부처님 살림부터 다 알게 되고 모든 조사(祖師)의 살림을 한 꼬챙이에 꿰어버리거든. 이것이 견성(見性)이다. 그리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이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어떠한 것이 정액상의 일구냐고 물으면,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조도탄(遭塗炭)이라.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진흙탄을 만남이로다.
하리라.

할(喝)!
일 할(一喝) 하시고 법상을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9월 25일
대구 팔공산 동화사 기초선원 소참법문


3. 불기2541년 4월 8일 부처님 오신 날에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세존(世尊)께서
 미리도솔(未離兜率) 이강왕궁(已降王宮)
 미출모태(未出母胎) 도인이필(度人已畢)

 부처님께서
 도솔천을 여의지 아니 하시고 왕궁에 내리셨고,
 마야 부인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모든 사람을 다 제도해 마침이라 하셨다.

대중은 알겠느냐?

 저성저성(低聲低聲)하소서.
 조용히 말하고 조용히 말하소서.

이 법문은 참으로 알기가 어려운 법문이라 부처님의 지혜의 경지를 증득하여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느냐?

부처님께서 마야 부인의 태중에서 오른 쪽 옆구리를 통해 나오시니 아홉 마리의 용이 향수를 토해서 목욕을 시켜드린 연후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떼어 놓고,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하늘 위 하늘 아래 나만이 홀로 높다.’ 하셨다.
부처님께서 대도를 깨닫고 보니 나만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팔만사천의 지혜와 덕상(德相)을 갖추고 있는 것을 설파하셨다.
부처님께서 오신 뜻은 이 고귀한 진리의 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오셨다.
부처님께서는 자성(自性)의 심인법(心印法)을 깨달으셨다.
만인(萬人)이 구족되어 있는 마음의 바탕을 증득하면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셨다. 부처님만 이렇게 진리의 법을 깨달아서 출태(出胎)와 입태(入胎)에 자재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 때 조주(趙州) 도인도 10세 미만의 동치(童稚)로서 출가하여 스스로 진리의 문답이 척척 나왔으니 이 어찌된 것이냐?
부처님의 진리의 법이 열린 이는 여러 번 몸을 바꾼다 해도 깨달은 바가 항시 밝아 있나니, 조주 도인이 10세 미만의 아이로서 출가를 하셔서 노스님 회하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하도 영리해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고, 열을 물으면 백을 답하는 그런 기틀을 가진지라. 그래서 암자의 노스님이 더 이상 가르칠 능력이 없어서 그 당시 유명한 남전 도인을 찾아가 지도를 부탁드리려고 수백 리 길을 걸어서 남전(南泉) 도인 회상에 이르러서 남전 도인께 인사를 드리고 나서
“제가 사미승을 데리고 왔는데 저의 능력으로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으니 선사께서 훌륭한 도인이 되게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부탁을 드리고 방을 나와서 사미승을 남전 도인 방에 들여보냈다.
남전 도인께서 누워 계시는데 어린 사미승이 누워 계시는 남전 도인을 보고 예를 드리니 남전 도인이 물었다.
“어디서 왔는고?”
“서상원(瑞像院)에서 왔습니다.”
“네가 서상원에서 왔을진대 상서(祥瑞)로운 상을 보았느냐?”
“상서로운 상은 보지 못했으나 누워 계시는 부처님은 보았습니다.”
그러자 남전 도인이 벌떡 일어나 앉아 다시 물었다.
“네가 주인이 있는 사미냐, 주인이 없는 사미냐?”
“주인이 있는 사미입니다.”
“어떤 것이 주인이 있는 사미냐?”
그러니 사미가 예를 드리며
“선사님, 정월달이 대단히 추우니 귀하신 법체(法體) 유의 하옵소서.”하니 남전 도인이 원주(院主)를 불러,
“이 사미승을 깨끗한 방에 잘 모셔라.”하셨다.

누구든지 수도를 해서 부처님의 바른 진리의 눈이 열리면 이와 같이 자재(自在)하게 쓸 수가 있는 것이다.

백장(百丈) 선사께서 백장산(百丈山)에 회상(會上)을 여니, 스님네와 신도들이 무수히 수행을 했다.
그런데 백장 선사께서 상당(上堂)하시어 법문을 하실 때마다 흰 속복(俗服)을 한 노인이 법문을 듣고는 대중들과 함께 돌아가곤 하였다.
하루는 법문이 끝나고 대중들이 각기 처소로 돌아갔는데도 그 노인이 가지 않으므로 백장 선사께서 물으셨다.
“거기 서 있는 이가 누구냐?”하니 노인이,
“제가 과거 가섭불 당시에 이 백장산에서 회상을 열어 많은 대중을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그때, 어느 학인(學人)이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因果)에 떨어집니까?’ 하고 묻기에,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라고 했다가 그 후 오백 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았습니다. 바라옵건대 스님께서 대자비(大慈悲)를 베푸시어 이 업보(業報)의 몸을 면하게 해 주옵소서.”하고 간청하였다. 그러자 백장 선사께서 말씀하셨다.
“옛날 학인이 그대에게 물었던 것과 같이 그대가 나에게 다시 물어라.”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인과에 어두워지지 않느니라.[不昧因果]”
백장 선사의 이 한마디 말씀에 크게 깨닫고 노인이 다시 예배를 올리고 하는 말이,
“스님, 이제 스님의 법력으로 여우 몸을 벗고 괴로움이 없는 천상락을 받아가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제가 법당 뒤 산중턱 바위굴에 여우 몸을 벗고 가리니, 선사께서 스님들이 돌아가셨을 때와 똑같이 다비(茶毘)해 주십시오.”하고는 예삼배(禮三拜)를 올리고 갔다.
그런 후에 백장 선사께서 시자(侍者)에게 열반종(涅槃鐘)을 치게 하셨다. 대중이 그 소리를 듣고는 이상히 생각하되, ‘그간에 병난 이가 없었는데···’ 하고 모두 의아해 하면서 가사와 장삼을 수하고 모여들었다.
백장 선사께서,
“다비할 일이 있으니, 모두 뒷산 바위굴로 가자.”하시어 대중이 모두 바위굴에 올라가 보니, 큰 여우 한 마리가 죽어 있기에 스님네 다비 절차와 똑같이 화장(火葬)을 해서 천도(薦度)하였다.

불법의 진리는 심오해서 바른 말 한 마디 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법을 펴서 만인을 제도한다는 것이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모르고 그릇 횡설수설하면 만인의 눈을 멀게 하고 부처님의 고귀한 진리를 그르치는 고로 살인(殺人) 이상의 과보가 따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전 백장(前百丈)이 불락인과(不落因果)라 하여 오백 생 동안 여우 몸을 받았다가 후 백장(後百丈)의 불매인과(不昧因果)라는 한 마디에 업보신(業報身)을 벗고 갔다.

대중아!
떨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이 옳으냐, 매하지 아니한다는 것이 옳으냐?

대중이 말이 없으니 스스로 이르시기를,

 불락불매투척해중(不落不昧投擲海中)하고
 만인봉두취태평가(萬仞峰頭吹太平歌)로다.

 불락불매를 바다 속에 던져버리고
 만 길 높은 봉우리에서 태평가를 부름이로다.

옛날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고,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말이 있는데, 오늘날 사회가 이렇게 혼탁한 것은 탐욕과 허세에 너무 집착한 고로 세상일이 혼란스럽도다.
우리가 다시 각자의 가정부터 새로운 교육상을 정립해야 될 줄 안다. 아이를 키우는 가정에는 아이가 남의 물건을 훔쳐오거나 주지 아니한 물건을 가져왔다든가 하면, 그럴 때에는 부모가 그 물건을 가져 온 내막을 물어서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도록 아이와 함께 물건을 가지고 그 주인집을 찾아가 주인에게,
“제가 아이를 잘못 가르쳐서 주지 않은 물건을 가져 왔습니다.”하고 백 배 참회를 함으로써 아이가 그 광경을 보고 다시는 탐욕심이 없어지도록 해서 마음속에 다시는 그런 짓을 해서는 아니 되겠다는 것을 심어주어야 이 사회가 밝아지리라고 봅니다. 우리 기성세대가 이러한 참 교육상을 정립함으로써 이 사회가 더욱 밝아지리라고 봅니다.

인생은 무상(無常)하다. 잠시 머물렀다가 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여생(餘生)을 값지게 살아야 한다.
왜 그러냐 하면, 옛 도인들이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은 지혜가 짧아서 그러하다.’ 하셨다. 지혜는 만복(萬福)의 근원이라. 사람들의 생활 속에 참선수행을 꾸준히 닦아 행할 것 같으면, 탐욕심, 애착, 시기, 질투, 공포, 불안 등 이러한 중생의 습기가 다 없어지고 지혜가 밝아지나니, 이러한 지혜를 갖춘 이는 태어날 때마다 출세와 복락을 누리게 된다.
참선이라는 것은 심산(深山)에서 스님네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이 생활 속에 ‘참나’를 찾는 수행을 할 것 같으면, 마음속에 번민과 갈등이 없어지므로 마음 광명의 지혜가 밝아져서 만인에 앞 선, 선견(先見)의 눈을 갖추어서 날 적마다 멋지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필경에 진리의 한 마디는 어떠한고?

 춘삼월(春三月) 호시절(好時節)에 백화(百花)가 만발하여
 그곳을 갔다가 꽃이 떨어짐을 쫓아 다시 돌아옴이로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4. 제일구 법문

 절기한회소살인(切忌寒灰燒殺人)
 좌각백운종불묘(坐却白雲宗不妙)
 유의기시첨의기(有意氣時添意氣)
 불풍류처야풍류(不風流處也風流)

 간절히 찬 재에 죽인 사람을 태우기를 꺼리고
 앉아서 백운을 물리침은 종지(宗旨)가 묘하지 아니함이로다.
 의기(意氣)가 있는 때에 의기를 더하고
 풍류가 없는 곳에 또한 풍류함이로다.

일일(一日)에 수산(首山)* 선사가 대중에게 말하였다.
“제일구(第一句)를 알아 얻을 것 같으면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 됨이요, 제이구(第二句)를 알아 얻을 것 같으면 사람과 하늘의 스승이 됨이요, 제삼구(第三句)를 알아 얻을 것 같으면 자기 구원도 마치지 못한지라.”

만약 사람이 산승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제일구입니까?” 하면,

삼황총상초의의(三皇塚上草依依)니라.
삼황*의 무덤에 풀이 무성한지라.

“어떤 것이 제이구입니까?” 하면,

봉절(棒切)이라도 부방여(不放汝)니라.
몽둥이가 끊어져도 그대를 놓지 않으리라.

“어떤 것이 제삼구입니까?” 하면,

계려궐(繫驢橛)이니라.
나귀를 매는 말뚝이니라.

“그러면 스님은 어느 구(句)에 알아 얻음입니까?” 하면

국수월재수(掬水月在手)하고
농화향만의(弄花香滿衣)로다.

물을 움켜쥐니 달은 손에 있고
꽃을 만지니 향기가 옷에 가득함이로다.

“스님의 가풍(家風)은 어떤 것입니까?” 하면

선불도량청풍기(選佛道場淸風起)요
해리수중보월휘(海裏水中寶月輝)니라.

부처를 가리는 도량에 맑은 바람이 일어남이요
바다 속 가운데 보배달이 빛남이니라.

“만 사람이 오시면 무엇으로 접대합니까?” 하면

가상다반만반족(家常茶飯萬般足)하니
사해만인교화귀(四海萬人敎化歸)로다.

집안이 떳떳해서 차와 밥이 만 가지가 족하니
사방의 만 사람을 교화해 돌아감이로다.

“필경에 한 마디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면

사오백조화류항(四五百條花柳巷)이요
이삼천처관현루(二三千處管絃樓)니라.

사오백이나 되는 즐비한 화류항*이요
이삼천 곳에 피리 불고 거문고 타는 누각이더라.
하리라.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5. 백척간두(百尺竿頭)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산승이 가지고 있는 이 주장자의 진리를 분명히 알 것 같으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지옥에서 만반 고통의 울음을 지음이요,
 부처님을 음해하고 비방하던 제바달다*는 연화대 위에 오름이로다.

이 어찌된 연고냐?

문수와 보현은 보살 가운데 으뜸이신데, 왜 지옥에 들어가서 온갖 고통의 울음을 짓는다고 하느냐?
또, 부처님 아우였던 제바달다는 부처님을 음해하고 불법을 비방한 과보로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는데, 왜 그 자가 부처님의 연화대 위에 오른다고 하느냐?
이 말의 심오한 뜻을 바로 알 것 같으면, 여러 생에 지은 빚을 직하에 다 갚고 억겁이 다하도록 다함이 없는 진리의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의 대도의 진리는 어떠한 것이냐?

 고목용음진견도(枯木龍吟眞見道)요
 촉루안청안초명(髑髏眼睛眼初明)이로다.

 마른 나무에 용의 소리가 나니 참으로 도를 앎이요,
 해골의 눈이 푸르러 있으니 비로소 진리의 눈이 활짝 열림이로다.

이러한 심오한 진리는 소식도 다하고 즐거움도 다함이어니, 만약 이 가운데 사람이 있어서 탁한 가운데 깨끗함이 있는 줄을 알 것 같으면, 참구하는 일을 다 마친 요사인(了事人)이 될 것이다.
부처님의 대도는 허공보다도 넓고 가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외도(外道)들이 비방하려고 해야 비방할 수가 없고, 칭찬하려고 해도 칭찬할 수가 없는 법이다.
우리가 이렇게 90일간 불철주야 참선정진을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심오한 진리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다.
오늘은 그 구순(구旬) 중에 반살림이 되는 날이다. 여러분들이 만약 지나간 45일 동안에 목숨을 걸고 모든 반연과 습기를 다 놓아 버리고 참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화두를 들었을진댄, 개개인이 다 장부의 활계(活計)를 쳤을 것이다.
그런데, ‘알았다’고 나오는 당당한 이가 한 사람도 없으니 대체 그 허물이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온갖 분별, 망상, 혼침에 시간을 다 빼앗긴 고로 화두일념이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허물을 뉘우치고 대오각성하여, 남은 45일간은 마음 가운데 모든 반연을 다 쉬어버리고 오로지 화두와 씨름하고 씨름해서 한 생각이 간단없이 지속되게끔 하라. 한 생각이 지속되는 이 삼매에 들게 되면, 천 사람이면 천 사람이 다 진리의 눈을 뜨게 되어 있다.

장사(長沙)* 선사께서 한 젊은 스님을 시켜서 회 화상(會和尙)*을 찾아가 이렇게 묻게 하셨다.
“스님께서 남전(南泉) 선사를 친견하시기 전에는 어떠하셨습니까?”
그 스님이 회 화상을 찾아가서 장사 선사께서 시키신 대로 물으니, 회 화상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계셨다.
“그러면 남전 선사를 친견한 후에는 어떻습니까?”하고 젊은 스님이 묻자, 회 화상은,
“별 다른 것이 있지 않다.”라고 대답하셨다.
그 젊은 스님이 돌아와서 장사 선사께서 회 화상과의 문답처를 그대로 들어 말씀하시자, 장사 선사께서 들으시고 다음과 같이 송(頌)하셨다.

 백척간두좌저인(百尺竿頭坐底人)
 수연득입미위진(雖然得入未爲眞)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시방세계현전신(十方世界現全身)

 백 척이나 되는 높은 장대 끝에 앉은 이여!
 비록 진리의 문에 들었으나 참진리는 못됨이니,
 백 척 높은 장대 끝에서 모름지기 한 걸음 나아가야만
 시방세계에 전신을 나투리라.

도안(道眼)이 열리면 이렇게 남의 살림살이를 바르게 점검할 줄 아는 눈을 갖추게 되는 법이다. 이것이야말로 천고에 가장 고귀한 것이다.
어느 스님이 이것을 들어 염관(鹽官)* 선사께 여쭙기를,
“백 척이나 높은 장대 끝에서 어떻게 나아갑니까?”하니, 염관 선사께서는
“백 척이나 되는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나아갈 것이 뭐 있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장사 선사께서는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나아가야만 옳다고 했는데 염관 선사께서는 나아갈 필요가 없다고 하셨으니,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우리가 참선 공부를 잘 해서 고인의 이러한 살림살이의 장단점을 꼬집어 낼 줄 알아야만 비로소 진리의 바른 눈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대중아!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옳으냐, 나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옳으냐?

대중이 아무 말 없자 스스로 이르시기를,

 풍행초우(風行草偃)로다.
 바람이 부니 풀이 저절로 흔들림이로다.

어느 날, 장사 선사와 앙산(仰山)* 선사가 만나서 달밤에 달구경을 하며 도량을 거닐었다. 앙산 선사가 달을 가리키며,
“사람 사람이 모두 저렇게 밝은 달을 갖고 있건만, 그 밝은 달을 쓸 줄 아는 사람은 드물다.”하니, 장사 선사가 듣고는 말하였다.
“그러면 그대가 한번 써 보게.”
그러자 앙산 선사가 다시 장사 선사에게,
“그대가 써 보게.”하니, 장사 선사께서는 즉시 앙산 선사의 멱살을 잡아서 땅바닥에 거꾸러뜨려 밟아버렸다.
앙산 선사가 일어나며 장사 선사를 보고,
“흡사 대충(大蟲)과 같구나.”라고 말하였다.
큰 범과 같다는 이 말 가운데는 큰 뜻이 있다.
여기에서 장사 선사가 한 마디 하였더라면 더욱 광채가 났을 것인데 아무 말이 없었다.
산승이 장사 선사와 앙산 선사의 이 문답처를 보건대,

 두 범이 서로 만나 조아(爪牙)를 잘 겨루었으나,
 두 범 가운데 하나가 발톱과 이빨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음이라.

시회대중은 어느 범이 이빨과 발톱을 온전히 갖추지 못하였는지 알겠는가?

여러분께서 이것을 마음 가운데 새기고 염두에 두어 의심하고 의심할 것 같으면, 이것이 곧 참선법이다.
세간의 일에 천 사량(思量), 만 사량을 하여 쓸데없는 기와집을 짓고 쌓아보아야 그것은 업만 될 뿐이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준한 법문을 듣고 마음 가운데 새길 것 같으면 여러 생에 지어온 죄업이 서서히 녹아 없어지고 지혜가 싹트는 법이니 대중은 잘 명심하기 바라노라.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묘년(1987) 동안거 반살림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6. 심심 도원(信心道源)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源功德母)
 장양일체제선근(長養一切諸善根)

 믿음은 도(道)의 원천이고 공덕의 어머니며
 일체의 선근(善根)을 기르느니라.

만약 한 사람이라도 부처님 법에 큰 신심을 발해서 신명(身命)을 돌보지 않고 꾸준히 정진하여 진리의 바다에 들어갈 것 같으면, 온 인류가 그 공덕으로 천상락을 받게 되리라.
믿음은 도의 원천이다.
이 신심의 여하에 따라서 한 생에 깨달음을 얻어 공부를 마친 한가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수십 생을 공부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수도 있다.
우리가 무수한 생을 사람 몸을 받아 만나기 어려운 이 최상승 법문을 얻어 듣고도 바로 행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지극한 신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극한 신심을 갖춘 다음,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 바른 지도를 받아 나간다면 이 주장자 아래나 한 마디 법을 설하는 즉시 깨달을 수 있다. 이 법은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버리고 청정한 마음가짐으로 한 마디 법문을 받아들이는 그 가운데 묘한 이치가 있기 때문이다.

조선 중엽, 벽계 정심(碧溪淨心)* 선사께서 노령(老齡)에 한가히 지내시기 위해 벗으로 노보살을 한 명 데리고 심산(深山)에 들어가 화전(火田)을 일구며 살고 계실 때이다.
그 시절에 어느 발심한 행자가 도를 아는 분을 찾아 전국을 헤매다가, 벽계 정심 선사가 위대한 선지식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그리하여 십년 동안을 묵묵히 감자 농사도 짓고, 나무도 해오고 온갖 시봉을 다 했다.
그러나 그렇게 십년이라는 세월 동안 지극한 정성으로 시봉했건만, 정심 선사께서는 법문 한 마디 설해 주시는 바가 없었다.
행자는 어느 날, 불현듯 십년을 허송했다는 생각이 들어 지게를 팽개쳐버리고 암자를 내려가 버렸다.
정심 선사께서 산책을 나가셨다가 돌아오니, 노보살이
“지엄 행자가 십년 동안 여기 있어봐야 스님께서 법문 한 마디 일러주시는 바가 없다고 가버렸습니다.”하고 사정 얘기를 했다.
정심 선사께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행자가 산중턱을 내려가고 있는 걸 보시고,
“지엄아! 지엄아!”
선사께서 목청껏 행자의 이름을 부르시자, 행자가 듣고는 돌아보았다.
그러자 정심 선사께서,
“이 놈아! 도(道)나 받아 가거라.”하시며 주먹을 내미셨다. 내미는 그 주먹을 보는 순간, 행자는 마음 광명이 활짝 열렸다.
이 분이 바로 정심 선사의 법을 이어 불법을 크게 드날리셨던 벽송 지엄(碧松智儼)* 선사이시다.
지엄 선사는 도를 구하고자 하는 간절한 일념에서 십년을 묵묵히 시봉했던 그 신심으로 도를 깨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법은 허덕이는 마음을 다 쉬고 오로지 부처님의 진리를 깨달아야겠다는 간절한 일념에서 생활해야만 진리에 계합될 수 있다. 마음 가운데 온갖 생각이 가득 차 있으면 아무리 고귀한 법문을 설해 주어도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법이다.

그러면 필경에 일구는 어떠한가?

 천재일상월하(天在日上月下)
 고사산심수한(古寺山深水寒)

 하늘에는 해가 뜨니 달이 지고
 옛 절의 산이 깊으니 물이 차가움이로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신미년(1991) 팔월 보름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7. 불조 정안(佛祖正眼)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영산회상(靈山會上)에
 다자탑전분반좌혜(多子塔前分半座兮)여
 시상가첨야부지(屎上加尖也不知)로다.
 달마(達摩)
 소림구년면벽혜(少林九年面壁兮)여
 기만세인야부득(欺瞞世人也不得)이로다.
 임제할덕산봉혜(臨濟喝德山棒兮)여
 몽리허성연연발(夢裏虛聲連連發)이로다.
 허허(呵呵)!
 회야마(會也麽)?

 영산회상에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나눔이여
 똥 위에 똥을 더함을 알지 못함이로다.
 달마 대사가
 소림굴에서 구년간 면벽함이여
 세인을 기만하려다 또한 뜻을 얻지 못함이로다.
 임제 할, 덕산 방이여
 꿈속에서 헛소리를 연발함이로다.
 허허!
 알고 또 알겠는가?

 낙화유의수유수(落花有意隨流水)나
 유수무정송낙화(流水無情送落花)로다.

 떨어지는 꽃은 뜻이 있어서 흐르는 물을 따라가나
 흐르는 물은 정이 없어서 떨어진 꽃만 보냄이로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을해년(1995) 하안거 결제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8. 실중사관(室中四關)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도부자할(刀不自割)하며 지부자촉(指不自觸)이라.
 곡백오현(鵠白烏玄)하고 송직책곡(松直棘曲)이라.
 재유섬진대영래(纔有纖塵帶影來)하니
 탈체전포무짐역(脫體全拋無朕迹)하리라.
 긍불존(肯不存)하고 낙불립(諾不立)하니
 일편청광사두우(一片淸光射斗牛)하야사
 천상인간득자유(天上人間得自由)하리라.

 칼로써는 스스로 베지 못하며
 손가락으로는 스스로 촉하지 못함이라.
 고니는 희고 까마귀는 검도다.
 소나무는 곧고 가시는 굽은지라.
 겨우 조그마한 티끌이라도 있으면 그림자를 가져 옴이니
 체를 벗어나서 온전히 버려야만 자취가 없으리라.
 긍정도 두지 못하고 허락함도 서지 못하니
 한 조각 맑은 빛이 북두성을 쏘아야
 천상과 인간 세계에 자유를 얻으리라.

청원산(靑原山) 행사(行思)* 선사가 하루는 석두(石頭)* 스님으로 하여금 남악 회양(南岳懷讓) 선사에게 서신(書信)을 전하게 하면서,
“돌아오는 날엔 그대에게 돌부자(鈯斧子)*를 하나 주어서 산에 주하게 하리라.”하였다.
석두 스님이 회양 선사의 처소에 이르러 서신은 전하지 않고 얼른 묻되,
“성인들도 흠모하지 않고 자기의 영식(靈識)도 소중히 여기지 않을 때에 어떠합니까?”하였다. 이에 회양 선사가,
“그대는 어찌 대고생(大高生)*만 묻고 향하사(向下事)는 묻지 않는고?”하니, 석두 스님이 말하기를,
“차라리 영겁(永劫)을 생사(生死)에 빠져 있을지언정 성인들의 해탈법은 구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회양 선사가 말없이 돌아앉으셨다. 그러자 석두 스님이 돌아갔다.
석두 스님이 처소로 와서,
“다녀왔습니다.”하니 청원 선사가 말하기를,
“편지는 잘 전했느냐?”하니 이에 석두 스님이,
“서신도 전하지 못하고 신(신)도 통하지 못했습니다.”하고는 전의 일을 자세히 말하고 다시 청하되,
“지난 날 화상께서 ‘서신을 전하고 오면 돌부자(돌부자)를 주시어 산에 머물게 하리라.’ 하셨는데 지금 주소서.”하니 선사가 발 하나를 드리우셨다.[垂一足] 이에 석두 스님이 절을 하고 남악산(南岳山)에 들어가서 살았다.

‘무딘 도끼[鈯斧子]를 주십시오.’ 하는 데 왜 발 하나를 드리웠는고?

조주(趙州) 선사 회상에서 어느 스님이 석 달 안거를 잘 지내고 해제일에 선사께 예를 올리고 하직 인사를 고하면서,
“석 달 간 선사님 회상에서 잘 지내고 갑니다.”하니, 조주 선사가 말하기를,
“부처 있는 곳에서도 머무르지 말고 부처 없는 곳에도 급히 달아나서 삼천리 밖에서 사람을 만나거든 그릇 들어 말하지 말라.”하니, 그 수좌가 대답하되,
“그러한즉 떠나지 않겠습니다.”하였다. 이에 선사께서

 적양화 적양화(摘楊花 摘楊花)로다.
 버들잎을 딴다, 버들잎을 딴다.하였다.

‘그러한즉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는데 왜 ‘버들잎을 딴다, 버들잎을 딴다.’ 하였는고?

덕산(德山)* 선사가 어느 날 공양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손수 발우를 가지고 식당으로 가니, 설봉(雪峰)* 스님이 보고 말하기를,
“종도 치지 않고 북도 울리지 않았거늘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십니까?”하니, 덕산 선사는 고개를 숙이고 방장실로 돌아갔다.
설봉 스님이 그 일을 암두(岩頭)* 스님에게 말했더니, 암두 스님이 듣고는 대뜸,
“덕산 노사(老師)가 말후구(末後句)를 알지 못하였다.”하였다. 덕산 선사가 이 말을 전해 듣고 시자를 보내 암두 스님을 불러서 묻되,
“그대가 왜 나를 말후구를 몰랐다 하는고?”하니, 암두 스님이 덕산 선사의 귀에다 아무도 듣지 못하게 속삭였다.

 어떠한 밀어(密語)를 하였는고?

마조(馬祖)* 선사 회상에 한 수좌가 마조 선사를 찾아와서,
“사구(四句)와 백비(百非)를 떠나서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을 이르소서.”하니, 마조 선사가 대답하되,
“내가 오늘 마음에 뜻이 없으니 지장(智藏) 스님에게 가서 물으라.”하였다. 그 수좌가 지장 스님에게 가서 물으니, 지장 스님은 손으로 머리를 가리키면서 말하되,
“나는 오늘 머리가 아파서 그대에게 말할 수 없으니, 회해(懷海) 사형에게 가서 물으라.”하니, 그 수좌가 회해 스님에게 물으니,
“나는 이에 이르러 알지 못한다.”하였다. 그 수좌가 다시 돌아와서 마조 선사에게 ‘지장 스님과 회해 스님이 이렇게 답을 하십니다.’하고 말씀드리니, 마조 선사가 말하되,
“지장의 머리는 희고, 회해의 머리는 검도다.”하였다.

 왜 ‘지장*의 머리는 희고, 회해의 머리는 검다.’고 하였는고?

사해(四海)와 오호(五胡)의 참학자(參學者)여!
이 사관문(四關門) 법문을 투과하지 못하면 어찌 견성이라 하리오?
이 사관(四關)은 불조의 법문 중에 최고의 법문이라. 법신변사(法身邊事)를 알아가지고는 우러러 보아도 미치지 못하도다. 이러한 안목으로 만인(萬人)을 제접하면 많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리라.
만약 누구라도 사관을 투과하면 천성(千聖)이 가두어 머물게 하지 못함이요, 만성(萬聖)의 이마 위를 밟고 걸어가 등등임운(騰騰任運)하고 임운등등하여 동쪽에서 솟고, 서쪽에서 잠기니 천룡팔부(天龍八部)도 또한 측량치 못한지라.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열반(涅槃)의 대안락(大安樂)을 수용하리라.

 할(喝)!

일할 하시고 하좌하시다.

병자년(1996) 동안거 결제일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9. 양구(良久)

 장수산색천고수(萇樹山色千古秀)
 해운명월만고명(海雲明月萬古明)
 약인문아해하종(若人問我解何宗)
 봉두절이불용서(棒頭絶而不容恕)

 장수산 산색은 천년토록 수려하고
 해운대 밝은 달은 만년토록 아름답도다.
 만약 어느 사람이 산승에게 어떠한 진리의 종지(宗旨)를 아느냐고 묻는다면,
 이 주장자가 부러지도록 때려도 용서할 수 없음이로다.

