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   Buddhist writings

  • 최근법문
  • 동영상
  • 주제별

최근법문

프린트 홈으로 법문 최근법문
제목 [법어집] 석인은 물을 긷고 목녀는 꽃을 따네
법문장소 admin (법문일자 : 1970.04.01 / 조회 : 13600)

 

 

 

石人은 물을 긷고 木女는 꽃을 따네

 

 

 

추천의 글


「누구나 열심히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왜 사는가? 자기 삶을 돌아보며 허무함, 무력감을 느끼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모니, 예수··· 수많은 성인, 현인들은 ‘나는 누구인가?’, ‘삶은 무엇인가?’, ‘죽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다. 그들은 답을 얻었다. 실존을 만났다. 각각 표현은 다르겠지만 ‘근본 경험’을 함으로써 철이 든 것이다. 꿈을 깬 것이다.
아직 꿈속의 우리들은 언제쯤에나 아침을 맞을 것인가? 먼저 꿈속에서 산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꿈속에서도 우리들은 아주 가끔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가 있다. 현실의 꿈속에서도 그러한 순간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던져야 한다. 우리는 현실에 쫓기며 살지만 이 ‘궁금증’이 확장되어 절절한 의심으로 바뀔 때 변화는 시작된다. 화두가 작동하는 것이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같이 화두에 의심이 걸리면 우리는 언젠가 도달할 것이다. 진제 스님의 말씀을 접하며 꿈속의 삶을 사는 내가 무슨 말을 더하고 빼겠는가? 다만 구구절절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 부모에게 이 몸 받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을 참구하라는 자비의 말씀이 귀를 때리고 마음을 울릴 뿐이다.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수처위주 입처개진(隨處爲主 立處皆眞(이르는 곳마다 참 주인이 되면 자신이 처한 그곳이 모두 다 참 진리다).’
그렇다. 어디서나 ‘주인공(主人公)의 삶’을 살 때 바로 그 자리가 우리가 꿈에서도 그리는 극락이요, 천당이요, 이상향이 아니겠는가? 주인이 공(空)하면 주인공이 드러난다.」

이 책은 《石人은 물을 긷고 木女는 꽃을 따네》라는 표제를 달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늘 함께 있는 ‘참나’를 돌아볼 때마다 선(禪)꽃의 향기는 가슴 속에서 연꽃처럼 피어오를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이들의 가슴에서 그러한 선꽃의 향(香)이 피어오르고 그 향이 백 리(百里), 천 리(千里), 만 리(萬里)로 흘러가기를 기원하며 부처님 앞에 두 손을 모읍니다.

중앙일보 회장 홍석현

 

추천의 글


‘참선’을 강조하는 한국불교는 깨달음을 최고의 가치로 삼으며, 수많은 중생은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어렵고도 힘든 선 수행을 합니다.
당대 ‘선지식’의 최고봉이신 진제 대선사께서 펴낸 《石人은 물을 긷고 木女는 꽃을 따네》는 기존의 관념적이고 교학적인 깨달음보다는 일상의 삶과 융합되어 출가자나 재가자들이 구체적이고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이 책은 상당법어와 고준한 안목을 갖춘 선사들의 법담과 문답 과정으로, 부처님의 말씀과 심오한 법문을 일깨워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올바른 참선법과 깨달음의 경지를 얻을 수 있게 합니다.

우주의 모든 진리는 ‘참나’에 있다

진제 대선사께서는 ‘참나’를 찾는 수행은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를 아우르는 삶을 살기 위한 방편이자 과정이라 하셨습니다. 알 듯 모를 듯한 선문답 속에는 스스로 날카롭게 돌아보고 끊임없이 고민하라는 준엄한 가르침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특히 물질 집착에서 벗어나 지혜로운 베풂과 나눔의 정신을 일상에서 펼치기를 권합니다. “가르침대로 내가 곧 상대요, 상대가 곧 내가 되는 진정한 지혜의 눈이 열리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가진 자나 못 가진 자가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는 혼란스러운 세상이 조금은 나아질 것이다”라고 일러주셨습니다.
불교는 인간의 정신세계에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주고, ‘참선’으로 참된 인간 본연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안내함으로써 반목과 다툼 없는 평화로운 세계로 중생을 인도하는 것이 큰 덕목입니다.
진제 대선사께서 이 책을 통해 말씀하시는 수많은 소중한 가르침이 수행자들에게 바른 참선과 깨달음을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책이 한국불교의 선풍 진작과 올바른 선(禪) 지식 보급에 도움이 많이 되었으면 합니다.

