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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법어집] 선백문백답(禪百問百答)
법문장소 admin (법문일자 : 1970.01.01 / 조회 : 15768)

 

 


禪百問百答

 

 

 

 

1997. 정축년(丁丑年) 9月 동화사 기초선원 좌담법문

 

우리가 출가(出家)한 본래의 뜻은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그러면, 견성성불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정진해야 되느냐?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야 된다. 고인(古人)네들, 명안종사(明眼宗師)들도 활구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다.
“다못 활구를 참구(參究)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는 말라” 또, “활구(活句)를 참구하면 부처님과 조사(祖師)의 스승이 된다”는 등,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그러면, 사구를 참구하면 어떠하냐? 견성 성불은 커녕 자기 자신도 구제하기 어렵다. 이렇게 활구와 사구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활구참선은 어떤 것이 활구참선이냐?
일천 성인(一千聖人)의 정액상(頂額上)의 일구를 투과(透過)해야만 활구가 된다. 일천 성인의 그 이마 위의 일구를 투과하지 못하면 활구의 세계를 전혀 모른다는 뜻이다. 활구의 세계를 투과할 것 같으면 불조(佛祖)의 스승이 된다고 했다. 그러니 일천 성인의 정액상의 일구(一句)를 투과할 수 있도록 참구(參究)할지어다. 정액상 일구를 투과한 자는 살활종탈(殺活縱奪) 기용제시(機用齊示),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고 기(機)와 용(用)을 가지런히 쓰는 수완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구(死句)는 도저히 이러한 자재의 수완을 갖출 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도 구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기초선원(基礎禪院)의 모든 대중은 이러한 법문을 듣고 천성(千聖)의 정액상의 일구를 투과해서 인천(人天)의 사표(師表)가 될 수 있도록 혼신의 정력을 쏟아야 한다.
다겁다생(多劫多生) 동안 중생놀음만 익혀왔기 때문에 이 견성법(見性法), 화두법(話頭法)을 처음 참구하려고 하면 화두가 천리 만리 멀리 가 있어서 화두 잡기가 어렵다. 과거생에 익혀온 습기(習氣)와 혼침, 망상이 자리잡고 있으니 평범한 발심(發心)으로는 이 공부를 지어나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늘을 찌를듯한 대장부 용맹(勇猛)의 기틀을 가진 자만이 다겁다생에 익혀온 습기를 몰록 놓아버리고 이 견성법을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용맹과 대신심(大信心)이 없는 사람은 이 화두 공부를 할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대용맹과 대신심을 가지고 공부를 지어나갈 것인가’ 하면 오직 눈밝은 지도자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서 바르게 참구하는 법을 배워 화두를 간택(揀擇)한 뒤 일상 생활 속에 자나 깨나 혼신의 정력을 화두에 쏟을 것 같으면 자연히 습기는 잠자고 간절한 한 생각이 물 흐르듯이 도도히 흘러가게 되는데 화두가 도도히 흘러가서 깊이 들어가면 의심삼매(疑心三昧)가 현전해 가지고 밤이 되는지 낮이 되는지 모르고 나중에는 몸뚱이까지 잊은 상태에서 홀연히 보거나 듣거나 하는 찰나에 화두가 타파된다.
우리도 제불제조(諸佛諸祖)와 똑 같은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는데 대용맹, 대신심을 낸다면 못할 것이 없어.
그래서 옛 도인네들이 말씀하시기를, “의심이 크면 클수록 깨달음도 크다”고 하셨는데, 의심이 크다 보면 진의(眞疑)가 발로(發露)되어서 온 천지가 의심덩어리가 되는 게지. 그렇게 되어야만 화두가 해결이 되는 것이다.
요즈음 참선하는 이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화두를 챙기고 있는지 잠을 자는지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어. 화두를 들고 뼈골에 사무치는 의정(疑情)을 지어가는 사람이 없단 말이지. 그만큼 생각이 죽었다는 거지.
부모 형제를 어느 산적이 와서 다 한 칼에 베어버리고 혼자만이 그 광경을 보는 심정이 어떻겠어? 그러한 심정에서 화두를 챙길 것 같으면 혼침, 망상이 어른거리지 못한다.
이렇게 화두를 챙길 것 같으면 3년 이내에 다 화두가 타파된다.
공부 한 철 지어 가는데 있어서 지겹다는 생각이 있으면 출가인(出家人)으로서는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어서 석 달이 지나갔으면, 어서 또 바랑을 짊어지고 산천(山川) 구경을 갔으면, 이런 등등의 생각들이 있다면 납자(納子)로서는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 모든 반연을 놓아버리고 오로지 일념삼매(一念三昧)에서 화두가 지속이 되어 나가도록 정진하고 또 정진해 나간다면 시절 인연을 따라 홀연히 화두가 타파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화두가 타파가 되면 앉은 그대로 여래지(如來地)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최고의 견성법(見性法)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깨달은 후에 ‘삼칠일 동안 사유(思惟)하고 사유해도 내가 법(法)을 설(說)하지 않고 열반이 드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셨다. 참으로 부처님의 첫 살림살이로서 위대한 말씀인 것이다.
이때에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옆에 있다가, “부처님이시여, 깨달으신 법(法)은 그러하나 방편(方便)으로서 하근 중생(下根衆生)을 위하여 얕은 법을 설하여 주옵소서.” 하니, 할 수 없이 그 수순을 밟기 위해서 사십 구 년 동안 설법을 하셨는데 마지막 열반(涅槃) 당시에 대중을 모아 놓고 하시는 말씀이, “내가 사십 구년 동안 사람의 그릇을 따라 법(法)을 설하였으나 실(實)로 한 법(法)도 설(說)한 바가 없다.” 하셨거든. 이 멋진 일성(一聲)을 바로 들을 줄을 알아야만 사십 구년 설법이 어린 아이들 울음달래기 위한 방편설인 줄로 이해가 될 것이야.
러면,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것은 어디로 좇아 형성이 되었느냐?
부처님의 이십 팔대(二十八代) 보리 달마(菩提達磨)를 좇아서 중국의 오조 홍인(五祖弘忍) 선사에 이르러 법을 전해 줄 지음자(知音者)를 찾기 위하여 어느날 대중에게, “모두 그 동안 공부하여 깨달은 바를 글로 지어 오너라.” 하시니, 신수(神秀) 스님이 며칠 동안 계교(計巧)를 하고 계교를 해 가지고 글을 지어 바쳤다.

 

身是菩提樹요

心如明鏡臺로다

時時勤拂拭하야

勿使惹塵埃어다

몸은 이 보리(菩提) 나무와 같고

마음은 명경대와 같다.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 티끌이 앉게끔 말지어다.

‘시시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밝은 거울에 먼지가 앉게끔 말지어다’ 한 이것이 점수 사상(漸修思想)이다.
돈오 견성(頓悟見性)과는 거리가 멀거든.
그래서 오조(五祖) 선사가
“이 게송을 외우고 열심히 닦는다면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짐은 면하리라” 하시니, 모든 대중들이 신수 스님의 게송을 외우고 있었다. 그때에 어느 사미가 외우고 다니는 것을 노 행자(盧行者)가 듣고는 사미에게 부탁하기를,
“나도 한 게송을 지을 테니 나를 대신해서 하나 써서 붙여다오” 했거든.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요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라.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이어니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리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
밝은 거울 또한 대(臺)가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어느 곳에 티끌, 먼지가 있으리오.

 

오조(五祖) 선사께서 이 게송을 보시고는 흡족하셨지마는 대중들이 시기를 할까 염려하시어,
 “이것도 견성구(見性句)가 아니다.” 하면서 그 게송을 지워버렸다.
나중에 아무도 모르게 노 행자가 방아를 찧고 있는 곳을 찾아가서 아주 기특하게 여기시면서,
“방아는 다 찧었느냐?”
하고 한 마디 말을 거니,
“방아는 찧은 지가 오래됩니다마는 아직 택미(擇米)를 못했습니다.”
누구든지 깨달으면 이렇게 바른 진리의 문답이 상통이 되는 법이다.
그래서 주장자를 가지고 방앗대를 세 번 치고는 돌아와 버렸거든.
삼경(三更)이 되면 아무도 몰래 찾아오라는 신호지.
그래서 밤중에 노 행자가 찾아 들어오니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가사(袈裟)를 가지고 휘장을 쳐서 은밀하게 금강경을 설하는데,
‘응당히 주(住)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낼지니라[應無所住而生其心]’하는 여기에 여지없이 대오(大悟)를 했거든.

 

何期自性本自淸淨(하기자성본자청정)
何期自性本不生滅(하기자성본불생멸)
何期自性本自具足(하기자성본자구족)
何期自性本無動搖(하기자성본무동요)
何期自性能生萬法(하기자성능생만법)

자성이 본래 청정한 줄 어찌 알았으며
자성이 본래 생멸이 없는 줄을 어찌 알았으며
자성이 본래 만법이 구족함을 어찌 알았으며
자성은 본래 동요도 없는 줄 어찌 알았으며
자성을 좇아 만법이 나는 것을 어찌 알았으리요.

 

이렇게 게송을 지어 바치니 여기에서 오조(五祖) 선사께서는 노 행자가 크게 깨달은 것을 아시고 의발(衣鉢)을 전(傳)하여 육대조(六代祖)로 봉(封)하셨다.
오조 선사는 신수 스님의 게송을 보고는 문외한(門外漢)이라고 하셨거든. 진리의 문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뜻이지.
법을 전해 받은 육조스님이 시절 인연이 도래하여 무수한 납자들을 제접하면서 어느날 법문을 하시기를.
“나에게 가사(假使) 한 물건이 있는데, 위로는 하늘을 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받치고 밝기로는 일월(日月)보다도 밝고 검기는 옻칠보다도 검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되 일상 동용(日常動用) 중에, 가고 오고 말하는 가운데 쓰고 있으면서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 무엇인고?”
이렇게 물으니 하택(荷澤) 스님이 일어나서 답을 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신회(神會)의 불성(佛性)입니다” 하니,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다고 했는데 무슨 소리냐?”하고 호통을 쳤어.
그 후 7년 만에 회양(懷讓) 선사가 찾아와서 답하기를,
“설사 일물(一物)[한 물건]이라도 맞지 않습니다.”하니,
육조 선사가 말씀하셨다.
“그러면 닦아 증득(證得)은 어떻게 생각하는고?”
“닦아 증득함은 없지 아니하나 오염될 순 없습니다.”
육조 선사가 말하기를
“다만 이 오염되지 않음은 모든 부처님께서 호념(護念)하시는 바라 네가 벌써 이러하고 나도 또한 이러하니라.”
하니, 흡족하시어 제자로 봉(封)한 것이거든.
그래서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는 오조 선사와 육조 선사가 이렇게 분명히 선을 그어 놨어.
점수(漸修)를 주장하는 이는 오조(五祖) 선사 회상에 신수 스님, 육조(六祖) 선사 회상에 하택 스님이 있는데, 견성을 하지 못한 지해종도(知解宗徒)들이 모두 점수(漸修)를 정법(正法)이라고 주장해서, 그 법이 오늘날까지 전래되어 있다. 견성을 하지 못한 스님들이 그렇게 그릇되게 지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정안(正眼)의 법(法)을 면밀히 이은 종사(宗師)는 돈오돈수, 즉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를 다 제창했다. 중국에서 선종(禪宗)이 크게 흥행할 적에도 그 오종 가풍(五宗家風)이 모두 돈오돈수 사상으로 만중생을 접인(接引)했지 점수는 꺼내지도 않았다. 점수(漸修)는 이 견성법(見性法) 앞에 도저히 어른거릴 수 도 없는 얕은 진리의 법이다.
그래서 마조(馬祖) 선사는 밑에 84인의 도인(道人) 제자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서 천성(千聖)의 정액상(頂額上)의 안목(眼目)을 갖춘 도인이 두 서너 분 계신다. 남전(南泉), 백장(百丈), 귀종(歸宗) 이런 유명한 분들인데 어느 납자가 귀종 도인을 찾아가서,
“어떤 것이 보림(保任)입니까?” 하고 물으니,
“눈에 한 티가 가리면 허공꽃이 어지러이 떨어진다[一瞖在眼 空花亂墮(일예재안 허공난타)]”
하셨거든.
이러한 안목을 갖춰야 비로소 선지식이라고 할 수 있지. 천하의 사람들의 눈을 안 멀게 하거든. 보통 정안(正眼)이 바로 열리지 못한 분들에게 ‘보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토굴(土窟)에 가서 습기(習氣)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지 귀종 선사처럼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모든 눈 먼 선지식들이 헛된 소리를 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일천 성인(聖人)의 일구(一句)를 투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리 나라의 태고 보우(太古普愚) 선사 같은 분은 중국의 석옥(石屋) 선사를 찾아가서 당당히 겨루어 살림을 주고 받고 하여 법(法)을 받아온 것이다. 그 주고 받은 살림살이가 온 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는 달마(達磨) 조사와 같은 위상으로서 존경 받고, 그 아손(兒孫)이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그러니 모든 대중은 삼 년 혹은 십 년 이내에 견성 대오(見性大悟)를 해야 되겠다는 각오로서 정진에 몰두해야 된다. 조석(朝夕)으로 예불할 때마다 큰 발원을 세워 ‘화두가 일념(一念)으로 지속되어 활연대오(豁然大悟) 하여지이다’ 하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심으로 정진해 나간다면 하루 하루가 새로워진다.

이러한 신심과 용기를 갖추지 아니하면 태풍이 조금 불어도 다 쓰러져 버린다. 그러니 견성을 하려고 출가하여 절집에 왔으니 새로운 각오를 가져야 된다. 이 몸뚱이에 집착하여 먹고 자고 하는 일에 마음을 쓰다 보면 공부를 지어 나갈 수가 없어. 사문(沙門)으로서는 절집에서 불평이나 하고 잘 먹고 잘 자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지. 그저 않으나 서나 화두(話頭)와 씨름해 가지고 견성해야겠다는 생각 이외에는 가져서는 안 돼.
그러니 우리 기초 선원 대중은 못난 소견부터 버릴지니 옛날 백장(百丈) 선사께서는 수도인의 일상생활 가풍(家風)을 내린 법문이 있는데 오늘날 수도인(修道人)에게 적절한 법문이다.

 

一日不作(일일부작)이면 一日不食(일일불식)이라.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밥을 먹지 아니한다.