이러한 때에 다다라 석가모니 부처님과 미륵보살은 몸을 숨기려 해도 숨길 곳이 없고, 문수보살과 여러 보살들은 삼천리 밖에서 거꾸러짐이요, 이 광경을 본 촌노(村老)들은 손뼉을 치면서 ‘하하’ 웃고, 만리장강(萬里長江)에는 백구(白鷗)들이 훨훨 날아감이로다.
이러한 진리의 법문을 바로 알 것 같으면, 금일 결제가 곧 해제일이다.
만약 이러한 심오한 법문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할진대, 이번 구순(九旬) 동안에 모든 반연을 다 놓아 버리고 오로지 화두 한 생각만 챙기되, 일초일각을 놓지 말고 의심하고 의심하라. 그리하여 그 한 생각이 현전(現前)되어 간단없이 지속 될 것 같으면, 홀연히 모든 부처님의 전지(田地)에 이르러서 세세생생 몸을 편히 하고 명(命)을 세우는 곳을 얻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 하루는 천이백 대중에게 법을 설하시기 위해 법상에 오르시어 말없이 앉아 계셨다. 이때 문수보살이 나와서 예삼배를 올리고는,
“자세히 법왕법(法王法)을 보니 법왕법이 이와 같습니다.”하니 부처님께서 즉시 법상에서 내려오셨다.
말없는 이 가운데 큰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산승에게 누군가
“법왕법을 보니 법왕의 법이 이와 같습니다.”라고 한다면, 산승은
“옳지 못하고, 옳지 못하다.”라고 답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바른 눈을 갖춘 이가 있어 한마디를 바로 이를 것 같으면, 그때라야 법상에서 내려가리라.

또 하루는 부처님께서 좌정하고 계시는데, 한 외도(外道)가 찾아와서 여쭙기를,
“말로써도 묻지 아니하고 말없이도 묻지 아니 합니다.”하니, 부처님께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계셨다.
이때에 외도는 부처님께서 양구(良久:가만히 앉아 있음)하신 뜻을 깨닫고,
“부처님께서는 큰 자비로 미운(迷雲)을 헤쳐 주시어, 저로 하여금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하며 큰절을 하고 떠났다.
그때에 부처님 곁에 아난존자가 있었는데, 아난존자는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일대시교(一代時敎)*를 하나도 잊지 않고 그대로 기억할 만큼 총명하였기에 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했었다.
그러한 아난존자이지만 부처님께서 양구하신 뜻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모르겠거니와, 또 외도가 말한 뜻도 도저히 알 수 없어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외도는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부처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가만히 앉아 계시는데, 진리의 문에 들었다고 합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의 영리한 말은 채찍 그림자만 보고도 갈 길을 아느니라.”라고 하셨다.

시회대중은 알겠는가?
산승이 당시에 부처님의 자리에 있었더라면 부처님과는 다르게 답하였으리라.
“말로써도 묻지 아니하고 말 없이도 묻지 아니합니다.”하는 외도의 물음에 부처님께서는 양구하셨지만 산승은,

완자낙지(椀子落地)하니 접자성칠(楪子成七)이로다.
주발을 땅에 떨어뜨리니 조각이 일곱이 남이로다.
라고 하였을 것이다.

또 외도가
“부처님께서 대자대비로써 진리의 문에 들게 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하고 큰절을 한 데 있어서는, 이 주장자로 이십 방(棒)을 때려서 내쫓았으리라.
만약 그렇게 하였더라면 그 외도는 외도의 소굴에서 영원히 벗어났을 것이다.
아난존자가 지켜보고는
“외도가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진리의 문에 들었다고 합니까?”하고 묻는 데는 이렇게 말하였으리라.

“아난아, 차나 한잔 마셔라.”

그러면 마지막 한마디는 어떠하냐?

 천언만어절진처(千言萬語絶盡處)
 수망각란야부지(手忙脚亂也不知)

 천마디 만마디가 다 끊어진 곳은
 손이 떨리고 발이 떨려서 도저히 알 수가 없음이로다.

임술년(1982) 하안거 결제일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10. 앙굴마라와 산모 난산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고,

 일구초연만겁안락(一句超然萬劫安樂)
 도출어묵리합방원(道出語黙理合方圓)

 일구를 뛰어 넘으면 만겁토록 안락함이요
 말과 묵묵함을 마음대로 쓸 것 같으면
 진리가 모나고 둥근데 합함이로다.

일구(一句)의 진리라는 것은 모든 부처님과 역대 도인의 이마 위 진리로, 불조(佛祖)가 비밀리에 전해 온 것이다.
이 일구의 진리를 깨달은 이는 깨달은 그 살림을 모나고 둥근 데 자재하게 쓸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자재하게 쓸 줄 아는 법을 갖추어야 참 선지식이 되어 모든 사람에게 최고의 진리의 경계를 잘 지도하여, 정안(正眼)이 열리게 할 수 있는 법이다.
이러한 일구의 진리를 알지 못한다면 부처님의 심오한 진리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만일 그러한 자가 선지식 노릇을 하다면 만인을 눈멀게 하여 육도(六道)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헤매게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만 일구의 진리를 얻을 수 있느냐?
이 법은 참 종자(種子)를 바로 심는 데서 큰 결과가 온다. 그래서 고인들도, ‘고준한 진리의 한마디가 귓전을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그것이 인(因)이 되어 필경에는 육도의 윤회에서 영구히 벗어나 부처님의 안락국토에서 법의 즐거움[法樂]을 누리게 된다.’고 하셨다.

부처님 당시에 여덟 살 된 용녀(龍女)라는 여자 아이가 있었는데, 이 용녀는 부처님의 깊을 비밀의 법문을 다 수지(受持)하여 깊은 선정(禪定)을 얻어서 제법(諸法)을 요달(了達)하였다.
또, 선성(善星) 비구는 12부경을 독송하여 제4선정까지 얻었는데, 나쁜 친구의 말을 들어 부처님을 저버리고 사견(邪見)을 품었다가 땅이 갈라져서 산 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졌다.

 시즉용녀변성불(是則龍女便成佛)이요
 비즉선성생함타(非則善星生陷墮)로다.

 옳은 즉, 용녀가 문득 부처를 이루고
 그르친 즉, 선성이 지옥에 떨어짐이로다.

이렇듯 법문을 잘 수지한 이는 문득 불과(佛果)를 이루었고, 법문을 잘못 듣고 사견을 일으킨 이는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진 것이다.
그러니 바른 선지식을 의지해서 고준한 일구 법문을 듣는 이 인연공덕이야말로 세상의 어떠한 부귀공명과도 견줄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 아시의 제자였던 앙굴마라 존자는 부처님을 만나기 전에 한 바라문을 스승으로 섬기고 있었다.
하루는 스승인 바라문이 출타하고 없을 때에 스승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고 거절하였다가 모함을 받게 되었다. 바라문인 스승은 그 아내의 말만 듣고 불같은 노기(怒氣)가 일어나 앙굴마라에게 여러 나라로 다니면서 천 명의 사람을 죽여 영락(瓔珞:손가락으로 만든 목걸이)을 만들어 오면 법을 일러주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앙굴마라는 그곳을 떠나 여러 곳을 다니면서 999명을 죽이고 마지막에 친어머니를 죽이려 하다가 부처님을 만나 정법에 귀의하게 되었다.
이렇게 부처님께 귀의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하루는 발우를 들고 탁발을 나갔다.
어느 집 문전에 이르니 주인이 급히 나와서 맞으며
“지금 저의 아내가 산고(産苦)에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스님께서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저의 아내를 위하여 법을 설해 주십시오.”라고 간청을 하였다.
“저는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러한 법력이 없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부처님께 가서 여쭈어보고 말씀해 드리리다.”하고는 앙굴마라가 부처님 처소에 달려가서 부처님께 그 사정을 아뢰니, 부처님께서 이르셨다.
“너는 속히 가서 ‘내가 성인의 법에 귀의한 후로 살생한 바가 없노라.’라고 산모에게 전해라.”
그리하여 앙굴마라가 단숨에 그 장자(長者)의 집에 가서 산고를 겪고 있는 부인에게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전했다. 그랬더니 사경을 헤매던 고통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산모는 곧 순산을 하였다.

 부처님 법은 참으로 희유(稀有) 난사의(難思議)로다.

대중아, 그런 후에도 산모가 난산으로 헤맨다면 어떻게 하려는고?
묵묵히 계시다가 이르시기를,

 오구진일우봉춘(五九盡日又逢春)이로다.
 오구가 다한 날에 또한 봄을 만남이로다.

을축년(1985) 십이월 초하루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11. 산심수한(山深水寒)

 이 일을 논하건대 도독고(塗毒鼓)*와 같음이니
 한 번 치는 소리에 멀거나 가깝거나 다 몸을 상함이로다.

치지도 아니하고 듣지도 아니 할 때는 어떠한고?

 산심수한(山深水寒)
 산이 깊으면 물이 차가움이로다.

오늘은 이 깊은 선(禪)에 대한 법문을 좀 할까 한다.
이 선(禪)이라는 것은 삼세(三世) 모든 부처님의 정안(正眼)이요, 역대 조사(祖師)의 명근(命根)이다.
불법(佛法)에 있어서 선은 그만치 고귀한 진리인 것이다.
문수보살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약인정좌일수유(若人靜坐一須臾)
승조항사칠보탑(勝造恒沙七寶塔)
보탑필경화위진(寶塔畢竟化爲塵)
일념정심성정각(一念正心成正覺)

만약 어떤 사람이 잠시라도 고요히 앉아 참구할 것 같으면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칠보탑을 쌓는 것보다 공덕이 수승하니라.
보배탑은 언젠가 티끌이 되지만
한 생각 바른 수행은 정각을 이룬다네.

그러니 가장 보람 있고 값진 일은 선을 참구하는 일이다.
선을 참구하여 마음 바탕을 뚜렷이 밝힌 자는 진리의 법에 법왕이 되어서 일만 경계를 임의자재하게 수용하고 쓸 수 있다.
마음의 바탕에 팔만사천의 지혜가 다 구족되어 있는 고로, 망념이 다한 곳에 홀연히 지혜의 눈이 열리면 팔만사천 지혜를 다 자재하게 쓸 수 있게 되는 법이다.

문수보살이 하루는 동자를 한 명 데리고 산에 약초를 캐러 가셨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시며 약초를 캐다가 동자에게 이르시기를,
“약 아닌 풀을 캐어 오너라.”하니, 동자가 말하기를,
“다 약 아닌 것이 없습니다.”하며, 풀 한 포기를 뜯어 바쳤다. 문수보살이 그 풀을 받아 들고,
“이 약은 천하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천하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무한한 뜻이 있다.
어째서 “약이 아닌 풀을 캐어 오라.” 하는데, 동자는 풀 한 포기를 뜯어다 바쳤느냐?
이것을 알 것 같으면,
“이 약은 천하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천하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는 말의 뜻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것에 확연명백해야 진리의 법왕이 되어 팔만사천 지혜를 자유자재로 염출(염출)해 낼 수 있게 된다.

방 거사(龐居士)가 약산(藥山) 선사를 방문하여 거기에서 며칠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가려 하니, 그곳 선객(禪客) 몇몇이 전송을 나왔다. 마침 눈이 내리므로 방 거사가 허공을 쳐다보며,
“송이송이 날리는 눈이여, 별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네.”라고 하자, 뒤따르던 한 선객이 물었다.
“별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으면 어느 곳에 떨어집니까?”
방 거사가 묻는 선객의 뺨을 올려 치면서,
“이런 소견을 짓고도 선객이라 하느냐?”하고 호통을 쳤다.

알겠는가?
‘송이송이 날리는 눈이 별다른 곳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또 거기에 뭐라고 응수해야 뺨 맞음을 면하겠는가?

훗날 설두(雪竇)* 선사께서 여기에 대해서 착어(着語) 하시기를,

 설단타설단타(雪團打雪團打)
 방노기관몰가파(龐老機關沒可把)

 눈을 뭉쳐 때리고 때려 주었던들
 방 거사의 날카로운 기봉도 별 수 없었으리.

안목이 있고 없음의 차이가 이와 같다.
“송이송이 날리는 눈이 별다른 곳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는 말에, 그 당시의 선객은,
“눈이 별다른 곳에 떨어지지 아니하면 어느 곳에 떨어집니까?”하였고, 설두 선사께서는 눈을 뭉쳐서 때리고 때린다고 했다.
대중은 설두 선사를 알겠는가?

 설두노설두노(雪竇老雪竇老)
 적과후장궁(賊過後張弓)

 설두노여, 설두노여!
 도적이 지나간 후에야 활을 쏘셨구려.

갑자년(1984) 동안거 해제일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12. 단하 소불(丹霞燒佛)

 싱그러운 빛이 온 우주를 비추니
 모든 번뇌와 갈등이 없어짐이요,
 청정한 진리의 체성(體性)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니,
 모든 사람이 환희에 가득 참이로다.

이 불법의 진리는 한번 밝혀 놓으면 억겁(億劫)이 다하도록 대안락을 누릴 수 있다. 싱그러운 빛이 온 우주를 비추니, 마음의 번뇌와 갈등이 다하여 가는 곳마다 불국토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 싱그러운 광명을 알지 못하면 불안, 초조, 갈등이 그칠 날이 없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생활에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쉼 없이 일어난다.
우리가 이러한 어려운 일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항시 부처님 전에 발원하고 기도하여 많은 생에 지어온 죄업을 소멸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여러 고난들을 이겨내고 막아낼 수 있다.

옛날에 어느 암자에 노스님이 살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 아이는 호식(虎食)* 당할 팔자라, 부처님 전에 지극정성으로 기도하고 또 스님의 지도를 받는다면 액(厄)을 면할 수 있다고 하니, 스님께서 잘 지도해 주십시오.”하고 아이를 노스님에게 맡기도 돌아갔다.
그 후, 아이는 십 년 동안 노스님을 시봉하며 절에서 살았는데, 부모님 생각이 간절하여, 하루는 노스님의 허락을 받아 집에 가게 되었다. 가는 도중에 홍수로 인하여 개울물이 불어 개미집이 떠내려가고 있는 것을 보고는 옷을 벗어 던져서 수천 마리나 되는 개미들을 건져서 살려 주었다.
그동안 노스님 밑에서 ‘살생을 하지 말아라.’,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 주어라.’는 등의 법문을 늘 들어왔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자비를 베풀게 된 것이었다.
며칠 후, 암자에 돌아온 아이의 얼굴에 살기(殺氣)가 없어지고 업장이 걷혀진 것을 본 노스님이 아이에게 물었다.
“집에 갔다가 오는 길에 무슨 좋은 일을 한 적이 없느냐?”
아이가 물에 떠내려가고 있던 개미떼들을 살려주었던 일을 말씀드리자 노스님이,
“너는 이제 호식 당할 액운이 다 소멸되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좋은 일을 하면 반드시 그 복이 돌아오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나쁜 인연을 심으면 반드시 괴로운 과보가 돌아온다.
세상 사람들의 형상과 생활이 다 천차만별인 것은 각자가 전생에 지어온 복의 열매, 죄의 그림자, 마음 닦은 공덕의 그림자가 다른 고로, 거기에 따라서 고락(苦樂)을 달리 받는 것이다.
이것이 인과법(因果法)이다.
그러나 우리가 참선수행을 잘 해서 마음을 깨닫게 되면 거기에는 죄니, 복이니, 지옥이니, 극락이니 하는 천만 가지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땅에 이른 자는 삼세(三世)의 인과법이 다 끊어져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단하 천연(丹霞天然)* 선사는 과거생에 많이 닦아서 도안(道眼)이 열리신 고로 입태(入胎), 출태(出胎)에 결코 매(昧)하지 않은 생이지지(生而知之)이시다.
처음에 강서(江西)의 마조(馬祖) 선사를 뵈니,
“나는 너의 스승이 아니니, 남악산(南岳山)의 석두(石頭) 선사를 찾아가라.”하셔서, 석두 스님의 회상을 찾아갔다.
석두 선사께 가서 인사를 올리니, 선사께서 보시고는,
“방앗간에 가서 일이나 해라.”하셔서, 거기에서 행자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루는 석두 선사께서 대중에게 이르시기를,
“법당 앞에 풀을 베는 운력이 있으니 모두 낫을 준비하라.”하니, 대중들이 다 낫을 준비하여 법당 앞에 모였다.
그러나 단하(丹霞) 행자는 물을 담은 대야와 삭도(削刀)를 가지고 와서 석두 선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내밀었다.
“스님, 저의 머리를 깎아 주십시오.”
도안(道眼)이 열리면 작용하는데 이렇게 척척 상통하는 법이다.
석두 선사께서 머리를 깎아 주시고는 계법(戒法)을 설하려 하시자, 단하 행자는 귀를 막고 도망가 버렸다.
그길로 마조 선사를 찾아가서는 마조 선사께 인사도 올리지 않고 나한전(羅漢殿)에 들어가 나한상(羅漢像)의 어깨에 걸터앉아 있었다.
마침 지전(知殿)* 스님이 그 광경을 보고 선사께 사실대로 아뢰니, 마조 선사께서 나오셔서,
“내 아들 천연(天然)이로구나.”하고 반기셨다. 천연이란, 그대로 지혜의 안목(眼目)을 갖추었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천연’이라는 이름을 얻어 마조 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천연 선사께서 도인들을 친견하고 법거량을 하시면서 천하를 두루 행각(行脚)하시던 중에, 어느 작은 절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몹시 추운 날인데도 불구하고 객실(客室)에는 불을 때지 않아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법당에 모셔져 있는 목불(木佛)을 가져다가 도끼로 패서 군불을 지폈다.
다음날 새벽, 예불 시간이 되어 그 절 원주(院主)가 법당에 들어가 보니, 불단(佛壇)에 부처님이 안 계시는지라, 여기저기 찾다가 객실 아궁이에서 활활 타고 있는 불상을 발견하고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천연 선사께 호통을 쳤다.
“거룩한 부처님을 가져다가 군불을 때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그러자 천연 선사는 막대기로 재를 헤치면서 말했다.
“사리(舍利)를 얻으려고 하오.”
원주는 더욱 기가 막혀서,
“목불에 무슨 사리가 나올 수 있단 말이오?”
이에 단하 천연 선사는
“사리가 없으면 나무토막이지 무슨 부처이겠는가? 나머지 보처불(補處佛)마저 태워 버릴까 보다.”
이 말에 원주의 두 눈썹이 저절로 빠져버렸다.

알겠는가?
부처님을 가져다가 군불을 지핀 천연 선사는 정작 눈썹이 빠지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원주의 눈썹이 몽땅 빠져버렸느냐?

 화복무문(禍福無門)
 유인자소(唯人自召)

 화(禍)와 복은 원래 들어오는 문이 없건마는
 오직 사람이 스스로 부름이로다.

정묘년(1987) 칠월 초하루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13. 능행파 거량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무운생령상(無雲生嶺上)
 유월낙파심(有月落波心)

 산마루 위에 구름이 걷히고 나니
 달은 깨끗한 강물 속에 잠겼도다.

알겠는가?

당대(唐代)에 부배(浮盃)* 화상의 명성이 세간에 유명해지자, 하루는 능행파(凌行婆)*가 와서 절하고 물었다.
“힘을 다해 말한다 해도 이르지 못한 진리를 누구에게 부치려 하십니까?
그러자 부배 화상이 말하기를,
“나는 그것에 대하여 말할 수 없노라.”하니, 능행파가
“멀리서 듣기로는 부배라는 이름이 자자하더니, 와서 보니 듣던 바와 같지 못하구나.”하고 부배 화상에게 한 방망이를 내렸다.
“달리 장처(長處)가 있다면 그대가 드러내 보라.”
부배 화상이 이렇게 말하자 능행파가
“아이고, 아이고!”하고 곡(哭)을 하면서,
“이 가운데 원수의 고통이 더욱 깊도다.”라고 하였다.
이에 부배 화상이 묵묵히 있자, 능행파가
“말의 바르고 치우침도 알지 못하고, 이치의 삿됨과 잘못됨도 모르고서 남을 위한다고 한다면 재앙이 생긴다.”라고 말하였다.
부처님의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면서 법문을 한다든가, 남을 지도한다는 것은 정법을 그르치고 만인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이므로 허물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 후에 한 승(僧)이 부배 선사와 능행파의 이 문답을 남전(南泉) 선사께 말씀드리니, 남전 선사께서 들으시고는 이렇게 평을 하셨다.
“슬프다! 부배가 그 노파에게 한 차례 꺾였구나!”
능행파가 이 말을 전해 듣고 웃으면서,
“남전 노사(老師)가 그래도 조그마한 기틀을 갖추었구나.”라고 하였다.
그런데 거기에 마침 징일(澄一)*이라는 선객이 있다가 그 말을 듣고는 물었다.
“어째서 남전 선사께서 조그마한 기틀을 갖추었다고 하는가?”
그러자 능행파가 곡을 하면서,
“슬프고 애통하도다.”하니, 그 선객이 어리둥절하였다. 다시 능행파가
“알겠느냐?”하고 다그치자, 선객은 속수무책으로 합장하고 서 있기만 했다.
그러자 능행파가 탄식하며,
“죽은 송장과 같은 선객이 부지기수로다.”라고 하였다.
후에 징일이 조주(趙州) 선사를 찾아가서 능행파와의 이 문답을 말씀드리니, 조주 선사께서 듣고는 말씀하셨다.
“내가 당시에 그 구린내 나는 노파를 보았더라면 한마디 물어서 벙어리를 만들어버렸을 것이다.”
징일이 그 말을 듣고 여쭙기를,
“그렇다면 스님께서는 그 노파에게 어떻게 물으시렵니까?”하자, 조주 선사께서 별안간 징일을 때렸다.
“어째서 저를 때리십니까?”
“이 송장 같은 선객을 이때에 때리지 않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느냐?”
능행파가 이 일을 전해 듣고서 말하기를,
“조주 선사가 나의 방망이를 맞아야 옳다.”하였는데, 조주 선사께서 이를 전해듣고 곡을 하시며
“슬프고, 슬프도다.”하셨다.
능행파가 다시 이것을 전해 듣고 탄식하며 이르기를,
“조주 선사의 눈빛이 사천하(四天下)를 비춤이로다.”하였는데, 조주 선사께서 이 말을 전해 듣고는 능행파에게 사람을 보내어 물으셨다.
“어떤 것이 조주의 눈이냐?”
이에 능행파는 주먹을 내밀었다.
조주 선사께서 이것을 전해 듣고 송(頌)을 지어 보내시기를,

 당기관면제(當機覿面提)
 관면당기질(적面當機矢)
 보니능행파(報你凌行婆)
 곡성하득실(哭聲何得失)

 기틀에 당해 보는 찰나를 잡으니
 보는 찰나에 기틀을 당함이 쏜살 같더라.
 그대 능행파에게 답하노니
 곡하는 소리에 어찌 얻고 잃음이 있으리오.

이에 능행파가 화답하였다.

 곡성사이효(哭聲師已曉)
 이효부수지(已曉復誰知)
 당시마갈령(當時摩竭令)
 기상목전기(幾喪目前機)

 곡하는 소리를 이미 아셨나니
 이미 아신 뜻을 다시 누가 알리오.
 당시 마갈타국 설법에
 목전의 기틀을 잃음이 얼마였던고.

시회 대중은 남전, 조주 두 분 선사를 알겠는가?

 남전, 조주 선사는 천하 선지식 중의 선지식이로다.

능행파를 알겠는가?

 선지식을 능가하는 고준한 안목을 갖추었으니, 보살 가운데 으뜸이로다.

부배 선사를 알겠는가?

 이름만 분분했지, 실속 없는 허수아비로다.

대중아! 네 분의 문답처(문답처)에 대해서 한마디 일러 보라.

묵묵히 계시다가 이르시기를,

 삼개사개한(三箇四箇漢) 일갱매각(一坑埋却)
 허허(噓噓)!

 세 분, 네 분을 한 구덩이에 매장함이로다.
 허허!

정묘년(1987) 십이월 보름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14. 삼성(三聖) 보수(保壽) 호환지기(互換之機)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고목용음진견도(古木龍吟眞見道)
 촉루식진안초명(髑髏識盡眼初明)
 소식진시희식진(消息盡時喜息盡)
 당인나변탁중청(當人那辨濁中淸)

 마른 나무에 용이 소리를 내니 참으로 도를 봄이요
 해골 뼈다귀에 분별이 다하여야만 진리의 눈이 처음 밝음이라.
 소식이 다한 때에 기쁜 소식이 다했거늘
 마땅히 사람이 이에 탁한 가운데 맑은 것을 가릴꼬?

이렇게 몸을 굴리는데 자재하면 진리를 참구하는 일을 마치리라.
만약 이렇게 자재한 눈을 갖추지 못할진댄, 일상 중에 모두가 참구하는 화두를 들고 한 생각[一念]이 지속되어 진리의 문에 모두 들어갈 것 같으면, 종지(宗旨)도 통하고 설법(說法)도 통하리라.

예전에 임제(臨濟) 선사 아래 세 분의 제자가 있었다.
하루는 보수(保壽)* 선사가 회상을 열어 법상에 오른 차에 삼성(三聖)* 선사가 법상 앞에 나아가서, 한 수좌를 보수 선사 앞에 데려와 멱살을 잡아 일으키거늘, 보수 선사가 그 수좌를 주장자로 한 번 때리니 삼성 선사가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이렇게 납자를 제접할진댄, 진주(鎭州) 사람을 다 눈 멀게 하리라.”하니, 보수 선사가 말없이 법상을 내려오셔서 조실방으로 돌아가셨다.

시회대중은 두 선사를 알겠는가?

 사자가 울부짖고 상왕(象王)이 몸을 비틀면서 소리를 지르도다.
 비록 그러하나 자세히 점검하건댄 두 분의 선사가 이로움을 잃었도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무진년(1988) 하안거 반살림
해운정사 금모선원에서


15. 기사회생(起死回生)

 성전일구천성난회(聲前一句千聖難會)
 약인식득참학사필(若人識得參學事畢)

 말하기 전 일구(一句)는 일천 성인도 알기 어렵거늘
 사람이 만약 이것을 안다면 참학사(參學事)를 마치리라.

중생은 탐(貪)하는 마음이 한량없어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형형색색(形形色色)의 것들을 보면 탐착심(貪着心)이 나고 또, 온갖 경계에 다다라 성내는 마음이 일어나고, 어리석은 마음이 그칠 날이 없다.
이 세 가지를 좇아서 팔만사천 가지의 미세한 번뇌가 생기고, 이 번뇌를 말미암아 윤회의 고통이 있고, 살아가는데 온갖 장애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한 고로 탐(貪)ㆍ진(嗔)ㆍ치(癡) 이 세 가지 근본업(根本業)을 제거하게 되면 팔만사천 가지의 번뇌가 일시에 소멸된다. 그리하여 일월(日月)과 같은 밝은 지혜가 생기므로, 지옥에 가면 그곳이 곧 불국토로 변하고 도산(刀山) 지옥과 화탕(火燙) 지옥이 그대로 연화장(蓮華藏) 세계로 화(化)해 버린다.
이것은 마음을 밝히는 선수행을 하루하루 실답게 쌓아가는 데에서 얻어질 수 있다.
우리가 수행을 잘 해 나가면 탐ㆍ진ㆍ치 삼독(三毒)은 계(戒)ㆍ정(定)ㆍ혜(慧) 삼학(三學)이 된다. 계를 잘 지킴으로 인해서 몸과 마음이 청정해지고, 거기에다 참선수행을 잘 익히면 대정(大定)을 성취하여 진리의 삼매락을 누리게 된다. 대정이 지속되면 일월과 같은 큰 지혜가 열리는 법이니, 여기에 이르러야 대법왕이 되리라.

산승이 월내(月內)에서 다년간 향곡 선사를 모시고 지냈는데, 하루는 향곡 선사께서 상당하시어 이러한 법문을 하셨다.
“여기에 크고 큰 송장이 하나 있는데, 머리는 비비상천 꼭대기에 닿아 있고, 발은 아비지옥 밑바닥에 버티고 있으며, 몸뚱이는 시방세계에 가득 차 있다. 시회대중은 이 송장을 살릴 수 있겠느냐? 살릴 사람이 있거든 한번 살려 보아라.”
대중이 아무도 답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만 있기에 산승이 나아가서,
“큰스님!”하고 한 번 불렀다.
그러자 향곡 선사께서
“왜 그러느냐?”하시는데, 산승이 큰절을 하고 법당을 나왔다.
이에 향곡 선사께서는 즉시 법상에서 내려오셨다.
이러한 법문을 바로 들을 줄 아는 안목을 갖추어야만 진리의 스승이 될 수 있는 법이니, 대중은 노력하고 노력하라.

무진년(1988) 칠월 초하루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16. 홀우금시조(忽遇金翅鳥)

산승이 가지고 있는 이 주장자를 들어 보임에,

 상견불양미(相見不揚眉)
 군동아역서(君東我亦西)

 서로 보고 눈썹도 깜짝하지 않더라도
 그대는 동쪽을 향하는데 산승은 서쪽으로 향함이로다.

이 한마디의 낙처를 바로 알 것 같으면, 대장부 활계를 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극락세계 연화대 위의 모든 부처님과 동참하게 될 것이다.
극락세계 연화대 위에는 오직 이 심성의 천진불을 분명히 본 자만이 가서 앉을 수가 있다. 극락세계는 언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중중장엄의 세계가 이루어져 있는데, 범인(凡人)으로서는 설사 극락세계에 간다고 할지라도 하품세계(下品世界)나 중품세계(中品世界)에 갈 수 있을지언정 상품(上品)의 연화장 장엄세계에는 참여할 수 없다. 연화대 위에 모셔 놓는다 해도 있을 수가 없다.
모든 부처님께서 앉아 계시는 연화장 세계는 우리가 공부를 잘 해서 견성을 해야만 수용할 수 있는 것이지, 조그마한 덕이나 복을 지은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승이 항시 여러 대중에게 법문하기를, 개개인인이 각자 가지고 있는 심성을 밝혀야만 세세생생 부처님과 동일한 낙을 누릴 수 있다.