 STX그룹 회장ㆍ전경련 부회장 강덕수

 

추천의 글


진제 선사님의 《石人은 물을 긷고 木女는 꽃을 따네》의 초고를 읽어보니, ‘참나를 찾아서’와 ‘선향이 만 리에’는 와닿는 말씀이 많았으나, ‘石人은 물을 긷고 木女는 꽃을 따네’와 ‘정법의 당간’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특히 깨우치신 경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하신 글들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선사님의 법어집을 대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옳고 그르고, 착하고 악하고, 이득이 되고 안 되고 하는 것만 따지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삶이 당연하고, 심지어 마치 이러한 것들이 바르다면서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사님께서는 이렇게 상대적인 것을 다 떠나 옳고 그름이 없고, 선함과 악함이 없으며, 이익과 손해가 없는 진리의 세계를 말씀하십니다.
서로 손해보지 않으려고 아귀다툼하면서 상처투성이 삶을 살아야 하고, 옳고 그르고, 착하고 착하지 않음을 시시비비하는 데 에너지를 소진하여 진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현대인에게 이 책은 깊은 산속에서만 마실 수 있는 신선한 공기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마음의 밝은 지혜를 밝히는 참선공부는 우리 모두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한 기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적어도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참선한다면 생활의 윤활유가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일반인에게도 참선 공부할 기회를 주시려는 선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모든 분들이 이 법어집을 읽고 선사님의 바람대로 ‘참나’를 찾는 소중한 인연을 맺기 바랍니다.

방송인ㆍ사진작가 이상벽

 