 

이 경구(經句)는 우리 수도인에게 귀감(龜鑑)이 되리라고 본다.
이 참선 공부는 동정(動靜)에 일여(一如)하게 지어가는데 있는 것이지 앉아 있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대중은 각자 소임에 성실한 가운데 화두를 또록 또록 들어서 일념이 지속되게끔 노력할 지어다.
사람마다 심성(心性) 가운데 제불 만조사(諸佛萬祖師)와 더불어 똑같이 갖추어져 가지고 있는데 단지 알지 못하는 고로 쓰지 못하고 있거든. 그러니 자재(自在)하게 쓰기 위해서는 이 공부를 일생을 걸고 열심히 지어나가야 된다.
화두와 씨름을 하다가 보면 무르익어져 바보처럼 되어 버리는데, 사람들이 옆에서 볼 때 저 사람이 혼이 나간 사람이다 하게끔 그렇게 일념(一念)에 푹 빠져야 한다. 거기서 타파되면 사자후(獅子吼)가 나오는 법이지. 사자후가 나오면 석가모니 부처님 살림부터 다 알게 되고 모든 조사(祖師)의 살림을 한 꼬챙이에 꿰어 버리거든. 이것이 견성(見性)이다. 그리고 활구 참선(活句參禪)이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어떠한 것이 정액상 일구(頂額上一句)냐고 물으면,

 

三世諸佛이 遭塗炭이라 하리라.

삼세(三世) 모든 부처님이 진흙탄을 만남이로다.

할(喝)! [일할(一喝)하시다.]

 

 

 

1994. 갑술년(甲戌年) 동안거 법보신문과의 문답

 

큰스님, 건강하신 것 같아 마음이 좋습니다. 요즈음 하루 일과를 어떻게 보내십니까?

-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지냅니다. 그곳엔 수좌가 한 30여 명 있는데, 그들과 하루 4시간에서 정진하고, 아침공양 후에는 개별적으로 수좌들을 맞아 답을 해주고 그럽니다.

 

큰스님의 출가 동기가 몹시 궁금합니다.

- 나의 출가 동기는 숙세의 두터운 인연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나는 경남 남해에서 출생했는데, 스물 한 살 때인가 마을 근처 해관암(海觀庵)이라는 절에 설석우(薛石友) 스님이 정초 법문을 한다고 해서 찾아간 것이 출가 인연이 됐어요. 그런데 첫 친견 자리에서 설석우 스님께서 내 나이를 보고 이것 저것 물으시더니 "세상 생활도 좋지만 그보다 더 값진 생활이 있으니 그대가 한번 해보지 않겠는가?" 하시는 거라. 그래 그 값진 생활이 무엇인가를 물어보니까 "범부(凡夫)가 위대한 부처가 되는 법이 있네. 세상에 한 번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수행의 길을 가보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거듭 권유하십디다. 그래 그 길로 스님들의 사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 후 환희심을 느껴 출가를 했었지.

 

은사 설석우 스님은 어떤 분이셨는지요?

- 설석우 스님은 서른 일곱에 금강산 장안사로 출가한 큰스님입니다. 출가 전엔 '설약국'이라고 해서 유명한 약방을 운영하셨고,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한 대선비였지요. 정화 이전 모든 사판승들도 '절집의 재상은 설석우 스님'이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또 스님은 앞날 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분입니다. 금강산에서 6.25사변 직전에 지리산 칠불사에 오셔서 대중과 함께 기거하시다가 당시 지리산 토벌 사건을 미리 아시고 남해 해관암으로 옮기셨지요. 나중에 해인사 조실로 계셨고, 정화 후에는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내셨습니다. 그 후 동화사에 주석하시며 많은 후학을 지도하셨지요. 특히 큰스님의 임종게는 아주 좋습니다. 내 오늘 특별히 소개하지요.


주머니에 하늘과 땅을 잡아 넣어서 시방 밖에다 던져 버리고,

소매 가운데에 해와 달을 따 넣어 감춰버림이라.

종 한 소리 떨어지매 뜬 구름이 흩어지니

일만 푸른 산봉우리 이미 다 석양이라.

囊括乾坤方外擲(낭괄건곤방외척)하고

杖挑日月袖中藏(장도일월수중장)이라

一聲鍾落浮雲散(일성종락부운산)하니

萬朶靑山正夕陽(만타청산정석양)이라.

 

큰스님과 향곡선사와의 인연은 어떤 계기로 맺어진 것입니까?

- 내가 스물 한 살 때 중이 된 이후 석우 스님 밑에서 4년간 공부를 한 후 선산 도리사에서 공부를 하던 중 망지견(妄知見)이 나서 월내 관음사의 향곡선사를 찾아가 법을 물은 일이 있었지요. 그게 인연의 시작이 된 셈입니다.
당시 향곡선사께서 법을 물으시매, 답을 해도 모두 다 아니라고 그래요. 그래도 제방(諸方)에서 계속 공부를 더한 후 오대산 상원사에서 겨울 안거를 나던 어느날, 그날은 유난히 날이 따뜻했었는데 문득 스스로 반성하는 마음이 생겨나요. '내가 공부를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 백지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는 향곡선사를 찾아가서 사생결단 공부를 하겠다고 말씀드리고 화두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를 받아 참구를 했지요.
즉 '한 스님이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 입으로 가지를 문 채 매달려 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달마대사가 서역에서 중국에 온 뜻을 물으니, 대답을 하면 떨어져 죽을 것이고 대답을 안하려니 모르는 게 되니 어찌해야 하는가'라는 내용의 화두지요. 이 화두를 2년간 참구하여 결국 해결을 했지요. 그래 향곡선사와 스승, 제자가 되었습니다.

 

'한국선'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 선법(禪法)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 한국으로 전해졌는데, 당당한 진미의 기풍은 오직 한 가닥 한국에만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온 국민의 영광이지요.

 

큰스님께선 부처님 법을 이은 제79조 선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큰스님의 경우처럼 법맥을 잇고 있다고 말하는 스님이 또 있는 줄 압니다. 이를 어찌 보아야 할까요?

- 법맥은 여러 갈래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조 선사나 행사 선사 밑에도 여러 제자가 있었지만은. 그러나 그 가운데에도 얼마만큼 날카롭고 바른 안목을 잇는 상수전법(上首傳法)인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자 굴에 사자 새끼가 나는 게 아니겠나.

 

큰스님, 깨달음이란 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 깨달음은 곧 견성(見性)이라. 심성을 보는 것이지요. 심성을 바로 알았기 때문에 8만 4천가지 법을 아는 것이거든. 견성하면 일체가 차별이 없어서 천차만별이 다 한 가지라. 밝은 대낮에 사물을 보면 열 사람이 다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어두운 밤에 보면 다 제각기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 백일하에 심성을 본다면 일체 시비장단이 없는 것이라.

 

만약 큰스님의 깨달음의 경계를 묻는다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 오구진일(五九盡日)에 우봉춘(又逢春)이라. '오구가 다한 날에 또한 봄을 만남이로다'라고 말하겠어.

 

큰스님, 간화선(看話禪)이 아닌 염불선(念佛禪)이나 위빠사나선으로서는 견성할 수 없습니까?

- 바른 견성은 불가능하지.

 

간화선이 최선이라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 간화선은 화두를 참구하는 동시에 의심이 병행되거든. 제목과 함께 의심이 오매불망하면 의심삼매, 일념삼매의 경계에 이르게 되고 그럴 때 전후(前後) 일체분별이 사라지게 되지요. 의심과 화두 제목은 수레의 양쪽 바퀴마냥 항상 함께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서 의심이 커지고 화두일념이 되면 깨달음이 열리는 것이라. 불조(佛祖)가 다 이렇게 깨달았습니다. 다른 수행법은 이러한 생명력이 미약하지요. 온 천지가 의심 덩어리가 될 때 크게 깨달음이 열리지. '의심이 크면 깨달음도 크다'는 원리가 다 여기서 나온 것이라.

 

염불이나 교학으로도 성불이 안 되는 것입니까?

- 안됩니다. 절대 가능하지 않아요.

 

큰스님은 약 40여년간 출가 수행 해오셨습니다. 그 동안 여러가지 장애가 있었을 줄 압니다.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 나는 수행 과정이 아주 순탄했습니다. 발심할 때 좋은 스승[설석우 스님]을 만나 신심을 길렀고, 마음 공부할 때 밝은 스승[향곡 스님]을 만나 철방망이를 맞았으며, 세상의 모든 습기가 근접할 수 없는 그런 수행 생활을 해 온 셈이지요. 아마도 절집의 좋은 인연은 나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 다 선근공덕(善根功德)을 타고 난 덕이라 생각합니다.

 

오늘날 젊은 수행자들의 수행 자세를 어떻게 보십니까?

- 요즈음 수좌들은 끈기가 부족해요. 공부하는 동안은 바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데 석달이 멀어라 하고 움직이려 하지. 다 깨달을 때까지 꿈쩍 않겠다는 근성이 필요합니다. 그래 앞으로 동화사 금당에선 5개월 결제 1개월 해제를 할 생각입니다.

 

금당선원을 이끌어 나갈 계획이 있으시다면 밝혀 주십시오.

- 금당선원은 역대 선지식이 거의 다 수행하며 정지견(正知見)을 얻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참선 도량입니다. 그런데 여러 사정으로 한 20여 년 방치되어 있었지요. 나는 다시 금당을 선(禪) 정진 도량으로 가꿔나갈 것입니다. 금당에서 안목 있는 이가 많이 나올 것으로 믿습니다.

 

큰스님, 세속 생활을 하면서 참선 정진을 잘하는 방법은 없습니까?

- 참선엔 출가(出家)와 재가(在家) 구분이 있을 수 없어요. 밥 먹을 줄 알면 누구나 참선을 할 수 있어요. 화두를 늘 간직하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면 되는 것이지. 방거사(龐居士) 같은 이도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종교 인구는 늘어가는데 사회는 갈수록 혼탁해 갑니다. 불교를 포함해 모든 종교가 잘못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 바른 법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오직 참선법(參禪法)만이 그 치유책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지도층부터 참선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참선이 국민 교육이 되어야 하는데 그럴려면 먼저 깨달은 선지식이 많이 배출되어야겠지.

 

큰스님과 늘 가깝게 교유하며 지내는 도반 스님이 계십니까?

- 뜻이 통하는 도반은 드물지요.

 

끝으로 후학들에게 경책의 말씀을 해 주시지요.

- 수행의 근본은 '나'를 앞세워선 안 되는 것이지. 일체 시비를 모두 놓아버리고 출가의 본분사에 전생애를 쏟아야 됩니다.

 

 

 

1991. 신미년(辛未年) 동안거 금모선원 정진대중과의 문답

 

저는 지금까지 이 참선 공부는 어떤 화두를 들든지 간에 밑바닥까지 완전히 깨닫는 상태가 온다면 확철대오(廓撤大悟)까지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향곡(香谷) 큰스님께 찾아 가셔서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 화두를 타 2년 만에 해결해 내셨는데, '일면불 월면불(日面佛月面佛)' 공안에 막혀 다시 5년을 참구하셔서 비로소 막히는 바 없이 상통(相通)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첫번째 화두로 완전히 깨치지 못하신 원인은, 화두상에 심천(深淺)이 있기 때문입니까? 만일 화두상에 깊고 얕음이 있기 때문이라면, 참학자(參學者)가 애초부터 얕은 것보다는 깊은 것을 들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 명확히 알고 싶습니다.

- 화두에는 법신변사(法身邊事)의 화두가 있고, 여래선(如來禪)의 화두가 있고, 향상구(向上句), 향하구(向下句)의 화두가 있고, 최초구 (最初句), 말후구(末後句)의 화두가 있고, 일구(一句), 이구(二句), 삼구 (三句)의 화두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분종사(本分宗師)들은 항시 최고의 진리의 화두를 간택해 주지, 법신변사와 같은 것을 화두로 간택(揀擇)해 주지 않는다. 우리가 역대 조사 스님네들을 보건대, 두 번 세 번 깨달은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일념무심삼매(一念無心 三昧)에 들어가서 삼칠일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일년이고 흐르는 그 가운데서 해결이 되면 더 깨달을 것이 없이 여지없이 깨닫게 되는데, 일념무심 삼매가 안되고 홀연히 깨닫는 수가 더러 있다. 그런데 그것은 힘이 미약해서 낱낱 법문을 다 보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참구해야 된다. 두 번 세 번 깨닫게 되는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향상구, 향하구를 들어서 일념무심 삼매에서 해결이 된다면, 그것은 여지없이 깨달아 더 깨달을 것이 없다.

 

스님께서는 일념삼매(一念三昧)를 말씀하시는데, 그렇다면 스님께서는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셨습니까?

- 일념삼매나 오매일여나 다 일념(一念)이 지속된다는 그 말이다. 진의(眞疑)가 돈발(頓發)하여 화두일념이 현전(現前)되면 그대로 삼매(三昧)에 들어 자나 깨나 흩어지지 않고 지속된다. 표현만 다르게 되었을 뿐이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천오백 년 전에 새벽별을 보고 깨치신 그 경지와 스님께서 깨치신 경지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만일 이 물음에 대한 답에 털끝만큼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스님께서는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빠져서 헤어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 허허허허.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다. 견성(見性)이라 하는 것은 성품을 보았다는 것 아니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성품을 보셔서 각(覺)을 이루신 것이고, 역대 도인들께서도 다 자기 심성을 보셔서 깨달으신거고, 견성(見性)자리에 차별이 있을 수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무사자오(無師自悟)는 천마(天魔), 외도(外道)라 하지 않았는냐.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면밀히 정법(正法)을 이어 온 선사로부터 인증(印證)을 받으라고 하셨던 것이고, 독불장군(獨不將軍)으로 '내가 견성했다'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견성법 문중에서는 조작이 없고 거짓이 없게 하기 위해서 먼저 깨달은 선사로부터 인증을 받아야 하는 가풍(家風)이 서 있는 것이다.