산승이 월내에서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 화두를 들고 애쓰다가 홀연히 심안(心眼)이 열려 향곡 선사께 글을 지어 올렸다.

 자개주장기인회(這箇拄杖幾人會)
 삼세제불총불식(三世諸佛總不識)
 일조주장화금룡(一條拄杖化金龍)
 응화무변임자재(應化無邊任自在)

 이 주장자의 진리를 몇 사람이나 알꼬?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다 알지 못함이로다.
 한 막대기 주장자가 문득 금룡으로 화해서
 한량없는 조화를 자유자재 하는구나.

그러자 향곡 선사께서,
“홀연히 용이 금시조(金翅鳥)를 만난다면 어떻게 하려는고?”하고 아주 벽력같은 물음을 던지셨다.
금시조라는 새는 구만 리 장천(長天)을 날아다니다가 배가 고프면 삼백육만 리나 되는 두 날개로 바닷물을 내리쳐서 물이 갈라지면 그때에 거기에 드러난 용을 잡아먹는다는 전설의 새다.
그런데 그렇듯 위력을 지닌 금시조를 만난다면 어떻게 하려느냐고 물으셨으니, 선지식이 아니면 이러한 물음을 던질 수가 없는 법이다.
그래서 산승이 답하기를,
“바로 몸을 움츠리고 세 걸음 물러가겠습니다.”했더니, 향곡 선사께서
“옳고, 옳다.”하셨다.

석일(昔日)에 어느 선사께서 상당하시어 대중에게 물으시기를,
“문득 금시조를 만나서는 어떻게 하려는고?”하자 등은봉(鄧隱峰)* 선사는 가사를 둘러쓰고 법상 밑으로 들어가 숨어 버리셨다.
똑같은 물음에도 답처는 다르다.
“문득 금시조를 만나서는 어떻게 하려는고?”하는 물음에, 한 사람은 몸을 굽히고 세 걸음 물러간다고 했고, 한 사람은 가사를 둘러쓰고 법상 밑으로 들어가 숨었다.
심안이 열리면 물음에 이렇게 자재하게 응수하게 되는 법이다. 이러한 자재의 용처(用處)를 갖추지 못할 것 같으면 아무 쓸 곳이 없다.
이 주장자의 진리를 알면 그 같은 자재의 용처를 갖추어 억만 년이 다하도록 수용해도 다함이 없게 된다.
모든 불조(佛祖)가 이 주장자의 진리를 일생을 써도 다함이 없으셨다. 그래서 이 주장자를 제자들에게 부치고 가시는 것이다.
참학인(參學人)이 ‘알았다’고 하면, 선지식은 불조께서 베풀어 놓으신 백천 관문을 던져보아 그 살림살이를 점검한다. 여기에 자재의 수완을 갖추어서 어떠한 물음에도 척척 답을 하되, 전광석화와 같이 빠른 혜안의 기틀이 있어야 인증을 하는 법이다.
이러한 전광석화와 같은 기틀이 없다면, 그 사람은 사자의 조아(爪牙, 발톱과 어금니)를 갖추지 못한 이다. 사자가 조아를 날카롭게 갖추지 못할 것 같으면, 토끼 한 마리도 제대로 잡아먹지를 못한다. 사자가 사자 구실을 못한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선지식이 사자의 조아를 날카롭게 갖추지 못하면, 선지식의 위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해 만인에게 진리의 눈을 열어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주장자의 진리를 바로 알아서 응화무변(應化無邊)의 자재로움을 갖추어야사 비로소 종사(宗師)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주장자를 한 번 치시고 이르시기를,

 사방 팔면이 영롱하고 영롱해서 달보다 더욱 밝으며,
 넓고 넓어서 아는 사람이 없으니
 비밀히 전해오는 불조의 법을 누구에게 부칠꼬?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기사년(1989) 동안거 결제일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17. 위산(潙山) 삼부자(三父子)의 해몽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벽해신주(碧海神珠)
 형산보옥(荊山寶玉)
 조요건곤(照耀乾坤)
 지자시수(知者是誰)

 푸른 바다의 신령스러운 구슬이요
 형산 땅의 보옥이라.
 명주와 보옥이 하늘과 땅에 빛나니
 아는 자, 이 누구인고?

누구든지 이 명주(明珠)와 보옥(寶玉)을 바로 알 것 같으면 금일 결제가 곧 해제일이요, 일체가 해탈법이며, 곳곳마다 상적광토(常寂光土)라.

위산(潙山)* 스님이 백장(百丈) 선사 문하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백장 선사께서 물으시기를,
“화로에 불이 있느냐?”하여, 위산 스님이 화로를 뒤져 보고는 말씀드렸다.
“불이 없습니다.”
그러자 백장 선사께서 몸소 화로를 헤쳐보시더니 조그마한 불씨 하나를 꺼내들고,
“불이 이렇게 있는데 어째서 없다고 하느냐?”라고 하셨다.
이 말씀 끝에 홀연히 위산 스님의 마음광명이 활짝 열렸다.
하루는 풍수지리를 잘 보는 사람이 백장 선사를 찾아와서 대위산(大潙山)에 무수 도인이 배출될 좋은 절터가 있으니, 대위산의 주인이 될 스님을 천거해 달라고 청했다.
그래서 백장 선사께서 시자를 시켜 운집종을 치게 하시니, 대중이 다 모여들었다.
법상에 오르신 백장 선사께서는 유리병을 하나 대중에게 들어 보이면서 이르셨다.
“시회대중 가운데 누가 이 유리병에 대해서 한마디 일러 보겠는가? 만약 한마디 분명히 이르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대위산의 주인으로 봉하겠다.”
그러자 대중 가운데 제일좌인 화림(華林) 스님이 나와서,
“유리병을 목침이라고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리니, 백장 선사께서 수긍치 않으셨다.
“옳지 못하고, 옳지 못하다. 달리 이를 자 없느냐?”
이에 위산 스님이 앞으로 나와서 유리병을 발로 차버리고 들어가자 백장 선사께서,
“옳고, 옳다.”하시면 위산 스님을 대위산의 주인으로 봉하셨다.

그렇게 해서 위산 선사께서 대위산에 주하시게 되었는데, 십 년을 지내도 찾아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위산 선사께서는, ‘내가 이 대위산에 인연이 없는 거로구나.’ 생각하고 그곳을 떠나려고 산을 내려가는데, 어디선지 수많은 산짐승들이 몰려와서 길을 가로막았다. 이것을 보고 위산 선사께서, ‘이제야 인연이 도래하는 것이로구나.’ 하시고 다시 처소로 올라가셨다.
그 후로 사방에서 참학인들이 모여들어 상주(常主) 수행 대중이 천오백 명에 이르렀다.
하루는 위산 선사께서 제자들의 문안을 받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누워 계신 적이 있었다.
앙산(仰山) 스님이 들어와 문안을 드리자, 위산 선사께서는 벽을 향해 돌아 누워버리시므로 앙산 스님이 여쭈었다.
“제가 스님의 제자이온대 어찌하여 일어나지 않으십니까?”
이에 위산 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그대가 나를 위해 해몽을 좀 해 보게.”하자, 앙산 스님은 즉시 밖에 나가서 대야에 물을 가득 떠다가 위산 선사 옆에 놓고 나갔다.
그런 다음에 향엄(香嚴)* 스님이 들어와 문안을 드렸다.
“밤새 존후(尊候)가 어떠하십니까?”
“내가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그대가 나를 위하여 해몽을 해 주게.”
그러자 향엄 스님이 즉시 밖에 나가서 정성껏 차를 달여와 바치니, 위산 선사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칭찬하셨다.
“나의 두 제자가 사리불의 지혜를 뛰어 넘는구나.”했다.

대중은 앙산 스님이 물을 떠오고, 향엄 스님이 차를 달여온 뜻을 알겠는가?
금일 산승이 앙산 스님과 향엄 스님의 해몽에 대하여 점검해 보건대, 두 분께서 해몽을 멋지게 하시긴 했으나 팔부(八部) 밖에는 못하셨다고 하겠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온전한 십부(十部) 해몽이냐?

 연롱죽림산함옥(煙籠竹林山含玉)
 로적황화지용금(露滴黃花地涌金)

 연기가 죽림을 덮으니 산은 옥을 머금음이요,
 이슬방울이 국화에 맺히니 땅에서 금이 솟아나도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경오년(1990) 하안거 결제일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18. 남전(南泉) 주암시(住庵時)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한 번 치시고 이르시기를,

 다반가사불위정(茶飯家事不爲精)
 밥 먹고 차 마시는 일상의 생활이 정미(精微)로움이 되지 못함이로다.

왜 밥을 지어 먹고, 차를 달여 마시는 일이 정미로운 것이 되지 못하다고 하는가? 그것 지나가는 참 정미로운 일이 있다는 말이다.

다시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한 번 치시고

 손으로 취모검(吹毛劍)을 잡아쥐고
 세상의 불평지사(不平之事)를 다 끊어 없앰이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정미로운 일이다. 알겠는가?

 약이조사문하객(若以祖師門下客)
 봉구진리정안인(逢具眞理正眼人)
 홀연념래십만팔천(忽然拈來十萬八千)

 만약 조사의 문하에
 진리의 바른 눈을 갖춘 분을 만나더라도
 홀연히 잡아오는데 십만 팔천 리 멀어지리라.

이러한 법문은 바로 알기가 무척 어렵다.
우리가 이러한 법문의 낙처(落處)를 바로 알고자 할진댄, 자신의 마음 광명을 밝히는 수행을 쌓고 또 쌓아야 한다.

예전에 마조(馬祖) 도인의 84인 제자 가운데 기봉(機鋒)이 가장 날카로운 분이 남전(南泉) 선사였다.
남전 선사께서 마조 도인께 인가(印可) 받으신 후에 어느 고암(高庵)에 지내면서 시절인연(時節因緣)을 기다리시던 때가 있었다.
고암에서 한가로이 생활하고 계실 때, 하루는 객승(客僧)이 찾아와서 하룻밤 머물기를 청했다. 하룻밤을 함께 지내고 아침 공양을 지어 드시고는, 남전 선사께서 객승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셨다.
“나는 산등서이 너머에 있는 밭에 가서 일을 하리니, 점심 공양 때게 되거든, 스님이 밥을 지어 드시고 나에게도 한 그릇 갖다 주시오.”
그러고는 남전 선사께서는 밭에 가서 일을 하고 계셨는데, 점심 공양 시간이 한참 지나도 객스님은 깜깜 무소식이었다. 그래서 남전 선사께서 암자로 돌아와 보니 그 객승이 암자 안에 있는 살림살이를 모조리 부숴 놓고는 평상(平床)에 태연히 누워 있었다.
남전 선사께서 그 광경을 보시고 객승이 누워 있는 평상으로 가서 나란히 누우시자, 객승은 벌떡 일어나서 그만 가버렸다.
여기에 불법의 고준한 안목이 있다.

남전 선사께서 후에 출세(出世)하셔서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암자에서 살 때에 어떤 영리한 객승이 한 분 왔었는데 오늘에 이르도록 그 객승과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하고 그 객승을 두고 크게 칭찬하셨다.

시회대중(時會大衆)아!
암자 안의 살림살이를 다 부숴버리고는 평상에 누워 있다가, 남전 선사께서 옆에 와 누우시니 벌떡 일어나서 가버린 그 객승의 용심처(用心處)를 알겠는가?

대중이 아무 말 없자 스스로 이르시기를,

 불조(佛祖)와 더불어 동행하는 안목을 갖추었음이로다.

남전 선사께서 살림살이가 다 부서져 있는 광경을 보시고, 객승이 누워 있는 평상에 가서 나란히 누우셨던 뜻을 알겠는가?

 구름이 허공 가운데 일어났다가 멸하는 것을 스스로 관찰하는 눈을 갖추셨도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경오년(1990) 하안거 반살림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19. 천수천안(千手千眼) 중 정안(正眼)

 산승이 들어 보인 이 주장자가 진리의 묘한 법을 설함이 없는 가운데 설하니,
 모든 부처님과 큰 보살들이 합장하시고 들음이 없는 가운데 듣고 계심이로다.

이와 같은 심오한 법문은 눈으로 듣고, 귀로 볼 줄 아는 기틀을 갖추어야만 바로 알 수가 있고, 상응할 수가 있다.
이러한 고준한 법문은 여러 수천 생, 만 생 사람의 몸을 받더라도 듣기가 어렵다. 이것은 불교를 믿는다고 해서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과거 전생에 이 최상승법에 수승한 인연을 지어놓은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고인(古人)들께서는, 이 고준한 법문이 귓전을 스쳐가기만 해도 숙세(宿世)에 지어온 중생의 한량없는 죄업이 소멸된다고 하셨다. 그러니 이러한 진리의 법문 한 마디를 마음 가운데 깊이 새긴다면, 그것이 씨앗이 되어서 필경에는 진리의 과(果)를 얻게 되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눈이 천 개요, 자비의 눈이 천 개다.
관세음보살이 성불하여 서원하시기를,
“나의 명호(名號)를 지극정성으로 부를 것 같으면, 한 중생도 빠짐없이 소원을 이루어 주리라.”하셨다.
천 개의 눈으로 만중생의 마음을 헤아리고, 천 개의 손으로 자비를 베푸시는 위대한 법력을 갖추셨으니, 지극정성으로 명호를 부르고 발원한다면, 그것을 다 헤아려서 이루어 주신다.
그런데 다 같은 기도를 하는데, 왜 어떤 사람은 소원을 성취하고, 어떤 사람은 성취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각자가 지극정성으로, 간절한 일념에 기도를 하였는가, 그렇지 못하였는가 하는데 있다.
설사 기도하는 이가 하루에 몇 천 배씩 절을 하고 입이 닳도록 불보살의 명호를 부르더라도, 간절한 한 생각에서가 아니고 생각이 흩어지고 다른데 있으면 소원이 성취될 수 없다.
그러므로 지극한 마음에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면서 일념으로 소원을 발원해야만 성취할 수가 있다.

석일(昔日)에 임제(臨濟)* 선사께서 법문을 설하시려고 법상에 좌정하고 계시던 차제에, 마곡(麻谷) 선사께서 나와서 물었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의 일천 손 가운데 있는 일천의 눈 중 어느 것이 관세음보살의 정안(正眼)이냐?”
그러자 임제 선사께서 도리어,
“관세음보살의 천수천안 가운데 어느 것이 정안이냐? 속히 일러라!”하고 다그치셨다. 이에 마곡 선사께서 임제 선사를 법상에서 끌어내려버리시고 자신이 올라가 앉으셨다.
임제 선사께서 몸을 추슬러서 마곡 선사께 다가가 말씀하시기를,
“의심스럽도다.”하자, 마곡 선사께서 미처 응수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셨다.
그러자 임제 선사께서 마곡 선사를 당장 끌어내리고 다시 자신이 법상에 올라가 앉으시니, 마곡 선사께서는 즉시 법당에서 나가버리셨다.
이 두 분의 법거량에는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의 정안을 나투는데 묘한 이치가 있다.
그러나 산승이 보건대, 두 분 도인께서 ‘천 개의 눈 가운데 어느 것이 정안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멋지게 주고받긴 하셨지만, 관세음보살의 정안을 바로 보지는 못하였다 하리라.
그러면, 관세음보살의 천 개의 손에 있는 천 개의 눈 가운데 어느 것이 정안이냐?

 모래를 뿌리고 티끌을 뿌림이로다.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경오년(1990) 칠월 초하루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20. 파조타(破竈墮) 선사의 신(神) 제도

 산승이 가지고 있는 이 주장자는 모든 부처님께서 잡으려 해도 잡지 못하시고,
 모든 조사(祖師)가 그리려 해도 그리지 못하심이라.
 이 주장자를 바로 잡을 수 있고, 바로 그릴 줄 안다면,
 문득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를 얻어 미래제가 다하도록 대안락을 누리리라.

당(唐)나라 때 숭악산(崇嶽山)에서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한 도인이 법을 펴고 계실 때였다.
그 당시, 숭악산의 산문 입구에 있던 한 사당(祠堂)에는 매우 영험있는 조왕신(竈王神)이 있다고 하여 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 왔다. 그리하여 이들이 조왕단에다 짐승을 제물로 바쳐서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하니 산목숨이 많이 죽어갔다.
이러한 살생을 안타깝게 여기신 숭악의 도인은, 어느 날 시자(侍者)를 데리고 그 사당을 찾아가셨다.
사당 안에 들어가 주장자로 조왕단을 가리키면서 이르시기를,
“너는 진흙이 합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신령(神靈)한 것은 어디를 쫓아 왔으며, 성(聖)스러움은 또 어디를 쫓아 생기는고?”하고는, 이어 주장자로 조왕단을 두드리며 말씀하셨다.
“깨져서 떨어지도다. 깨져서 떨어지도다.”
그러자 조왕단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런 후, 조금 있다가 푸른 옷에 높은 관(冠)을 쓴 노인이 나타나서 이 도인(道人)께 큰 절을 올리며 말했다.
“저는 이 사당의 조왕신입니다. 오랫동안 업보(業報)에 끄달려 오다가 오늘에야 스님의 무생법문(無生法門)을 듣고서 해탈했습니다. 스님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숭악의 도인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대에게 특별한 법을 설한 것이 아니고, 원래 그대의 성품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라.”하니 조왕신이 재배(再拜)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이 도인은 처음부터 이름을 드러내지 아니하였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이 일을 들어 파조타(破竈墮)*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시자가 옆에서 그 광경을 다 지켜보고는 절로 돌아가 대중들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파조타 선사께 몰려가 여쭈었다.
“저희들은 여러 해 동안 선사를 모셔왔는데도 특별한 가르침을 입지 못하였는데, 조왕신은 어떤 법문을 들었기에 해탈을 얻었습니까?”
“내가 조왕신에게 별달리 말한 것이 아니라, ‘신령함은 어디를 쫓아 왔으며, 성스러움을 어디를 좇아 생기는고?’라고 말하였을 뿐이다.”
대중들이 선사의 말씀을 듣고도 가만히 있자, 선사께서 이르셨다.
“너희들은 어찌 절을 하지 않느냐?”
그러자 대중이 일시에 일어나 예배하니, 파조타 선사께서 주장자로 대중들의 머리를 때리시면서,
“깨져서 떨어지도다.”라고 하셨다.
이에 대중이 일시에 깨달았다.

파조타 선사를 알겠는가?

 사람을 시험하는 밝은 눈은 입을 열면 문득 상대방을 앎이로다.

경오년(1990) 구월 보름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21. 투자(投子) 선사의 기봉

 불법의 진리인 선(禪)의 묘한 이치는
 모든 부처님의 생명의 근원이며,
 역대 모든 도인들의 바른 눈이로다.

오늘은 결제일이라서 스님네와 재가신자들 백여 명이 안거에 임하고자 방부를 들였고, 또 많은 대중이 이 법회에 참여하였다.
이 구순(九旬) 안거는 각자가 자기의 마음 광명을 찾기 위해서 모든 반연을 다 끊고 오로지 정진에만 몰두하는 기간이다.
이 일을 밝히는 데는 조금이라도 미루는 마음이 있다면 벌써 십만 팔천 리나 어긋나버린다. 만약 ‘오늘 못하면 내일 하지’, ‘이 달에 못하면 다음 달에 하지’, 또 ‘금년에 못하면 다음 해에 하지’ 하는 생각이 마음 가운데 조금이라도 있을 것 같으면, 일생을 그만 허송세월 해버리게 된다.
그러니 모든 대중은 이 한 철에 결정코 견성하리라는 각오로 일분 일초를 허비하지 말고 화두와 씨름해야 한다.
이 귀중한 시간, 오늘이라는 날은 다시는 오지 아니한다.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곧 시시각각 죽음의 문턱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니, 누구라도 마음 광명을 밝히는 이 일을 소홀히 한다면 염라대왕의 추심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이 일을 분명히 밝혀서 자기의 마음 광명을 본 이에게는 생사의 괴로움이라는 것이 없는 법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여름 석 달 동안에는 온갖 번민과 갈등과 누겁에 쌓아온 애착을 탕탕 놓아버리고 기어코 자기의 마음 광명을 찾으리라는 대발심(大發心)으로 정진에 정진을 더하기 바라노라.

예전에 투자(投子)* 선사께서 어느 때 고암(高庵)에서 지내실 적에, 조주(趙州) 선사께서 친견하러 가신 적이 있었다. 암자를 찾아 올라가던 도중에 기름병을 잔뜩 챙겨들고 내려오는 한 스님을 만나게 되어 물으셨다.
“스님이 투자요?”
“그렇소.”
“어디를 가십니까?”
“기름 팔러 가요.”하고 투자 선사께서는 산 아래로 내려가 버리셨다.
조주 선사께서 암자에 올라가 기다리고 계시니, 투자 선사께서 기름을 다 팔고는 들어오셨다.
“어떤 것이 투자입니까?”
조주 선사께서 이렇게 물으시자 투자 선사께서는 기름병을 들어 보이시며,
“기름이고, 기름이다[油油].”라고 하셨다.
이에 조주 선사께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계시자, 투자 선사 역시 아무 말이 없으셨다.
어째서 “어떤 것이 투자입니까?” 하는 물음에 기름병을 들어 보이시고 “기름이고, 기름이라.”라고 하셨느냐?
여기에 눈이 열리면 삼라만상 일체의 것이 자신의 세계와 둘이 아닌 고로, ‘기름이고, 기름이라.’ 하신 것이다.
그러면 ‘기름이고, 기름이라.’ 하신 것에 대해서, 조주 선사께서는 한마디 할 수가 있었는데 왜 묵묵히 가만히 계셨느냐?
가만히 계신 그 가운데 묘한 진리가 숨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산승이 만약 당시의 조주 선사였다면, ‘기름이고, 기름이라.’ 할 때에 묵묵히 있지 않고 한마디 했을 것이다.
뭐라고 한마디 이를 것인가?

 ‘기름이고, 기름이라’ 함도 옳긴 옳으나
 진투자(眞投子)는 아님이로다.

조주 선사께서 그렇게 묵묵히 계시다가 곧 돌아가셔서 몇 년 후에 다시 투자 선사를 참방하여 물으셨다.

 대사저인각활시여하(大死底人却活時如何)?
 크게 죽은 사람이 문득 살아날 때 어떠합니까?

이렇게 고준한 일문(一問)을 던지시니, 투자 선사께서 즉시

 불허야행(不許夜行)이요, 투명수도(投明須到)니라.
 밤에 행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모름지기 밝거든 이를지니라.라고 답하셨다.

물음의 낙처를 명료하게 꿰뚫어서 전광석화와 같은 답을 하신 것이다.
그러면, 크게 죽은 사람의 경계는 어떠한 경계이며, 또 죽은 사람의 경계에서 문득 살아난다는 것은 어떠한 경계를 말하는 것이냐?

우리가 부처님의 정법을 의지해서 참선수행을 하고 있는데, 간절한 마음에서 애를 쓰고 애를 써서 화두를 참구하다 보면 일념이 현전한다. 그리하여 가고, 오고, 보고, 듣는 것을 다 잊고 시간이 흘러도 흐르는 줄 모르는 일념삼매에 푹 빠지게 된다. 그때는 흡사 석인(石人)과도 같고 목인(木人)과도 같은 사심(死心)의 경계가 된다. 바로 사중경계(死中境界)인 것이다.
이렇게 며칠이고, 몇 달이고 있다가 홀연히 의심덩어리가 타파되는데, 이때 비로소 죽은 사람이 문득 살아나는 경계가 나타나는 법이다.
여기에 이르면 모든 부처님과 역대 도인들께서 베풀어 놓으신 백천(百千) 법문 가운데 어느 것을 들어 묻더라도 바로 이 투자 선사, 조주 선사와 같이 전광석화로 척척 답할 수 있게 된다.
산승이 20여 년 전에 어느 조실 스님을 방문하여 이 법문을 들어 고인과 똑같이 여쭈었다.
“스님, 크게 죽은 사람이 문득 살아날 때 어떠합니까?”
그러자 그 조실 스님은,
“죽기는 왜 죽어!”라고 하셨다. 그래서 산승이,
“스님, 그것은 고인의 문답처를 살피지 못한 것입니다.”하여, 여기에서 대화가 단절되었다.
산승이 월내(月內)로 돌아와 이 문답 과정을 향곡 선사께 말씀드리니, 향곡 선사께서 물으셨다.
“그러면 만약 너에게, ‘크게 죽은 사람이 문득 살아날 때 어떠하냐?’고 묻는다면, 너는 뭐라고 한마디 하겠느냐?”
그때 산승은 이렇게 답했다.

 불허노호회(不許老胡會)
 지허노호지(只許老胡知)

 노호(老胡)가 앎을 허락하지 아니함이요,
 노호가 앎을 허락함입니다.

투자 선사의 명성이 높아지자 제방(諸方)에서 납자와 단월들이 많이 참방하였다.
어느 날, 소산(疎山) 스님이 찾아와서 인사를 올리니, 투자 선사께서 물으셨다.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연평(延平)에서 왔습니다.”
연평은 지명(地名)인데, 옛날에 신선(神仙)이 천하에 둘도 없는 보배 칼을 가지고 있다가 분실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선객(禪客)이 바로 연평 땅에서 왔다고 하니 투자 선사께서 물으시기를,
“연평에서 왔을진댄 연평의 보검을 가져왔는가?”하자, 그 선객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켰다.
그러던 차에 시자(侍者)가 점심 공양상을 들고 들어오니 선객은 조실방에서 물러갔다.
투자 선사께서 공양을 다 드신 후에 시자에게 물으셨다.
“객(客)이 객실(客室)에 있느냐?”
“조실 스님 장에서 나간 즉시 갔습니다.”
투자 선사께서 그제서야

 삼십년래농마기(三十年來弄馬騎)
 금일각피여자박(今日却被驪子撲)

 삼십여 년 간 말타기 재주를 부리다가
 오늘 당나귀에게 한번 채였도다.
하였다.

대중은 알겠는가?
투자 선사께서는 왜 그 선객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킬 때 이 말씀을 하시지 않고 떠난 후에야 하셨을까?

 적과후장궁(賊過後張弓)
 도적이 지난 후에 활을 쏨이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서 산승에게,
“연평의 보검을 가져왔느냐?”하고 묻는다면, 산승은 이렇게 답하리라.

 산호지지탱저월(珊瑚枝枝撑著月)
 산호나무 가지가지에 밝은 달이 영롱함이로다.

신미년(1991) 하안거 해제일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22. 오백나한(五百羅漢) 벽작수고우(變作水牯牛)

 마음의 청정한 그 자체를 깨달으면 그것이 곧 부처요, 마음의 청정한 광명을
 임의자재하게 쓴다면 그것이 곧 법(法)이요, 승(僧)이니라.

마음을 깨달으면 진리가 그 가운데 다 있으니, 삼보(三寶)가 하나이고, 하나가 삼보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마음, 바로 이것을 깨달아 알 때에, 팔만사천 진리가 사람 사람의 마음속에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중국 오대산(五臺山)은 문수보살이 상주하고 계시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하루는 조주(趙州) 선사께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오대산을 향해 행각(行脚)에 오르셨다.
수백 리 길을 가다가 하룻밤 머물고자 어느 암자에 들르시니, 그 암자에 계시던 백발(白髮) 노승(老僧)이 물었다.
“젊은 스님은 어디로 가는고?”
“오대산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가는 길입니다.”
이 말 끝에 노승이 게송하기를,

 하처청산비도량(何處靑山非道場)
 하수책장례청량(何須策杖禮淸凉)
 운중종유금모현(雲中縱有金毛現)
 정안관시비길상(正眼觀時非吉祥)

 어느 곳 청산인들 도량 아닌 곳이 없건마는
 하필 주장자 짚고 청량산까지 예(禮)하러 가려는가.
 가사 구름 가운데 금빛 사자를 탄 문수보살이 나타난다 해도
 바른 눈으로 보건댄 길상(吉祥)한 것이 못되느니라.
하고 조주 선사를 경책한 것이다.
노승의 게송을 다 듣고 난 조주 선사께서,
“어떤 것이 바른 눈[正眼]입니까?”하고 물으니, 노승은 그만 말이 막혀버렸다.
조주 선사께서 노승의 암자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다시 오대산을 향해 길을 나섰다.
도중에 또 어떤 노인을 만났는데 그 노인이 물었다.
“그대는 어느 곳을 향해 그렇게 가는고?”
“오대산 오백 나한승(羅漢僧)에게 예배하러 갑니다.”
“어젯밤 오백 나한이 다 물빛 암소가 되어 갔다.”
이 말 끝에 조주 선사께서,
“아이고, 아이고!”하고 곡(哭)을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천추만대(千秋萬代)에 귀감이 되는 진법문(眞法門)이다. 우리가 이러한 법문에 확연명백한 법안(法眼)이 열려야만 비로소 사람 도리를 할 수가 있는 법이다.
이와 같은 삼매를 보인 법문이 또 있다.

남전(南泉) 선사께서 천태산(天台山)의 한산(寒山)*, 습득(拾得)*께 예배드리러 와서 며칠 머물다가 하직 인사를 올리자, 한산이 물었다.
“어디를 가려 하시오?”
“마을 아래 돌다리에 놀러가고자 합니다.”
“거기 가서 무엇을 하시려오?”
“가서 오백 나한승에게 예를 올리려 합니다.”
그러자 한산이 하는 말이,
“어젯밤에 오백 나한이 다 물빛 암소가 되어 가버렸소.”하는 것이었다.
여러분들은 이 말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소승과(小乘果)를 증득한 신통자재한 나한승들이 물빛 암소가 되어 가버렸다고 하니, 그 말에 남전 선사가,
“아이고, 아이고!”하고 곡을 하니, 한산이
“비록 몸은 뒤에 받았지만 큰 종사(宗師)의 눈을 갖추었도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남전 선사는,
“허허.”라고 허허성(噓噓聲)을 하였다.