序文

古佛古祖가 걸어가는 길은 吹毛劍 위를 달리는 것과 같아서 毫釐라도 어긋나면 喪身失命이다. 그러나 劍上走人은 邪魔外道를 조복하고 一條白練을 펼쳐 천하를 태평케 하여 佛祖의 嫡子가 되리라. 그 大機大用 앞에서는 威音王佛조차 도리어 耳聾吐舌하리니 어찌 釋迦와 彌勒이 무릎을 꿇고 奴僕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近世 韓國佛敎에도 扶宗樹敎에 順逆縱橫하고 宗風振作에 一挨一拶하고 攝化利生에 當機物益하는 作家宗師가 있으니 桐華寺 祖室 眞際法遠 大宗師가 그 분이다. 和尙의 風貌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태어나면서부터 膽大함은 하늘 같았고 수 없는 魔軍의 붉은 깃발을 꺾어버렸으니 그 撥草瞻風은 飛騎將軍 같다고 하리라.
일찍이 月內 妙觀音寺, 대구 桐華寺 등지에서 股肱之力을 다해 求法하여 針箚不入處에 이르니 弱冠을 조금 넘은 나이에 天下大賊 香谷 祖室로부터 드디어 印可를 받고 佛祖大機를 全歸掌握하게 되었다. 또 田岡永信, 圓光鏡峰, 金烏太田 등 天下의 善知識으로부터는 處非處智力과 降魔利劍과 掃除凡聖棒을 지닌 踞地獅子라는 賞讚을 얻으니 大宗師야말로 不落賓主의 獨坐大雄峰이었다.
이후 大宗師는 竪指와 捲簾과 聞板과 棒喝을 自在하며 天下의 因緣處에서 應機接物의 群生敎化에 나서니 부산 金毛禪院을 비롯하여 桐華寺 金堂禪院, 鳳巖寺 宗立禪院 등이 그곳이었다. 會上에는 항상 正法을 배우고자 하는 道俗이 개미처럼 모여드니 雲集衲僧은 恒沙數요 接化雲水에게는 모두 漆桶打破의 法恩을 내렸다.
眞際 大宗師의 行履處는 理事無碍하되 破邪顯正하고 不思不善하되 爲法忘軀하니 佛敎正法의 幢竿은 和尙의 會上에서 더욱 높았다. 一言一句가 生死關頭를 透徹하는 徑截의 活句요 正念當行은 革凡成聖의 要諦였으니 그 門庭에서 一柵傀儡는 永久逐出이었다. 大宗師가 이처럼 禪風을 휘날리지 아니했다면, 오늘 大韓佛敎 曹溪宗이 어찌 佛祖正脈을 이은 宗團이라 할 수 있으리오.
眞際 大宗師와 老衲은 일찍이 桐華寺 金堂禪院에서 田岡 禪師를 祖室로 모시고 一向專修로 翦草除根하며 不眠不休의 精進을 할 때부터 因緣을 맺은 이래 半百年 가깝게 禪法을 擧話하고 叢林의 내일을 함께 걱정하는 사이였다. 世臘은 老衲이 위지만 大宗師는 傳佛心印을 透得하여 禪門法侶를 無相圓覺에 同歸케 하는 法力을 갖춘 분이다. 어찌 歡歡喜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또한 돌이켜보면 때는 魔强法弱의 시대라, 大宗師나 나와 같은 老衲이 아무리 佛之正眼을 强調해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점점 滅少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도리어 佛在世時의 六群比丘들도 하지 않은 悖倫과 悖惡이 亂舞하는 世態에 이르러서는 老顔이 便安하지 않다. 이러한 때에 大宗師는 大慈大悲의 마음으로 落草之談을 풀어놓은 뒤 그것을 새끼줄을 태운 灰로 묶어 《石人은 물을 긷고 木女는 꽃을 따네》라 題하여 세상에 내어놓았다.
오랜 知音의 因緣으로 그 草稿를 받아 먼저 읽어보니 實相離言이나 依言眞如라, 天下衆生을 불쌍하게 여기는 大宗師의 大悲願力이 이 한 권에 다 들어 있다. 古人이 말하기를 西來密旨는 良藥이요 黃券赤軸은 濟世之醫方이라 했으니 이 法語集이야말로 三界火宅에 빠진 四生九類에게 永滅輪廻의 妙方이 되고도 남는다 하리라.
眞際 大宗師는 실로 今生에는 만나기 어려운 大道人이시다. 바라기로는 大宗師의 門庭에 더 많은 衲子가 모여들어 發足超方하는 出格丈夫가 많이 배출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도적의 몸이 드러나니
 다리 아래가 석자로다.
 賊身已露하니
 脚下三尺이로다.

江湖禪林의 賢士들은 다른 곳에 정신 팔지 말고 발밑을 잘 살펴볼지어다.

佛紀 2553년 夏安居 解制日
大韓佛敎曹溪宗 元老會議 議長 慧光宗山 合掌

 

서문(풀이본)