 

스님께서 확철대오(廓撤大悟) 하셨다면 대기대용(大機大用)하고 자유자재(自由自在)하셔서 걸림이 없어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옛 조사스님네들이 뱉어놓은 찌꺼기들,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니 '일면불 월면불(日面佛月面佛)'이니 하는, 그러한 것들이나 주창(主唱)할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이 시대 상황에 맞고 이 시대 근기(根機)에 맞는 화두를 창안(創案)하셔서, 그것을 가지고 참구케 하여 빨리 눈 밝은 납자(衲子)들을 많이 나오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 허허. 그래서 법문(法門)할 때 내 말 안 하더냐. 화두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제불조사(諸佛祖師)께서 깨달으신 경계를 만인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신 것이 이 공안(公案)이다. 그러면 그 깨달은 진리의 세계에 예가 있고 이제가 있는가?
그리고 한번 생각해 봐라. 부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셔서 가섭존자(迦葉尊者)와 같은 훌륭한 제자를 많이 못 만드셨겠느냐. 일생 데리고 다니셨던 아난존자(阿難尊者)는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는 바가 없이 그렇게 총명했는데, 위대한 부처님이 무엇이 부족하셔서 아난을 견성도인(見性道人)으로 못 만드셨겠느냐? 네 논리대로 하면, 아난은 부처님으로부터 깨달음의 기연(機緣)을 얻지 못했고 가섭존자의 방망이를 맞고 깨달았으니, 가섭존자가 부처님 보다 낫겠네?
그러면 이것은 어찌 생각하느냐? 부처님께서 그러셨다. 가섭존자에게 법을 전하실 적에는 자신과 똑같은 심안(心眼)이 열렸기 때문에, '정법안장 열반묘심(正法眼藏涅槃妙心)을 가섭에게 부친다.' 하셨다. 가섭존자는 또 왜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난존자에게 법을 부치셨겠느냐? 서로 상통(相通)이 되니까 그런 것이지. 그것이 쭉 연달아 내려오는 것이 법맥(法脈) 아니냐. 왜 아무한테나 법을 전하지 않고 하필 그 사람 그 사람에게 쭉 전해내려 왔겠느냐?
사조(四祖)선사도 상통하는 이가 없어서 법을 전하지 못하고 계시다가, 80대 노인이 와서 상통되었는데 너무 연로(年老)한지라 몸을 바꿔 오라 하여 법을 전하신 것 아니냐. 그리하여 오조(五祖)선사는 육조(六祖)께서 행자 시절에 상통이 되니 법을 전한 거 봐라. 우리나라는 태고 보우(太古普遇)선사께서 고려 말에 송(宋)에서 법을 이어오셔서 쭉 전해내려 왔는데, 조선 중, 후기 이후 근 백 여년 간 단절되었다가 경허(鏡虛) 선사께서 다시 이어내셨다. 그 후대에 와서 향곡(香谷) 선사로부터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안목(眼目)을 갖추게 되었지. 이것을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면 호리(毫釐)의 착오가 없을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향곡 큰스님으로부터 향상구가 다시 신장(伸張)되었다고 하셨는데, 원래 부처님 정법(正法)이 돈오돈수(頓悟頓修) 아닙니까? 향곡스님 대에 와서 안목이 바로 부처님의 정법 돈오돈수일텐데,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부처님 정법을 바로 잇지 못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향상구가 돌아가신 향곡 큰스님에게서 펼쳐졌다고 하셨는데, 스님께서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 그렇지, 향상구(向上句)에 이르러야 돈오돈수인데 근세에 이르기까지의 우리나라 선사들은 향상구를 모르고 법신(法身)의 경계나 여래선(如來禪)만 알았다. 태고 보우나 환암 혼수 등 몇 분은 중국에서 직접 전해져서 안목이 있었지만, 그 후로 제대로 전수되지 못해 고준한 안목이 단절되었고, 돈오점수 사상에 침체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향곡, 성철 두 분 큰스님께서 향상구를 깨달으신 이후에, 다시 돈오돈수 사상으로 전환되고 부처님의 근본 살림이 재현된 것이다.
그리고 아는 이는 한 마디 들어면 천 리 밖에서도 그 사람 견처(見處)를 환하게 안다. 모르는 이는 아무리 손에 쥐어 주어도 알 턱이 없지만.
요즘 우리나라 근세 선사(禪師)들의 법어집이 많이 나왔지만, 들춰 보면 향상구를 제창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덕산탁발화'나 '일면불 월면불', 이러한 고준한 법문을 들어서 제창한 이는 아무도 없거든, 그것은 향상구를 모르기 때문에 제창하지 못한 것이다. 알았나? 그러니 너는 지금부터 바보가 되어 참구하되, 다른 사람이 한 번 바보가 되면 너는 열 번 바보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화두를 타파하고 보면 환하게 알게 된다.

 

책에서 보니 성철(性徹) 큰스님께서 무엇을 물으셨는데 향곡 큰스님께서 거기에 막혀 탑전에 삼칠 일간 정진하셔서 깨치시게 되었고, 거기서 깨치고 보니 방장스님 자신도 모르시는 것을 물으셨더라고 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 그것은 그대로다. "죽은 사람을 죽여 다 하여야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보고, 죽은 사람을 살려 다 하여야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본다[殺盡死人方見活人 活盡死人方見死人(살진사인방견활인 활진사인방견사인)]" 하는 법문이 있다. 방장스님께서 그것을 물으셨다. 거기에 향곡 스님께서 막히셔서 몰록 화두일념(話頭一念)에 들어 밤이 가는지 낮이 가는지를 모르고 정진하셨는데, 어떤 날은 탑 난간에 기대어 참구하시던 중에 장대 같은 소낙비가 쏟아지는데도 모르고 서 계셨다는 게야. 그렇게 삼칠 일 동안을 무심삼매(無心三昧)에 빠져 영 등신(等神)이 되어 자신의 몸뚱이까지도 잊어 버리셨다가, 도량을 걷는 중에 문득 자신의 양손이 흔들리는 것을 보시고 활연대오(豁然大悟) 하셨던 것이다.깨달으시고 보니 질문 하셨던 방장스님께서 확실히 아시는 것이 아님을 아시고 방망이를 놓으셨다. 이렇게 두 분이 서로 주고 받으시면서 힘을 얻게 되고 깨닫게 되셨다. 그리하여 이 두 분의 깨달음으로부터 한국 선종사(禪宗師)에 다시 임제(臨濟)골수의 안목(眼目)이 재현(再現)된 것이다.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만인을 상대해서 설하셨기 때문인지 알아듣기가 조금 쉬운 것 같은데, 이 공안법문(公案法門)에 들어와서는 도무지 깜깜해 알 길이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의심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얘기는 제가 부처님 말씀 중에서 깨달음에 대한 것을 착안(着眼)해 본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눈에 있으면 보는 것이요, 귀에 있으면 듣는 것이요, 손에 있으면 잡는 것이요, 다리에 있으면 걷는 것인데, 사람이 다만 욕심에 눈이 가리워 보지 못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셨는데, 스님의 법문 중에서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공안법문들을 다 뚫어서 진리의 세계를 환히 볼 수 있겠습니까?

- 나 뿐만 아니라 조사(祖師) 스님네의 법문은 아주 화살과 같이 찌른다.
부처님께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로 방편(方便)을 가지고 울어대는 어린 아이들 달래시는 것이어서, 49년 설법(說法)이 모두 방편이지 법이 아니다. 반면 조사(祖師)스님들 법문은 날카로운 화살촉과 같이 아주 아프게 찌르는데, 여기에서 참학자(參學者)가 의심이 일어서 일념삼매(一念三昧)에 들게 되고 업(業)이 소멸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부를 하는 이는 도인 스님네, 조사 스님네의 일언반구(一言半句)를 금쪽같이 여겨야 한다. 온전히 믿고, 온전히 따르고, 온전히 행하고, 지도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되지, 무슨 야호(野狐) 의심이 있을 것 같으면 선방에서 백년을 살아보아야 아무런 소득이 없다.
그러니 눈 밝은 선지식(善知識)을 만났으면 철저한 신심(信心)으로 지도하는 대로 받아들여서, 하늘을 찌를 듯한 용맹과 태산과 같은 부동 (不動)의 자세에서 일여(一如)하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된다. 만약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저렇게 해서 될까?'하는 의심을 갖는다면, 그 사람은 천불 만조사(千佛萬祖師)가 출세(出世)해도 이 일을 성취할 수 없다.
부처님을 일생 따라 다니면서 모셨던 아난존자(阿難尊者)는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에서 다문제일(多聞第一)의 제자였는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부처님의 참법문을 들을 수 없으니 가섭존자에게 가서 물었다. "부처님께서 금란가사(金欄迦娑) 외에 따로 전하신 법이 있습니까?" 이에 가섭존자가 아난을 부르자 아난이 대답하니, "문 앞의 찰간(刹竿)을 거꾸러뜨려라."하고 가섭존자가 한 마디 던졌다. 그래서 아난존자가 졸다가는 떨어져 죽게 되는 아주 높은 바위 위에 올라가서 용맹정진하여 그 도리를 깨달았다. "금란가사 외에 따로 전한 법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문전의 찰간을 거꾸러뜨려라” 했다. 이것이 바로 조사(祖師)의 말씀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대자대비 (大慈大悲)의 방편을 가지고 어루만져 주셨지 아프게 찌르지는 않으셨거든. 바로 이 한마디가 해결되어서 아난존자는 가섭존자의 법을 전수받았다.
이 법은 천불만조사(千佛萬祖師), 모든 도인의 살림살이가 다 동일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법이 계속 전해져서 오늘날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이 선법이 삽삼조사 이후로 더 흥하게 되었던 것은 마조(馬祖) 선사의 독특한 일미(一味), 모든 조사 스님네들이 토하지 못했던 독특한 일미가 있었기 때문에 그 밑으로 무수 도인이 쏟아져 나왔던 것 이다.
이 법은 소인배(小人輩)는 안되고 신심(信心)이 있고 그릇이 큰 사람, 도(道)를 구하는 간절한 일념에 불타는 사람이 들을 것 같으면, 선지식의 한 마디에 마음이 척 열리게 되어 있다. 지금 다들 참선한다고 앉아 있지만, 마음 한가운데는 야호(野狐)가 수 십 마리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법문을 해 주어도 순수하게 들 어가지 못한다. 이 대도(大道)를 배우는 이는 마음을 텅텅 비워서 선 지식의 지도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그것이 그대로 자기 살림이 된다. 그래서 이 대도의 문에 들어서려면 모든 지견(知見), 일체의 알음알이를 다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말을 이야기로 날려 버리지 말고 마음에 바로 새겨서 실천에 옮긴다면, 아주 큰 소득이 있을 것이다.

 

해운정사 법당에는 지금 주세불(主世佛)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이 모셔져 있고, 양쪽으로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미륵보살이 모셔져 있는데, 제가 듣기로는 이 주세불 때문에 해운정사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는 왜 주불(主佛)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을 모셨습니까?
그리고 오분향례(五分香禮)에서 영산(靈山)당시의 아라한(阿羅漢)에 대한 예는 올리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또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을 주세불로 모셨다고 하는데, 그 관세음보살 머리 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시지 않느냐. 십대제자와 모든 보살들이 다 석가모니 부처님 응화신(應化身)이다. 교화하기 위한 방편 응화신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교화하는 분상에서 모든 응화신을 모시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봉안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방편으로 삼는 것 아니냐. 그것을 모르고, 못 보니까 다들 야호(野狐) 소견으로 사견(邪見)에 떨어져서 그러는 게야.
그리고 사판들이 예불문을 지을 때, 소승(小乘) 나한(羅漢)들을 조사 (祖師)스님들 앞에 두었다. 앞에 둔 그것이 잘못된 것이지. 그래서 차서(次序)에 맞지 않아서 내가 빼 버렸다. 그리고 소승들은 승가(僧伽)에 속하면 되는 것이다.

 

저는 새벽에 일어나면 바로 화두가 챙겨지고 그렇긴 합니다만, 공부를 하다 보면 자꾸 여자 생각이 나게 됩니다. 항상 화두를 놓지 않고 열심히 참구하려고 노력하고 밤에 잠자리에 들 때도 화두를 챙기다가 잠이 드는데, 잠결이라든지 저 자신도 모르는 결에 여자 생각이 일어나 마음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것만 끊으면 화두가 일념으로 나갈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이것을 끊어낼 수 있겠습니까?

- 젊었을 때는 여자 생각이 남으로 인해서 공부에 많은 장애가 된다.  그것은 과거 다겁다생(多劫多生)에 지어온 습기(習氣)로 인해서 사람이나 축생이나 다 그렇다. 중생(衆生)은 이 마음의 습기로 인해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서, 보면 마음이 동(動)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앞에서 내가 대발심자(大發心者)는 돈과 여색에 무심해야 된다고 했지. 이것은 철칙이다. 돈과 여색에 무심하지 않으면 이 대도 (大道)를 성취할 수가 없다. 이 몸뚱이 사대육신(四大肉身)은 피고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아무리 천하일색 미인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많은 생(生) 을 그 허망한 것에 빠져서 오늘날까지 성불(成佛)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
그러니 금생에는 그러한 헛된 꿈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그 허망한 몸뚱이에 초연하리라'는 작심을 하고 생각생각 화두 참구에 열을 올려 봐라. 그렇게 해서 힘을 얻어 일념이 현전(現前)되기만 하면, 그 때는 그러한 잡된 생각들이 떠오르지 않게 된다. 그러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아직 화두 참구하는데 있어서 힘을 못 얻었기 때문에, 과거생에 지어 왔던 습기(習氣)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떠오르는 것이지.
그러니 내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진심(眞心)에서 우러나오는 화두를 챙기면 이 생각 저 생각이 다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렇게 한 번 잘 해봐라.

 

제가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화두 두는 방법에서, 스님께서는 화두를 목전(目前)에다 두라고 하시는데, 상단전(上丹田)이나 하단전(下丹田)에 두면 안 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 화두를 머리에다 두게 되면, 애를 써서 노력하는 중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고 기(氣)가 위로 올라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머리가 천근 만근이 되어 화두 참구하는 데 큰 장애가 와 버린다. 그러나 힘을 다 놓아버린 상태에서 눈 앞 1미터 아래에다 화두를 두고 생각으로만 참구하면, 상기(上氣)되지 않고 편안하다.
또, 어떤 이들은 하단전(下丹田)에다 화두를 두고 참구하라고 가르치는데, 물론 앉아 있을 때는 그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24시간 앉아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거든. 이 화두 참구라는 것은 사위의(四威儀) 가운데 무르익어져야 일념(一念)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이지, 사위의 가운데 익어지지 않으면 일념이 지속되지 않는다. 일념이 지속되지 않으면 깨달음이 올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러한 고로 일상의 모든 생활 가운데서 화두를 목전(目前)에다 두고 참구(參究)하라는 것이다. 이 방법이 숙달만 되면 아주 간편하고 좋다. 그렇게 알고 실천에 옮겨 열심히 하도록 하고, 더 묻고 싶은 이는 또 아침으로 독참(獨參)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도록 한다.

 

 

 

1990. 경오년(庚午年) 동안거 금모선원 정진대중과의 문답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길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는 것은 오조 홍인(五祖弘忍)대사 회상(會上)에서부터 전개가 되었지. 돈오돈수 사상은 오조 대사, 육조 대사로 전개되어 육조(六祖) 문하에 오종(五宗)이 벌어졌는데, 이 오종이 모두 돈오돈수다. 돈오점수 사상은 오조 대사 밑에 교수사(敎修師)로 있던 신수(神秀), 육조대사 밑에 하택(荷澤), 이후 규봉 종밀(圭峰宗密)로 전개되었는데, 이 점수 사상은 선종(禪宗)의 정안종사(正眼宗師)의 안목이 아니다. 이 최상승(最上乘) 선법(禪法)은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이다.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궁극에 가서 구경법(究景法)은 하나이니, 그 구경의 여래지에 이르면 다시 더 닦을 것도 깨달을 것도 없는 돈오돈수인 것이다.