여기에 큰 뜻이 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화두를 타파하여 자신의 성품을 바로 보게 되면, 왜 ‘아이고, 아이고!’하고 곡을 하며, 또 왜 ‘허허성’을 하는 것인지를 바로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조주, 남전 선사를 바로 알고, 한산, 습득의 살림살이를 다 알아서 그 분들과 척척 상통하게 되리라.
그러면 남전 선사께서, ‘허허’ 하시는데 한산, 습득 두 분 다 아무 말씀이 없으셨는데, 산승이 만약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손뼉을 치면서 ‘하하’ 한바탕 큰 웃음을 치리라.

여기에도 또한 큰 뜻이 있다.
손뼉을 치면서 ‘하하’ 웃는 이 뜻을 안다면 모든 부처님의 은혜와 사사공양(四事供養), 시주(施主)의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으리라.

마지막 진리의 한마디를 어떠하냐?

 충락벽계송천척(衝落碧開松千尺)
 재단홍진수일계(載斷紅塵水一溪)

 푸른 하늘을 찔러 여는 것은 천 길 푸른 소나무요,
 세간의 먼지를 끊어내는 것은 흐르는 물이더라.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임신년(1992) 칠월 초하루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23. 서경 수검마(西京收劍麽)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이 주장자 속에는 모든 부처님의 바른 진리의 눈이 있다. 이 주장자를 바로 알아 향상(向上)의 정안(正眼)을 갖출 것 같으면,

 문재답처(問在答處)
 답재문처(答在問處)

 물음은 답하는 곳에 있고
 답은 묻는 곳에 있음이로다.

이러한 수완을 갖추어야만 비로소 만인(萬人)에게 지도자가 될 수 있는 법이다.
이러한 수완을 갖추지 못하고서 만인에게 법을 편다면, 천사람 만사람의 눈을 다 멀게 할 것이다.
비유하건대, 눈 먼 장님이 앞에 서서 뒤에 눈 먼 사람들에게 손을 잡게 하여 이끌고 가는 것과 같다. 앞에 천길 만길 벼랑이 있는 줄도 모르고 가다가 앞선 사람이 그 낭떠러지에 떨어지면 뒤따라오던 사람들 또한 그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수천, 수만 명이 모두 고통을 받게 된다. 그야말로 동타지옥(同墮地獄)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이 진리를 향상의 정안을 갖추지 않고서는 만인을 지도하는 종사가 될 수 없는 법이다.

하루는 암두(岩頭) 선사께 한 행각승(行脚僧)이 찾아와서 인사를 올리니 암두 선사께서 물으셨다.
“어디서 오는고?
“서경(西京)에서 옵니다.”
“서경에서 왔다면 황 소(黃巢)의 난(亂) 후에 칼은 거두어졌던가?”
“거두어졌습니다.”
이에 암두 선사께서 고개를 빼어 그 행각승 앞에 가까이 대고,
“와!”하고 칼을 내려치는 소리를 흉내 냈다. 그러자 행각승이 말하기를,
“스님의 목이 떨어졌습니다.하니, 암두 선사께서 웃으셨다.
어째서 ‘스님의 목이 떨어졌습니다.’ 하는데 웃음을 짓느냐?
이 뜻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런 후에 그 행각승이 설봉(雪峰) 선사 회상을 찾아가니, 선사께서 물으셨다.
“그대가 어디서 오는고?”
“암두(巖頭) 스님 회상(會上)을 거쳐서 옵니다.”
“암두가 무슨 말을 하던가?”
행각승이 암두 선사의 문답했던 것을 그대로 말씀드리자, 설봉 선사께서 들으시고는 그 행각승을 주장자로 삼십 방을 때려서 내쫓아버렸다.

이 행각승에게 무슨 허물이 있기에 주장자로 삼십 방을 때려서 내쫓았느냐?
이러한 것을 바로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만 모든 도인들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으리라.

암두 선사와 설봉 선사를 알겠는가?

 생(生)을 같이하고 사(死)를 같이하는 안목을 갖춘 분들이로다.

행각승을 알겠는가?

 설사, 설봉의 삼십 방 아래에서 진리의 안목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둔한 물것은 쓸 곳이 없음이로다.

필경에 고준한 한마디는 어떠한가?

 횡담주장불고인(橫擔拄杖不顧人)
 즉입천봉만봉거(卽入千峰萬峰去)

 주장자를 비껴 메고서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고
 천봉 만봉 심산유곡(深山幽谷)으로 들어감이로다.

계유년(1993) 정월 보름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24. 임제(臨濟) 사료간(四料簡)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한 번 들어 보이시고 말씀하시기를,

 당당기우주뢰정(堂堂氣宇走雷霆)
 늠름위풍국상설(凜凜威風掬霜雪)
 장군령하참형만(將軍令下斬荊蠻)
 신검일휘천리혈(神劍一揮千里血)

 당당한 기상이 우뢰를 달음박질치게 하고
 늠름한 위풍에 설상(雪霜)도 녹음이로다.
 장군 영하(令下)에 오랑캐를 베니
 신검(神劍)을 한번 휘두르니 천 리에 피[血]로다.

어느 날 임제(臨濟) 선사가 시중(示衆)할 때에 이르되,
“내가 황벽(黃檗) 선사 처소에서 세 차례 불법(佛法)의 적적대의(的的大義)를 묻다가 세 번을 육십 방망이를 맞았는데 쑥대로 두드리는 것 같았다. 이제 다시 한 방망이를 맞고 싶은데, 누가 나를 위해서 때릴런고?”하니, 이때에 어느 수좌가 대중 가운데에 나와서 이르되,
“제가 때리겠습니다.”함에, 임제 선사가 주장자를 들어 수좌에서 주었더니, 그 수좌가 잡으려고 하거늘 임제 선사가 문득 때렸다.

대중아!
임제 선사의 응용처(應用處)를 잘 보라.

 여탈자재(與奪自在)
 조용동시(照用同時)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함에 자유자재하며
 조(照)와 용(用)이 동시(同時)로다.

임제 선사는 종사(宗師) 중에 명안종사(明眼宗師)라.
사해오호(四海五湖)에 견성참구자(見性參究者)는 임제 선사의 활발발지(活鱍鱍地)를 잘 보라.

임제 선사는 사료간(四料簡)으로써 학자들을 제접(提接)함이라.

 탈인불탈경(奪人不奪境)
 탈경불탈인(奪境不奪人)
 인경양구탈(人境兩俱奪)
 인경구불탈(人境俱不奪)

 때로는 사람을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아니하며
 때로는 경계는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아니하며
 때로는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으며
 때로는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지 아니하노라.

이와 같이 납자를 제접하였다.

만약 산승에게
“어떤 것이 사람을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하고 물으면,

 청산유로무인도(靑山有路無人到)
 청산에 길은 있으되, 이르는 사람이 없도다.

또, “어떤 것이 경계는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아니하는 것입니까?”하고 물으면,

 목동취적천지경(牧童吹笛天地驚)
 목동이 젓대를 부니 천지가 놀람이로다.

또, “어떤 것이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는 것입니까?”하고 물으면,

 만리절왕래(萬里絶往來)
 만 리에 왕래가 끊어짐이로다.

또, “어떤 것이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지 아니하는 것입니까?”하고 물으면,

 강남삼월화쟁발(江南三月花爭發)
 야노상봉권주가(野老相逢勸酒歌)

 강남 삼월에 꽃들이 다투어 핌이요
 일없는 늙은이들이 서로 만나 술을 권하며 노래하도다.

여하시빈간주(如何是賓看主)이닛고?
어떤 것이 손님이 주인을 보는 것입니까?

 방문지식변래기(訪問知識辨來機)
 독존독행무반려(獨尊獨行無伴侶)

 선지식을 방문하여 오는 기틀을 가려서,
 홀로 높고 홀로 행하니 벗이 없음이로다.

여하시주간빈(如何是主看賓)이닛고?
어떤 것이 주인이 손님을 보는 것입니까?

 좌관운기운멸(坐觀雲起雲滅)
 전기대용임자재(全機大用任自在)

 앉아서 구름이 일어나고, 구름이 멸함을 보다가
 전기대용을 자재하게 씀이로다.

여하시주간주(如何是主看主)닛고?
어떤 것이 주인이 주인을 보는 것입니까?

 어전걸명불용서(御殿乞命不容恕)
 어전에 꿇어앉아 용서를 비니 용서하지 못함이로다.

여하시빈중빈(如何是賓中賓)이닛고?
어떤 것이 손님 중의 손님입니까?

 한로축괴(韓獹逐塊)니라.
 한나라의 개가 흙덩이를 쫓아가도다.

산승의 문답 공안 점검을 제방(諸方)에 일임하노라.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계유년(1993) 구월 초하루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25. 위산(潙山)의 수고우(水牯牛)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한 번 들어서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되,

 방거수래득자유(放去收來得自由)
 불감우처역감우(不堪憂處亦堪憂)
 가련체구승언자(可憐滯句承言者)
 쟁시쟁비공백두(爭是爭非空白頭)

 리각양두도방하(離却兩頭都放下)
 무변광야임한유(無邊廣野任閑遊)

 놓아 가고 거두어 옴에 자유를 얻음이니,
 근심이 없는 곳에 또한 심히 근심함이로다.
 불쌍하다. 글귀에 막히고 말을 따르는 자여!
 옳음을 논하고 그름을 논하다가 공연히 머리가 희어지도다.

 양변(兩邊)을 여의어서 다 놓아버리고
 가없는 넓은 들에 한가로이 놀지니라.

예전에 위산(潙山) 선사가 있었는데 어느 날 법상에 오르시어 말씀하시기를,
“노승(老僧)이 백 년 후, 산 아랫마을의 단월가(檀越家)에 한 마리 물빛 암소가 되어 왼쪽 옆구리에 다섯 자를 쓰되, ‘위산승 아무개[潙山僧某甲]’라 하겠다. 그때를 당해서, 이 ‘위산승(潙山僧)’을 ‘수고우(水牯牛)라 부르겠느냐?’ ‘수고우’를 ‘위산승’이라 부르겠느냐? 필경에 뭐라고 해야 되겠느냐?”하니, 앙산(仰山) 스님이 나와서 예배하고 물러갔다.

대중아! 눈을 뜨고 바로 보라.

 일신양명부사의(一身兩名不思議)
 유시유계변고봉상(有時遊溪邊孤峰上)

 한 몸에 두 이름 사의하기 어려운지라.
 때로는 시냇가에서 놀다가 때로는 고봉상(孤峰上)에 있도다.

 위산부자능통변(潙山父子能通變)하고
 구신통어묵자재(具神通語黙自在)로다.

 위산 부자(父子)는 통과 변에 능하고
 신통을 갖추어서 어묵에 자재로다.

비록 이와 같으나, 산승의 수중 봉(手中棒)을 면치 못함이로다.

할(喝)!
일할 하시고 하좌하시다.

갑술년(1994) 동안거 반살림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26. 일일호일(日日好日)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한 번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심심해저금룡약(深深海底金龍躍)
 만장봉두옥토면(萬丈峰頭玉兎眠)
 일도신광조내외(一道神光照內外)
 무한청풍변우주(無限淸風遍宇宙)

 깊고 깊은 바닷물에는 금룡이 뛰고
 만 길이나 높은 산머리에는 옥토끼가 졸고 있구나.
 한 줄기 신령한 빛은 안과 밖을 비추니
 한없는 맑은 바람 우주에 두루 함이로다.

모든 사람들이 일상생활에 죄를 짓는 근본은 아만과 교만과 허세를 쫓아 모든 죄를 짓게 되는데, 아만과 교만과 허세를 어떻게 해야 뿌리를 뽑을 수 있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생활 속에 자기의 참 모습을 발견하는 참선 수행을 하루하루 쌓아 가실 것 같으면, 자연히 그 모든 상념(想念)들이 다 없어지고 자기의 참 모습이 드러나니, 자기의 참모습이 드러나면 사해(四海)가 일가(一家)요, 만류(萬類)가 동체(同體)라.

시시호시(時時好時) 일일호일(日日好日)
때때로 좋은 때요, 나날이 좋은 날이라.

길 위에 돈을 많이 놓아두었는데, 세 사람의 수행승이 지나갔다.
한 사람은 돈을 주워서 걸인(乞人)에게 주고, 한 사람은 돈을 보고는 돌아가고, 또 한 사람은 돈을 그냥 지나간다.

세 사람의 수행의 깊고 얕은 것은 드러나니, 대중은 어느 용심(用心)을 취하려는고?
각자가 이 법문에 대해서 유심히 확인해 보라.법상에서 하좌하시다.

갑술년(1994) 이월 초하루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27. 청원 행사(靑原行思)의 돌부자(鈯斧子)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청산녹수비로신(靑山綠水毘盧身)
 해상파도장광설(海上波濤長廣說)
 천성만조금하재(千聖萬祖今何在)
 주장두상방호광(柱丈頭上放毫光)

 청산녹수는 비로자나 법신불이요
 바다 위 파도는 부처님의 장광설이로다.
 일천의 성인이며 만 조사시여, 지금은 어디에 계신고?
 주장자 머리 위에서 백옥호 광명을 놓으시네.

회마(會麽)?
알겠는가?

 팔공산색천고수(八公山色千古秀)
 해운명월만년명(海雲明月萬年明)

 팔공산 산색은 천년토록 수려하고
 해운대 밝은 달은 만년토록 빛나도다.

금일은 갑술년 하안거 결제일인데 사부대중은 각자의 본분사(本分事)를 밝히는데 전 생애를 걸어야 한다.
모든 반연(攀緣)을 다 끊고, 모든 분별을 쉬어서 오직 화두일념이 지속되도록 혼신을 다해 의정(疑情)을 일으켜야 한다.

예전에 육조 선사 문하에 청원 행사(靑原行思) 선사와 남악 회양(南岳懷讓) 선사 두 분이 계셨는데, 그 당시 선풍(禪風)을 드날리고 있던 때였다.
어느 날, 행사 선사께서 다년간 지도를 해 오시던 제자 석두(石頭) 스님을 불러서 서신(書信)을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 서신을 남악 회양선사에게 전해 드리고 오면, 무딘 도끼를 주어서 산에 살게 하리라.”하셨다.
석두 스님은 그 서신을 가지고 여러 날을 걸어서 남악 회양 선사를 찾아 갔는데, 서신은 전하지 않고 대뜸 여쭈기를,
“모든 성인(聖人)도 사모하지 않고 자기의 영식(靈識)도 중요시 않을 때에는 어떠합니까?”
“그대는 어찌 향상사(向上事)만 묻고, 향하사(向下事)는 묻지 아니하는고?”
“영겁토록 생사(生死)의 바다에 잠길지언정 제불(諸佛)의 해탈법은 구하지 않겠습니다.”하고 대답을 드리니, 남악 회양 선사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돌아앉아 버리셨다.
그래서 석두 스님은 행사 선사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서신은 잘 전했느냐?”
“서신도 전하지 못하고 신(信)도 통하지 못했습니다.”했다. 그리고는 석두 스님은 다시 행사 선사께
“스님께서 심부름을 다녀오면 무딘 도끼를 주시고 분가(分家)하여 산에 머물게 해 주신다고 하셨는데 무딘 도끼[鈯斧子]를 주십시오.”했다. 그러니 행사 선사께서는 아무 말씀 없이 한 쪽 발[一足]을 들어 올려 보이셨다. 이에 석두 스님이 절을 올리고 물러났다.

이렇게 고인(古人)들은 법을 전하는 과정에서 세밀하게 접인(接人)을 하셨다.
산승이 금일에 팔을 걷어붙이고 고인의 살림살이를 점검하리라.

“모든 성인도 공경하지 아니하고 기령(己靈)도 중히 여기지 않을 때는 어떠함이닛고?”

비록 그렇더라도 삼십 봉을 때리리라.

회양 선사가 석두 스님을 보고,
“그대가 태고생(太高生)만 묻고, 향하사(向下事)는 묻지 아니 하느냐?”하니 석두 스님이,
“영겁을 생사에 잠길지언정, 모든 성인의 해탈법은 구하지 않겠습니다.”하는 말에는, 또 산승이 이렇게 점검하리라.

 금소수귀(金銷須貴)
 낙안성예(落眼成翳)

 금가루가 비록 귀하다 하나
 눈 속에 떨어지면 가리움을 이루니라.

석두 선사가
“선사님, 다녀왔습니다. 서신을 전하고 오면 무딘 도끼를 주어 산에 머물게 한다 하셨으니 무딘 도끼를 주십시오.”하니, 청원 선사가 한쪽 발을 드니 석두 선사가 예배한 것에 대해서, 또 산승이 점검하기를,

 천리동풍(千里同風)
 만리지음(萬里知音)

 천리 밖에서도 바람을 같이 하고
 만리 밖에서도 소리를 아는도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갑술년(1994) 하안거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28. 운암(雲岩) 대비수안(大悲手眼)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한 번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방개일월명(放開日月明)
 파정건곤흑(把定乾坤黑)
 일차불회두(一箚不廻頭)
 만지생형극(滿地生荊棘)
 용궁해장혜(龍宮海藏兮)
 비다(非多)
 전광석화혜(電光石火兮)
 미급(未急)

 놓아 여니 일월이 밝음이요
 잡아 정함에 건곤이 캄캄함이라.
 한 번 찌르는데 머리를 돌이키지 못하면
 땅에 가득히 가시덤불이 생기도다.
 용궁에 팔만 사천 법문을 감춤이여
 많은 것이 아님이요,
 전광석화여
 빠름이 아니도다.

석일(昔日)에 도오(道吾) 선사에게 운암(雲岩) 선사가 묻되,
“대비(大悲) 관음보살(觀音菩薩)이 허다한 손과 눈을 써서 무엇 함이닛고?”
하니 도오 선사가,
“사람이 밤에 손을 등 뒤로하고 목침을 만지는 것과 같으니라.”하니 운암 선사가,
“내가 그 말한 뜻을 알도다.”
하니 도오 선사가,
“네가 어떻게 알았는고?”하니 운암 선사가
“몸을 두루함이 이것이 눈입니다.”했다. 다시 도오 선사가,
“이르기는 잘 일렀으나 다만 팔부만 일렀도다.”하니 운암 선사가,
“사형(師兄)은 그러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니 도오 선사가 말하기를,
“전신을 통한 것이 이 눈이니라.”했다.

대중아!

몸을 두루 한 것이 옳으냐?
몸을 통한 것이 옳으냐?
편신(遍身)과 통신(通身)은 놔두고 어느 것이 바른 눈[正眼]인고?

대중이 말이 없으니, 거좌(據坐)해 보이시고,  문득 일할(一喝)하시고 하좌하시다.

을해년(1995) 오월 초하루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29. 태전(太顚) 선사의 관색관공 즉 색공(觀色觀空卽色空)

 부처님의 근본 진리를 논하건대,
 가히 비방할 수도 없고 칭찬할 수도 없나니,
 그 진리의 본체가 허공과 같아서 걸림이 없도다.
 본 바탕을 여의지 아니 해서 항상 밝으니 찾은 즉 알라.
 그대가 가히 보지 못하리라.

예전에 태전(太顚) 선사의 명성이 분분해서 그 선사를 추종하는 신자들이 운집하니, 고을 원(員)으로 있던 한퇴지(韓退之)가 몹시 못 마땅해서, ‘산사(山寺)의 노승이 고을 백성들을 기만하는 술책이 아닌가?’ 해서 의아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곧 불법을 말살해야겠다는 계교를 생각했는데, 어떻게 하든지 태전 선사의 명성을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수행인으로서 수치스러움을 느끼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느 날 홍련이라는 천하에 인물이 빼어난 기생을 불러서 이르기를,
“이 산중에 태전 선사가 있어 불교를 널리 퍼뜨려 세상 사람들을 현혹케 하고 있으니, 네가 가서 무슨 수를 써서든지 그 선사를 파계하고 오면 너의 일생이 편안할 것이로되, 만약 그렇지 못하면 너를 죽일 것이다.”하였다.
평소에 기생 홍련은 자신의 미모에 자신감이 있는지라, 태전 선사를 파계시킬 자신이 있었다.
곧 신자를 가장하여 태전 선사가 계시는 절에서 백일 기한을 정해 놓고 열심히 기도를 했다.
그런데 기도가 다 끝나는 날이 다가오는데도 태전 선사는 여여부동(如如不動) 하신지라. 홍련의 마음은 몹시 초조했다. 드디어 홍련은 통곡하면서 태전 선사께 온 뜻을 사실대로 말씀드리니, 홍련이 입고 있던 치마의 폭을 펼치게 하시더니 붓으로 게송을 지어서 써주기를,

 십년불하축령봉(十年不下竺嶺峰)
 관색관공즉색공(觀色觀空卽色空)
 여하조계일적수(如何曹溪一適水)
 긍타홍련일엽중(肯墮紅蓮一葉中)

 십 년 동안 축령봉을 내려가지 않았으니
 색을 보는 관이 공한 즉, 색이 곧 공이로다.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청정한 조계의 한 방울 물이라도
 어찌 홍련의 한 잎에 떨어뜨릴까보냐.

“위의 게송을 고을 원님에게 보여주면 너는 죽음을 면할 수 있으리라.”하셨다.
홍련이 돌아가서 고을 원님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니, 원이 감탄하기를,
“불법의 도리는 참으로 난사의(難思議)한 일이로구나. 천하의 영웅호걸도 여색에 빠지는데, 과연 태전 선사의 청정한 법력이 이에 미치는구나.”했다.
그 뒤 관직을 버리고 불법에 귀의하고 입산하여 태전 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필경에 진리의 한마디는 어떠한고?

 월락담공수저정(月落潭空水底靜)
 금풍소지산야수(金風掃地山野瘦)

 달이 못에 떨어지나 물 밑은 고요함이요,
 가을 바람 땅을 쓰니 산과 들이 앙상함이로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을해년(1995) 하안거 해제일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30. 설봉(雪峰)의 삼처상견(三處相見)

상당념주장시중운(上堂拈拄杖示衆云)

 장신수요무종적(藏身須要無蹤跡)
 벽안호승난변백(碧眼胡僧難辨白)
 몰종적처막장신(沒蹤跡處莫藏身)
 문문확달료제진(門門廓達了諸塵)
 독래장위무주려(獨來將謂無儔侶)
 뇨리홀연봉고인(閙裏忽然逢古人)
 류선함금유외냉(柳線含金猶畏冷)
 매화파설이성춘(梅花破雪已成春)
 아농수안통신시(阿儂手眼通身是)
 선응무방처처진(善應無方處處眞)
 처처진(處處眞)이여
 산시산수시수(山是山水是水)니라.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몸을 감춤에 모름지기 종적이 없으면
 눈 푸른 호승도 가리기가 어려운 법이요
 종적이 없는 곳에 몸을 감춤이 없으면
 문을 활짝 여니 모든 티끌이 없도다.
 홀로 옴에 장차 짝이 없다 하나
 번잡한 속에 홀연히 고인을 만남이라.
 버들이 금을 머금음에 오히려 차가운 것을 두려워함이요
 매화꽃이 눈 속에서 피어나니 이미 봄이 왔음이라.
 너의 손과 눈이 몸을 통한다 하니
 잘 응하되 모남이 없으면 처처가 진이라.
 처처진이여!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예전에 설봉(雪峰) 선사가 있었는데, 하루는 설봉 선사가 마을에 들렀다가 절에 돌아와서 대중에게 말하기를,
“망주정(望州亭)에서 여러분들과 더불어 만났고, 오석령(烏石嶺)에서도 여러분들을 서로 보았으며, 지금 승당(僧堂) 앞에서도 여러분들과 서로 만났다.”
이렇게 설봉 선사께서 대중에게 법문을 했다.
그런 후에 보복(保福) 선사가 아호(鵝湖) 선사에게 묻기를,
“승당 앞에서 서로 본 것은 그만 두고, 망주정과 오석령에서 서로 본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고?”하니, 아호 선사가 뛰어서 방장실로 돌아가거늘, 보복 선사는 문득 승당으로 들어갔다.

대중은 설봉 선사를 알겠느냐?

 세 곳에서 다 서로 보았다 하니
 과연 천오백인의 선지식이로다.

아호 선사와 보복 선사를 알겠느냐?

 투정 투저(透頂透底)하신 종사(宗師)의 눈을 갖춘지라.

필경에는 어떠한고?

 관불용침(官不容針)이나
 사통거마(私通巨馬)로다.

 법(法)에는 바늘도 용납하지 못하나
 사사로이는 큰 말[馬]이 통하도다.

을해년(1995) 유월 초하루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31. 기림(祇林)의 목검(木劍)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한 번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중생제불불상침(衆生諸佛不相侵)
 산자고혜수자심(山自高兮水自深)
 만별천차명차사(萬別千差明此事)
 자고제처백화향(鷓鴣啼處百花香)

 모든 중생과 모든 부처님이 서로 침범하지 아니함이요
 산은 스스로 높고 물은 스스로 깊도다.
 천차만별로 이 일을 밝히니
 자고새 우는 곳에 백 가지 꽃이 향기롭도다.

예전에 호남(湖南)의 기림(祇林) 선사가 항상 목검(木劍) 한 자루를 들고 말하기를,
“나는 마군을 항복시킨다. 날마다 문수(文殊)와 보현(普賢)이 마구니가 되어서 온다.”하면서, 어느 중이 와서 절을 하기만 하면,
“마구니가 왔도다.”하고, 목검으로 몇 번을 휘두르고는 방장실(方丈室)로 돌아갔다.
이렇게 12년 간을 법문하고 제접(提接)하시다가 어느 날 칼을 치워버렸다.
그런 후에 어떤 스님이 묻되,
“12년 전에는 어찌해서 마구니를 항복시켰습니까?”하니 기림 선사가 답하기를,

 적불타빈아가(賊不打貧兒家)니라.
 도적은 가난한 집을 훔치지 아니한다.

스님이 말하기를,
“그러면 12년 후에는 어찌해서 마구니를 항복시키지 않으셨습니까?하니

 적불타빈아가(賊不打貧兒家)니라.
 도적은 가난한 집을 훔치지 아니한다.하셨다.

시회대중(時會大衆)아!
저 묻는 스님을 알겠느냐?

 소아감철주(小兒撼鐵柱)로다.
 어린 아이가 철주를 흔듦이로다.

기림 선사를 알겠느냐?

 신수념래일일친(信手拈來一一親)
 기림검하진범성(祇林劍下盡凡聖)
 적적(賊賊)

 능숙하게 잡아 옴에 일일이 친함이요
 기림 검 아래 범부와 성인이 흔적없으니
 도적 도적이로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병자년(1996) 사월 초하루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32. 석공(石鞏)의 살활전(殺活箭)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되,

 좌선하는 가운데 한결같으면, 행선(行禪) 중에도 일여(一如)하여,
 어묵동정(語黙動靜)에 한결같이 할지어다.
 이와 같이 정진한다면 한 생각 지속됨이 만년토록 한결같을지니,
 이렇게 참구함으로써 참된 의심이 돈발되어 크게 쉬어가는 땅에 이를 것이니라.

예전에 마조 선사 주암시(住庵時)에 혜장(慧藏) 선사가 있었는데, 석공 혜장(石鞏慧藏)* 선사가 사냥꾼으로 있을 때에 사슴을 쫓다가 마조 선사 계시는 암자 앞을 지나다가 묻되,
“사슴 지나가는 것을 혹시 보셨습니까?”하였다. 그래서 마조 선사가 도리어 물었다.
“그대는 무엇 하는 사람이오?”
“저는 사냥꾼입니다.”하니,
“그러면 그대는 활을 쏠 줄 아는가?”
“예, 압니다.”하니, 마조 선사가
“화살 하나로 몇 마리나 잡는가?”
“화살 하나로 한 마리씩 잡습니다.”하니, 마조 선사가
“그렇다면 그대는 활을 쏠 줄 모르는구나.”하시니, 석공이
“화상(和尙)께선 화살 하나로 몇 마리나 잡을 수 있습니까?”하니,
“나는 화살 하나로 한 무리를 쏜다.”하시니, 석공이
“피차(彼此)가 서로 생명을 가졌거늘, 어찌 잔인하게도 한 무리씩이나 잡습니까?”
마조 선사가 말하기를,
“네가 이미 그러할진댄 어째서 스스로 쏘지 못하는고?”
이에 석공이 말하기를,
“저로 하여금 스스로 쏘라 하시지만 바로 쏠 곳이 없습니다.”
마조 선사가 다시 말씀하시되,
“이 사람의 여러 겁에 쌓인 무명(無明)이 오늘에야 활짝 벗어지는구나.”하고는 바로 삭발을 하고 암자에 있으면서 마조 선사를 시봉했다.

그런 후에 세월이 흘러 회상(會上)을 열어 삼십 년 동안 설법을 했는데 상당하여서는 항상 활[弓]을 당기고는 이어 할(喝)을 하고 말하되,
“대중들은 이 화살을 봐라.”
이와 같이 삼십 년을 똑같이 이 법문만 하셨는데, 하루는 삼평(三平)* 스님이 듣고, 법상 앞에서 일어나서 문득 앞가슴을 열어 제치니, 석공 선사가 이내 활을 놓아버렸다.
이에 삼평 스님이 말하기를,
“이것은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화살[殺人箭]이거니와 어떤 것이 사람을 살리는 화살[活人箭]입니까?”하니, 석공 선사가 화살 시위를 세 번 튕겼다.
삼평 스님이 절을 하니, 석공 선사가 말하기를,
“삼십 년 동안 활 하나로 두 화살을 쏘았는데, 오늘에야 겨우 반 개 성인(聖人)을 쏘아 얻음으로다.”

삼평 스님이 하루는 태전(太顚)* 선사를 방문하여서 석공 선사와의 문답처(問答處)를 말씀드리니, 태전 선사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미 사람을 살리는 화살일진댄 어찌 활시위 위에서 밝히느냐?”하셨다.

예부터 진리의 문답처는 진리의 눈이 열린 성인들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필경에 석공 선사와 삼평 선사를 알겠는가?

양구(良久)하신 후 이르시기를,

 비바시불조류심(毘婆尸佛早留心)이나
 즉지여금부득묘(卽至如今不得妙)로다.