 

스님께서 상당(上堂)법문 하실 때, '한 번 깨치고 또 깨쳤다'는 말씀을 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로, 향곡(香谷) 큰스님께서 어린 나이에 출가하셔서 행자(行者)시절에 한 번 깨쳤는데, 그 후 봉암사에서 정진하실 때 또 한 번 깨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그 말씀만 들을 때는 혼돈이 옵니다. 한번 깨치면 바로 여래지(如來地)인데, 다시 또 깨쳤다고 하시니까요. 저희들도 화두를 참구하고 있는데, 만약 화두를 한 번 타파(打破)한 뒤에 다시 또 참구해서 깨쳐야 할 것이 남아 있다면, 돈오돈수 사상이 성립될 수 없지 않느냐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 그래, 그것도 의심이 날 수가 있는 것이지. 육조 대사도 두 번 깨치셨는데, 처음 한 번은 시장에서 탁발승이 금강경(金剛經) 독송하는 것을 듣고 홀연히 깨달으셨다. 그러고 나서 오조(五祖) 대사 회상을 찾아가서 행자(行者)로 있었는데 하루는 오조 대사께서 대중에게 이렇게 공포하였다. "모두 공부한 바 소견(所見)을 글로 지어 바쳐라. 만약 진리에 계합(契合)하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법(法)을 전해서 육대조(六代祖)로 봉(封)하리라."  그러니 신수(神秀) 상좌가 되지도 않는 소리를 적어서 벽에 붙여 놓았다. 오조께서 그것을 보시고, "이 게송대로 닦으면 악도(惡道)에 떨어 지지 않고 큰 이익이 있으리라 하시며 향 피워 예배하게 하고 모두 외우라고 하셨다." 그래서 온 대중이 신수 상좌를 칭찬하며 그 게송을 외웠는데, 마침 한 사미승이 그 게송을 외우면서 노 행자(盧行者)가 방아를 찧고 있던 방앗간 앞을 지나갔다. 노 행자가 그 게송을 들어보고, 그것이 견성(見性)한 사람의 글이 아니니, "나에게도 한 게송이 있는데, 나는 글자를 모르니 나를 위해서 대신 좀 적어다오"하고 게송을 읊었다.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보리본무수 명경역비대 본래무일물 하처야진애)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 밝은 거울 또한 대가 아닐세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티끌이 있으리오.

이 게송(偈頌)이 신수 상좌 글 옆에 붙으니 대중이 모두 놀라 서로들 웅성거렸다. 오조대사께서 그 소란스러움 때문에 나오셔서 그 게송을 보시게 되었다. 보시니 그것은 진리의 눈이 열린 이의 글이라, 대중이 시기하여 해칠 것을 염려하셔서 손수 신짝으로 문질러 버리면서 말씀하셨다. "이것도 견성한 이의 글이 아니다." 다음날, 오조대사께서 가만히 방앗간에 오셔서 방앗대를 세 번 치고 돌아가셨는데, 노 행자가 그 뜻을 알아 차리고 대중이 다 잠든 삼경(三更)에 조실방으로 갔다. 오조 대사께서는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가사(袈娑)로 방문을 두르시고는 금강경(金剛經)을 쭉 설해 내려가시는데,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낼지어다(應無所住 而生其心)'하는 귀절에 이르러서, 노 행자가 다시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오조대사께 말씀드리기를,

何期自性 本自淸淨(하기자성본자청정)

何期自性 本不生滅(하기자성본불생멸)

何期自性 本自具足(하기자성본자구족)

何期自性 本無動搖(하기자성본무동요)

何期自性 能生萬法(하기자성능생만법)

어찌 제 성품이 본래 청정함을 알았으리까

어찌 제 성품이 본래 나고 죽지 않음을 알았으리까

어찌 제 성품이 본래 구족함을 알았으리까

어찌 제 성품이 본래 흔들림 없음을 알았으리까

어찌 제 성품이 능히 만법을 냄을 알았으리까

하니, 오조께서 노 행자가 크게 깨달았음을 아시고 법(法)을 전하셨다. 이렇듯 육조 대사는 행자 시절에 두 번 열리셨던 것이다.
그 분 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를 보면 두 번 세 번 깨달으신 분이 부지기수다. 설봉(雪峰) 선사도 암두(岩頭) 선사께 혼이 나 다시 깨치셨고, 임제(臨濟) 선사도 그런 적이 있었고...
물론 구경법은 하나이니, 최상승의 향상구가 열리면 다시 더 깨달을 것이 없는 돈오돈수이지. 향상구를 알면 그것이 바로 구경법이기 때문에, 모든 법이 그 가운데 전개되어 있으므로 자연히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어 있다.
그런데 향상구 밑에 여래선(如來禪)이 있고 법신변사(法身邊事)가 있어서, 우리가 공부를 하여 그러한 경계에 소견(所見)이 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스승없이 공부하는 이 중에는 법신변사를 알아 가지고 그것을 견성(見性)이라고 착각하여 구경법으로 삼는 이가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향상(向上)의 진리의 법을 설해놓은 것에는 도저히 앙망불급(仰望不及)이다.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또 향상의 진리를 깨쳐야만 구경법에 이른다.
자고로 고인네들이 두 번 세 번 깨달았던 원인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향상구만 해결이 되면 모든 공안(公案)을 다 알게 되어 있다. 지상에서 가장 높은 히말라야산 상봉에 올라서면 동서남북 상하가 다 내려다 보이는 것과 같이, 향상구를 투과(透過)하면 모든 공안이 다 그 아래에 있다. 그러나 향상구를 모르면 견성이 아니고, 부처님과 조사의 전지(田地)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향상구를 알아야만 비로소 부처님과 조사의 전지에 이르러 대자재인 (大自在人)이 된다. 수방자재(收放自在) 여탈자재(與奪自在) 살활자재(殺活自在), 거두고 놓고 주고 빼앗고 죽이고 살리는, 이러한 자재의 수완을 갖춘다는 말이다. 이러한 향상의 안목을 갖춘 연후에야 제불제조(諸佛諸祖)께서 안주(安住)하는 무념무심(無念無心)의 경지를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그렇다면 조실 스님께서는 향곡 큰스님께 전법게(傳法偈)를 받으실 때, 향상구를 아시고 받으셨습니까?

- 허허. 몰랐다면 어찌 법을 전하셨겠느냐. 내가 스물 네 살 때 선산 도리사에서 첫 철을 났다. 그때 일곱 분이 함께 지냈는데, 그 분들 중에서 지금 학산 스님이라는 노장님이 전라도 어느 토굴에 계시고, 나머지 분들은 타계(他界)하시거나 속가(俗家)에 가고 안 계시지. 공부인은 본시 모든 반연(攀緣)이 다 끊어져야 하고, 방선(放禪)을 했다고 해서 한화잡담(閑話雜談)을 해서도 안되고, 항시 화두와 씨름하여 자나 깨나 그 일념(一念)에 잠겨야 된다. 그래야만 화두가 무르익어져서 흐르는 물과 같이 끊이지 않고 지속이 된다.
일념삼매(一念三昧)에 푹 빠져서 모든 분별(分別)을 다 잊어버린 가운데, 흡사 돌사람[石人]과도 같고 나무사람[木人]과도 같이 되었다가, 거기에서 문득 살아나야 대용전창(大用全彰)이 된다.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그 곳에서 공부를 애쓰다가 사견(邪見)으로 '알았다'는 한 생 각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것을 점검받겠다고 제방(諸方) 선지식들을 두루 참방(參訪)해 보았는데 그 분들 대부분이 문답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옳다', '그르다' 하는 점검을 바로 해주시지를 못하더라. 그런데 월내(月內)향곡(香谷)선사께서는, 물음에 답을 하면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것이 옳은 답인가, 그른 답인가 척척 칼질을 하셨다. 그래서 '제방 선지식들이 쓰지 못하는 칼을 쓰시는구나' 싶어 어느 선지식보다도 신망(信望)이 많이 갔지.
그러나 '알았다'는 이 고집덩어리 하나를 들게 되면, 그것을 놓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엊그제도 몇 년 전에 여기서 살았던 수좌 한 명이 자기 딴에는 '알았다'고 점검 받겠다고 왔더라. 그래서 쉬운 공안(公案)을 하나 던져보았는데, 엉뚱한 소리만 하길래, "그것은 잘못 안 것이니 다시 공부해라." 하고 바로 일러 주었거든. 그런데도 자기 고집만 세우고 가던데, 그 병이 아주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한 3년 허송세월을 했었지. 만약 그 때 가는 곳마다 ‘아니다’라고 방망이를 내렸었더라면, 아닌 줄을 알고 즉시 놓아버렸을 것인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안하무인이 되어 세월을 헛보냈던 게지.
그러다가 스물 여섯 살 때, 오대산 상원사에서 동안거(冬安居) 정진을 하게 되었다. 그 때는 마을이건 절집이건 생활이 몹시 어려웠던 때라 모든 것이 귀했다. 그 추운 곳에 이불도 없고 좌복도 하나여서 잘 때는 그 좌복때기를 배에다 얹고 잤었다. 그런데 그 곳이 얼마나 추웠느냐 하면, 방에 숭늉을 놔두면 그 숭늉이 꽁꽁 얼더라. 문단속도 허술하고 나무도 풍족하질 않고 하니. 그 당시에 그 곳에서 한 열명 남짓 지냈는데, 지금 해인사 부방장이신 혜암 스님, 활안 스님, 월현 스님이 지내셨고 그리고, 젊은 우리 또래들이 살았다. 한 번은 일주일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는데, 그 때는 다들 40대 전이라서 장군죽비를 때리면 한쪽 어깨가 기울어지는 판이 라. 어떻게나 때리던지, 모두 그렇게 애를 쓰면서 살았다.
하루는 유달리 겨울 날씨가 푸근해서 선방 옆마루에 혼자 앉아 햇볕을 벗하고 있다가 문득 자기사(自己事)를 돌이켜 보게 되었다. '내가 참으로 견성을 해서 고인네와 같이 낱낱 법문에 당당한가?' 하고 내가 나 자신에게 묻는데, 거기는 조작과 거짓이 통할 리가 없지. 그래서 '내가 이것을 가지고 견성했다 한다면, 나를 속이고 모든 사람을 속이는 것이요, 세월 낭비요, 말이 아니니, 백지로 돌아가서 다시 출발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 어느 선지식을 찾아가서 지도받아야 되겠는가? 언하(言下)에 흑백을 칼질해 주는 선지식을 찾아가서, 나의 전 생애를 걸고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해제하자 마자 바랑을 짊어지고 도반스님 몇몇과 함께 월내 향곡 선사 회상을 다시 찾아갔다.
그 곳에서 향곡 선사로부터 새로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 화두를 받았다. 그 화두를 한 2년 들었을 게야. 그 2년 동안은 모든 반연과 가고 오는 것을 다 잊어 버리고 해제도 상관하지 않고 화두와 씨름했지. 그러다가 그 화두가 해결되니, 종전에는 문답하면 허튼 소리만 나오던 것이 그 때야 비로소 바른 소리가 나오더라.
그러나 비로소 바른 답이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마조(馬祖) 선사의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 :일면불은 천 팔백세까지 장수하는 부처님, 월면불은 단 하루 수명의 부처님)'공안에는 막혔다. 그래서 그 화두를 들고 다시 5년 동안 신고(辛苦)하다 해결해 냈지. 그리하여 마침내, 고인들께서 베풀어 놓으신 중중(重重)의 차별법문(差別法門)에 걸리는 바 없이 상통(相通)하게 되었다.

 

제 경우는 ‘삼서근[麻三斤]’ 화두를 참구하고 있는데 만일, '삼서근' 화두가 타파되지는 않았으니까 만약이라는 단서를 붙이는 것입니다만, 타파되었다고 하더라도 '일면불 월면불' 화두에 걸릴 수 있다는 것입니까?

- 그것은 화두 참구하는 심천(深淺)에 달렸다. 화두일념이 지속되고 의심이 아주 철두철미해서 온 대지가 의심덩어리가 되는 일념무심삼매(一念無心三昧)에 깊이 들어가서 깨닫게 되면, 그 때는 향상구(向上句)가 열린다. 그렇지 않고 홀연히 아는 수가 있다. 홀연히 아는 것은 힘이 미약해서 모든 공안을 바로 보기가 어렵다. 그러니 무심삼매에 며칠이고 몇 달이고 푹 빠진 그 가운데서 해결이 되어야 진리의 최고봉(最高峰)에 올라서게 되는 법이지.

 

무심삼매(無心三昧)라는 말씀과 오매일여(寤寐一如), 숙면일여(熟眠一如)라는 말씀하고는...

- 다 자나 깨나 일념(一念)이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도 내가 말했던 것처럼, 흡사 석인(石人), 목인(木人)과 같이 모든 분별이 다 마비된 상태다. 전후지분별(前後之分別)이 다 끊어져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모르고, 자신이 어디에 처해 있는지도 모르고, 자기 몸뚱이까지도 다 잊어 버리는 상태라는 거지. 그 상태에서는 온 천지가 화두가 되어 오로지 화두 한 생각, 의심 뿐이다.

 

스님의 첫 오도송(悟道頌)인 '자개주장기인회(這箇柱杖幾人會) 삼세제불총불식(三世諸佛總不識)...'하는 그 오도송도 확철대오(廓撤大俉) 한 오도송입니까?

- 허허허허, 그것은 내가 '확철대오한 오도송이다', '아니다' 하는 것보다 안목이 열린 이는 보면 다 안다. 그것은 '향엄상수화' 화두가 열려 견처(見處)가 나서 지은 것이고, '일면불 월면불'을 깨닫고는 '일봉타도비로정(一棒打倒毘盧頂)'으로 시작되는 오도송을 지은 것이다. 두 오도송이 그러한 기연(機緣)이 있지.

 

스님께서는 '일면불 월면불' 화두를 참구하실 때 오매일여(寤寐一如)가 5년 동안 지속되셨습니까?

- 아니, 그리 지속된 것은 아니다.

 

화두일념에 간단(間斷)이 있게 되면 화두가 해결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 그렇지, 그렇지. 일념(一念)이 간단없이 지속되어야만 깨달음이 온다는 것은 철칙이다. 그런데 지속되는 그 기간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거든. 며칠이거나 몇 달이거나 몇 년이거나, 사람에 따라서 다 다른데, 내 경우는 그렇게 장기적으로 지속되지는 않았다.

 

예전 선지식들께서는 화두를 주실 때, 상대방의 근기(根機)에 맞게끔 고려해 주셨던 것 같은데, 요즈음 스님들께서는 상대방에 대한 고려 없이 그냥 천편일률적으로 주시는 것 같습니다. 마치 기계화되어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의심도 크게 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각자에게 맞지 않는 화두도 많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니 스님, 옛날 그 천 칠백 공안 외에 의심이 굉장히 많이 갈 수 있는 것으로 상대방의 근기에 맞게끔 다른 것을 창조해 주시면 안 되는지, 그것 좀 말씀해 주십시오.

- 의심이 일고 일지 않고, 의심의 강도가 강하고 약하고 하는 것의 원인을 화두상에서 찾는 것은 분별이다.선지식이 참학자(參學者)에게 천 칠백 공안 중의 한 화두를 주나, 의심을 물어서 한 마디 던져주나, 상대방이 얼마만큼 온전히 받아들이고 십분 신(信)을 갖고 참구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공부가 화두나 선지식이 이것 저것 일러주는 것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지금도 고인들께서 납자(衲子)를 제접(提接)하셨던 것과 같이 참학인이 와서 부처님의 근본대의(根本大意)를 묻는 다든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묻는다든가 하면, 응당 한마디 일러주지. 그러면 그것을 참구의 분(分)으로 삼으면 되는데, 그러한 자세로 공부하려는 이가 없거든. 다들 "화두 타러 왔습니다" 하니 계제따라 화두를 일러주는 것이지. 그러나 참구하는 데 있어서 의심이 일고 일지 않고의 문제는, 일러주는 화두가 어떤 화두인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만큼 신심(信心)있게 받아들이고 실답게 참구하느냐, 여기에 있는 것이지 절대 화두에 비중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상대방으로 하여금 의심이 돈발(頓發)하도록 만들어줄 수 있는 기연(機緣)이 없겠습니까?

- 그것은 정말 의심이 나서 찾아와 물으면 그렇게 한 마디 던질 거 아니냐. 그러면 받아 가지면 되지. 이 공부는 무슨 요행을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대도(大道)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면, 선지식이 던지는 법문 한 마디가 금쪽 같은 법이다. 그러한 신심(信心)에서 묻는다면, 한 마디 던졌을 때 몰록 의심삼매(疑心三昧)에 들 수가 있다.

 

잘 알겠습니다. 조실 스님께서는 '향엄상수화' 화두를 타파하시고 다른 공안에는 다 막힘이 없으셨는데 '일면불 월면불' 공안에 막혀 다시 5년 동안을 참구하셔서, 그 화두를 해결해 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일면불 월면불' 화두를 해결하시기 전에 다른 공안(公案)들에 대해서 아셨다는 공부 분상이, 혹시 일면불 월면불을 해결하시고 난 후에 달라지지는 않으셨습니까?

- 달라진 것은 없지. 백천공안(百千公案)에는 고인네들이 여래선(如來禪)을 알아서 여래선 도리를 베풀어 놓은 것이 있고, 법신변사(法身邊事)를 알아서 법신의 변사를 베풀어놓은 대문도 있고, 최초구(最初句), 말후구(末後句)를 알아서 그것을 베풀어 놓은 것이 있고, 향상구(向上句), 향하구(向下句)를 베풀어 놓은 것이 있고, 일구(一句), 이구(二句), 삼구(三句)를 베풀어 놓은 것이 있다.
진리의 최고봉(最高峰)인 향상구가 해결되면 다른 것은 다 자연히 알게 되어 있지만, 최고봉에 올라서기 전이라도 앞에서 열거한 작은 봉우리들에 올라서서 진리의 부분 부분들을 볼 수가 있다.

 

향상구라는 것이 천 칠백 공안 중에 어떤 공안이 아니고...

- 그렇지. 진리의 최고봉(最高峰)이다.

 

공안(公案)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시지요?

- 그렇지, 아니지. 진리의 최고 봉우리라는 말이다.

 

잘 알겠습니다. 교리(敎理)에서 말하는 십지보살지위(十地菩薩地位), 등각(等覺), 묘각(妙覺)과 관련지어 볼 때, 향상구는 어떤 것을 제창한 것입니까?

- 향상구는 부처님의 구경열반법(究竟涅盤法)이니 묘각의 경계로 보면 정확하다.

 

과거 육조 혜능(六祖慧能) 대사까지 조사(祖師)들께서는 여래선(如來禪) 도리로 인가(印可)를 하시고 전법(傳法)을 해오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조사선(祖師禪)을 제창하시고 향상구를 타파해야만 진리의 최고봉에 이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렇다면 과거 삽삼 조사들께서 깨치신 살림살이는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 그것은 그렇지도 않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대중에게 세 번 특별한 법문을 하셨다. 한 번은 인천(人天) 백만 대중이 법문을 듣기 위해 좌정(坐定)하고 있을 때, 제석천왕(帝釋天王)이 부처님께 우담바라꽃을 올리니 부처님께서 그 꽃을 받아서 아무 말없이 대중에게 보이셨고, 한 번은 또, 법회일에 모든 대중이 법문을 듣기 위해서 다 운집(雲集)해 있었는데 맨 마지막으로 가섭 존자(迦葉尊者)가 들어오니, 부처님께서 법문을 설하시기 위해서 법상에 좌정해 계시다가 자리의 반을 비켜 앉으셨다. 가섭 존자가 부처님의 그 뜻을 알고는 선뜻 그 자리에 가서 앉으니, 부처님 께서 가사를 같이 두르시고 대중에게 말없이 보이셨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지 일주일 후에, 교화(敎化)를 위해 타방(他方)에 가 있던 가섭존자가 돌아와, 부처님의 열반신(涅槃身)을 향하여 위요삼잡(圍繞三匝)하고 합장 예배를 올리며,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 사생(四生)의 자비스런 아버지시여! 우리에게 항상 법문하시기를,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원래 없다’ 하시더니, 이렇게 가신 것은 모든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니, 칠 푼 두께의 금관 속에서 두 발이 쑥 나왔다. 그래서 가섭존자가 다시 합장 예배를 올리니, 두 발은 관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관이 그대로 중천(中天)에 떠올랐는데 이때, 지혜삼매(智慧三昧)의 불꽃이 일어 허공 중에서 화장(火葬)되었다.  이것이 삼처전심(三處傳心)이다.  꽃을 들어보인 뜻은 무엇이며, 자리를 나누어 가사를 같이 두르고 앉으신 뜻은 무엇이며 또, 두 발을 내미신 뜻은 무엇이냐?
모든 후손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살림살이를 깨달아 거기에서 백천공안(百千公案)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이 삼처전심 외에 또 특이한 것을 보이셨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설법을 마치시자 청법(聽法) 대중이 모두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는데, 한 여인이 부처님 근좌(近座)에 좌정한 채 자리를 뜰 줄 몰랐다. 문수보살이 그 광경을 보고 부처님께 여쭙기를,  "대중들이 모두 돌아갔는데, 어찌하여 저 여인은 자리를 뜨지 않고 저렇게 앉아 있습니까?"  "저 여인이 정(定)에 들어 있으니, 문수 너의 신력(神力)으로 저 여인이 정에서 나오도록 한 번 해 보아라."  말씀이 떨어지자 문수보살이 신통으로 백천 문수를 허공 중에 나투고, 위요삼잡을 하고, 탄지(彈指)를 해 보았는데, 여인은 정에서 나오지 않았다. 부처님께서 그 광경을 지켜 보시고는, "문수야, 네가 비록 백천신통묘용(百千神通妙用)을 나투어도 너의 신력(神力)으로는 저 여인을 정(定)에서 나오게 할 수 없다. 하방(下方) 42국토를 지나가면 망명초지보살(罔明初地菩薩)이 있는데, 오직 그만이 저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 할 수 있다"라고 하셨다.
그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망명보살이 땅에서 솟아나와 부처님께 예배를 올렸다. 부처님께서 입정(入定)한 여인을 가리키시며, "저 여인이 정에 들어 있으니, 망명 네가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 해 보아라." 하시니, 망명보살이 여인을 향하여 손가락을 세 번 튕기자. 여인이 바로 정에서 나왔다.  또 하루는, 부처님께서 상당(上堂)하시어 말없이 앉아 계신데, 문수 보살이 나와서 예 삼배(禮三拜)를 올리고는  "자세히 법왕법(法王法)을 보니 법왕의 법이 이와 같습니다." 하니, 부처님께서 즉시 법상에서 내려오셨다.  그러면, 문수 보살은 과거 칠불(過去七佛)의 스승이며 백천신통을 나투었는데도 무엇이 부족하여 그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끔 하지 못했으며, 어찌하여 망명은 초지 보살인데도 탄지(彈指) 세 번에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 할 수 있었느냐? 그리고 문수 보살은 무엇을 보았기에 부처님께서 가만히 앉아 계시는데 "법왕법(法王法)을 보니 법왕의 법이 이와 같다."고 하였느냐?
부처님 당시에도 이러한 공안(公案)이 벌어졌는데, 삼처전심(三處傳心)은 알기 쉬워도 이 '여인출정화(女人出定話)'나 '관법왕법여시(觀法王法如是)'는 알기 어려운 공안이다. 이것을 알면 향상구(向上句)를 알게 된다. 중국의 위대한 도인들도 이러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살림살이를 바로 알았기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법을 써서 백천 공안(百千公案)을 베풀어 놓은 것이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 향상구가 제창되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이 견성법(見性法)이라 하는 것은, 내 살림이 따로 있고 네 살림살이가 따로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불 만조사(千佛萬祖師)의 견성이나 모든 후래인(後來人)의 견성이나 다 성품, 즉 마음땅을 본 것을 말 한다. 백천 공안은 모두 이 가운데서 베풀어진 것이므로, 우리가 성품을 바로 보게 되면, 한 번 봄으로 인해서 모든 공안을 다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백천 공안의 낙처(落處)를 척척 꼬집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방중(房中)에 봐라. 다 같은 출가승(出家僧)인 비구, 사미로 이렇게 한 방에서 참선수행을 하고 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모습도 다르고 이름도 다르다. 백천 공안도 그와 같이 모양이 다르고 이름도 다 다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아무개야!" 하고 부르는데 다른 사람이 "제가 아무개입니다" 한다면 통하지 않는다. 백천 공안도 이치가 그와 똑같은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일념삼매(一念三昧)에 푹 빠졌다가 일기일경(一機一境)에 홀연히 개오(開悟)하면 고인과 더불어 동일한 안목(眼目)을 갖추게 될 것이니, 그렇게 알고 여러분도 열심히 공부해서 고인네 살림살이를 내 살림으로 만들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제가 어리석어 가닥을 제대로 못 잡았습니다. 그렇다면 조사선(祖師禪)과 여래선(如來禪)은 어떻게 다릅니까?

- 조사선(祖師禪)이 곧 여래선(如來禪)이고 여래선이 곧 조사선인 것이니, 그것은 고인들이 자재처(自在處)를 식파(識破)하면 된다.

 

건강문제에 대해서 여쭤 보겠습니다. 스님께서는 깨닫기 전에 건강관리를 어떻게 하셨으며 깨달은 후에는 어떻게 하시고 계시는가, 지금도 화두를 들고 계시는가 궁금합니다.

- 이 몸뚱이라는 것은 제 아무리 건강하다고 해도 병이 있기 마련이다. 누구나 다 소소한 병은 있기 마련이니, 그렇게 알고 이 몸뚱이에 애착(愛着)을 두지 말아야 한다.
몸은 배탈이 날 수도 있고 신경통도 생길 수가 있고 감기도 앓을 수 있는 것인데, 그 가운데서 우리가 착실히 화두를 챙기면서 소일을 하면, 위장병도 나을 수 있고 신경통도 나을 수 있고 감기도 나을 수 있는 법이다.
수좌들에게 생기는 위장병은 대체로 잔뜩 먹고 조는 데서 온다. 적당히 한 칠부 팔부 먹고 어깨와 허리를 쭉 펴고 반듯하게 앉으면, 설사 졸음이 오더라도 고개만 끄떡하다 말지 허리가 구부정한 자세는 되지 않는다. 허리가 구부러지고 고개가 앞으로 많이 수그러지게 되면 오장육부에 부담을 줘서 병을 만들게 된다. 그러니 항상 바른 자세를 취하도록 노력하길 바란다.
그리고 이 몸뚱이라는 것은 '내가 약하다', '무슨 병이 있다'고 하여 거기에 집착하면 더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몸이 약하다거나 조그만 병이 있는 것은 아예 마음에 두지 말고 무심(無心)으로 돌려 버리고 화두에 안주(安住)할 것 같으면, 고요한 일념이 지속되는 데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소소한 병은 자연히 잊어 버리게 된다. 병에 대한 집착에서 생각이 떠나 버리기 때문에 자연히 좋아지게 되는 것이지.
그리고 좌선하는 자세가 바르면 건강상의 장애 뿐만 아니라, 화두 참구할 때 오는 장애들도 다 사라져 버리게 된다. 망상도 사라져 버리고, 혼침도 달아나 버리고 그렇다. 그래서 이 공부하는 이의 자세가 아주 중요하다. 처음 한철만 잘 길들여서 바른 자세를 갖추어 놓으면 일생 편안하게 수행할 수 있다. 오래 앉아 있어도 끄떡 없고, 앉아 있을 때 다리 아프면, 아래 위 다리 바꾸는 것은 아무 상관 없다. 식생활에 있어서는 좋은 것만 취하지 말고 고루고루 먹고 과식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견성지인(見性之人)은 공부를 마쳤다고 하여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경계를 일상생활에 항시 수용하는 것이다. 깨달은 살림이 그대로 생활화된다는 말이지.

 

별히 화두를 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 그렇지, 화두를 드는 것이 아니고 깨달은 경계가 일상생활에서 그대로 살림살이가 되어 버리지.

 

스님께서는 화두를 목전(目前)에 두라고 하셨는데, 목전에 둔 화두 있고 화두 드는 사람 따로 있고 하면 둘로 쪼개지는 것 아닙니까?

- 둘로 어떻게 쪼개져?

 

화두를 목전에 두라고 하였으니까, 목전에 둔 화두 따로 있고 또, 참구하는 나 자신이 따로 있게 되니, 둘로 쪼개지는 것 아닙니까?

- 아니, 온 정신을 목전에 두라는 말이지. 목전에 두는 것이 숙달 되면 앉아 있을 때 뿐만 아니라, 걸어갈 때도 그렇고, 누울 때도 그렇고, 어느 때건 화두 한 생각 모으기가 쉽다. 그렇지 않고 생각을 머리에 두면 상기(上氣)되어 참선을 할 수가 없고, 또 시야를 다른데 두면 견문(見聞)에 끄달려 화두 한 생각 모으기가 어렵다.

 

제 소견으로는 화두가 어디 머무는 바가 없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 응?

 

어디 한 군데 주(住)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 아니, 그렇지 않아. 항시 화두를 목전에 두어 생각을 모아야 된다.

 

그리고 또, '생각하면서 의심하고, 의심하면서 생각하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하다 보면 의리선(意理禪)이 되는 것 아닙니까?