 과거 비바시불이 일찍이 이 법에 마음을 머묾이나
 오늘에 이르도록 묘한 이치를 얻지 못함이로다.

주장자를 한 번 치시고 법상에서 내려오시다.

병자년(1996) 하안거 해제법어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33. 여래어(如來語)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살인도(殺人刀), 활인검(活人劍)은 예로부터의 가풍(家風)이요,
 또한 때의 사람들의 추요(樞要:가장 중요함)로다.
 진리의 살활검(殺活劍)을 자재하게 쓰면
 종사(宗師)의 수완을 갖추어서 문득 가히 자유자재하여
 줄탁지기(啐啄之機)*를 폄으로써 인천(人天)의 안목을 열어감이로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옴이런고?

하루는 복주(福州) 장경 혜릉(長慶慧稜)* 선사가 말하되,
“차라리 아라한(阿羅漢)에게 삼독(三毒)이 있다고 말할지언정 여래(如來)에게 이종어(二種語)*가 있다고 말하지 말 것이며, 여래가 말이 없다고도 말하지 말라. 다못 이종어가 없을 뿐이니라.”하니, 보복(報復) 스님이 말하되,
“어떤 것이 여래의 말인가?”함에, 장경 선사가 대답하되,
“귀먹은 사람이 어찌 들을 수 있으리오.”하였다. 보복 스님이 다시 말하되,
“그대가 제 이(二)의 문턱에서 말하는 줄 짐작은 했었느니라.”하니, 선사가 말하되,
“어떤 것이 여래의 말인가?”함에
“차나 마시라.”하였다.

이에 산승이 묻노니,

대중아!
양(兩) 대선사(大禪師)의 문답처를 보라!

 용호상박(龍虎相搏)하니
 난형난제(難兄難弟)로다.

 용과 호랑이가 서로 싸움에
 형 되기도 어렵고 아우 되기도 어렵도다.

자세히 점검컨댄 양대 선지식이 여래어는 꿈에도 보지 못함이로다.

양구(良久)하신 후 이르시되,

 할려축대과서천(瞎驢逐隊過西天)하고
 흘료두삼천리(吃嘹頭三千里)로다.

 눈 먼 나귀는 무리를 쫓아 서천을 지나가고
 혀를 놀려 지껄임도 삼천 리 밖이로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팔월 초하루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34. 장사(長沙) 선사의 유산(遊山)

 삼천찰해로차신(三千刹海露此身)
 의생정동견소친(疑生情動見疎親)
 부산항포무역다(釜山港浦貿易多)
 시민일상족사린(市民日常足四隣)

 삼천대천세계에 이 몸을 나툰지라.
 의심을 내고 정(情)을 움직이면 성글고 친함을 보리라.
 부산항에 무역이 많아서
 일상생활이 이웃과 함께 만족하리라.

 심청정시불(心淸淨是佛)
 심광명시법(心光明是法)
 심처처무애정광시도(心處處無礙淨光是道)
 삼즉일(三卽一)
 개공이무실유(皆空而無實有)
 여진정도인(如眞正道人)
 념념심불간단(念念心不間斷)

 마음이 청정하면 이것이 부처요,
 마음의 밝은 빛 이것이 법이요,
 마음이 처처에 걸림이 없는 깨끗한 빛 이것이 도(道)니라.
 삼[삼:불,법,도]이 곧 하나이니,
 다 공(공)해서 실로 있음이 없음이라.
 진정한 도인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마음에 간단(間斷)이 없음이라.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一歸何處)오?
 만법은 필경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이 화두를 생활 속에 밝고 깨끗하게 챙겨서 한 생각[一念]이 흐르는 물과 같이 지속되어서 밤낮을 모르고 지내는 가운데 문득 삼매(三昧)에 들 것 같으면 홀연히 해결될 터이니, 노력하고 또 노력하라.

예전에 장사(長沙) 선사가 산을 돌고 와서 문 앞에 이르니 수좌(首座)가 묻되,
“화상(和尙)께선 어디를 다녀오십니까?”하니, 화상이
“산을 돌고 온다.”
수좌가 다시 묻되,
“어디까지 갔다가 오십니까?”하니, 장사 선사가 말하되,
“처음에는 고운 풀밭을 따라 나섰다가 나중에는 낙화(落花)를 따라 돌아왔느니라.”하셨다. 이에 수좌가,
“마치 봄소식 같습니다.”하니, 화상이 말하되,
“가을 이슬이 연꽃 위에 떨어지는 것보다 나으리라.”하셨다.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장사 선사를 알겠는가?

 방초낙화무한의(芳草落花無限意)
 유산소식부여수(遊山消息付與誰)

 부드러운 풀, 떨어지는 꽃 다함없는 뜻이여!
 유산 소식(遊山消息)을 누구에게 부칠꼬?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병자년(1996) 동안거 해제법문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35. 보화(普化) 존자의 시성 시범(是聖是凡)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한 번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선재처처봉미륵(善財處處逢彌勒)
 탄지작성루각개(彈指作聲樓閣開)
 삼라대천출방촌(森羅大千出方寸)
 조중지허정중동(照中之虛靜中動)
 납승분상상상공(衲僧分上常相共)
 목전편시장안로(目前便是長安路)
 만리평전무촌초(萬里平田無寸草)
 무촌초혜초심장(無寸草兮草深長)

 선재 동자가 처처에 미륵을 만나서
 손가락 튕기는 소리에 누각이 열림이로다.
 삼라 대천이 방촌(方寸)에서 나오고
 비치는 가운데 비움이요 고요한 가운데 움직임이로다.
 납승의 분상에는 항상 서로 같이 함이니
 목전이 문득 장안의 길이로다.
 만 리나 되는 평전에 작은 풀 한 포기 없으니
 작은 풀 한포기도 없음이여, 풀이 무성함이로다.

석일(昔日)에 보화 존자(普化尊者)*가 임제(臨濟) 선사 계시는 절에 재(齋)가 있어서 갔더니, 때마침 하양(河陽) 스님과 목탑(木塔) 스님이 임제 선사와 승당(僧堂) 내에 같이 앉아서 말하기를,
“요즈음, 보화 존자가 매일 거리를 헤매이며 미치광이 짓을 하니, 그가 범부(凡夫)냐, 성인(聖人)이냐?”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보화 존자가 밖에서 돌아와서 불쑥 말하기를,
“너희들 한번 일러봐라. 내가 범부인가, 성인인가?”하니, 임제 선사가 문득 할(喝)을 했다.
보화 존자가 두 스님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하양은 신부(新婦)와 같고 목탑(木塔)은 노파선(老婆禪)이라. 임제는 작은 아이[小廝兒]로서 다만 한쪽 눈을 갖추었구나.”하였다.
임제 선사가 말하되,
“이 도적놈아!”하니, 보화 존자가
“도적 도적이라.”하고 문득 나가버렸다.

대중은 저 임제 선사와 보화 존자를 알겠는가?

 상봉양회가(相逢兩會家)
 타고농비파(打鼓弄琵琶)
 개중수시적(個中誰是的)
 백마입노화(白馬入蘆花)

 두 작자가 서로 만나서
 북을 치고 비파를 뜯음이라.
 그 중에 누가 긴요한고?
 백마가 흰 갈대꽃에 듦이로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병자년(1996) 구월 초하루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36. 불진법신(佛眞法身)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한 번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되,

 심심처세세행(深深處細細行)
 은은시밀밀처(隱隱時密密覷)
 약능임마철근철원(若能恁麽徹根徹源)
 방참회호완전허현(旁參回互完轉虛玄)
 불촉존귀구리명종(不觸尊貴句裏明宗)
 종중변적(宗中辨的)
 습마인(什麽人) 임마래(恁麽來)

 깊고 깊은 곳에 자세히 행하고
 은은한 때에 밀밀히 볼지니라.
 만약 능히 이렇게 근원을 사무치고 사무치면
 널리 참례하고 회호하며, 완전히 허현을 굴리어
 존귀함에 촉하지 아니하며 글귀 속에 종지를 밝히고
 종중에 밝고 밝은 이치를 가릴지니라.
 어떤 사람이 이렇게 오는고?

예전에 동산 양개(洞山良价)* 화상의 법을 이어받은 조산 탐장 본적(曹山耽章本寂)* 선사가 있었는데, 하루는 조산 선사가 덕 상좌(德上座)에게 묻되,
“부처님의 참 법신(法身)은 허공과 같아서 물건에 응하여 형상이 나타나기를 마치 물 속에 달과 같다 하니, 어떤 것이 물건에 응하여 나타나는 도리인가 한번 말해보게.”
덕 상좌가 답하기를,

 여려처정(如驢覰井)이라.
 나귀가 우물을 엿보는 것 같습니다.
하였다.
조산 선사가 다시 말하되,
“이르기는 재빨리 일렀으되, 겨우 팔 부(八部)만 일렀도다.”하니, 덕 상좌가
“화상은 어떠함이닛고?”함에, 조산 선사가

 여정처려(如井覰驢)니라.
 우물이 나귀를 엿보느니라.
하였다.

대중은 두 분의 문답처를 잘 보라.
세밀하게 문답을 잘 함이로다.

‘부처님의 참 법신[眞法身]은 오히려 허공과 같되, 물(物)에 응하여 형상을 나투는 것이 물 가운데 달과 같다 하니, 어떻게 생각하는고?’ 함에 한 사람은
‘나귀가 우물을 엿보는 것 같다.’하고 한 사람은, ‘우물이 나귀를 엿보느니라.’ 하니,
두 분의 문답처를 자세히 보건댄, 온전하게 십 부(十部)를 이르지 못함이로다.

만약 산승에게 묻는다면,

 풍취수지자동(風吹樹枝自動)
 바람이 불매 나뭇가지가 스스로 움직임이라.
하리라.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하안거 결제 중 오월 초하루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37. 앙산(仰山)의 마설(魔說)

법상에 오르시어 묵연히 앉아 계시다가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순수사선유자가(順水使船猶自可)
 역풍파이세간희(逆風把柂世間稀)
 수연호개담판한(雖然好箇擔板漢)
 도두미면낙편의(到頭未免落便宜)

 흐르는 물에 배를 띄움은 오히려 쉽거니와
 바람을 거슬러 배의 키를 잡는 것은 세간에서는 드물도다.
 비록 능숙한 담판한이나
 마침내 편의에 떨어짐을 면치 못함이로다.

예전에 위산(潙山) 선사가 앙산(仰山) 스님에게 묻기를,
“부처님께서 설하신 열반경 사십 권 중에 얼마만큼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며, 얼마만큼이 마구니가 설한 것인고?”
앙산 스님이 답하기를,
“다 마구니가 설한 것입니다.”
위산 선사가 말하기를,
“이후의 사람들이 그대를 어찌하지 못하리라.”
앙산 스님이 말하기를,
“모갑(某甲)이 한번 기약하는 일이거니와 행리(行履)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위산 선사가 말하기를,
“다못 그대의 눈 밝은 것을 귀히 여김이요, 그 자(者)의 행리는 말하지 않노라.”

시회대중(時會大衆)아!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무렵에 설하신 열반경 법문이어니 어째서 앙산 스님이 마설(魔說)이라 하였는고?

여기에서 분명히 알아갈 것 같으면 일가견(一家見)을 갖추어서 홀로 단소(丹霄)에 걸음 하거니와 그러하지 못할진댄 죽음에 다다라 염라대왕이 너를 그냥 두지 아니하리라.

필경에 앙산 스님이 말한, ‘부처님께서 설하신 열반경 사십 권이 마설이라’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고?

 앙산 스님의 안목이 옛적에도 빛나고 지금도 빛남이나
 자세히 점검건댄 삼십 방을 면치 못하리라.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이월 초하루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38. 만리무촌초거(萬里無寸草去)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한 번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묘약하증과구(妙藥何曾過口)
 신의막능착수(神醫莫能捉手)
 약존야거본비무(若存也渠本非無)
 지허야거본비유(至虛也渠本非有)
 불멸이생(不滅而生)
 불망이수(不亡而壽)
 전초위음지전(全超威音之前)
 독보공겁지후(獨步空劫之後)
 위평야천개지경(威平也天蓋地擎)
 운전야오비토주(運轉也烏飛兎走)

 묘약(妙藥)이 어찌 일찍이 입을 지나가며
 신의(神醫)는 능히 손을 잡지 아니함이로다.
 있다고 해도 저가 본래 없지 아니함이요,
 지극히 비었으나 저가 본래 있지 아니한지라.
 멸하지 아니한 생이며,
 없어지지 않은 수명이라.
 온전히 위음왕불(威音王佛) 이전을 뛰고
 홀로 공겁(空劫) 뒤를 걸음한지라.
 평평함을 이룸에 하늘을 덮고, 땅을 떠받치고
 운행(運行) 변전(變轉)함에 까마귀는 날고 토끼는 달리도다.

어언간 반살림이 도래했도다.
각자 참구하는 화두를 성성하게 잡아 일으키어 일념(一念)이 백일 천일이 지속되게끔 노력하고 노력하라. 만약 금생에 판단하지 못하면 어느 생에 견성대오(見性大悟)하리오. 금일은 있음이나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도다. 일체 시비장단(是非長短)을 다 놓아버리고 이 일을 밝힐지니라.

예전에 동산(洞山) 양개(良价) 선사가 있었는데, 하루는 시중(示衆)하되,
“형제들이여, 가을 첫 머리, 여름 끝에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되 곧장 만 리에 한 치의 풀도 없는 곳을 향해 가야 옳다.”하였다. 또 말하되,
“그 만 리에 한 치의 풀도 없는 곳을 어떻게 가는가?”
나중에 어떤 이가 석상(石霜)* 선사에게 이야기했더니, 석상 선사가 말하되,
“문을 나서면 곧 바로 풀이로다.”하였다.
동산 양개 선사가 이 말을 전해 듣고 말하기를,
“당나라 안에 이러한 안목을 갖춘 이가 능이 몇이나 될까?”하였다.

대중아!
한 사람은 ‘만 리에 한 치의 풀도 없는 곳으로 가라’ 하고, 또 한 사람은 ‘문을 나서면 곧 바로 풀이로다’ 하니, 산승이 점검컨댄 두 선사가 풀 속을 행함을 면치 못하도다.

필경에 어떠한고?

 무사중야무사(無事中也無事)로다.
 일없는 가운데 또한 일 없음이로다.

정축년(1997) 하안거 반살림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39. 현자(蜆子) 화상의 신전주대반(神前酒臺盤)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도태부전천자령(道泰不傳天子令)이요
 시인진창태평가(時人盡唱太平歌)로다.

 도가 큼에 천자의 영을 전하지 아니함이요,
 때 사람이 모두 태평가를 부르도다.

모든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수행으로 생활화하면 몸과 마음이 평안하고 마음 가운데 번민과 갈등이 없어져서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
가령, 수행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얼굴 앞에 모양 없는 참사람이 있어서 출입 자재(出入自在)를 하는데 어떤 것이 형상 없는 참사람인고?’ 의심하여 일념이 지속토록 노력하라.
마음 가운데 일체 번민과 갈등이 쉬어지고 간절한 일념이 지속되면 맑은 마음이 되고 서서히 자리가 잡힐 것이니 조급한 마음을 내지 말지어다.

예전에 동산(洞山) 선사의 법제자 중에 현자(蜆子) 화상이 있었는데, 현자 화상은 동산 선사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은 후 의발(衣鉢)을 던져버리고 일정한 장소 없이 살면서 계울을 지키지 않고 날마다 강가에서 새우와 조개를 잡아 끼니를 삼고 밤에는 백마묘(白馬廟) 안의 종이 돈[紙錢] 속에 묻혀 잤다.
화엄 휴정(華嚴休靜)* 선사가 이 말을 듣고 현자 화상을 찾아오니 현자 화상이 없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밤이 늦어 돌아오기에 가만히 있다가 캄캄한 가운데에서 현자 화상의 허리를 껴안고 묻되,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하니,

 신전주대반(神前酒臺盤)이라.
 신 앞의 술 소반이니라.하다.
현자 화상의 답에 화엄 선사가 감탄하여, ‘동산 선사의 법제자 중에 이러한 고준(高峻)한 안목을 가진 이가 있다니!’ 하고 예배하고 돌아갔다.
그러면 불법의 도란 어떤 것이기에 의발을 던져버리고 은거(隱居) 생활을 하니 불가사의(不可思議)로다.

이에 산승이 묻겠는데, 대중은 현자 화상을 알겠는가?

 삼세제불몽리한(三世諸佛夢裏漢)
 불전계전구시천(佛殿階前狗屎天)
 사해오호구도자(四海五湖求道者)
 끽냉수우휴망상(喫冷水盂休妄想)
 세상최가인위수(世上最佳人爲誰)
 신전주대반도자(神前酒臺盤道者)

 삼세제불은 꿈속의 사람이요
 불전 뜰 앞에는 개들이 똥누는 곳이라.
 사해와 오호에 도를 구하는 자여!
 냉수나 한 그릇 마시고 망상을 쉬어라.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이 누구겠는가?
 ‘신전주대반’이라 이르는 자니라.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하안거 해제일
동화사 금당선원


40. 용아(龍牙)의 선판(禪板)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타고간래군불견(打鼓看來君不見)
 백화쟁발위수개(百花爭發爲誰開)
 막연굉기진천뢰(莫然轟起振天雷)
 백초두두춘색회(百草頭頭春色回)

 북을 쳐서 와서 보게 하나 그대가 보지 못함이라.
 일백 가지 꽃이 다투어 핌이 누구를 위함인고?
 막연히 하늘에서 우뢰를 쳐 굉음을 일으키니
 일백 가지 풀마다 봄빛이 완연하도다.

하루는 용아산(龍牙山) 거둔(居遁) 선사가 처음 취미(翠微) 선사를 참예하여 묻되,
“어떤 것이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하니, 취미 선사가 대답하되,
“선판(禪板)을 나에게 가져오너라.”하였다. 용아(龍牙) 선사가 선판을 가져와 취미 선사에게 주니, 취미 선사가 잡아서 문득 때리거늘, 용아 선사가 말하기를,
“때리기는 마음대로 때리나, 아직 조사의 뜻은 없도다.”하였다.
또, 임제(臨濟) 선사 처소에 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하니, 임제 선사가
“나에게 저 포단(蒲團)을 가져오너라.”하거늘, 용아 선사가 포단을 가져와 임제 선사에게 주자, 임제 선사가 받아서 때리니 용아 선사가 말하되,
“때리기는 마음대로 때리나, 아직 조사의 뜻은 없도다.”하였다.
후에 용아 선사가 절의 주지(住持)가 되어 회상(會上)을 연 때에, 어느 수좌가 있어 묻기를,
“화상(和尙)이 행각(行脚)할 때에 취미 선사와 임제 선사에게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물으셨다는데, 두 분의 선사가 도안(道眼)이 밝던가요?”하니, 용아 선사가 말하기를,
“도안이 밝기는 하나, 아직 조사의 뜻은 없음이로다.”하였다.
이에 설두(雪竇) 선사가 송(頌)하기를,

 용아산리용무안(龍牙山裏龍無眼)
 사수하증진고풍(死水何曾振古風)
 선판포단불능용(禪板蒲團不能用)
 지응분부여노공(只應分付與盧公)

 용아산의 용이 눈이 없나니
 죽은 물에서 어찌 옛 가풍을 떨칠쏘냐?
 선판, 포단을 능히 쓰지 못하니
 다만 노공(盧公, 설두 자신)에게나 주어야 하리.

대중아!
설두 선사는 다못 그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하도다. 가사(假使) 선판, 포단으로 정령(正令)을 행하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들 쓸 곳이 없음이라.
산승(山僧)이 삼 개, 사 개 한(漢)을 자세히 점검컨댄,

 조사의(祖師意)가 없음이로다.

필경에 어떠한고?

주장자를 던지신 후,

 간간(看看)하라!
 보고 보아라!

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하안거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41. 무위진인(無位眞人)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응현종횡총불휴(應現縱橫總不虧)
 동용시위수부득(動用施爲收不得)
 활발발흑효효(活鱍鱍黑洨洨)
 차문시인지부지(且問時人知不知)
 부지직대문미륵(不知直待問彌勒)

 종횡으로 응현함에 모두 다 이지러지지 아니함이라
 동용에 베풀어도 거두어 얻지 못함이로다.
 활발발하고 빠르고 날쌘지라
 때에 사람에게 묻노니, 아느냐? 알지 못하느냐?
 알지 못하거든 기다려 미륵보살에게 물어라.

임제 선사가 하루는 대중에게 말하시기를,
“한 형상 없는 참사람[無位眞人]이 있어서 항상 여러분들의 얼굴 문으로 드나든다. 증거를 잡지 못한 이는 살펴보라.”하니, 어떤 수좌가 나서서 묻기를,
“어떤 것이 형상 없는 참사람입니까?”하였다. 이에 선사가 선상(禪床)에서 내려와 멱살을 잡고 말하되,
“일러라. 일러라!”하니, 그 수좌가 망설이거늘, 임제 선사가 멱살을 놓고 이르시기를,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무엇이냐? 마른 똥막대기[乾屎橛]니라.”

임제 선사는, 수좌가 형상 없는 참사람을 묻는데 멱살을 잡고, 천장(天章) 선사는 문득 때리니 대중은 두 큰 선사를 알겠는가?

두 선사의 용처(用處)가 좋은즉 아주 좋음이요, 아름다운즉 아름다우나,
자세히 점검컨댄, 멀고 멀도다.

필경에 여하(如何)오?

 타녀이귀소한거(奼女而歸霄漢去)
 애랑유재수공방(獃郞猶在守空房)

 아리따운 처녀는 하늘나라로 갔거늘
 어리석은 총각은 빈 방만 지키도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3월 18일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42. 위산(潙山)의 체(體)와 용(用)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설상재반자연춘(雪霜才泮自然春)
 상봉진도군행조(相逢盡道君行早)
 수지갱유야행인(誰知更有夜行人)
 야행인혜(夜行人兮)
 거년빈혜미시빈(去年貧兮未是貧)

 눈서리 얼음이 녹으니 자연히 봄인지라.
 서로 만나 말하기를 그대가 일찍이 행한다 하나
 누가 다시 밤에 행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알리오.
 밤에 행하는 사람이여!
 지난해에 가난한 것은 이 가난함이 아니로다.

예전에 위산(潙山) 선사와 앙산(仰山) 스님이 있었는데, 어느 날 위산 선사가 앙산 스님과 더불어 찻잎을 딸 때에, 위산 선사가 말하기를,
“종일 찻잎을 따고 있으나, 그대의 소리만 들리고 그대의 형상은 보이지를 않는구나.”
앙산 스님이 차나무를 흔들거늘, 위산 선사가
“그대가 용(用)을 얻고 체(體)를 얻지 못함이로다.”하니, 앙산 스님이 말하기를,
“살피지 못합니다만, 화상께서는 어떠합니까?”
위산 선사가 양구(良久)하니, 앙산 스님이 말하기를,
“화상께서는 체(體)를 얻고 그 용(用)은 얻지 못했습니다.”하니, 위산 선사가 말하기를,
“그대에게 삽십 방(棒)을 때리노라.”하였다. 이에 앙산 스님이 말하기를,
“화상의 방(棒)은 모갑(某甲)이 맞거니와 모갑의 방(棒)은 누가 맞아야 됩니까?”하니, 위산 선사가
“그대에게 삼십 방을 때리노라.”하셨다.

이에 산승이 묻노니,
시회대중은 위산, 앙산 두 부자(父子)를 알겠는가?

 막위위산부자체용가풍(莫謂潙山父子體用家風)
 타가증답상두관(他家曾踏上頭關)

 위산 부자의 체(體)와 용(用)의 가풍이라 이르지 말라.
 타가(他家)가 일찍이 상두관(上頭關)을 밟았음이로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봄 산철 결제 법어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43. 임제, 보화의 공양청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한번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전천홍일벽파심(箭穿紅日碧波心)
 부동기륜유락초(不動機輪猶落草)
 포끽반혜화의도(飽喫飯兮和依倒)
 대면청담종부도(對面淸談終不道)
 봉하활개금강안(棒下豁開金剛眼)
 불허야행투명도(不許夜行投明到)

 화살이 푸른 파도 속 깊숙이 붉은 태양을 뚫으나,
 기륜(機輪)을 움직이지 않더라도 오히려 초초(草草)에 떨어지도다.
 밥을 배불리 먹고 옷을 차려 입고 거꾸러지니,
 얼굴을 맞대고 청담(淸談)을 나누나 마침내 이르지 못하도다.
 방하(棒下)에 금강안(金剛眼)이 활짝 열림이나
 밤에 행하는 것은 허락지 아니함이요 밝거든 이를지니라.

석일(昔日)에 보화 존자(普化尊者)가 임제(臨濟) 선사와 같이 시주 집에 공양청(供養請)이 있어서 갔는데, 임제선사가

 모탄거해(毛呑巨海)
 개납수미(芥納須彌)

 한 터럭이 큰 바다를 삼키고
 겨자 속에 수미산이 들어감이라.
하니, “이것이 신통묘용(神通妙用)인가, 이 법이 또한 그러한가?”하고 물으니, 보화 존자가 차려놓은 공양상을 발로 차서 엎거늘, 임제 선사가 말하기를,
“매우 머트럽구나!”하니, 보화 존자가 말하기를,
“이 속에 무엇이 있길래 머트러움[麁]을 말하고 세밀함[細]을 말하는고?”하니, 임제 선사가 쉬었다.
다음 날, 또 다른 집에 공양청이 있어서 같이 갔는데, 임제 선사가 말하기를,
“금일 공양이 어찌 어제와 같으리오.”하니, 보화 존자가 또 한 번 밥상을 걷어차거늘, 임제 선사가 말하기를,
“크게 머트럽구나.”하니, 보화 존자가 말하기를,
“눈 먼 놈아! 불법에 무슨 추(麁)와 세(細)를 말하는고?”하니, 임제 선사가 쉬었다.

대중아!

 양개악적상봉(兩介惡賊相逢)이
 여수입수(如水入水)요
 여금박금(如金博金)이나
 향관만리(鄕關萬里)로다.

 두 분의 악한 도적이 서로 만남은
 물이 물에 들어가는 것 같고
 금에다 금을 입히는 것 같으나
 자세히 점검컨댄, 고향이 만 리나 멀도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2월 18일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44. 대수(大隨)의 수타거(隨他去)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취중권잔증혼미(醉中勸盞增昏昧)
 금상첨화난자홍(錦上添花亂紫紅)
 수모약무하작안(水母若無蝦作眼)
 수류하처인동서(隨流何處認東西)

 술에 취한 가운데 술을 권함은 혼매(昏昧)만 더함이요,
 비단 위에 꽃을 더함은 어지러히 붉고 붉은지라.
 수모(水母)*가 새우의 눈을 갖지 않으면
 흐름을 따라 어느 곳이 동서(東西)인줄 알리오.

부처님께서 설법하시기를,
“겁화통연(劫火洞然)에 대천(大千)이 구괴(俱壞)나-겁화가 활활 타서 대천세계가 다 무너짐이나-, 한 물건은 길이 신령하여 무너지지 아니한다.”하셨다.
이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 남쪽에 기거하는 스님이 북방에 대선지식이 계신다는 말을 듣고, 대수 법진(大隨法眞)* 선사를 찾아가서 묻기를,
“‘겁화(劫火)가 활활 탐에 대천세계가 다 무너짐이라.’하니 살피지 못합니다. 자개(這箇)도 도리어 무너집니까? 무너지지 않습니까?”하니, 대수 선사가
“무너지느니라.”라고 답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대수 선사께서 ‘무너진다’ 하니 다시 만 리를 걸어와서 남방의 수산(修山)* 선사를 찾아가 묻기를,
“‘겁화가 활활 탐에 대천세계가 무너진다’ 하니 자개도 무너집니까? 아니 무너집니까?”하니, 수산 선사가 답하기를,
“무너지지 않는다.”하셨다.
또 다시 대수 선사를 찾아 몇 년이 걸려서 만 리나 찾아 가니 대수 선사가 열반에 드신 후였다.
부처님께서는 ‘대천이 다 무너져도 이 한 물건은 무너지지 않는다’ 했는데, 어째서 대수 선사는 ‘무너진다’ 했는가에 의심이 사무쳐 참구하다가 도를 깨쳐 대수 선사의 법을 전해 받았다.

그러면 시회대중아!

대수 선사의 ‘무너진다[壞]’가 옳으냐?
수산 선사의 ‘무너지지 않는다[不壞]’가 옳으냐?

 장장만리역왕반(長長萬里亦往返)
 위법망구기기인(爲法忘軀幾幾人)
 대천괴불괴차치(大千壞不壞且置)
 지자개(只這箇)
 환회마(還會麽)?

 장장 만 리를 또한 되돌아가니
 법을 위해 몸을 잊은 이는 몇몇이던고?
 대천세계가 무너지고 무너지지 않고는 그만 두고
 또한 이것을 아느냐? 마느냐?

주장자를 던지시고,

 간간(看看)하라.
 대중은 보고 보라.
하시고 하좌하시다.

임신년(1992) 2월 지장재일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45. 위산(潙山)의 노자우(老牸牛)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대포사계비위유(大包沙界非爲有)
 세입미진기시무(細入微塵豈是無)
 석년영조친투휴(昔年靈照親携處)
 명월청풍편오호(明月淸風徧五湖)

 크게는 사계(沙界)를 포용함이나 있음이 되지 아니함이요,
 가늘기는 티끌 속에 들어가나 어찌 이 없으리오.
 옛적에 영조(靈照)*가 친히 잡은 곳에
 밝은 달 맑은 바람 오호(五湖)에 두루함이로다.

예전에 위산 선사가 유 철마(劉鐵磨)* 비구니가 오는 것을 보고 말하되,
“늙은 암소야, 네가 왔는가?”하니, 철마가 말하되
“내일 오대산에 큰 재(齋)가 있는데 화상께서도 가시겠습니까?”하였다.
위산 선사가 몸을 벌렁 드러누우니, 유 철마는 문득 나가버렸다.