- 아니지. 내가 '생각하면서 의심하고, 의심하면서 생각하라'고 할 때의 '생각하라'는 말의 의미는, 사량(思量)으로 화두를 헤아리거나 이치로 따지라는 것이 아니라, 화두 전체를 분명하게 챙기라는 말이다. "조사(祖師)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느니라." 이렇게 화두 제목이 분명하면서 의심이 쭉 지속되면 다시 화두를 챙길 필요가 없다. 그러나 화두가 희미해지고 혼침이 오고 이 생각 저 생각이 떠오르면 화두를 다시 챙겨야 한다. 분명하게 챙겨야 다른 번뇌, 망상, 혼침이 달라들지 않는다.
그렇게 화두를 챙기고 의심을 짓고, 챙기고 의심을 짓고, 그렇게 계속 애쓰다 보면 진의심(眞疑心)이 발동걸릴 때가 있다. 그 때는 한 번 화두를 챙겨 들면 며칠이고 몇 달이고 흐르게 되므로 굳이 다시 챙길 필요가 없다. 이렇게만 화두를 든다면 공부를 바로 지어가는 것이다.

 

한 생각이 지속되면 화두를 다시 챙길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지요?

- 그렇지. 다시 챙길 필요가 없지. 그대로 지속이 되니.

 

그것이 화두를 '관(觀)하라' 하는 것과 같은 말씀이신가요?

- 아니지. '관하라'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화두는 고요히 관(觀)하는 대상이 아니라 의심이 생명이다. 몰록 진의심이 돈발(頓發)하여 일념무심삼매(一念無心三昧)에 들게 되면 모든 바깥 경계뿐만 아니라 참구하는 나 자신까지도 없어지고, 온통 의심덩어리 뿐이게 되는 것이다. 대상도 주체도 없는 의심덩어리 그 자체다.

 

그런데 이것이 분별심(分別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화두일념이 지속되는데도 자꾸 '이것이 진짜 의정(疑情)이 아니지 않나?'하는 의심이 일어 다시 반성하곤 하는데,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면 되는 것입니까?
- 혼침, 망상 없이 화두가 분명하면서 의심이 지속될 것 같으면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좋다.

 

'의심하고 생각하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의심과 생각은 어떻게 다릅니까?

- 생각은 화두 전체를 떠올리는 것을 말하고, 의심은 그 내막의 뜻을 몰라서 그것을 알고자 간절히 의심하는 것이다. "달마 대사께서 서역에서 동토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데, 조주 선사께서 "뜰 앞에 잣나무니라" 하셨다.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묻는데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한 화두 전체가 분명해야 하고, 분명한 그 가운데 '어째서 뜰 앞에 잣나무라 했는고?' 하는 의심이 뒷받침 되어야 하지. 그 두 가지가 상반(相伴)되지 않으면 수레의 외바퀴와 같이 아무 활로가 없다. 제목이 분명하지 않고 의심만 지으면 나중에는 멍하게 되어 아무 것도 없이 시간만 흘러가고 생기가 없지. 마찬가지로 화두 제목만 있고 의심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부에 힘이 없고 아무 진척이 없게 된다. 그래서 고인들께서도 의심이 크면 클수록 깨달음도 크다고 하셨다. 그러니, 모두 해운정사 금모선원(金毛禪院)에서 실답게 정진하여, 몰록 활연대오(豁然大悟)해서 한국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시키게끔 한 번 열심히 해보자.

 

 

 

1990. 경오년(庚午年) 4月 수선회(현담)와의 문답

 

평상심(平常心)이란 무엇입니까?

- 먹고 자고 하는 일상생활 그대로가 평상심이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것이 평상심입니까?

- 그렇지.

 

도인들의 평상심과 속인들의 평상심은 어떻게 다른가요?

- 도인과 범부는 다르지. 중생은 모든 생활에 일일이 집착을 하는 반면에, 도인은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지. 평상심이라는 것은 도인의 깨달은 경계를 생활화하는 것이지.

 

생사가 둘이 아니라는 말과 생사가 없다는 것은 다릅니까?

- 생사가 둘이 아니라는 것은 생(生)하는 이치나 사(死)하는 이치가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시 진리 자체에는 생도 사도 없다.

 

깨닫고 나면 작용하는 망상이나 생각이 없습니까?

- 그대로 진법(眞法)으로 돌아가는 거지.

 

그러니까 망상 그대로가 보리(菩提)가 된다는 것입니까?
- 망상이란 자체가 없는 것이지.

 

욕심(慾心)과 탐심(貪心)의 차이는 어떠한지요?

- 오십보백보지.

 

스님들께서는 무심(無心)으로 소유욕 없이 살아가라고 하시는데 중생들이 소유욕 없이 무심으로 살 수 있습니까?

- 그럴 수 있지. 참 나를 알면 온 법계(法界)를 알고 온 중생과 한 몸이 되어 절대 평등이 되게 되지.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견성을 하면 지상이 불국토가 되고, 모든 백성이 부모형제로 한 몸이 되어서 아귀 다툼이 없고 항상 평온하고 안락하게 되지.

 

바른 선지식(善知識)을 바르게 믿어야 한다는데 중생은 눈이 없는데 어떻게 선지식을 바르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 중생은 안목이 없기 때문에 바른 선지식을 가리기가 어렵지.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스승에게 탁마(琢磨)를 받아야 한다고 하셨거든. 혼자서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니고 스승에게서 인가를 받은 분을 따르면 백 생애를 닦아야 할 것을 한 생에 바르게 닦아 깨치게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중구난방(衆口難防)으로 이 사람도 선지식이고 저 사람도 선지식이라고 쫓아다니다 보면 사견(邪見)에 떨어져서 정진(精進)에 진척이 없고 업(業)에다가 업을 더 보태게 되지. 그래서 대도(大道)와는 거리가 멀어져서 깨달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야.

 

결국 본인이 정진을 해서 닦아야 하는 것이지, 눈 없는 사람은 선지식을 가리지 못하겠네요?

- 그렇지. 안목이 없이는 상대를 바로 볼 수 없지.

 

금강경에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을 버리라고 하는데, 중생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버리고 생활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 중생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참으로 올바르고 건전한 생활은 내가 없는 생활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래야 복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

 

아상(我相)이란 무엇입니까?

- '내가 수행한 것이 제일이다, 내 법이 제일이다, 내가 잘 났다, 내가 잘 한다, 내가 많이 안다, 내가 많이 가졌다' 하는 것이 다 아상에 속하는 것이다. 진정한 부처님 법에는 대오(大悟)하면 이런 것이 없게 되지.

 

재가자(在家者)는 어떻게 해야 참답게 사는 것입니까?

-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지해서 자기를 계발(啓發)하는 수행을 하루하루 쌓아가는 가운데 직분에 따라 성실하게 사는 것이 참답게 사는 길이지.

 

수행하는 데 있어서 재가자가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참선을 하는 사람이 혼자서 사는 것은 좋은 것이지. 참 나를 알기 위해서 그 길을 가는 것이고. 아주 값진 생활이지.

 

출자가와 재가자의 수행에 있어서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 출가자는 혼자의 몸으로 홀가분하고, 재가자는 처자가 있어서 생활을 하여야 하니까 번거롭지. 그러나 최상승법에서는 바른 신심으로 바른 법을 구하는 철두철미한 생각을 갖고 바른 선지식을 만나서 바른 수행법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승속(僧俗)에 관계가 없지.

 

총림(叢林)으로 출가를 하는 것이 좋습니까?

- 안목이 근본인데 총림의 방장이라도 모두 안목이 투철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 한국 불교의 현실이거든. 절이 크다고 해서 일등 수행인이 사는 것은 아니야.

 

출가하는 사람은 어떠한 곳으로 출가를 하여야 합니까?

- 참나를 발견하는 데에는 절대적으로 선지식(善知識)이 근본이다. 선지식은 부처님의 대행인(代行人)이야. 출가는 견성대오(見性大悟)를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거든.

 

꿈과 잠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 잠으로 인해서 꿈을 꾸는 거지.

 

그럼, 꿈과 잠이 똑같은 것입니까?

- 잠을 자지 않으면 꿈이 없는 법이거든. 망상이 있는 중생이 망상이 그대로 꿈이 되는 것이지.

 

음욕심[性欲]은 어떻게 없앨 수 있습니까?

- 전생의 습기로 축생이나 사람이나 다 익힌 것이지. 다겁생에 익힌 것으로 아주 예민한데 이것을 제하려면 정진을 해서 일념삼매가 되어야 하지. 좋고 나쁜 것이 차단이 되어서 깨달으면 모든 습기가 일시에 다 제거가 되지.

 

선가귀감(禪家龜鑑)에 서산 대사(西山大師)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즉돈오 사비돈제’(理卽頓悟 事非頓除 : 이치로는 깨달았어도 습기는 제하지 못했다)라 하셨는데요.

- 그것은 모순이지. 육조 대사도 금을 캐어 녹여서 잡금을 제하면 순금이 된다고 하셨지. 물에 있으나 산에 있으나 순금은 변하지 않는 것과 같이 견성을 하면 습기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지. 번뇌가 곧 보리, 완전히 진리로 돌아갔는데 번뇌에 놀아나게 되겠는가.

 

낮에는 화두가 잘 되는데 꿈 속에 화두가 안 되는 이유는?

- 아주 간절하게 참의심이 순일되어야 꿈 속에서도 화두가 이어지게 되지.

 

조실스님은 언제 어디서나 화두가 꿈 속에서도 이어졌나요?

- 나는 결제, 해제에 관계없이 정진을 했었지. 아주 간절한 일념이 지속되다가 깨달았지.

 

잠깐 사이에 깨치셨습니까?

- 잠깐 사이가 아니고 아주 간절하게 일념으로 화두의심이 지속되다가 깨달았지.

 

시간적으로 얼마나 됩니까?

- 모르겠다.

 

며칠간은 일념이 지속된 것이지요?

- 전 생애를 화두에 걸고 생활을 했었지.

 

태고 보우 국사는 오매일여가 90일간[가을~이듬해 봄] 이어졌다고 하는데요?

- 선정삼매에 들면 눈 깜짝할 사이에 3년이고 세월이 가는 것이지. 석가모니 부처님도 삼매에 드셔서 새가 둥지를 트는 것도 모르셨다고 하셨거든. 누구든지 삼매에 들게 되면 길고 짧은 것을 논하게 되지는 않지.

 

외도(外道)들은 ‘기(氣)가 있어야 한다. 기를 잘 돌려야 한다’고 하는데 기(氣)는 무엇입니까?

- 견성법은 기(氣)를 논하지 않고 오직 바른 안목을 논하지. 이 몸은 백년 이내에 없어지거든. 수행인은 그런 것에 집착하지 않아야지.

 

죽는다는 것은 슬픈 것입니까?
- 가고 오는 것을 모르고, 참나를 모르니까 적막하고 막막해서 슬프다고 하는 것이지.
 
죽은 후에도 자기가 닦은 것은 그대로 가져가는 것이지요?

- 그렇지. 지혜, 복덕, 업, 이 세 가지는 가지고 가지.

 

참다운 근기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 부처님의 대승법, 최상승법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기(大機)를 말하는 것이지.

 

수좌 스님들이 몇 년간 정진을 하다가 강원으로 들어가는 것은 신심이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까?

- 신심이 빈약하고 참다운 발심을 못한 고로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니라. 출발 자체도 진정한 신심이 아니고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하다가 정진이 힘들고 진취도 없으니까 자포자기하고 다른 길로 가는 것이지.

 

그러니까 한 번 수좌가 되면 끝까지 수좌의 길로 가야 하는 것이지요?

- 그렇지. 발심한 사람은 구경에 이를 때까지 불퇴전의 신심으로 정진을 해야 하지.

 

화두가 일념이 되기 전에 다른 길로 가는 것은 신심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지요?

- 그렇지. 정진삼매의 진가(眞價)를 모르니까.

 

초보자에게 권하시는 책은..? 선가귀감(禪家龜鑑)이나 육조단경(六祖壇經)...?

- 육조단경이 좋지. 심요(心要)의 비결이 육조단경에 있지.

 

조실스님께서도 육조단경을 많이 보셨습니까?

- 육조단경을 수행의 길잡이로 삼았다.

 

결제 기간 중에 원주, 다각 등 소임을 맡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선(禪)은 동정(動靜) 가운데서 익히는 것이지. 일거일동, 일상 생활 가운데에서 화두와 씨름을 하면서 익혀야 하는 것이지.

 

선지식이란 말과 스승이란 말과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 스승은 은사 스승, 법사 스승 등 많고, 선지식은 부처님의 진리를 깨달아 안목을 갖춘 분을 말하지.

 

현 사회에 불신풍조가 만연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탐(貪), 진(瞋), 치(痴)와 아만, 교만, 허세 때문이지.

 

도인은 어떠한 분입니까?

- 진리대로 생활하고 모든 사람을 평화로운 곳에 인도하는 역할을 하지.

 

화두를 타는 방법이 있습니까?

- 삼배(三拜)하고 생각을 비우고 선지식이 일러 주시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지.

 

‘無’자 화두를 참구할 때 '조주는 어째서 無라고 했는가?' 하고 그 뜻을 참구하는 것이 바르게 하는 것입니까?

- 그렇지.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다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셨는데 조주선사는 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하셨는가?’ 하고 오매불망 조주 선사의 뜻을 참구하는 것이지.

 

‘이 뭣고?’ 참구할 때 ‘이‐’만 바로 의심하면 ‘뭣고’는 필요 없다고 하는데요?

- 화두를 드는 데에는 화두 전체를 분명히 챙기는 것에 바로 화두를 드는 묘미(妙味)가 있는 법이지. 육조 선사가 시심마(是甚麽 : 이 뭣고) 화두를 들 때 ‘모든 사람에게 한 물건이 있으되, 가고 오고 말하는 가운데에 늘 쓰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모르니 이것이 무엇인고?’ 했으니 화두 전체가 분명한 가운데 의심이 철저해야 한다.

 

경계가 날 때마다 점검을 받는 것이 좋습니까?

- 말을 들어보고 바르게 지도를 하니까 자주 물을수록 좋지.

 

묻는 허물보다 묻지 않는 허물이 더 큽니까?

- 서울을 가야 하는데 잘 모르고 엉뚱한 곳으로 가면 안 되지.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곧바로 서울로 가야 하는 것이지.

 

어떻게 해야 업장 소멸이 됩니까?

- 참회하는 것도 조그마한 업장 소멸은 되는 것이지만, 견성을 해야 모든 업장이 소멸되는 것이지.

 

업(業)은 어떻게 이루어 집니까?

- 생활 가운데에 가지가지 습기(習氣)로 이루어진다.

 

생각이 업이라고 하는데요?

- 진법(眞法)을 아는 사람은 모든 것이 법이지만 중생은 진법을 모르니까 생각 생각이 다 습이 되고 업이 되는 것이지.

 

오매일여(寤昧一如)가 되면 배 고프고 오줌 누고 하는 생각들이 나지 않습니까?

- 그 가운데에서도 일념이 지속되는 것이지.