위산 선사는 천 오백인의 선지식이라
만인을 대해서 응기응변(應機應變)의 선지(禪旨)로써
궁(窮)한즉 통(通)하고 통즉변(通則變)의 수완을 갖추어서
인천(人天)의 안목을 열었도다.

이에 산승이 묻노니,
위산 선사와 철마 비구니를 알겠는가?

양구(良久) 하신 후 이르시되,

 방거수래득자유(放去收來得自由)
 천상인간무등필(天上人間無等匹)

 놓아가고 거두어 옴에 자유로우니
 천상 인간에 같이 짝할 이가 없도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6월 18일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46. 동산(洞山)의 한명(閑名)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목인석녀공환호(木人石女共歡呼)
 신수념래용흡호(信手拈來用恰好)
 청산무진의무궁(靑山無盡意無窮)
 하수갱멱래시도(何須更覓來時道)

 목인 석녀가 같이 환호하여
 신수로 잡아옴에 씀이 만족함이로다.
 청산도 다함이 없고 뜻도 다함이 없거늘
 어찌 다시 내시의 도를 찾으리오.

동산(洞山) 선사가 입적할 때 대중에게 이르되,
“나에게 부질없는 이름이 세상에 남았으니, 누가 나를 위해 그 부질없는 이름을 없앨꼬?”하니, 대중이 아무도 대답이 없거늘 때마침 시자가 있다가 말하되,
“화상(和尙)에게 법호(法號)를 청하나이다.”함에 선사가 말하되,
“나의 부질없는 이름이 이미 사라졌도다.”하였다.

대중아!

동산 선사 명성이 사해 오호에 충만하고
그 고준한 기봉이 여탈수방자재해 무수의 제자를 배출함이라.
그 후에 조동종(曹洞宗)을 세움이라.
동산(洞山)은 대선사이어니 어째서
‘나의 한명(閑名)의 제거(除去)’를 청함인고?

동산 선사는

 가지례야(可知禮也)로다.
 가히 예를 아는 분이로다.

 법법본무명(法法本無名)
 나리하유명(那裏何有名)
 작일임마래(昨日恁麽來)
 금일임마거(今日恁麽去)
 거래도방하(去來都放下)
 월락천시과(月落穿市過)

 법법(法法)이 본래 이름이 없거늘
 이 속에 어찌 이름이 있을까보냐.
 어젯날에 이렇게 옴이나
 금일에 이렇게 가도다.
 거래(去來)를 다 놓으니
 달이 떨어짐에 저자를 꿰어 지나감이로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유월 초하루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47. 황벽(黃蘗)의 주조(酒糟)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대중에게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목전갱시장안로(目前更是長安路)
 만리평전무촌초(萬里平田無寸草)
 심성축적수여마(尋聲逐迹數如麻)
 도두희부노산승(到頭辜負老山僧)

 눈 앞이 문득 이 장안로요
 만리 평전에 풀 한 포기 없도다.
 소리를 찾고 자취를 쫓음이 수가 삼[麻]과 같도다.
 마침내 노산승(老山僧)을 배반함이여!

예전에 황벽(黃檗)* 선사가 대중에게 보이기를,
“그대들은 모두가 술찌꺼기를 먹는 무리로다. 그렇게 행각해서 어찌 오늘이 있었겠는가? 큰 당(唐)나라 안에 선사가 없는 것을 알겠느냐?”하니 그때 어떤 수좌가 나서서 말하되,
“지금 제방(諸方)에서 대중을 거느리고 지도하는 이는 어찌합니까?”하였다. 이에 황벽 선사가 말하되,
“선법(禪法)이 없다고 한 것이 아니라, 다못 지도할 스승이 없느니라.”하였다.

황벽 선사의 이 말씀이 천이백여 년이 지난 지금 이때에 유달리 귀에 쟁쟁 사무침이라.

 사해오호(四海五湖)에 말만 쫓아 행하는 자여!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을 흉내만 내지 말고
 각자의 가슴 속 깊이 정액상 일구가 나와
 하늘을 덮고 땅을 덮어야사 비로소 옳다.
 지금 우리의 현실도 그 당시와 비교해 보면
 가히 슬프로 가히 통탄함이로다.
 선법(禪法)은 있어도 스승이 없도다.

만약 어떤 이가
“제방(諸方)에 회상(會上)을 열어 대중을 거느리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하고 산승에게 묻는다면,

 유노파선(有老婆禪)
 할각천하인안(瞎却天下人眼)

 노파선(老婆禪)만 있어서
 천하 사람의 눈을 멀게 하도다.

대중은 황벽 선사를 알겠는가?

양구(良久) 하신 후

 사자효후진일성(獅子哮吼振一聲)
 원근문자상담혼(遠近聞者喪膽魂)

 사자의 울부짖음 한번 진동하니
 멀리서 가까이서 듣는 자 간담이 서늘하여 혼을 잃었도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칠월 초하루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48. 암두(岩頭)의 말후구(末後句)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되,

 자개주장자(這箇拄杖子)는
 삼세불조명근(三世佛祖命根)이며
 열성겸추(列聖鉗鎚)라.
 환두이성(換斗移星)하고
 경천동지(驚天動地)로다.
 십마인(什麽人) 임마래(恁麽來)오?
 시거간(試擧看)하라.

 이 주장자는
 삼세불조의 생명의 뿌리이며
 열성의 불집게와 쇠망치라.
 북두를 잡아 별을 옮기고
 하늘이 놀라고 땅이 진동함이로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오는 것인고?
 시험에 드는 것을 보라.

예전에 설봉(雪峰) 선사가 주암시(住庵時)에 어떤 수좌 두 사람이 와서 예배하거늘, 설봉 선사가 보고 암자 문을 열고 나서서 말하되,

 시심마(是甚麽)오?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수좌도 역시 말하기를,
“이것이 무엇입니까?”함에, 설봉 선사가 고개를 숙이고 암자로 돌아갔다.
그 수좌가 나중에 암두(巖頭) 선사에게 갔더니, 암두 선사가
“어디에서 오는가?”하니,
“영남(嶺南)에서 옵니다.”
암두 선사가 묻되,
“설봉 선사를 보았느냐?”하니,
“설봉 선사의 처소를 다녀오는 길입니다.”
암두 선사가 다시,
“무어라 하던가?”함에, 한 수좌가 앞의 이야기를 했더니, 암두 선사가 묻되,
“달리 무어라 하던가?”
그 수좌가 대답하기를,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암자로 돌아갑디다.”하였다.
암두 선사가 말하기를,

 희(噫)라!
 슬프다!

“내가 애초에 저를 향해 말후구(末後句)를 일러주었던들 천하 사람이 설봉 노사를 어찌하지 못했으리라.”하였다.
그 수좌가 여름이 끝날 무렵에 다시 이 이야기를 들어 이익(이익)을 청하니 암두 선사가 말하되,
“왜 진작 묻지 않았는가?”
그 수좌가 대답하되,
“용이(容易)하지 못했습니다.”하니, 암두 선사가 말하기를,
나와 설봉은 비록 삶[生]은 같이 했으나 죽음은 같이 하지 못함이로다. 말후구를 알고자 할진댄,

 지저시(只這是)니라.
 다만 이것이니라.
하였다.

이 법은 천하 선지식들도 알기가 어렵다.

대중아!
산승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설봉, 암두 두 분의 살림살이를 점검해서 제방(諸方)에 일임하노라.

설봉 선사가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돌아간 것을 알겠는가?

 설봉(雪峰)은 득편의시(得便宜時)에 실편의(失便宜)로다.
 설봉 선사는 편의함을 얻은 때에 편의함을 잃었도다.

암두 선사를 알겠는가?

 암두 선사는 분명히 백염적(白拈賊)이로다.
 비록 그러하나 말후구는 일렀으되
 다만 팔 부 밖에 이르지 못함이로다.

어떻게 일러야만 십 부를 일러갈꼬?

양구(良久) 하신 후 이르시되,

 운재영두한불철(雲在嶺頭閑不撤)
 유수간하태망생(流水澗下太忙生)

 구름은 산마루에 한가로이 떠있는데
 흐르는 물은 개울 아래에서 유달리도 바쁘더라.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하안거 결제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49. 동산(洞山) 과자(菓子) 공양차(供養次)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되,

 정명거사가선현(淨名居士呵善現)
 금우화상감방노(金牛和尙勘龐老)
 피차불상요(彼此不相饒)
 준기무처토(峻機無處討)
 운행우시(雲行雨施)
 뇌분전소(雷奔電掃)
 호살호함(虎殺虎陷)
 출초입초(出草入草)
 시득야(始得也)

 정명 거사(淨名居士)*는 선현(善現)*을 꾸짖고
 금우(金牛)* 선사는 방 거사(龐居士)를 감험(勘驗)함이니
 피차가 서로 넉넉하지 못한지라
 준걸한 기틀을 토론할 곳이 없도다.
 구름을 움직여 비를 내림이요
 우뢰가 달리어 번개를 쓸도다.
 범을 잡아 함정에 빠뜨리려면
 풀에 나오고 풀에 들어가야만
 비로소 옳다.

어언가 반살림이라.
각자 참구하는 화두를 성성히 잡아 일념이 지속토록 노력하라.

예전에 동산(洞山) 선사가 태(泰) 수좌를 청해 묻되,
“한 물건이 있으니, 위로는 하늘을, 아래로는 땅을 받쳤다. 검기는 칠(漆)과 같고 밝기는 일월(日月) 같아서 항상 동용(動用) 가운데 있으나 동용 가운데 거두어 얻지 못한다 했으니 허물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 보라.”하니, 태 수좌가 말하되,
“허물이 동용 가운데 있습니다.”함에, 동산 선사가 문득 할(喝)을 하고 과자 상을 치우게 했다.

이에 산승이 묻겠는데,
대중아!
어떻게 일러야사 과자를 얻어먹을 수 있겠느냐?
대중이 답이 없으니 선사가 이르시되,

 저승(這僧)
 탐착일립미(貪著一粒米)
 실각반년량(失却半年糧)

 태 수좌는
 한 톨의 쌀을 탐하다가
 반 년의 양식을 잃어버림이라.

“한 물건이 있어 위로는 하늘을 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받친다. 검기는 칠(漆)과 같고 밝기는 일월(日月)과 같아서 동용(動用) 가운데 있으나 동용 가운데 거두어 얻지 못한다 하니 허물이 어디에 있는고?”라고 산승에게 물을 것 같으면,

시자야! 차나 한 잔 가져와서 동산 선사께 드려라.하리라.
어째서 그러냐?

 당단부단(當斷不斷)
 반초기란(返招其亂)

 끊어야함을 당하여 끊지 아니하면
 도리어 어지러움을 부르리라.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하안거 반살림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50. 삼성(三聖)의 불위인(不爲人)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제인법안장(諸人法眼藏)
 천성막능당(千聖莫能當)
 위군통일선(爲君通一線)
 광휘만대천(光暉滿大千)
 수미주입해(須彌走入海)
 유월봉엄상(六月逢嚴霜)

 모든 사람의 법안장은
 천성도 능히 당하지 못한지라.
 그대를 위해서 한 선을 통하나니
 광명이 대천세계에 가득찬지라.
 수미산이 달아나 바다에 들어가고
 유월에 된서리가 내림이로다.

어느 날 진주(鎭州)의 삼성 혜연(三聖慧然) 선사가 상당(上堂)하여 말하되,
“나는 사람을 만나면 곧 나가리니, 나가는 것이 곧 사람을 위하지 않는 것이니라.”하였다.
흥화(興化) 선사가 듣고 말하기를,
“나는 사람을 만나면 나가지 않나니, 나가는 것이 곧 사람을 위하는 것이니라.”하였다.

이에 내가 묻겠는데
대중아!
임제 선사 하에 두 분의 선사가 출세하여 임제 가풍을 천하에 선양했다.

 일인고봉정상좌(一人孤峰頂上坐)
 시운기운멸(視雲起雲滅)
 일인십자가두(一人十字街頭)
 회두토면거(灰頭土面去)

 한 사람은 고봉정상(孤峰頂上)에 앉아서
 구름이 일어나고 구름이 멸함을 보고
 한 사람은 십자가두(十字街頭)에서
 머리는 재요, 얼굴엔 흙먼지를 쓰고 감이로다.

 봉인즉출(逢人卽出)
 출즉불위인(出卽不爲人)
 시(是)아?
 봉인즉불출(逢人卽不出)
 출즉편위인(出卽便爲人)
 시(是)아?

 사람을 만남에 곧 나가리니
 나간즉 사람을 위하지 아니함이 옳으냐?
 사람을 만남에 곧 나가지 아니하리니,
 나간즉 문득 사람을 위함이 옳으냐?

필경에 여하오?

선사께서 양구하신 후 이르시기를,

 백운사가래청장(白雲乍可來靑嶂)
 명월나교하벽천(明月那敎下碧天)

 흰 구름은 잠깐 푸른 산봉우리에서 옴이나
 밝은 달은 어찌 하여금 푸른 하늘에서 내리리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칠월 지장재일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51. 조과(鳥窠) 선사의 포모(布毛)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밀이일보육문효(密移一步六門曉)
 무한풍광대지춘(無限風光大地春)
 당명중유암(當明中有暗)
 물이암상우(勿以暗相遇)
 당암중유명(當暗中有明)
 물이명상도(勿以明相覩)
 일체법진처(一切法盡處) 요요상재(了了常在)
 일체법생시(一切法生時) 공공상적(空空常寂)

 은밀히 한 걸음 옮기니 육문(六門)이 밝음이요
 한없는 풍광(風光)이 대지의 봄이로다.
 밝은 가운데를 당해 어둠이 있으니
 어둠으로써 서로를 만난다고 하지 말라.
 어두운 가운데를 당해서 밝음이 있으니
 밝은 것으로써 서로를 본다고 하지 말라.
 일체 법이 다한 곳에 분명한 모양이 항상 있음이요
 일체 법이 나는 때에 비고 비어서 항상 적적함이라.

예전에 항주(杭州) 땅에 조과 도림(鳥窠道林)* 선사가 어느 날 시자 회통(會通)이 떠나려 하기에, 조과 선사가 묻되,
“네가 지금 어디로 가려 하는고?”하니, 시자 회통이
“회통은 불법(佛法)을 위해 출가했는데, 화상께서 가르쳐 주시지 않으시니, 이제 제방(諸方)에 가서 불법을 배우고자 하나이다.”하였다.
이에 선사가,
“그와 같은 불법이라면 나에게도 약간은 있느니라.”하니, 시자가 말하되,
“어떤 것이 화상(和尙)의 불법입니까?”하였다.
조과 선사가 몸에서 포모(布毛, 실보푸라기)를 들어 올려 부니, 회통이 비로소 현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이에 한마디 묻겠는데,

대중아!
조과 선사가 포모를 들어 올려 부니 시자 회통이 깨달았으니, 불법이란 사의(思議)하기 어렵도다.

 포모취기혜(布毛吹起兮)
 사십구년설(四十九年說)
 일모두상혜(一毛頭上兮)
 식득근원거(識得根源去)

 실보푸라기를 불어 일으킴이여!
 49년 설(說)이로다.
 한 터럭 끝 위여!
 근원을 알아 얻어감이로다.

필경 일구(一句)는 어떠한고?

 천봉한색(千峯寒色)이요
 우적암화(雨滴岩花)로다.

 일천 봉우리는 차가운 빛이요
 빗방울은 바위에 꽃이로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팔월 지장재일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52. 반야위체(般若爲體)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만리무운편월휘(萬里無雲片月輝)
 벽담어희랑화비(碧潭魚戱浪花飛)
 가련강변수조자(可憐江邊垂釣者)
 지도파심축수귀(只道波深縮手歸)

 만리에 구름이 없으니 조각달이 빛남이요
 푸른 못에 고기가 노니니 물결꽃이 날도다.
 가련하다 강가에 낚시를 드리운 자여!
 다못 파도가 깊어 손을 떼고 돌아온다 이름이로다.

어느 날 대자(大慈) 선사에게 조주(趙州) 선사가 묻기를,
“반야(般若)는 무엇으로 체(體)를 삼음이닛고?”하니, 대자 선사가 묻기를,
“반야는 무엇으로 체를 삼는가?”하였다.
이에 조주 선사가 껄껄대며 크게 웃었다.
이튿날, 조주 선사가 마당을 쓰는데 대자 선사가 묻되,
“반야는 무엇으로 체를 삼는가?”하니, 조주 선사가 비를 놓고 손을 모아 크게 웃으니, 대자 선사는 방으로 돌아갔다.

대중아!
두 분의 큰 선사가 반야위체(般若爲體)를 잘 묻고 답하였도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산승에게 ‘반야는 무엇으로 체를 삼음이닛고?’하고 묻는다면,

 월낙삼경천시과(月落三更穿市過)니라.
 삼경(三更)에 달이 지니 저자를 뚫고 지나감이라.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병자년(1996) 2월 16일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53. 임제 선사와 왕 상시의 문답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비심비불역비물(非心非佛亦非物)
 일이삼사오육칠(一二三四五六七)
 곤사천축우전다(困思天竺雨前茶)
 갈억남해상후유(渴憶南海霜後柚)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다.
 일이삼사오육칠이로다.
 곤한즉 천축(天竺)의 우전다(雨前茶)를 생각함이요
 목마른즉 남해(南海) 서리가 온 뒤에 유자를 생각함이로다.

임제(臨濟) 선사 회상에 왕 상시(王常侍)*가 찾아와서 함께 승당(僧堂) 안을 돌아보았는데, 왕 상시가 묻되,
“이 승당 안의 스님들은 경(經)을 봅니까?”하니, 임제 선사가 이르시기를,
“경을 보지 않습니다.”
왕 상시가,
“좌선은 합니까?”하니, 임제 선사가
“좌선도 하지 않습니다.”
왕 상시가 다시,
“그러면 경도 보지 않고 좌선도 하지 않으면 무엇을 합니까?”하고 물으니,
“모두가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려고 합니다.”하였다.
왕 상시가 이르되,
“금가루가 귀하기는 하나, 눈에 들어간즉 가리우니라.”하니, 임제 선사가 말하되,
“아무리 그래도 너는 속한(俗漢)이니라.”하였다.

대중은 왕 상시(王常侍)를 알겠는가?

 장위후백터니(將謂候白)터니
 갱유후흑(更有候黑)이로다.

 후백(候白)*인줄 알았더니
 다시 후흑(候黑)*이 있음이로다.

임제 선사를 알겠는가?

 임제 선사는 일용(日用)에 번개와 같은 기틀을 갖추어서
 바람을 치고 달을 치나, 속한의 한 물음에 얼음이 녹고 기왓장이 풀어짐이로다.
 그러나 마지막 한 마디로 인해서, 하나 반(半)을 구제해 얻음이로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지장재일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54. 정법안장(正法眼藏)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일조주장횡청천(一條拄杖橫靑天)
 별향일승교외전(別向一乘敎外傳)
 정안묘심진실상(正眼妙心眞實相)
 묘야묘불성(描也描不成)
 화야화불성(畵也畵不成)

 한 막대기 주장자가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니
 달리 일승(一乘)을 교(敎) 밖에 전함이로다.
 바른 눈 묘심(妙心)의 진실상은
 모방하려야 모방하지 못하고
 그리려야 그리지 못하도다.

세존께서 영산 회상에서 설법하시니, 하늘에서 꽃비가 내린지라. 세존께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니 가섭(迦葉)이 미소함이라.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나에게 정법안장이 있으니 마하 가섭(摩訶迦葉)에게 부촉하노라.”하시다.

대중은 도리어 세존을 알겠는가?

 지만상갱지만(枝槾上更枝槾)
 나뭇가지 위에 다시 나뭇가지를 더함이로다.

도리어 가섭을 알겠는가?

 진미래제미소(盡未來際微笑)
 하처용(何處用)

 미래제가 다하도록 웃은들
 어느 곳에 쓸 것인가?

필경에 어떠한가?

 제불정법안장(諸佛正法眼藏)
 여등정액상재(汝等頂額上在)
 요고등금(耀古騰今)
 금부전법시(今付傳法時)
 할각일체인안(瞎却一切人眼)

 제불의 정법안장은
 모든 사람의 정액상에 있어서
 옛적에도 빛나고 이제도 등등함이라
 이제 법을 전해 부치는 때에
 일체 사람의 눈을 도리어 멀게 하도다.

할(喝)!
일 할(一喝)하시고 하좌(下座)하시다.

병자년(1996) 6월 18일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55. 백의 재상(白衣才相)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금강정체담적응연(金剛正體湛寂凝然)
 약인(若人)
 철근철원기용자재(徹根徹源機用自在)
 고목생화철수결실(枯木生花鐵樹結實)
 어생어사중대자재(於生於死中大自在)
 회호방래혈맥부단(回互傍來血脈不斷)

 금강과 같은 바른 진리의 체는 담적하고 응연함이라.
 만약 사람이,
 근원을 사무치고 사무치면 기틀과 용이 자재하여
 고목에 꽃이 피고 철나무에 열매를 맺으리라.
 저 생사 가운데 대자재하며,
 주고 빼앗아 옴에 혈맥이 끊어지지 아니함이라.

하루는 동산 양개(洞山良价) 선사가 신산 승밀(神山僧密)* 선사와 같이 행차할 때, 흰 토끼가 눈 앞을 달려 지나가는 것을 보고 승밀 선사가 말하되,
“뛰어나구나!”하였다.
이데 동산 선사가 말하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니 밀 선사가 말하되,
“마치 백의(白衣)로서 재상(宰相)의 자리에 오르는 것 같습니다.”하였다.
동산 선사가
“헛 늙은이가 그러한 말씀을 하는군요.”
밀 선사가
“그대는 어찌 하겠는가?”
동산 선사가 말하되,
“대대로 쌓아온 높은 잠영(簪纓)*이 잠시 혼(魂)이 떨어짐이라.”하였다.

만약 산승에게 묻는다면,

 피모수횡이중래(被毛鬚橫異中來)
 봉초끽초봉수끽수(逢草喫草逢水喫水)

 터럭 나고 수염이 드리워진 축생으로 와서
 풀을 만나면 풀을 먹고, 물을 만나면 물을 먹으리라.

삼인(三人)의 답처를 어떻게 생각하는고?

 만약 삼인의 답처를 알아갈 것 같으면,
 불조의 차별삼매(差別三昧)의 법문을 한 꼬챙이에 꿰어서
 홀로 건곤(乾坤)에 걸음하리라.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12월 1일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56. 조주(趙州) 바자감파(婆子勘破)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지음절운(至音絶韻)
 묘곡비성(妙曲非聲)
 통신불괘촌사(通身不掛寸絲)
 적체전무기휘(赤體全無忌諱)
 제인(諸人)
 절막염만지지(切莫拈饅舐指)
 직수절단설두(直須截斷舌頭)
 방하신심(放下身心)
 자연괘활(自然快活)
 안약불수(眼若不睡)
 제몽자제(諸夢自除)
 심약불이(心若不異)
 부명하물(復名何物)
 쾌활쾌활(快活快活)

 지극한 소리는 운율이 끊어짐이요
 묘한 곡은 소리가 아닌지라
 몸 전체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아니하여
 벌거벗은 몸에 온전히 싫어하고 꺼림이 없도다.
 모든 사람이여!
 만두를 잡고 손가락을 핥지 말 것이며,
 곧 모름지기 설두(舌頭)를 끊고
 몸과 마음을 놓으면
 자연히 쾌활하리라.
 만약 잠이 없으면
 모든 꿈이 스스로 없어지고
 마음이 만약 다르지 아니하면
 다시 무슨 물건이라 이름하리요.
 쾌활, 쾌활이로다.

조주(趙州) 선사가 사는 오대산(五臺山) 가는 길가에 한 노파가 있어 수좌들이 오다가 그 노파에게 묻기를,
“오대산은 어디로 가오?”하면, 노파는 대답하기를,
“곧장 가시오.”하여, 수좌가 서너 걸음 내딛으면 노파는,
“좋은 스님이 또 이렇게 가는구나.”하였다.
나중에 어떤 수좌가 이 일을 이야기했더니, 조주 선사가,
“노승이 그 노파를 감파(勘破)하리라.”하였다.
이튿날 가서 그렇게 물으니, 종전과 같이 대답하는지라, 선사가 그대로 돌아와서 대중에게 말하되,
“내가 그대들을 위해 그 노파를 감파했다.”하였다.

이에 산승이 묻노니,
오대산에 이르러 모든 스님네와 같이 오대산 가는 길을 노파에게 물었거늘 어느 곳이 노파를 감파한 곳이냐?
감파한 곳을 분명히 살필지어다.

산승이 보건대 노파에게 조주 선사가 감파를 당한지가 오래로다.

회마(會麽)?
알겠는가?

 일감파이감파(一勘破二勘破)
 장위후백갱유후흑(將謂候白更有候黑)

 일 감파 이 감파여!
 장차 후백이라 이르더니 다시 후흑이 있음이로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을해년(1995) 동안거 결제일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57. 조주 끽다거(喫茶去)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종사험인단적처(宗師驗人端的處)
 등한개구편지음(等閒開口便知音)
 적면약무청백안(覿面若無靑白眼)
 종풍쟁득도여금(宗風爭得到如今)

 종사가 사람을 시험하는 단적처는
 한가로이 입을 엶에 문득 지음(知音)함이로다.
 바로 면전을 대하여 청백안(靑白眼)이 없으면
 어찌 종풍이 오늘에 이르름을 얻으리오.

어느 날 조주 선사가 어떤 수좌에게 묻되,
“일찍이 여기에 이르렀느냐?”하여, 수좌가 대답하되,
“이르렀습니다.”하니, 선사가 말하되
“끽다거(喫茶去)하라.[차나 한 잔 마셔라.]”하였다.
또 수좌에게 묻되
“일찍이 여기에 이르렀느냐?”하여, 수좌가 대답하되,
“일찍이 이르지 못했습니다.”하니, 선사가 말하되,
“차나 한 잔 마셔라.”하였다.
이에 원주(院主)가 묻기를,
“어찌하여 일찍이 이르렀던 이도 ‘차나 한 잔 마셔라.’ 하고, 일찍이 이르르지 못했던 이에게도 ‘차나 한 잔 마셔라.’ 하십니까?”하니, 선사가
“원주야!”하고 불러 원주가 대답하거늘,
“너도 차나 한 잔 마셔라.”하였다.

이에 산승이 대중에게 묻노니,

대중은 조주 선사를 알겠는가?

일찍이 이르렀다 해도 ‘차나 한 잔 마셔라.’ 하고 일찍이 이르지 못했다 해도 ‘차나 한 잔 마셔라.’ 하니 조주 선사의 법은 사의(思議)하기 어렵도다.

필경에 어떠한고?

 조주 선사의 안광(眼光)이
 항사법계(恒沙法界)를 비추어 빛남이라.
 비록 이와 같으나
 시자(侍者)야!
 차를 달여서 조주 선사께 드려라.

할(喝)!
일 할(一喝) 하시고 하좌하시다.

을해년(1995) 동안거 해제일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58.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 추대 법어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이 주장자와 불자(拂子)는 모든 부처님의 생명의 뿌리이며 진리의 안목(眼目)이로다.
 생명의 뿌리와 진리의 안목을 논하건댄,
 석가와 달마는 삼천리 밖에 거꾸러짐이니,
 야노(野老)들은 손뼉을 치며 ‘하하’라고 웃음이로다.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봉황서오동(鳳凰棲梧桐)
 백학무공산(白鶴舞公山)

 봉황은 오동나무에 깃들고
 백학은 팔공산에서 춤추도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갑술년(1994) 하안거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59. 대매 선사(大梅禪師) 즉심즉불(卽心卽佛)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영산회상염화혜(靈山會上拈花兮)
 삼천찰해우담개(三千刹海優曇開)
 조주운문전기대용혜(趙州雲門全機大用兮)
 시산위위혈해도도(屍山崣崣血海濤濤)

 영산회상의 꽃 한 송이를 듦이여!
 삼천대천세계에 우담바라화가 만개함이로다.
 조주와 운문의 전기대용이여!
 송장 산이 높고 높고
 피바다가 출렁거림이로다.

오늘은 팔공산 동화사에서 처음 개설되는 초발 선객(初發禪客)의 기초선원 교육 법회일이라.

여러분은 한국 불교의 미래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으니 장차 정진을 잘 해서 한국 불교를 전 지구촌에 선양하는 역군이 될 것이며, 부처님의 적자(嫡子)가 되기 위해서는 바른 신심을 내어서 바른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 일천 성인의 정액상(頂額上) 일구(一句)를 투과할 것 같으면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어서 천상 인간의 독보의 존재가 될 뿐만 아니라, 세세생생 사람의 할 일을 다 해 마치리라.

천성(千聖)의 정액상 일구를 투과하려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야 되나니, 요즈음 참선하는 이들이 여기 저기서 출판된 책자를 보고 가지 각색의 화두 참구를 하고 있는데, 혹자는 묵조선(黙照禪)을 하기도 하고, 혹자는 관법(觀法)을 하기도 하고, 염불선(念佛禪)을 하기도 하니, 이러한 참선법은 여러 생을 지나야 대오견성(大悟見性)을 할 수 있나니,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 활구선(活句禪)을 참구(參究)할 것 같으면 일념삼매(一念三昧)가 되고, 그 삼매가 지속이 되면 홀연히 여래지(如來地)에 이르게 된다. 여래지에 이른 후에는 더 닦는다거나 습기(習氣)를 제거할 것이 없나니, 이러한 깨달음이라야 임제선(臨濟禪)의 골수를 바로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참구하고 참구할지니 견성대오를 해서 순금(純金)을 이룰 것 같으면 천년 만년이 지나도 순금이 변질되지 않나니, 자성(自性)의 바탕을 이와 같이 수용하면 불조(佛祖)와 다름이 없다.

예전에 마조(馬祖) 선사 회상에 한 납자(衲子)가 마조 선사를 참방(參訪)하여 묻기를,

 여하시불(如何是佛)?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조 선사가 대답하시길,

 즉심시불(卽心是佛)이니라.
 마음이 곧 부처니라.

그 납자는 언하(言下)에 곧 깨달아 대매산(大梅山)에 들어가서 삼십여 년 간 머물고 계셨는데, 회상을 열었다는 소식이 없어 마조 선사가 수좌를 시켜서 대매산 법상(法常) 선사한테 가서 전하기를,
“마조 선사께서 전에는 ‘마음이 곧 부처니라’하셨는데, 요즈음엔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다’라고 법문을 하십니다.”라고 말하니,
대매 법상(大梅法常) 선사가 말하기를,
“그 노장이 망령이 들었구나. 그래도 나는 ‘마음이 곧 부처다’ 하리라.”하셨다.
수좌가 돌아와선 마조 선사께 대매 선사의 말씀을 전하니, 마조 선사께서,
“대매산의 매실이 익었구나.”라고 인가(印可)를 하셨다.

중국 천하에 이 소문이 분분하니 하루는 방(龐) 거사가 대매 선사를 찾아가서 대뜸 묻기를,
“매실이 익었느냐?”하니,
대매 선사가 답하기를,
“어느 곳을 향해 입을 벌리려 하느냐?”하니, 방 거사가
“백 번이나 씹어 부셔버렸다.”하니, 대매 선사가
“씨나 돌려다오.”했다.
이렇게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이 문답을 전개하니 진리의 안목을 갖춤이로다.

시회대중(時會大衆)아!
두 분의 문답처(問答處)에 우열이 있느냐, 없느냐?

 설령 우열이 있다 해도 삼십 방을 맞고
 우열이 없다 해도 삼십 방을 맞는다.

말후(末後)의 일구(一句)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면야차재계수(馬面夜叉才稽首)
 우두옥졸수격권(牛頭獄卒須擊拳)

 말의 머리를 가진 야차는 머리를 조아리고
 소의 머리를 가진 옥졸은 주먹을 불끈 쥠이로다.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봄철 동화사 기초선원 개원식 법어


60. 기초선원 법어

불조(佛祖)의 명맥과 열성(列聖)의 겸추(鉗鎚)는 주장자를 알아 얻음으로써 사자(獅子)의 조아(爪牙)를 갖추어 어느 때에는 금강왕 보검(金剛王寶劍)으로 일체의 갈등을 끊고, 어느 때에는 대사자후(大獅子吼)로 백수(百獸)의 간담(肝膽)을 서늘하게 하고, 어느 때에는 일 할(一喝)을 짓지 않고 일 할을 씀이로다.
이러한 기봉(機鋒)을 갖추어야 대종사(大宗師)가 되어 호래호현(胡來胡現)하고 한래한현(漢來漢現)하여 자재로운 수안(手眼)으로 물음은 답처(答處)에 있음이요, 답은 물음처[問處]에 있음이로다.
이곳에 모인 모든 대중은 잘 참선 지도를 받음으로써 부처님의 적자(嫡子)가 되어 이 나라 불교의 동량(棟樑)이 될 것이다.
견성법(見性法)은 할구참선(活句參禪)을 하여야 대오(大悟)를 하나니 사구(死句)에선 깨닫지 못한다.
사견(邪見)에 떨어지면 시간만 허비하니 견성대오(見性大悟)를 하려면 첫째, 명안 선지식(明眼善知識)을 만나야 한다.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허송세월 하나니 정신을 똑바로 차려서 정진할지어다.
이 활구참선법은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이니 대장부로서 한 번 할 일이로다.
일초직입여래지하면 다생(多生)의 번뇌와 습기(習氣)가 당하(當下)에 소멸되고 대원경지(大圓鏡智)를 갖추어서 역겁(歷劫)토록 삼매(三昧)를 수용함이로다.

필경에 여하(如何)오?

 수류낙화지하처(水流落花知何處)
 동구도원별시춘(洞口桃源別是春)

 물은 떨어진 꽃잎이 어느 곳으로 흘러간 줄 앎이나
 동구(洞口)엔 복사꽃 만발하니 달이 이 봄이더라.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가을철
동화사 기초선원에서


61. 부산불교연합회 유등법회(流燈法會)

 일엽유등재일심(一葉流燈載一心)
 표표수파수상행(飄飄隨波水上行)
 시회대중회야마(時會大衆會也麽)
 벽파심처착안간(碧波深處着眼看)

 일엽의 유등 한 마음에 싣고
 물결을 따라 나부끼며 물 위를 가고 있도다.
 여기에 모인 대중들은 참마음을 아느냐?
 푸른 물결 깊은 곳에 눈을 크게 뜨고 보라.

금일(今日) 연등대제(蓮燈大祭)에 동참하신 사부대중(四部大衆)아!
각자의 마음가짐을 연꽃과 같이 깨끗이 가지면 집안이 화목하고, 사회가 안정되고, 국가가 날로 발전될 것이니.
대중들아!
유등법회의 참 뜻을 바로 보자.

금일 동참한 유주무주(有住無住) 일체 선망부모(先亡父母) 제위 영가(諸位靈駕).

마지막 일구의 법문을 잘 청취하여 모든 애착과 집착을 다 놓아버리시고, 청정한 부처님 국토에 편안히 머무소서.

 무구청정광(無垢淸淨光)
 혜일파제암(慧日破諸暗)
 능복재풍화(能伏災風火)
 보명조세간(普明照世間)

 때 없는 청정한 빛이여!
 지혜의 광명이 모든 어둠을 깨고
 능히 삼재(三災)를 조복(調伏) 받아서
 널리 세간을 밝게 비춤이로다.

병자년(1996) 11월 21일
을숙도 현지에서


62. 부처님 오신 날 봉축 법어

 세존(世尊)께서
 주행칠보(周行七步)하시고 지천지지(指天指地)하야 칭제일(稱第一)이라 하시니,
 간각하(看脚下) 하소서.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오시어 처음 일곱 걸음을 내딛으시고 한 손으로 하늘을,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에 제일이라’ 하시니, 각하(脚下)를 보소서.

 간각하혜(看脚下兮)여,
 무한군생(無限群生)이 부불기(扶不起)로다.

 각하(脚下)를 봄이여,
 한없는 군생(群生)이 잡아 일으키지 못함이로다.

 5월의 신록(新綠)은 부처님의 법신(法身)이요
 산간(山澗)의 흐르는 물소리는 부처님의 설법(說法)이라.

 우리 모두 허상(虛像)을 활짝 벗어 던지자.

 세계(世界)가 일가(一家)요 만류(萬類)가 동체(同體)로다.

 김서방, 하서방이 손뼉치며 크게 웃고,
 남북이 상봉하여 평화의 무생곡(無生曲)을 다같이 합창하세.

불법의 깊고 깊은 일구는 어떻게 생각하는고?

 만고벽담공계월(萬古碧潭空界月)
 재삼로록시응지(再三撈漉始應知)

 만고의 푸른 못에 비친 공계(空界)의 달은
 두서너 번 건져봐야사 비로소 알리라.

정축년(1997) 4월 8일
부산불교연합회 증명 진제(眞際)


63. 참선하는 법

불심인법(佛心印法)은 확철대오(廓徹大悟)함을 종(宗)으로 삼는다. 다생(多生)에 지은 중생의 악습이 소멸되고 무량한 번뇌가 모두 없어지는 동시에 여래의 대지혜가 현전하여 불조의 심심한 진리의 정안(正眼)이 구족하여 여래의 적적삼매(寂寂三昧)를 수용하여 미래제가 다하도록 열반락을 누리리라.

옛 도인들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가난한 것은 지혜가 짧기 때문이요, 말[馬]이 여위면 털이 길다.’ 하셨느니라. 세상 사람들의 생활을 보라. 둔하고 어리석은 사람 출세한 것을 봤는가? 지혜는 만복(萬福)의 근원이며, 모든 부처님의 살림살이며, 나고 날 적마다 대안락과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만인의 진리의 스승이 되는 법이다.
우리 인생은 무한한 전생과 후생이 있다. 전생과 금생에 마음을 닦고 닦은 인연 공덕으로 잘 살고 출세를 누리는 것이다. 참선은 일상생활 속에서 참구하는 것이다. 앉고, 눕고, 먹고, 자고, 일하고, 산책하고, 장사하고, 사업하고, 그리고 일상생활 하는 그 가운데에서도 오매불망(寤寐不忘) 화두를 생각하고 의심해서 일념이 지속되게끔 노력해야 한다.
우리 모두 생활 속에서 꾸준히 공부를 지어가면 일체 잡념은 모두 사라지고 화두 한 생각만 흘러감으로써 마음 속 이 생각 저 생각 모든 갈등이 없어지고 맑고 깨끗한 한 생각만 뚜렷하게 드러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낮이 가고 밤이 되어도 자기 몸도 다 잊을 것 같으면 이러한 시간이 흘러서 화두 일념에 푹 빠져서 흐르는 동안 홀연히 어떤 사물을 보는 찰나에 화두가 타파되어 제불(諸佛), 모든 도인과 더불어 동참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일상생활 속에서 참선을 부지런히 하여 대장부 활계(活計)를 한껏 펴보자.

을해년(1995) 2월 18일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64. 법보신문(法寶新聞) 기자회견 내용
-선학원 재단 이사장에 추대되시고-

대담자 : 선원빈(宣元彬)
때 : 1992. 6. 1
곳 : 선학원 염화실

선 기자(宣記者) 질문 : 큰스님께서 지난 5월 1일 선학원(禪學院)의 재단이사장에 추대되신 것을 먼저 감축드립니다.
선학원이 창건된 지 얼마나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 역사적 배경도 말씀해 주시지요.
진제(眞際) 큰스님 : 선학원은 올해로 70주년을 맞게 됩니다. 선학원이 창건된 동기라고나 할까, 과거 한일합방 이후, 조선 불교가 완전히 총독부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풍전등화(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앞날과 조선 불교의 계승, 유지에 밤낮으로 염려하시던 선사들이 계셨는데, 즉 만공(滿空), 용성(龍城), 한암(漢巖), 석우(石友), 적음(寂音), 석두(石頭), 남천(南泉), 성월(惺月), 도봉(道峰) 선사들께서 ‘선(禪) 확립과 진작이 곧 구국(救國)이다.’라는 논리로 10여 년 간 뜻을 모아 1921년에 현재 서울 안국동에 창건한 것이 오늘 날의 바로 이 선학원입니다.

선 기자 : 그런데 선학원은 한국의 정통 선맥인 임제종의 계승지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다른 절처럼 ‘사(寺)’라든지, ‘암(庵)’자(자)의 명칭을 쓰지 않는지요?
큰스님 : 예, 보편적으로 ‘사ㆍ암’의 명칭을 붙이지 않아서 「선학원」이라는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질 것입니다만, 그 이유는 대략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당시 일본 총독부의 ‘사찰령’ 때문에 탄압을 받지 않기 위해서이고, 또 하나는, 참선을 모든 대중에게 널리 보급한다는 창립 본래의 목적에도 어울리게 「선학원」이라고 했습니다.

선 기자 : 그러면 그 이후 일제의 탄압을 받지 않고 안정된 기반을 구축해 나갈 수 있었습니까?
큰스님 : 아닙니다. 그 이후에도 사실상 선학원이 일제에 항거하고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었지요. 33인 중의 한 분이신 한용운 스님 등은 선학원에 몸담고 계시면서 나라를 되찾으려고 노력하셨습니다. 그래서 항상 일본 총독부의 끊임없는 감시와 탄압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서 해방이 될 때까지는 많은 곡절이 있었습니다.
그 후 불교 정화 후에 선학원은 오늘의 「조계종」을 탄생시킨 진원지(震源地)가 되었습니다.

선 기자 : 그러면 「선학원」과 「조계종」은 별개의 것입니까?
큰스님 : 꼭 별개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선학원」과 「조계종」은 한 집안입니다.

선 기자 : 이제 한국 불교의 현장으로서, 또 한국 불교 근대사의 현장으로서, 한국 선불교의 명맥을 이어 온 선학원이 올해로 고희(古稀)를 맞는 셈인데요, 앞으로 선학원이 해야 할 일과 특별한 계획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지요.
큰스님 : 선학원은 무엇보다 사부대중에게 선(禪)을 권장하고 널리 보급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선학원 내에 「중앙선원」을 재개설하여 운수납자들을 제접하고 또한 「시민선원」을 개방하여 일천만 서울 시민을 비롯 우리 국민이 누구라도 와서 참선수행 할 수 있는 선(禪) 도량이 되도록 할 계획입니다.
그 다음에는, 제방(諸方)의 원로대덕 스님들을 모시고 정기적인 법회를 열어 모든 이들이 감로법문을 들을 수 있도록 하여 선불교를 전법하는 명실상부한 선의 요람이 되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 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로부터 상호교류와 유대를 더욱 강화해 나가자는 제의를 받고 있습니다만, 동(東)과 서(西)의 구분 없이 한국 선불교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데도 힘쓰려고 합니다.

선 기자 : 잘 알았습니다. 선학원이 모름지기 한국 선불교의 중심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면 선(禪)이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큰스님 : 부처님의 광대무변한 가르침은 결국, 인간이 인간의 참모습을 바로 보고 깨달아 고해(苦海)에서 모든 번뇌와 업연의 고리로부터 해탈하여 참자유와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
기도를 한다든지 주력을 한다든지 여러 방편이 있지만, 참자기를 바로 보고 깨달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편은 바로 선(禪)입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자기의 화두를 항시 목전(目前)에 두고 의심하는 수행 방법인데, 이 참선 수행을 착실히 하여 화두가 철저히 타파되면 모든 인간 세계와 우주와의 관계가 해와 달처럼 환하게 드러나 깨닫게 됩니다.
참마음의 눈을 뜨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하지요.

선 기자 : 예, 그렇군요.
견성하신 선사님들의 얘기가 듣고 싶습니다. 한국 선맥(禪脈)을 이어 오신 역대 선사님들에 대해 좀 말씀을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전법게(傳法偈)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심인(心印)의 표(表)인 전법게를 다 말씀드리기엔 정해진 시간에 불가능하고, 선맥의 중흥조이신 경허 선사로부터 혜월 선사, 운봉 선사, 향곡 선사 그리고 산승에 이르기까지의 전법게를 전수했던 과정만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먼저 혜월 혜명(慧月慧明) 선사는 경허 선사로부터 화두를 타서 불철주야 공부를 지어가시길 3년이란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짚신 한 켤레를 다 삼아놓고서 잘 고르기 위해 신골을 치는데, ‘탁’ 하는 소리에 화두가 타파되었습니다.
그길로 경허 선사를 찾아가니, 경허 선사께서 물음을 던지셨습니다.
“목전에 고명한 한 물건이 무엇인고?”
“저만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천 성인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자 경허 선사께서 물으셨습니다.
“어떠한 것이 혜명(慧明)인가?”
이에 혜명 스님은 동쪽에서 걸어와 서쪽에 가서 섰다가, 다시 서쪽에서 걸어와 동쪽에 가서 섰습니다.
경허 선사께서
“옳고, 옳다.”하시며 인가(印可)하신 후, 1902년 혜월(慧月)이란 법호(法號)와 전법게를 내리셨습니다.

 부혜월혜명(付慧月慧明)

 요지일체법(了知一切法)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
 여시해법성(如是解法性)
 즉견노사나(卽見盧舍那)
 의세제도제창(依世諦倒提唱)
 무문인청산각(無文印靑山刻)
 일관이상도호(一關以相塗糊)

 수호 중춘 하한일(水虎 仲春 下澣日)
 만화문인 경허 설(萬化門人 鏡虛 說)

 혜월 혜명에게 부치노라

 일체법을 깨달아 알면
 자성에는 있는 바가 없는 것
 이같이 법성을 깨쳐 알면
 곧 노사나불을 보리라.
 세상법에 의지해서 그릇 제창하여
 문자 없는 도리에 청산을 새기니
 고정된 진리의 상에 풀을 발라 버림이로다.

 임인년 늦봄에
 만화문인 경허 설하다.

그 후, 혜월 스님에 대한 명성이 자자하고 일화도 많은데 하루는 당시 일본의 미나미 총독이 수하 사람들과 함께 와서 혜월 선사께 여쭈기를,
“어떤 것이 불법의 적적대의입니까?[여하시불법적적대의(如何是佛法的的大意)]”하니,
“불법의 긴요한 진리? 귀신 방귀에 털이 났지.”하시니, 총독이 알아듣지 못해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갔습니다. 일본 총독이 혜월 선사께 한 방 맞았다는 소문이 나니, 사무라이 병사가 분개해서 ‘내가 가서 혜월을 혼을 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장검을 차고 와서 혜월 선사 방에 노크도 안 하고 구둣발로 그냥 들어와서 대뜸 장검으로 혜월 선사의 목을 베려고 갖다내는데, 혜월 선사께서 병사의 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병사가 돌아보는 순간 등을 치면서,
“내 칼 받아라.”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병사는 잘못을 뉘우치고서는 장검을 집어넣고 큰절을 올리고 갔습니다.
이러한 기봉(機鋒)은 어디서 나오느냐? 지혜의 저력입니다. 만약 거기서 우물쭈물했다면 혜월 선사의 목이 달아났을 것입니다. 선(禪)이란 바로 이러한 경천동지(驚天動地)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운봉(雲峯) 선사는 동진(童眞)으로 출가하시어 경율(經律)을 모두 섭렵하셨는데, 거기에서 만족하심을 못 얻으시고 대오견성법(大悟見性法)이 있다는데 나도 도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남방의 위대한 선지식이신 혜월 선사를 찾아가서 열심히 참구하셨지만, 10여 년이 지나도 순일(純一)함을 이루지 못하시다가, 어느 날 오대산 적멸보궁에 가서 100일 기도하며 발원하시길, ‘화두일념과 견성대오하여 종풍을 드날려 광도중생 하여지이다.’ 하셨습니다.
100일 기도를 회향하고 백양사 운문암에서 불철주야 정진하신 끝에 타성일편(打成一片)을 이루어, 어느 날 새벽 선방 문 밖을 나오니 밝은 달이 있어 온 산하대지(山河大地)가 환희 밝은 것을 보시고 활연대오(豁然大悟)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당시 부산 선암사에 계시던 혜월 선사를 참예(參詣)하여 여쭈었습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는 어느 곳에서 안심입명(安心立命)하고 계십니까?”
이에 혜월 선사가 양구(良久)하시므로, 스님이 냅다 한 대 치면서,
“산 용이 어찌 죽은 물에 잠겨 있습니까?”
“그러면 너는 어찌 하겠느냐?”
스님이 문득 불자(拂子)를 들어 보이니 혜월 선사께서는 짐짓
“아니다.”라며 부정하셨습니다.
이에 다시 응수하기를,
“스님, 기러기가 창문 앞을 날아간 지 이미 오래입니다.”하자, 혜월 선사께서는 크게 한바탕 웃으시며,
“내 너를 속일 수 없구나.”하고 매우 흡족해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전법게를 내리시기를,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본무진실상(本無眞實相)
 어상약무상(於相若無相)
 즉명위견성(卽名爲見性)

 世尊應化 2951年 4月
 鏡虛門人 慧月 說

 일체의 유위법은
 본래 진실된 모양이 없으니
 저 모양 가운데 모양이 없으면
 즉 이름하여 견성이니라.

 세존응화 2951년 4월
 경허문인 혜월 설하다.

이후 제방에서 납자를 제접하시며 선의 종지를 크게 펼치시니, 도법(道法)의 성황함이 당대의 으뜸이었습니다.

향곡(香谷) 선사는 16세 때 운봉 선사께서 조실로 계시는 천성산 내원사로 스님이셨던 형님을 만나러 어머니와 함께 갔습니다. 그때 많은 스님들이 모여서 참선하시는 광경을 보시고는 모친만 집으로 되돌아가시게 하고는 운봉 선사로부터 화두를 타서 공양주를 2년간 하시면서 공부하셨습니다.
하루는 봄에 골짜기에서 산바람이 불어와 문을 치는 소리에 마음의 경계가 있어, 운봉 선사를 찾았는데, 조실방을 들어서는 모습이 당당하여 이미 가늠하시고, 운봉 선사께서 목침을 두고,
“한마디 일러라!”하시거늘,
즉시에 목침을 차버리리,
“다시 일러라.”하시거늘,
“천언 만어(千言萬語)가 다 몽중설(夢中說)이라, 모든 불조(佛祖)가 나를 속였습니다.”하니 운봉 선사가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갑신(甲申)년 8월에 향곡(香谷)이라 법호를 내리시고 전법게를 부치기를,

 부향곡혜림장실(付香谷蕙林丈室)
 
 서래무문인(西來無文印)
 무전역무수(無傳亦無受)
 약리무전수(若離無傳受)
 오토부동행(烏兎不同行)
 세존응화(世尊應化) 2967年
 혜월문인(慧月門人) 운봉 설(雲峰說)

 향곡 혜림 장실에 부치노라

 서쪽에서 온 문인(文印)이 없는 진리는
 전할 수도 받을 수도 없나니
 만일 전하고 받을 수 없는 것조차 여의면
 까마귀는 날고 토끼는 달리느니라.

 세존응화 2967년
 혜월문인 운봉 설하다.
라고 전법게를 내리시어, 임제정맥 법등 상속을 부촉하여 가시니, 즉 양기(楊岐), 밀암(密庵), 석옥(石屋), 태고(太古), 환성(喚惺), 율봉(栗峰), 경허(鏡虛)의 적전(嫡傳)입니다.
그 후 정해(丁亥)년 문경 봉암사에서 도반들과 정진하던 중

 살진사인(殺盡死人)하야사 방견활인(方見活人)이요
 활진사인(活盡死人)하야사 방견사인(方見死人)이라.

 죽은 사람을 죽여 다하여야만 산 사람을 보고
 죽은 사람을 살려 다하여야만 비로소 죽은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
한 말이 있는데, 한번 일러 봐라 하는 한 도반의 말에 삼칠 일 동안 침식을 잊고 일념삼매(一念三昧)에 들었는데, 홀연히 스스로의 양손을 발견하자 활연대오(豁然大悟) 했습니다.

 홀견양수전체활(忽見兩手全體活)
 삼세불조안중화(三世佛祖眼中花)
 천경만론시하물(千經萬論是何物)
 종차불조총상신(從此佛祖總喪身)

 홀연히 두 손을 보니 전체가 드러났네
 삼세 제불도 눈[眼] 속의 꽃이로다.
 천경 만론[千經萬論]은 이 무슨 물건인가
 이로 좇아 불조(佛祖)가 모두 몸을 잃어버렸도다.

 봉암일소천고희(鳳岩一笑千古喜)
 희양수곡만겁한(曦陽數曲萬劫閑)
 내년갱유일륜월(來年更有一輪月)
 금풍취처학려신(金風吹處鶴戾新)

 봉암사에 한 번 웃음 천고에 기쁨이요
 희양산 구비구비 만겁에 한가롭도다.
 내년에 다시 한 수레 밝은 달이 있어서
 금풍이 부는 곳에 학의 울음이 새롭구나.

이후부터 천하 노화상(天下老和尙)의 설두(舌頭)에 속임을 입지 않고 임운등등(任運騰騰), 등등임운(騰騰任運)하여 천하 총림(天下叢林)에 대사자후(大獅子吼)를 하셨습니다.

선 기자 : 역대 선지식의 전법게를 들으니 환희심이 납니다. 큰스님, 장시간 좋은 말씀 대단히 감사합니다.


65. 영조(靈照)의 차수(叉手)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건법당입종지(建法幢立宗旨)
 금상첨화(錦上添花)
 투과형극림(透過荊棘林)
 해개불조박(解開佛祖縛)
 득온밀전지(得穩密田地)
 제천봉화무로(諸天捧花無路)
 외도잠규무문(外道潛窺無門)
 십마인임마래(什麽人恁麽來)

 법당을 일으키고 종지를 세움은
 금상첨화라.
 형극림을 뚫고 지나
 불조의 결박을 풀어 엶이로다.
 은밀한 전지(田地)를 얻어야
 제천이 꽃으로 공경히 받들려고 하나 길이 없음이요
 외도가 가만히 보려고 해도 문이 없도다.
 어떠한 사람이 이렇게 옴인고?

어느 날 방(龐) 거사가 앉았다가 딸 영조(靈照)에게 묻되,
“옛 사람이 말하기를, ‘밝고 밝은 백 가지 풀끝에 밝고 밝은 조사의 뜻이라.’ 했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고?”하니 영조가 대답하되,
“아버지, 머리가 희고 이가 누렇도록 수도(修道)를 했건만, 아직도 그런 소견밖에 짓지 못하십니까?”하였다.
방 거사가 말하되,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밝고 밝은 백 가지 풀끝에 밝고 밝은 조사의 뜻입니다.”하였다.

대중아!
방 거사와 영조의 문답처(問答處)를 잘 보라.
거사의 답처와 영조의 답처가 같은가? 다른가?

 영조는 한낱 여자의 몸이로되
 모든 조사(祖師)를 능히 지나가는 안목이 있음이로다.

또 하루는 방 거사가 집을 비웠는데, 단하 천연(丹霞天然) 선사가 왔다가 영조가 나물 씻는 것을 보고,
“거사께서 계시는가?”하고 물으니,
영조가 나물바구니를 놓고 일어서서 차수(차수)하고 섰다.
단하 천연 선사가 다시 묻되,
“거사께서 계시는가?”하니, 나물바구니를 이고 집으로 가버리자, 단하 선사는 되돌아갔다.

이 어찌된 문답이냐?

 과연 영조는 문수, 보현, 미륵과 같이 큰 지혜로써
 만세(萬歲)에 선문(禪門)의 종안(宗眼)을 갖춤이로다.

또 하루는 방 거사가 초막 암자에 일가족이 모여 있었는데 말하되,

“어렵고 어려움이여! 백 섬이나 되는 마(麻) 기름을 나무 위에 폄이로다.”
하니, 방 바자(龐婆子)*가 말하기를,

“쉽고 쉬움이여! 백 가지 풀끝에 조사의 뜻이로다.”하니 그의 딸 영조는 말하되,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음이여!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잔다.”하였다.

대중아!

 이 세 사람의 답처는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이 가슴 속에서 흘러나오니
 하늘을 덮고 땅을 덮음이로다.

방 거사의 일가족과 같은 안목을 갖추어야사 만세 안락을 누릴 것이요, 제불제조(諸佛諸祖)로 더불어 동참하리라.

필경에 여하오?

양구하신 후 이르시되,

 상봉진도휴관거(相逢盡道休官去)
 림하하증견일인(林下何曾見一人)

 서로 만나 다 말하기를 벼슬을 쉬어간다 함이나
 수풀 아래 어찌 일찍이 한 사람을 보았으리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8월 16일 삼년 결사(三年結社) 해제 법어
석남사 정수선원에서


66. 연등 대제(蓮燈大祭) 법어

 일엽연등표표류(一葉蓮燈飄飄流)
 일편심재하처거(一片心載何處去)
 심성고향유원처(心性故鄕幽源處)
 도홍이백별유촌(桃紅李白別有村)

 한 잎 연등은 표표히 흘러
 한 조각 마음 싣고 어느 곳으로 가는고?
 마음의 고향 그윽한 근원처에
 복사꽃 붉고 오얏꽃 흰 별유촌이더라.

오늘 연등 대제에 사부대중의 신심어린 동참 발원으로 해수관세음보살님이 한 송이 연꽃 타고 강 위에 강림(降臨)하셨네.
일체중생 근심 걱정 다 소멸하고 모든 소원을 다 성취케 하는 해수관세음보살님이시여!

어제는 보타산 산정에 계시더니, 금일에는 이곳 연등 대제 도량 중에 강림하셨네.

시회대중아!
관세음보살님을 보았느냐?

염주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간간(看看)!
 보고 보아라!
하시고 하좌하시다.

불기 2541년 10월 12일
을숙도 현지에서


67. 조사(弔辭)

월산 대종사 영결식전에

월산 성림(月山聖林) 대종사의 정액상 일구 진리는 옛적에도 빛남이요, 이제도 등등(騰騰)함이라. 좌지우지(左之右之)에 일구를 더하니 한가한 일이 있음이로다.

 한사재혜(閑事在兮)여!
 한가한 일이 있음이여!

토함산 토목들은 주야로 대광명을 놓고, 동해 물 속 밝은 달은 빛남이로다.

월산 대종사의 명성이 세간에 분분하니, 금일 모든 대중이시여!
월산 대종사의 한명(閑名)을 없앨 자가 있느냐?
대중이 말이 없으니,

 부혐천구소(富嫌千口少)
 빈한일신다(貧恨一身多)

 부자는 입이 천 개라도 적다고 싫어함이요,
 가난한 자는 한 몸도 많다고 한탄함이로다.

불기 2541년 9월 10일
전국 선원 대표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68. 남원(南院)의 일방(一棒)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당당좌단천차로(堂堂坐斷千差路)
 도기철마입중성(倒騎鐵馬入重城)
 연화타타화중개(蓮花朶朶火中開)
 청산보보수상행(靑山步步水上行)

 당당히 앉아서 천차로(千差路)를 끊고
 철마를 거꾸로 타고 중성(重城)을 들어감이라
 연꽃은 송이송이 불 가운데 핌이요
 청산은 걸음걸음 물 위를 행함이로다.

옛 도인들이 이르기를,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니라.’ 하셨다.
활구 아래 알아 얻으면 길이 의심하여 막힘이 없음이요, 사구 아래 알아 얻으면 자기 스스로도 구제하지 못한다. 모든 대중은 활구참선을 하여 일념(一念)이 지속되게 노력하라.

예전에 남원(南院)* 선사가 제자인 풍혈(風穴)*에게 묻되,
“남방에서는 한 봉(棒)의 주장자를 어떻게 헤아리던가?”하니 풍혈이 대답하기를,
“기특하다고 헤아립니다.”하고는 도리어 남원 선사께 묻되,
“이 지방에서는 어떻게 헤아립니까?”하니 선사가 주장자를 가로 끼고 말하되,
“방망이 아래 무생법인(無生法忍)이여, 기틀에 다다라서는 스승도 사양치 않느니라.”하였다.