 

망상은 망상대로 약간은 남아 있는 것이지요?

- 화두가 일념이 되면 망상이 차단이 되지.

 

화두법 이전에는 무슨 법이 있었습니까?

- 염불, 독경, 관법이 있었지. 중국 육조 선사 이후로 무수한 도인이 난 것은 최상승법으로 인하여 모든 습기가 제거되고 몰록 진리의 문이 열려진 것이지. 간화선만 바로 하면 누구나 견성도인이 되거든.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바로 진리에 접할 수 있는 것이 간화선 화두이지.

 

정진 중에 과거 망상이 많이 떠오르고 미래 망상은 적은데 왜 그렇습니까?

- 과거의 습기로 인해서 망상이 떠오르는 것이지.

 

많이 보고 듣는 것이 업식만 더 보태는 것입니까?

- 그렇지.

 

그럼, 산중에서 안 보고 안 듣고 정진을 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 아닙니까?

- 그렇지도 않지. 선지식이 없는 곳에서는 힘만 허비하는 것이지. 지혜로운 자는 선각자(先覺者)를 친견하여 바른 수행법 묻기를 좋아하지.

 

어떤 스님은 수좌가 300~400명이 되어도 그 분이 뜻하는 바대로 바르게 실참실구하는 사람은 한두 명밖에 없다고 하시는데, 조실 스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 이 일을 밝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지. 그러나 십분 신심과 용맹심을 가져서 선지식 스님의 지도를 받아 수행을 잘 하면 십중팔구는 대도(大道)에 들어갈 수 있지.

 

선지식 스님을 만날 때마다 화두 참구 방법을 물어보아야 합니까?

- 바른 선지식을 만나 바르게 참구하는 법을 익혔으면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지.

 

일반인들이 화두 참구를 하다 보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지를 못하는데, 일반인들이 어떻게 생각을 정립해야 합니까?

- 여러 가지 생각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는데 이것을 화두로 돌리면 사심(邪心)이 없어지게 되지. 일상 생활을 직분에 충실하고 나머지 시간에 가지가지 생각을 하지 말고 오로지 화두 참구에 전력할 것 같으면 마음의 지혜가 계발되어 더욱 더 잘 사는 국토가 될 것이고, 온 세계가 일가(一家)가 되어서 발전하고 평화가 오지.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도 농부도 정치인도 누구든지 참선을 수행해야 마음의 평화가 오는 법이지.

 

산중에서 20~30년 정진해도 견성을 하기가 어려운데 세속에서 처자와 살면서 견성할 수 있겠습니까?

- 진실하게 얼마만큼 바로 받아들이느냐에 달렸지. 일념이 순일하게 되어야 하는 것이야. 장시간(長時間)을 요하는 것이 아니거든. 일념이 지속되어서 홀연히 마음땅[心地]을 돌이키는 것이 견성이지. 시간에 구애되는 것이 아니야.

 

어떤 스님은 일주일간 용맹정진을 해서 트이지 못하면 견성을 못한다고 그러셨는데요?

- 형식적이 아니라 참의심이 일념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지. 하루가 지속되어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지.

 

무심(無心)과 무아(無我)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 마음 가운데에 따로 마음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지. 무심(無心)하면 무아(無我)를 누리고 무아(無我)하면 자연히 무심(無心)을 수용하느니라.

 

무심 상태에서는 업식이 동(動)하지 않기 때문에 무심 속에서 화두를 잡고 고기를 먹고 술을 먹어도 업식이 나지를 않는다고 하는데, 견성 전에는 업식이 나는 것이지요?

- 견성을 해서 진리를 봐야 정법이지. 무심 상태라도 진리를 보지 못하는 가무심(假無心)은 업식이 나는 법이지.

 

화두 공안 중에서도 체(體)를 나툰 공안이 있고, 용(用)을 나툰 공안이 있다고 하는데요?

- 체와 용에 국한되지 않고 향상구, 향하구, 최초구, 말후구, 일구, 이구, 여래선, 법신구 이러한 등등의 화두 공안이 나열되어 있지.

 

용(用)을 나툰 공안은 대표적으로 덕산탁발(德山托鉢), 남전참묘(南泉斬猫), 노파소암(老婆燒庵)이 아닙니까?

- 그렇지 않지. 체니 용이니 논할 수가 없지. 그것은 선지식이 학자를 접할 때 밝혀야 하는 것이지.

 

법거량할 때 차별지(差別智)를 살펴야 한다고 하셨는데, 요번에 차별지의 답을 못하고 다음에 정진을 하고 나서 그 차별지를 설명하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 바른 눈이 열리면 일체 법문이 일시에 열리게 되지.

 

세상살이가 고통이라고 하는데 가장 큰 괴로움은 무엇입니까?

- 나고 죽는 고통이 가장 큰 고통이 되지.

 

전에 한 번 맛본 경계를 또 다시 맛보려고 하는데도 안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정진의 힘을 못 얻어서 그렇지.

 

잠은 몇 시간 자야 합니까?

-  이 참선 공부를 실천하려면 4~5시간 자는 것도 무방하지.

 

화두를 방편이라고들 하는데요?

- 화두를 실답게 참구해서 실답게 깨달으면 바로 진리에 들어가는 지름길이 되지.

 

식(識)이 맑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 분별이 다하면 맑게 되지.

 

화두법(話頭法)에서 식이 맑다는 것과 관법(觀法)에서 식이 맑다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 대동소이한 것이지.

 

대승법에서의 견성과 소승법에서의 견성과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 소승법에서는 견성이 없지.

 

사정(邪定)과 정정(正定)의 차이는?

- 견성을 해야 정정(正定:바른 정)이고 못하면 사정(邪定:삿된 정)이지.

 

화두를 참답게 실참실구(實參實究)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눈 밝은 선지식 밑에서 공부하면서 법문도 듣고 자주 묻고 해야지.

 

눈을 감고 정진을 하는 것은 어떠합니까?

- 눈을 감고도 일념이 지속되면 관계가 없는데 그렇지 않으면 혼침과 망상에 떨어지느니라.

 

호흡하는 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따로 권하지를 않는다. 자연스럽게 하면 되는데 일부러 따로 익히려고 하면 어렵지. 호흡에 관계하지 말고 화두에 전념하는 것이 힘을 더는 것이니라.

 

터[도량]는 어떻게 보십니까?

- 신라 고찰도 명당에 지어졌었고, 터가 좋으면 생기가 나고 좋지만 선지식이 없으면 소용없지. 선지식도 있고 도량이 좋으면 금상첨화지.

 

수좌 스님들이 터가 세어서 정진을 못한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십니까?
- 마음이 굳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터가 센 곳에서 수행하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 터가 세고 세지 않는 것을 느껴보지 못했다.

 

외마(外魔)가 있습니까?

- 마음의 분별이지.

 

가위에 눌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 자나 깨나 화두를 일여하게 들면 없는 것이지.

 

섬이나 바닷가에 도인이 적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 도인은 인연을 따라서 곳곳마다, 어디든지 머무르게 된다.

 

하안거보다 동안거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 둘 다 중요하지. 발심하기에 달린 것이지.

 

30~40세에 힘을 얻지 못하면 내생으로 넘어가고 이 나이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데요?

-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의 신심을 내어 간절한 마음으로 바른 지도를 받아 바르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지.

 

현 시대의 도인이 신통이 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일상 생활 그대로가 다 신통이지. 별달리 신통을 구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야.

 

평소에 화두가 안 되면 숨 떨어질 때에도 화두가 안 될 것인데, 임종시에는 아미타불이라도 염(念)해야 하는 것입니까?

- 아미타불을 염하는 정신이 있으면 화두를 바로 챙기는 것이 더욱 좋지.

 

시신(屍身)을 화장하는 것이 좋습니까? 안하는 것이 좋습니까?

- 화장을 하는 것이 좋지. 중생은 몸에 혼(魂)이 머물고 있는데 시신을 태워 없애고 법문을 해 주어서 집착을 없애고 떠나보내는 것이 좋지.

 

풍수가들은 묘자리의 씀에 따라서 집안이 흥하고 망한다고 하는데요?

- 절집 견성법 문중에는 중요시 여기지 아니한다.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세다고 하는데요, ‘도고마성(道高魔盛)’이 사실입니까?

- 잘못된 인식이니라.

 

정진 중에 꿈 가운데에서 몽사(夢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요?

- 다 전생의 업이지.

 

조상이 천도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알 수가 있습니까?

- 천도를 잘하면 영가가 집착을 놓고 좋은 곳으로 저절로 가게 되지. 신심과 정성으로 환희심을 다해서 영가를 천도할 것 같으면 자연히 영가는 고(苦)를 여의고 낙(樂)을 얻어 가지. 천도는 법력을 의지하여야 되는 것이다.

 

대중선방 생활과 토굴 생활과의 장단점은 무엇입니까?

- 선지식이 주석하는 회상이라야 고귀한 생명력이 있다. 그렇지 않고는 용두사미에 불과하다.

 

끝으로, 달마가 서역에서 중국으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 조사는 무의(無意)니라.

 

조사는 왜 뜻이 없습니까?

- 억.[일할(一喝)하시다]

 

 

 

1988. 무진년(戊辰年) 동안거 수선회(현담)와의 문답

 

조실 스님은 돈오돈수(頓悟頓修) 사상이 육조(六祖) 이후 마조(馬祖)로 내려오는 것이 정맥(正脈)이고 하택(荷澤) ‐ 규봉(圭峰) ‐ 보조(普照)로 내려오는 문중은 문밖 사람이라 정맥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돈오돈수는 미세망념(微細妄念)이 없는 것입니까?

- 그렇지. 일체번뇌(一切煩惱)와 미세망념이 몰록 끊어진 것이지.

 

종정[性徹] 스님과 여기 조실[眞際] 스님 가풍은 돈오돈수 사상이지요?

- 그렇지. 육조문하(六祖門下)에 오종(五宗)이 벌어졌고 오종은 모두 돈오돈수 사상이지.

 

깨친 다음에 인가(印可)를 받습니까? 깨치기 전에도 인가를 받습니까?

- 깨친 다음에 일체법문(一切法門)에 막힘이 없어야 인가를 받는 것이지.

 

깨친 후 탁마하여 확실하다고 인가해서 은밀히 전해진 후에도 미혹한 것이 있으면 또 다시 점검받는 경우도 있습니까?

- 향상구(向上句)가 해결되면 다시 더 닦고 깨달을 것이 없는 것이지. 법신구(法身句)나 여래선(如來禪)을 가지고 알았다는 것은 종사(宗師)가 되지 못하는 것이지. 마조(馬祖), 임제(臨濟), 덕산(德山)의 살림살이를 모르는 것이야. 마조 선사께서 향상구를 제창하셨으니, 그 문하들이 모두 향상구를 모르면 견성이 아니고 임제, 덕산의 돈오돈수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이러한 바른 안목이 열리지 못하고 점수의 물이 잔뜩 들어서 큰 병폐가 되는 것이지. 육조 대사(六祖 大師)도 하택은 지해인(知解人)이라 하셨고, 오조 대사(五祖 大師)는 신수(神秀)를 문 밖의 사람이라 하셨거든. 반야다라존자의 수기를 받으신 마조 선사는 선(禪)에 대해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안목을 지니신 분으로 마조의 가풍은 독특한 것이야.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보다도 마조선사가 더 안목이 투철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 백장(百丈), 남전(南泉), 귀종(歸宗)이 마조의 법을 이어받아 이 법이 중국 천하를 덮게 되었고, 임제, 덕산도 바로 이 법을 터득한 것이지. 임제, 덕산의 법이 곧 마조의 법인데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하지만 이 법을 바로 알면 돈오돈수이고 이것이 부처님의 바른 수행법이 되는 것이야.

 

돈오점수에서는 육조 스님이 16년간 사냥꾼과 지낸 기간을 보림으로 보는데 스님께서는 이 점을 어떻게 보십니까?
- 돈오 후의 점수 기간이 아니라 시절 인연(時節因緣)이 있는 것이지. 오조 대사도 육조 대사에게 시절을 기다리라고 부촉했거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셔서 법을 펴는 데도 시절 인연이 있었던 것이지. 시절 인연이 도래하지 않으면 법을 펼 수 없고 역행하게 되는 것이거든. 귀종 선사는 마조 선사의 제자인데 어느 납자가 “어떤 것이 보림입니까?”하고 물었더니 “한 티가 눈에 가리면 어지러이 허공꽃이 떨어진다.”고 하셨던 말이야. 귀종 선사가 아니면 이렇게 말을 못하지. 이것을 바로 들을 줄 알면 모든 종사의 본분사(本分事)를 다 알게 되는 것인데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근래 우리나라 선지식들에게 돈오점수 사상이 있게 된 것이지. ‘한 티가 눈에 가리면 허공꽃이 떨어진다’고 한 뜻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종사의 눈을 바로 갖추지 못했다고 보는 거지.

 

돈오점수 사상은 이변지(理邊智)가 부처님과 똑같아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사변지(事邊智)는 부처님과 같은 능력이 나오지를 않으니까, 사변지를 닦기 위해서 닦는 것이 점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 닦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흐르면, 즉 이변지만 바로 보게 되면 자연히 다 갖추게 되는 것이지.

 

이변지만 확실히 보고 나면 사변지는 닦지 않고 노력하지 않아도 신통이 저절로 나오는 것인가요?

- 그럼, 이변지만 지키면 다 되는 것이지.

 

소승사과(小乘四果)인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도 견성을 못한 것이라고 하는데 아라한이 견성했습니까? 못했습니까?

- 아라한은 성인(聖人)의 지위에 들어간 것이지. 부처님께서도 아라한은 성인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셨고. 하지만 이것은 달마(達磨)의 견성법과는 다른 것이지.

 

소승법(小乘法)이기 때문에 다른 것입니까?
- 소승법은 성인의 지위에 들어가는 것이고 견성법과는 차등이 있는 것이지.

 

확철대오(確撤大悟)하면 미세망념(微細妄念)이 없다고 보십니까?
- 그렇지. 돈오돈수(頓悟頓修)만 되면 미세망념이 없는 것이지.

 

망상이 있는데 놀아나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망상이 아주 없는 것입니까?
- 망상이 없는 자체를 그대로 수용하고 깨달은 경계 그대로가 일상 살림이 되는 것이지.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것이 일반인들은 아뢰야식 가운데 그대로 훈습이 되는데 확철대오하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훈습이 안 됩니까?
- 그렇지. 육조대사도 제8식을 넘어서 대원경지(大圓鏡智)가 되면 종전의 분별 작용이 서지 못한다고 하신 것처럼 구경에 이르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것이지.

 

묘관음사의 비문에 적혀 있는 운봉 선사로부터 향곡 선사가 인가를 받고 난 후에 함께 정진하던 도반(성철스님)이 물었는데, 향곡선사께서 답을 못해서 더 정진을 하신 후에 답을 했다.... 하는 것은?
- 향곡 선사께서는 답을 못하시고는 소낙비가 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탑에 기대어 삼칠 일간 용맹정진을 하면서 참구하시다가 깨치셨는데, 깨닫고 보니까 질문을 한 도반 스님이 확실히 아는 것이 아닌 것을 보고 도반 스님에게 방망이를 놓고 이렇게 두 분이 서로 주고 받으면서 힘을 얻게 되고 깨닫게 되었지. 이 두 분 스님으로부터 다시 한국 선종이 임제, 덕산의 가풍을 재현하게 된 것이지. 그 전에는 대부분의 스님들이 돈오점수 사상에 침체되어 있었거든.

 

여기서 향상구는 조사선(祖師禪)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 아니지, 별개야. 향상구를 알아야 차별삼매를 다 알게 되는 것이야.

 

경허, 혜월로 이어지는 법맥을 운봉 선사가 향곡 선사에게 전하신 것인데, 향곡 선사께서 인가를 받은 후, 도반의 물음에 막혀서 삼칠일 간 용맹정진을 해서 답을 했다는 것은 미진하기 때문에 더 닦은 것으로 돈오돈수의 확철대오가 아닌 돈오점수 아닙니까?
- 고인들도 한두 번 늦게 깨달은 경우도 있지. 설봉 선사(雪峰禪師)도 암두 선사(巖頭禪師)에게 한두 번 혼이 났었고, 임제 선사도 두 번 그런 적이 있고..... 구경각, 즉 향상구에 이르러야 돈오돈수인데 근세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선사들의 사상이 향상구를 모르고 여래선만 알았지.

 

400년 전의 서산대사까지도 돈오점수로 잘못 아신 것으로 보십니까?

- 나중에는 돈오돈수를 제창했다.

 

그 위의 태고 보우(太古普愚), 환암 혼수(幻菴混修), 구곡 각운(龜谷覺雲) 같은 분들도....

- 태고 보우 국사가 중국으로부터 직접 선법을 전수 받은 뒤로 환암 혼수 등의 선사들은 안목이 있었고, 그 후로 실낱같이 내려오게 된 것이지.

 

임제, 덕산의 살활자재(殺活自在)하는 가풍이 향곡‐성철 선사로부터 재현되었다고 보면 기존의 경허‐혜월‐운봉 선사의 맥은 존중하되 거기에 맞추면 이론이나 논리가 맞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 안 맞지. 우리가 허물을 짚고 넘어가야 돼. 임제 골수의 안목을 전수 받지 못하다가 변화가 온 것이지.

 

임제종(臨濟宗)에서 깨닫게 되면 조동종(曺洞琮), 위앙종(僞仰宗), 운문종(雲門宗), 법안종(法眼宗)과 거량해서 서로 통하고 걸림이 없게 되는 것입니까?

- 육조의 자손들도 다 똑같은 것이지. 임제의 가풍은 대기 대용(大機大用)한 것이고, 모르는 사람이 잘못 알고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이지 알면 다 통하는 것이야.

 

큰스님께서는 법상에 올라가시기 전에 미리 법문을 준비하십니까?

- 준비가 좀 되어야지. 아침에 좀 생각하지.

 

준비한다는 것은 미진한 것 아닙니까?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살활자재(殺活自在)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 미진한 것이 아니고, 줄거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부처님 사십구년 설법도 마찬가지야. 십이 년간 소승법을 설하시고, 어느 정도 교육이 된 후에 한 단계씩 올려서 대승법으로, 마지막에는 최상승선을 설하신 것이지. 주장자만 들면 되는데 중생들이 이 뜻을 모르니까 말로 하신 것이지.

 

법상에 올라가셔서 법문을 하실 때 주장자를 처음에는 세 번, 끝날 때에는 한 번 치는 경우가 있고, 처음에 한 번, 끝날 때에 세 번 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표현하는 것입니까?
- 고인(古人)들은 세 번 치는 경우가 있었지만 나는 꼭 한 번 치지. 삼즉일이요 일즉삼이라[三卽一 一卽三].

 

제 알음알이 상식으로는 한 번 치는 것은 일구(一句)이고, 세 번 치는 것은 군더더기로 표현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 그것은 사견이야. 종사(宗師)는 항시 본분사(本分事)를 다루는 법이야.

 

조실 스님이 주장자를 한 번 치시는 것은 무슨 도리입니까?
- 심오한 진리가 있지. 일천 성인도 알지 못할 일구가 있지.

 

큰스님께서 최초로 법상에 오르신 시기와 장소는 어떻게 됩니까?
- 묘관음사에서 인가를 받고 법상에 올랐는데, 세속 나이로 33세일거야.

 

외호 대중을 만나지 못하면 도통하지 못한다고 들었는데요. 예를 들면 석두(石頭) 선사가 효봉(曉峰) 선사를 토굴에서 정진하게 할 때에 음식도 넣어주고 사람도 못오게 하여, 마치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고 있는 것처럼 외호를 해 주셨는데, 조실 스님도 향곡 스님한테 그렇게 외호를 받으셨습니까?
- 그냥 대중 생활을 했었지. 외호가 필요 없었어. 마음의 반연이 다 끊어졌는데….

 

깨칠 때 7일 혹은 90일간 화두의심(話頭疑心)이 이어진다고 하는데, 조실 스님은 얼마나 화두가 이어지셨는지요?
- 나는 모든 반연이 끊어져서 결제, 해제를 관계하지 않고 앉으나 서나 화두를 참구했지. 처음 화두 타서 2년 만에 열렸고, 그 뒤 한 5년….

 

그 기간에는 묘관음사(妙觀音寺) 산문 밖을 나가지 않으셨습니까?
- 거의 안 나갔지.

 

그 때 잠은 몇 시간이나 주무셨습니까?
- 잠은 너댓 시간 잤지.

 

어느 경계가 지났을 때 조실 스님에게 물으셨습니까?
- 막힌 것이 있을 때 묻고 화두가 타파되어야 거량이 되는 것이지. 깨닫고 난 다음에 물으면 여러가지 문답이 상통되지.

 

향곡 선사께서 인가를 받으실 때 전 대중을 모아 놓고 하셨습니까? 개인적으로 인가를 받으셨습니까?
- 단독으로 인가를 받으면서 전법게(傳法偈)를 받았어.

 

밀전(密傳)이라고 하지만 제3자가 보았을 때 공신력이 덜한 것이 아닙니까?
- 단독으로 받았지만, 선사께서 대중에게 알려서 대중이 다 알았지.

 

여태까지 마음에 드는 수좌가 없다고 하셨는데 인정 받은 사람이 없는 것인가요?
- 없지. 서로 문답이 상통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어.

 

수좌 스님들이 평생 목숨을 걸어도 견성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 첫째는 선지식을 신(信)하지 않는 데에 있고, 둘째는 바른 지도를 받지 못하는 데에 있지. 바른 지도를 받고 모든 반연이 쉬어서 오로지 견성을 위해서 전 생애를 바쳐야겠다는 확고한 신심(信心)이 서야지.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안되는 것이지.

 

학인을 다룬다는 것은 말을 시켜보고 다룬다는 것입니까? 모습을 보고 다루는 것입니까?
- 말을 주고 받으면 알게 되지.

 

정진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임종할 때 매(昧)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데 평상시에도 화두가 안 되는데 숨 떨어질 때 되겠습니까?
- 진실되게 화두가 순일하게 될 것 같으면 정신이 혼미해지지 않나니....

 

숨 떨어질 때 차라리 주력(呪力) 등으로 힘을 얻는 것만 못한 것 아닙니까?

- 정신을 못 차리는데 주력이라고 해서 나을 것이 없지. 그러나 화두 한 생각이 바로 이어지면 모든 산란심이 없어지고, 어느 것보다도 나은 것이지.

 

공안(公案) 화두법은 자력(自力)으로 보아야 합니까? 타력(他力) 으로 보아야 합니까?
- 절대 자력이지. 화두 일념이 지속되면 홀연히 타파가 되는 법이야.

 

타력적인 기도나 정근(精勤)을 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보십니까?
- 그것은 하근(下根) 중생의 신앙 생활이지.

 

복(福)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 복은 마음이 깨끗하고 삿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마음이 깨끗하고 삿되지 않으면 일거일동이 선행(善行)이 됨이니 그것이 복의 원천이니라.

 

덕(德)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 덕도 복과 마찬가지이지. 남을 헐뜯지 않고 항시 본성의 깨끗한 성품을 따라서 평등하고 인아상(人我相), 아만(我慢)이 없는 마음을 쓸 것 같으면 덕이 되지.

 

지혜(智慧)는 무엇입니까?

- 마음의 본 바탕을 봄으로 인해서 마음 광명이 열리니 이것을 지혜라 하나니라.

 

중생은 어리석고 무명업식(無明業識)에 있다고 하지만 머리를 써서 우주를 관찰하고 과학을 발전시키는데, 이것은 지혜와 다른 것입니까?
- 지혜와 견문 알음알이는 다르지. 지혜는 본 바탕을 바로 보아서 체성(體性)의 광명을 찾는 것이고, 세상의 지식은 알음알이 분상으로 따지고 셈하는 것으로 과학이 이루어진 것이지.

 

묘관음사에서 정진을 하실 적에 해운정사(海雲精舍)를 지으려고 생각하지 않으셨는지요?

- 공부할 때에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 안되지.

 

인가를 받고 나서 회상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하신 후 장소를 물색하시던 중에 장수산의 맥이 뻗쳐 있는 것을 보시고 해운정사를 지으셨다고 하셨는데, 지금 짓고 계시는 108평 큰 법당 불사도 그렇게 즉흥적으로 하신 것입니까?

- 3년 전부터 만반의 준비를 했지.

 

중생들이 생각하는 알음알이 계산, 계획과 조실스님이 절을 지으시는 것에 차이가 있습니까?

- 물론 차이가 있지. 혜안으로 미래사(未來事)를 직견(直見)하고 바로 시작하는 것이지만, 장소와 시주자와 여러 가지 조건이 되어야지....

 

해운정사가 장수산의 정맥으로 조실스님의 인연도 있는 것이지만, 불보살님의 가피도 입어서 절을 지으신 것은 아닌가요?

- 가피는 생각 않고 그냥 세속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법을 펴기 위하여 여기에 자리를 잡은 것이지. 이렇게 좋은 조건의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은 숙세(宿世)에 많은 사람과 인연이 있기 때문이지. 사람들이 많이 오는 것보다도, 부처님 법을 바르게 지도할 수 있는 바른 안목을 가진 자가 나와야 하는 것이지.

 

업장 소멸이 된 사람과 업장 소멸이 안 된 사람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 업장은 과거의 여러 가지 습기(習氣)인데 중생은 그 습기가 없어지질 않지. 견성을 해야 없어지는 것이지.

 

견성을 해야 업장이 소멸되는 것이라면 조실스님은 업장이 소멸된 것이네요. 업장이 소멸되지 않은 사람도 각기 업의 가볍고 무거운 차별이 있는 것입니까?

- 덜하고 더한 경중(輕重)이 있지.

 

업이 최초로 시작되는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 본심본성(本心本性)을 한 생각 등짐으로 인해서 한 생각을 쫓아서 온갖 생각이 점차 일어난 것이지. 모두 자성삼매(自性三昧)를 수용하면 생각이 붙지를 못하는데 한 생각 일어남으로 인해서 퇴보하게 되어 천차만별이 일어 나는 것이지.

 

깨달으면 확연하게 다 알게 됩니까?
- 그렇지, 일체지(一切智)를 갖추면 다 알게 되지.

 

확연하고 명백하게 아는 것을 확철대오(確撤大悟)라고 하는 것이고, 희미하게 아는 것을 그냥 안다고 하는 것입니까?

- 구경(究境)에 이르러야 바로 아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안다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지.

 

화두를 하면 마음이 편안할 때 있지만, 괴로울 때도 있는데 이것은 화두를 바르게 참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 그렇지. 분별이 꼬리를 물고 따라 다니기 대문에 그런 것이지.

 

조실스님이 보실 때 한국 불교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모두를 한 곳에 모아놓고 참선을 지도해서 인상(人相), 아상(我相)을 쉬게 하여 마음 광명을 찾음으로 인해서 종단이 화합하고 온 나라가 불국토(佛國土)가 될 것이야. 껍데기 불교는 소용이 없는 것이지.

 

체중현, 구중현, 현중현의 삼현(三玄)이 임제의 가풍이 아니라고 스님은 그러시는데, 임제록에는 삼현이 나오는데요?
- 그것은 고탑주라는 후손이 자기의 사견(邪見)으로써 성립시킨 것이지. 임제선사의 삼현 현지(玄旨)와는 거리가 멀어.

 

생사를 넷으로 나누어서 지무생사(知無生死), 체무생사(體無生死), 계무생사(契無生死), 용무생사(用無生死)라 하고 이것을 교가(敎家)의 이무애(理無碍), 사무애(事無碍), 이사무애(理事無碍), 사사무애(事事無碍)와 비교하면 서로 맞는데, 이러한 것들을 후학이 알아야 하는 것입니까, 깨치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입니까?

- 깨치면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인데 공부하는 과정에서 일부러 알려고 할 필요는 없지. 임제선사와 고인(古人)의 살림살이는 살활종탈(殺活從奪), 기용제시(機用提示)의 자재에 있는 것이지. 그러니까 바보가 되어서 화두와 씨름을 해서 일념삼매가 되어야 하는 것이야.

 

장좌불와(長坐不臥)를 어떻게 보십니까?

- 나는 권하지를 않아. 왜냐하면 장좌불와를 해도 혼침이나 몸에 끄달리지 않는 상태이면 좋지만, 억지로 하려면 어려운 것이지. 화두가 일념으로 지속되면 장좌불와가 저절로 되고 혼침도 없어지고 괴로움도 없어지게 되는데 이를 흉내내서 몸만 망치게 되면 오히려 실다운 소득이 없게 되지. 몸은 기계와 같아서 기계에 기름을 치듯이 몇 시간을 쉬고 맑은 정신에서 혼침과 망상에 끄달리지 않고 정진을 하는 것이 좋지.

 

오후 불식(午後不食)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건강을 유지할 정도로 적당히 먹는 것이 좋지.

 

화두만 바로 하면 장좌불와(長坐不臥), 묵언(默言), 일종식(一種食) 등은 저절로 되니까 조작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 것이지요?

- 그렇지, 화두만 바로 하면 되는 것이지.

 

향상구와 일구는 어떠한 관계입니까?

- 향상구를 알면 일구를 아는 것이지. 향상구와 향하구, 최초구와 말후구, 일구와 이구가 번복되면 안 되는 것으로, 같은 몸이라도 머리, 손, 발이 있는 것처럼 각 부분이 있는 것인데, 미(迷)한 자는 이것을 가리지 못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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