이에 산승이 말하노니,

대중아!

양(兩) 대선사의 문답처를 잘 보라!

 두 사람이 눈 멀음을 면치 못하도다. 웬 일이냐?
 풍혈 스님이 이르기를, ‘기특하다고 헤아립니다.’ 하니,

 호여삼십봉간출(好與三十棒赶出)
 좋게 삼십 봉을 때려서 내쫓으리라.

그러나 남원 선사는,

 임제 문하의 적자(嫡子)로다.

할(喝)!
일 할(一喝)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11월 18일 지장재일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69. 무정설법(無情說法)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건곤진시황금국(乾坤盡是黃金國)
 만유전창정묘신(萬有全彰淨妙身)
 옥녀개풍무교졸(玉女皆風無巧拙)
 영묘화수부지춘(靈苗花秀不知春)

 건곤이 다 이 황금국이요
 만 가지 있는 것이 온전히 정묘신이 빛남이라.
 옥녀는 공교롭고 졸함이 없는 것을 풍류함이요
 신령한 싹에서 꽃이 핌이나 봄을 알지 못함이로다.

송나라 때 소동파(蘇東坡)*는 당(唐)·송(宋)의 8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서 문학사상 찬연한 빛을 던진 대가이다.
하루는 소동파가 형남에 있을 때, 근방에 있는 옥천사(玉泉寺) 승호(承皓)* 선사를 방문하게 되었다. 어느 날 변복을 하고 승호 선사를 만나니, 승호 선사가 물었다.
“대관(大官)의 존함은 누구요?”
“나의 성(姓)은 칭(秤)가요.”
“칭가라니? 제방(諸方)을 저울질하러 다니오?”
“그렇소이다.”
승호 선사가 대뜸 일 할(一喝)을 하고 나서,
“이 할(喝)이 몇 근이나 되오?”하니, 여기에서 일생동안 공부와 재치, 식견이 빙소와해(氷消瓦解)가 되어서 기고만장한 위세가 다 꺾여버렸다. 그런 후로는 세상에 문장과 재주, 변재(辯才)는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선지식이 있다는 곳을 다 찾아서 법문 듣기를 좋아하였다.

하루는 명성이 높고 도법(道法)이 고준한 대선지식이 계신다는 말을 듣고, 노산 흥룡사에 주석하신 상총(常聰)* 선사를 찾아가 인사를 올리고,
“선사님의 법문을 들으러 왔습니다.”하니 상총 선사가 말하기를,
“그대는 유정설법(有情說法)만 들으려 하고 무정설법(無情說法)은 들으려 하지 않는고?”하였다.
소동파는 난생 처음으로 듣는 ‘무정(無情)이 설법한다’는 말에 의심이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의심삼매에 들었다. 수십 리를 말을 타고 먼 길을 달리면서 길을 잃고 다시 산모퉁이를 돌아오는 순간, 산골짜기 폭포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에 대오(大悟)하였다.
게송(偈頌)을 짓기를,

 계성편시광장설(溪聲便是廣長舌)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

 산골짜기 흐르는 물소리가 문득 이 광장설인데
 산색이 어찌 청정신이 아니겠는가?
 밤이 옴에 팔만 사천 법문을
 다른 날에 어떻게 사람에게 들어서 보일꼬?

소동파는 이처럼 여생(餘生)을 불법(佛法)의 낙을 누리며 잘 사셨다.
우리 모두 소동파의 깨달음을 살펴보자.
선지식을 만나 방망이를 맞음으로써 의정(疑情)이 돈발(頓發)하여 깨닫게 되었으니 우리도 이와 같이 노력해보자.

필경에 여하(如何)오?

 묘명일구위음외(妙明一句威音外)
 절각니우설리면(折角泥牛雪裏眠)

 묘하고 밝은 일구는 위음왕불 밖이니
 뿔이 끊어진 진흙소는 눈 속에서 졸더라.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9월 초하루
해운정사 원통보전에서


70.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법상에 오르시어 묵묵히 계시다가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한번 치시고 이르시기를,

 산승이 가지고 있는 이 주장자의 머리에서
 모양 없는 참광명이 나와 온 세계를 비추니,
 육도의 모든 중생의 세계와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세계가 한 집을 이룸이로다.
 만약 여기에서 모든 번뇌를 끊어버리려 하면 번뇌는 더욱 치성해지고,
 모든 진리를 닦고 닦으려 하면 진리는 더욱 멀어진다.
 만약 사람이 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을 것 같으면
 진리의 본체가 저절로 드러나며, 모든 중생과 더불어 수순(隨順)하고,
 ‘나’라는 생각을 다 잊어버리면,
 ‘산다, 죽는다, 진리다, 열반이다’ 하는 것이 모두 허공 가운데 꽃이로다.

부처님께서 도솔천에 계시다가 사바세계에 출세할 인연이 도래하여 마야 부인 태중에 들어 열 달 만에 이 세상에 나오셨다.
여기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도솔천을 여의지 않고 마야 부인 태중에 들었으며, 마야 부인 태중에서 나오지 않고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해 마쳤노라.”하셨는데, 이것이 부처님의 진리를 다 드러낸 말씀이다.
그러나 진리의 눈을 갖춘 자가 부처님의 이 말씀을 보건대,

 시퍼런 칼날 위에 묻은 벌꿀을 핥는 것과 같으며,
 또한 시퍼런 칼날 위를 달리는 것과 같음이로다.

부처님께서 마야 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나오셔서 일곱 걸음을 옮기신 뒤,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일성(一聲)을 토하셨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하늘 위와 하늘 아래 ‘나’만이 홀로 높다.

이로부터 천이백 년 후에 출세하신 운문(雲門)* 선사께서는 부처님의 이 말씀에 대해서,
“내가 그 당시에 있어서 한 몽둥이로 갈겨, 개에게나 던져 주었더라면 온 천하가 태평했을 것이다.”라고 한 마디 평(評)을 붙이셨다.
왜 위대한 부처님의 말씀을 그렇게 점검했느냐?
이 점검에 또한 지극한 진리의 일구(一句)가 숨어 있는 것이다.

당시에 법안(法眼)* 스님이 운문 선사의 이 말을 전해 듣고 크게 노하여,
“위대한 부처님을 어찌 그렇게 비방할 수가 있느냐?”하고 꾸짖었으나, 20년 후에 불법의 진리를 확연히 깨닫고서는,
“운문 선사께서 부처님의 은혜를 반이나 갚으셨다.”라고 말씀하셨다.
진리의 눈이 열리기 전에는 운문 선사의 말씀에 노발대발하더니, 깨닫고 나서는 이렇듯 달라졌으니 이 어찌된 연고인가?
운문 선사의 그와 같은 폭언 가운데는 참으로 부처님의 은혜를 온전히 다 갚고도 남는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시회대중은 운문 선사를 알겠는가?

 운문 선사께서 대장부의 활계(活計)를 쳐서 모든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였으나,
 운문 선사 뒤에 산승이 또 보고 있는 것은 어찌할꼬?

한참 묵묵히 계시다가 이르시기를,

 향하(向下)의 글이 길어서 내일에 부치리라.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신유년(1981) 동안거 결제일
해운정사 원통보전


71. 석가, 달마도 다시 참구해야 옳다

 만고벽담공계월(萬古碧潭空界月)
 재삼노녹시응지(再三撈鹿始應知)

 만고의 푸른 못에 비친 공계의 달을
 두서너 번 건져 보아야 비로소 알리라.

석가, 달마도 다시 참구해야 옳다.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천(人天) 백만 대중에게 꽃을 들어 보이시니, 오직 가섭 존자만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미소 지었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을 가섭 존자에게 부촉하셨다.

알겠는가?

 정법안장열반심(正法眼藏涅槃心)
 시상가첨야부지(屎上加添也不知)
 서천지나치남녀(西天支那痴男女)
 개안화탕노탕거(開眼火湯爐湯去)

 정법안장과 열반묘심이여!
 똥 위에 똥을 더함을 알지 못함이라.
 서역과 동토의 어리석은 남녀들을
 눈을 뜨고 지옥으로 가게 함이로다.

무진년(1988) 동안거 결제일
해운정사 원통보전


72. 본래신(本來身)

 사람 사람의 면전(面前)에 형상 없는 참사람이 항시 출입자재하고 있어,
 목전(目前)에 있길래 보려고 하니 문득 뒤에 가서 있고,
 뒤에 있어 붙잡으려 하니 홀연히 천리 만리 밖에 가 있더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옳으냐?

 보려고 하고 잡으려 하는 것을 다 놓아버리면 홀연히 정좌해 있음이로다.

불법(佛法)은 이 형상 없는 참사람을 바로 아는 데에 묘한 뜻이 있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들께서도 이 형상 없는 참사람을 밝혀서 천상 천하에 위대한 성자(聖者)가 되신 것이다.
사람 사람에게 다 모양 없는 한 물건[一物]이 있어서 이 몸뚱이 가운데 출입자재하건만, 우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고로 윤회 고통이 쉴 새가 없는 것이다.
이 참사람만 발견할 것 같으면 생사고(生死苦)가 해결될 뿐 아니라, 거기에는 무량의 복(福)이 있고, 한량없는 덕(德)이 있고, 크나큰 지혜가 있고, 다함이 없는 수명이 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 좋은 법이 자기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바깥으로만 치닫는다. 돈과 명예와 애욕 등 마음의 병통을 초래하는 이러한 것들에 허송세월하다 보면 금생이 괴로울 뿐만 아니라, 내생도 괴롭고 세세생생토록 행복할 날이 없다.
그러므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의식주만 해결된다면, 재물과 명리와 같은 허망한 것을 위해서 이 귀중한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
자기의 ‘참사람’을 찾는 이 일!
이 일 밖에 무슨 큰 일이 있을까?
이 ‘참사람’을 찾은 연후에는 세상사가 다 원(願)을 따라, 마음을 따라 이루어지는 법이다. 진리를 깨닫고 나면 세상의 출세와 부귀라는 것은 콧구멍의 때만큼도 못하지만, 그러한 것도 역시 마음먹는 대로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우리의 할 일은 오직 이 화두 공부, 자신의 ‘참사람’을 찾는 이 일이 급선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사람마다 이 몸뚱이를 지배하는 ‘참사람’이 하나 있어 온갖 작용을 다 한다.
‘가고, 오고, 듣고, 부르면 말하고, 좋다·나쁘다 분별하고, 일상생활 하는 가운데 분명히 쓰고 있으면서 잡아 거두어 알지 못하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 문제를 가지고 오매불망 아주 간절히 생각하면서 의심할 것 같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의 모든 번민, 갈등 등을 다 잊어버리게 된다.
골똘히 의심하는 그 ‘한 생각’이 지속됨으로 인해서 모든 분별, 망상이 끊어진다. 번뇌가 일어나려야 일어날 것이 없다.
마음 가운데 모든 분별망상이 재가 되어 버렸으니, 남은 것 오직 화두일념 뿐이다.

 시심마(是甚麽)오?
 이 무엇인고?

의심하는 것이 일념이 되어 하루가 흐르고 한 달이 흐르고 일 년이 흘러도 지나간 줄 모르는 여기에서 문득 열반의 광명이 현전하게 된다.

경전에 보면 나타 태자(那吒太子)라는 이가 있다. 이 나타 태자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몸뚱이를, 살은 어머니에게 다 돌려드리고 뼈는 아버지께 다 돌려드리고서, 본래의 몸[本來身]을 나투어, 부모님을 위해 연화대(蓮花臺) 위에서 부처님의 심오한 법을 설하였다.

참으로 희유한 일이다. 이것은 세상 사람으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일 것이다. 육신(肉身)이 있어야 말을 하고 법을 설하는데 본래신(本來身)을 나투어서 설법하였다고 하니, 사람이 자기의 참모습을 보아 안목이 열리면 이러한 데에 조금도 의심이 없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세상 사람들은 지수화풍(地水火風), 곧 사대(四大)로 형성이 된 이 몸을 ‘나’로 삼고 있지만, 이 몸뚱이를 지배하는 ‘참사람’이 있다. 오늘 이 법회에 와서 법문을 듣고자 하는 그 ‘주인공’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몸은 사대(四大)로 구성되었다가  백년 이내에 다 각기 흩어져 돌아간다. 살과 뼈는 흙[地]으로 돌아가고, 침·콧물·오줌·눈물 같은 것은 물[水]로 돌아가고, 따뜻한 기운은 불[火]로 돌아가고, 움직이는 것은 바람[風]으로 돌아가는데, 이렇게 뿔뿔이 흩어져버리면 형상이 없게 된다.
사람의 몸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이 우주도 마찬가지이다. 먼지나 티끌들이 모여서 지구가 되고, 우주를 형성했다가, 오랜 겁(劫)이 지나면 그것이 다 무너지고 티끌로 화(化)해서 필경에는 다 없어지고 만다. 그리하여 수없는 세월이 흐르면 없는 그 가운데에서 또 다시 형상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을 성(成), 주(住), 괴(壞), 공(空)이라 한다.
사람의 몸이나 이 거대한 우주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단지 수명의 장단(長短)과 형상의 대소(大小)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든 현상계는 생노병사(生老病死)와 생주이멸(生住離滅)과 성주괴공(成住壞空)을 하는 이치는 같다.
그러한 고로 모든 형상 있는 것은 이렇게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한 물건[一物]은 영겁토록 불변하다.
그렇기 때문에 선(禪) 수행을 잘 닦아서 자신의 ‘참사람’을 발견한 이는 죽음에 다다라도 태연하고 다음 생에 모양만 바꿔온다.
가고 오고, 나고 죽음이 없는 진리의 체를 분명히 본 고로, 날 적마다 불국토를 여의지 아니하고 대안락(大安樂)을 향유한다.
나타 태자가 부모를 위해 본래의 몸을 나투어 법을 설하셨는데, 어떠한 것이 본래신이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남자는 남자요
 여자는 여자이니라.

기사(1989) 오월 보름
해운정사 원통보전


73. 파초(芭蕉) 주장자

탁주장일하운(卓拄杖一下云)

 요평불평(要平不平)에 임제덕산정령행(臨濟德山正令行)이요,

 

탁주장일하운(卓拄杖一下云)

 의천조설(倚天照雪)에
 혈해도도수미정(血海滔滔須彌頂)이로다.

 

탁주장일하운(卓拄杖一下云)

 적적(賊賊)이여
 납승비공증념득(衲僧鼻孔曾拈得)이로다.
 십마인(什麽人)이 임마래(恁麽來)오.

 

주장자를 한 번 치시고 이르시되

 불평을 평평하게 요함에
 임제 선사와 덕산 선사의 정령을 행함이요,

주장자를 또 한 번 치시고 이르시되

 보검의 빛이 눈[雪]을 비치니
 피바다가 수미산 꼭대기에 넘실거림이로다.

주장자를 한 번 치시고는

 도적, 도적이여
 납승의 콧구멍을 일찍이 잡아 얻음이로다.
 어떤 분이 이렇게 걸어 옴인고?

 

파초 혜정(芭蕉慧情) 선사가 법상에 오르시어 말씀하시기를,

"너에게 주장자가 있으면 주장자를 주고, 너에게 주장자가 없으면 주장자를 뺏으리라."

어째서 주장자가 있는데 주고, 없는데 빼앗는다 하는고?
이 법문 아래 분명히 얻을 것 같으면 백천 삼매(百千三昧)의 법문을 알아 가리라.

 

 유마 거사는 방장실(方丈室)을 여의지 아니함이나
 문수 보살이 올 것을 스스로 앎이로다.

 

대중은 파초 선사를 알겠느냐?

 

 여탈임시자재용(與奪臨時自在用)하니
 사바인간능기기(娑婆人間能幾幾)냐

 

 주고 빼앗는 때에 다다라 자재하게 쓰니
 사바세계 인간 가운데 이와 같은 이가 몇몇이나 될꼬?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동안거 결제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74. 호리유차 천지현격(毫釐有差天地懸隔)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대지여우(大智如愚)며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
 용진공부참불철(用盡工夫參不徹)이라.
 막어평지상증퇴(莫於平地上增堆)하고
 휴향허공리정궐(休向虛空裏釘橛)어다.

 큰 지혜는 어리석음과 같으며
 크게 공교로움은 졸(拙)함과 같은지라.
 공부를 써서 다함에 참구해도 사무치지 못함이니
 저 평지 상에 무더기를 더하지 말고
 허공을 향해서 말뚝박음을 쉴지니라.

법안(法眼) 선사가 일일(一日)에 수산주(修山主)에게 물었다.
“‘호리(毫釐)만큼도 어김이 있으면 하늘과 땅 사이가 벌어진다.[호리유차천지현격(毫釐有差天地懸隔)]’ 하니,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고?”
“호리만큼 어긋나면 하늘과 땅 사이만큼 벌어짐이로다.”
“이러할진대 어찌 얻었으리요?”
“모갑(某甲:본인을 낮추는 말)은 이와 같이 답을 했거늘 화상(和尙)은 어떠합니까?”
“호리만큼 어긋남이 있으면 하늘과 땅 사이가 벌어짐이로다.”
이에 수산주가 예배(禮拜)를 하였다.

대중은 법안 선사를 알겠느냐?

 전광리(電光裏)에 전기(轉機)하니
 선지식중선지식(善知識中善知識)이로다.

 번갯불 속에 기틀을 굴리니
 선지식 중 선지식이로다.

수산주를 알겠느냐?

 지은(知恩)하야사 방해보은(方解報恩)함이니
 과연적자(果然嫡子)로다.

 은혜를 알아야만 은혜를 보답함이니 과연 맏아들이로다.

필경에는 어떻게 생각하는고?

 낙하여고목제비(落霞與孤鶩齊飛)요
 추수공장천일색(秋水共長天一色)이로다.

 저녁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더불어 가지런히 낢이요
 가을 물은 긴 하늘과 같이 일색(一色)이로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동안거 반살림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


75. 만상지중독로신(萬像之中獨露身)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극진목전의로(極盡目前義路)하고
 절단고금오와(截斷古今誤訛)하여
 직하투정투저(直下透頂透底)하여
 일향파진파적(一向破塵破的)이어다.
 이상리명인불품(離相離名人不稟)이니
 취모용료급수마(吹毛用了急須磨)어다.

 목전에 뜻 길이 다하고
 고금의 잘못됨을 끊어서
 직하에 이마 위를 뚫고 아래를 뚫어서
 일향(一向)에 티끌을 파하고 밝음도 파할지니라.
 상(相)을 여의고 이름을 여의면 사람들이 본받으려 아니함이니
 취모검을 쓰려거든 급히 모름지기 연마할지어다.

석일(昔日)에 법안(法眼) 선사는 오래도록 장경(長慶) 선사 회상에서 지내시다가, 후에 지장(地藏)* 선사의 법을 이었는데, 장경 선사 회상에 있던 자소(子昭)*라는 수좌가 찾아와서 항의해 묻기를,
“장로(長老:법안 선사)가 개당하시니 법을 어느 분에게 이었습니까?”
“지장 선사니라.”
“크게 장경 선사를 져버림이로다.”
“모갑이 장경 선사의 일전어(一轉語)를 알지 못함이라.”
“어째서 물어 오지 아니합니까?”
“만상(萬像) 가운데 홀로 드러난 몸은 그 뜻을 어떻게 생각하는고?”
이에 자소 스님이 불자(拂子)를 들어 보이니 법안 선사가 말했다.
“이는 장경 선사께 배워 얻은 것이니 수좌 분상(分上)에는 어떻게 생각하는고?”
자소 스님이 말이 없으니 법안 선사가 물었다.
“저 만상 가운데 홀로 몸이 드러남이라 하니, 이 만상을 헤침[撥]인가? 헤치지 아니함인가?
“헤치지 아니함입니다.”
“두 개로다.”
“만상을 헤침입니다.”
“만상 가운데 홀로 드러난 몸은, 기(呩)라.”

대중은 알겠는가?

 자소 스님은 만상을 헤치지 아니한다고 답하니
 과연 눈 먼 한(漢)이로다.

산승이 당시에 법안 선사가
“만상 가운데 홀로 드러난 몸이라 하니 이 만상을 헤침인가? 헤치지 아니함인가?”하고 이렇게 물으면, 문득 일 할(一喝)하고

 간간(看看)!
 보고 보아라!
하리라.
도리어 알겠느냐?

 만상지중독로신(萬像之中獨露身)은
 지허가인독자지(只許佳人獨自知)니라.

 만상 가운데 홀로 드러난 몸은
 자못 가인이라야 홀로 앎을 허락함이로다.

할(喝)!
일 할 하고 하좌하시다.


76. 풍혈(風穴) 철우지기(鐵牛之機)

 대야(大冶)에 정금(精金)이요
 징담(澄潭)에 교월(皎月)이라.
 남북동서(南北東西)에 수분우열(誰分優劣)이리오.
 작야춘풍일진래(昨夜春風一陣來)에
 소진천산만산설(掃盡千山萬山雪)이로다.

 큰 담금질에 정미로운 금이요
 맑은 못에 밝은 달이로다.
 남북동서에 누가 우열을 나누리오.
 어젯밤 봄바람이 한바탕 불어오매
 천산 만산에 눈들이 다 녹음이로다.

풍혈 연소(風穴延昭) 선사가 상당하여 말씀하시기를,
“조사(祖師)의 심인(心印)은 모양이 철우(鐵牛)의 기틀과 같은지라, 간즉은 인에 머무르고[去則因住], 머무른즉 인을 파함이니[住則印破], 다못 가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을 것 같으면 인(印)이 옳으냐? 인(印)이라고 하지 아니하는 것이 옳으냐?”하시다.
작가 종사(作家宗師)는 일기 일경상(一機一境上)에 높이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잡아서 철(鐵)을 점(點)쳐서 금(金)을 이루며, 금을 점쳐서 철을 이룸이니, 천하 총림에 불조(佛祖) 가풍을 떨침이로다.

알겠느냐?

 원앙수료종군간(鴛鴦繡了從君看)이나
 막파금침도여인(莫把金針度與人)이라.

 원앙새 수 놓음은 그대를 좇아 봄이나
 금침(金針)을 잡아 사람에게 주지는 못하니라.

정축년(1997) 11월 초하루
해운정사 원통보전


77. 일러도 삼십 방, 이르지 못해도 삼십 방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천차만별해투기(千差萬別解投機)는
 명안종사자재시(明眼宗師自在時)로다.
 북두장신수유어(北斗藏身雖有語)나
 출군소식소인지(出群消息小人知)로다.

 천차 만별의 기틀을 던질 줄 앎은
 명안 종사의 자재하게 쓰는 때로다.
 북두에 몸을 감춤은 비록 말은 있음이나
 무리에서 뛰어난 소식은 아는 이가 드물도다.

일일(一日)에 덕산(德山) 선사가 대중에게 법문하시기를,
“이르고 일러라. 일러도 삼십 방을 맞고, 이르지 못해도 삼십 방을 맞음이라.”
하셨다.
이 법문을 임제(臨濟) 선사가 전해 듣고 시자(侍者)를 불러 영(令)을 내렸다.
“네가 덕산 선사 회상에 가서, 덕산 선사가 ‘일러도 삼십 방을 맞고 이르지 못해도 삼십 방을 맞음이라.’ 하거든, 문득 묻되, ‘바로 일렀는데 어째서 삼십 방을 때립니까?’ 하여, 저가 때리거든 네가 주장자를 잡아서 한 번 밀어버려라.”
시자가 가서 지시대로 하니, 덕산 선사가 시자에게 한 번 밀려 거꾸러짐을 당해서 문득 방장실로 돌아가서 문을 닫음이로다.
시자가 임제 선사에게 돌아와서 들어 말하되, 임제 선사가 말하기를,
“네가 옴으로 좇아 저 늙은이를 의심했노라. 비록 이와 같으나 네가 도리어 덕산을 봤느냐?”하니, 시자가 우물쭈물하거늘 임제 선사가 문득 때렸다.

대중아!
여기에 분명히 알아가지 못하면 다시 제방 선지식을 참례해 방문하여야 옳다.
그러므로 이르건대,

 불가이유심구(不可以有心求)하며
 불가이무심득(不可以無心得)하며
 불가이언어주(不可以言語做)하며
 불가이적묵통(不可以寂黙通)이니라.

 가히 유심으로도 구하지 못하며
 가히 무심으로도 얻지 못하며
 가히 언어로도 짓지 못하며
 가히 적묵으로도 통하지 못하니라.

대중은 임제 선사와 덕산 선사를 알겠느냐?

 용호상박(龍虎相搏)에 난형난제(難兄難弟)로다.

비록 그러하나 한바탕 허물을 받음이로다.

허물이 어느 곳에 있음이고?

 일갱매각(一坑埋却)하리라.
 한 구덩이에 묻어버리리라.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무인년(1998) 정월 초삼일
해운정사 원통보전


78. 불조(佛祖)의 행리(行履)

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거불횡추(車不橫推)요 이무곡단(理無曲斷)이라
 고인수즉전기거령(古人雖則全機據令)이나
 요차노이무공(要且勞而無功)이로다.
 하고(何故)냐
 불견도(不見道)아
 득력(得力)이 불여봉시(不如逢時)로다.

 수레는 옆으로 밀지 못함이요
 이치는 굽게 끊지 못함이라.
 옛 도인들이 비록 온전한 기틀로 정령을 잡음이나
 종요로이 수고로움이나 또한 공이 없음이로다.
 어째서 그러하냐?
 이름을 보지 못했는가?
 힘을 얻음이 때를 만남과 같지 못함이로다.

대중아! 나고 날 적마다 일체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할진대 탐진치(貪嗔痴) 삼독(三毒)을 제거할지니, 탐진치를 뿌리째 제거하지 못하면 이로 쫓아 팔만 사천 번뇌가 머리를 다투어 일어나나니 한량없는 세월에 나고 죽는 근본이로다.
모든 분들이 생활속에 참나를 밝히는 선(禪) 수행을 하면 자연히 탐진치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돌아와서 역겁다생(歷劫多生)에 무명(無明)이 소멸되고 대원경지(大圓鏡智)가 현전하여 자재무애(自在無碍) 경지를 수용함이로다.
모든 부처님과 모든 도인 스님네들께서는 이러한 행리(行履)와 용심(用心)을 하오니 다음에 드는 것을 보라.

 안과장공(鴈過長空)에 영침한수(影沈寒水)로되
 안무유종지의(鴈無遺蹤之意)요
 수무류영지심(水無留影之心)이로다.

 기러기가 높은 허공을 날아감에 그림자가 찬물에 잠기되
 기러기는 그 자취를 남길 뜻이 없음이요
 물은 기러기의 그림자를 머무르게 할 마음이 없음이로다.

모든 대중들도 이와 같이 행할지어다. 이와 같이 용심하면,

 화리연화처처개(火裏蓮花處處開)에 종불괴(終不壞)리라.
 탄지원성팔만문(彈指圓成八萬門)하니
 찰나멸각항사업(刹那滅却恒沙業)이로다.

 불 속에 연화가 처처에 핌에 마침내 무너지지 아니하리라.
 손가락 튕기는데 팔만 사천 법문을 뚜렷이 이루니
 찰나지간에 항하강 모래 숫자와 같은 업을 소멸함이로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정축년(1997) 동안거 해제일
해운정사 원통보전


후기(後記)

벚꽃이 만발하고 새순이 돋는 봄의 길목에서 법어집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조실스님의 사자후와 경책도 건강하실 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요즘 매일 뒷산에 포행을 가시니 여간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실스님께서 33세에 활연대오 하시고 중생교화의 길에 나선 지 어언 30여 년, 수많은 스님, 거사, 보살이 다녀갔지만 여지껏 상통되는 이가 없었다 하시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조실스님께서는 항상 법상, 금모선원, 시민선원, 매주 토요일 철야정진 등 새벽, 저녁에 수시로 경책해 주시고, 스님, 재가불자, 일반인 등 누구를 막론하고 다 만나서 가르침을 내려 주시고 계십니다.
조실스님께서 선가(禪家)에 이설(異說)이 횡행하여 정법을 오도하고 있는 현실을 크게 염려하셨습니다. 잘못된 사상을 바로잡기 위해서 육조혜능, 남악, 마조, 백장, 남전, 황벽, 임제, 덕산, 운문선사 등 정안종사의 귀감을 들어서 법문해 오셨습니다.
4년 전에 법어집 돌사람 크게 웃네를 내시고 그 이후 여러 대중에게 설하신 법어를 모았습니다. 이 법어가 어렵기는 하지만 바른 선수행의 길이 열려 있어 눈푸른 납자와 모든 국민의 바른 길잡이가 되었으면 합니다.
개개인의 진정한 발심수행으로 확철히 깨쳐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 중생의 고통을 외면 내지 일신의 영달만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며, 제불제조의 막대한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며, 조실스님의 자비원력의 본뜻을 받드는 일이 될 것입니다.
법신은 무한하나 육신은 무너지니, 큰스님의 직접 지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사바세계에 머물러 계실 때 가능한 것이기에 각자 급하고 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반도의 국난타개와 세계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세계의 모든 국민이 바른 선수행으로 정안을 갖추어야 된다고 누누이 강조해 오셨습니다.
이 시대의 아픔을 극복하고 동시대 동업중생의 인과를 면하기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의 반성과 발심정진으로 지구촌 전법의 청정국토 대작불사에 크게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끝으로 시간을 내셔서 서문을 써 주신 고불총림 방장 서옹대선사께 감사의 예를 올립니다.
법어집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애쓰신 여러 스님들께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아울러 불사(佛事)하는 마음으로 임하신다고 말씀하신 화산문화 허만일 사장님의 정성에 감사드리며 출판에 인연 맺으신 모든 분들께 불은(佛恩)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무쪼록 이 법어집을 가까이 두고 읽고 정진하며, 문은 항상 활짝 열려 있으니 누구든지 직접 친견하고 여쭈어 가면서 올바른 수행으로 정법안장을 갖추시기를 앙망합니다.

불기2542년 4월
시자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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