옛 부처와 옛 조사들이 걸어가는 길은 취모검(날카로운 칼날) 위를 달리는 것과 같아서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면 몸을 상하고 명(命)을 잃음이다. 그러나 검 위를 달리는 사람은 삿된 마군과 외도를 조복하고 흰 비단 한 필을 펼쳐 천하를 태평케 하여 불조의 적자가 되리라. 그 큰 기틀과 큰 작용 앞에서는 위음왕불(최초의 부처님)조차 도리어 귀머거리가 되고 혀를 토할지니, 어찌 석가와 미륵이 무릎을 꿇고 종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근세 한국불교에도, 진리를 받들어 가르침을 폄에는 역과 순으로 종횡하고, 종풍을 진작함에는 치열한 거량을 펼쳐 보이고, 중생을 섭수 교화하여 이롭게 함에는 기틀에 당하여 만물을 이익하게 하는, 일을 다 해 마친 종사가 있으니 동화사 조실 진제법원(眞際法遠) 대종사가 그분이다. 화상의 풍모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태어나면서부터 담대함은 하늘과 같았고, 수없는 마군의 붉은 깃발을 꺾어버렸으니 풀을 헤치고 바람을 봄은 비기장군(飛騎將軍, 날아가는 말을 탄 장군) 같다고 하리라.
일찍이 월내 묘관음사, 대구 동화사 등지에서 혼신을 다해 법을 구하여 바늘로 찔러 들어갈 곳이 없는 데 이르니, 약관을 조금 넘은 나이에 천하의 큰 도적 향곡 조실로부터 드디어 인가를 받고 불조의 큰 기틀을 온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전강영신, 원광경봉, 금오태전 등 천하의 선지식으로부터는 도리를 밝게 아는 부처님의 지혜의 힘, 마군을 항복받는 날카로운 검, 범부와 성인을 쓸어 없애는 방망이를 지닌 ‘거지사자(踞地獅子, 땅에 걸터앉은 사자)’라는 극찬을 얻으니, 대종사야말로 손(賓)과 주인에 떨어지지 않고 홀로 대웅봉에 앉음이었다.
이후 대종사는 때로는 손가락을 세워 보이고, 때로는 발(簾)을 걷어 올리고, 때로는 판때기 소리를 듣고, 때로는 방과 할을 자재하게 쓰며 천하의 인연처에서 응기접물의 뭇 중생 교화에 나서니, 부산 해운정사 금모선원을 비롯하여 동화사 금당선원, 봉암사 종립 태고선원 등이 그곳이었다. 회상에는 항상 정법을 배우고자 하는 사부대중이 개미처럼 모여드니, 운집한 납승은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음이요, 찾아오는 모든 운수납자들에게는 법은을 내려 다겁의 무명을 타파케 하였다.
진제 대종사께서 걸어오신 길은 이와 사에 걸림이 없되 파사현정(破邪顯正)하고, 옳지 않음을 생각지 아니하되 정법을 위해 몸을 돌보지 않았으니, 불교정법의 당간은 화상의 회상에서 더욱 높았다. 한 마디와 한 구절이 생사관두를 뚫어 사무치는 가장 빠른 활구요, 바른 생각과 당당한 행은 범부를 바꾸어 성인을 이루게 하는 요체였으니, 그 문정에서는 한낱 꼭두각시는 영구히 축출되었다. 대종사가 이처럼 선풍을 휘날리지 아니했다면 오늘의 대한불교조계종이 어찌 불조의 정맥을 이은 종단이라 할 수 있으리오.
진제 대종사와 노납(본인, 宗山)은 일찍이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전강 선사를 조실로 모시고, 일향에 오로지 수행으로 무명초를 베고 육진을 제(除)하며 자지 않고 쉼이 없는 정진을 할 때부터 인연을 맺은 이래, 반백년 가깝게 선법을 들어 이야기하고 총림의 내일을 함께 걱정하는 사이였다. 연배는 노납이 위지만, 대종사는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온 심인법(心印法)을 투득하여 선문의 납자들에게 무상원각에 함께 이르게 하는 법력을 갖춘 분이다.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고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또한 돌이켜보면, 마는 강하고 법은 약한 시대라, 대종사나 나 같은 노납이 아무리 부처님의 정안을 강조해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도리어 부처님 살아계실 때의 육군비구(六群比丘, 부처님 재세 시에 말썽이 많았던 여섯 비구)들도 하지 않은 패륜과 패악이 난무하는 세태에 이르러서는 노안이 편안하지 않다. 이러한 때에 대종사는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방편의 언설을 풀어놓은 뒤 그것을 새끼줄을 태운 재[灰]로 묶어 《石人은 물을 긷고 木女는 꽃을 따네》라 제목하여 세상에 내어놓았다.
오랫동안 서로 알고 지낸 인연으로 그 초고를 받아 먼저 읽어보니, 실상은 말을 떠남이나 말을 의지한 진리라, 천하의 중생을 불쌍하게 여기는 대종사의 대비원력이 이 한 권에 다 들어 있다.
옛 성인이 말하기를 서쪽에서 전한 비밀한 뜻은 좋은 약이요, 부처님 경서는 세상을 구제하는 의사의 묘방이라 했으니, 이 법어집이야말로 삼계의 화택에 빠진 사생과 구류에게 영원히 윤회를 소멸하는 묘한 방편이 되고도 남는다 하리라.
진제 대종사는 실로 금생에는 만나기 어려운 대도인이시다. 바라기로는 대종사의 문정에 더 많은 납자가 모여들어, 길을 떠나 세간을 초월한 출격장부(出格丈夫)가 많이 배출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도적의 몸이 드러나니
 다리 아래가 석자로다.
 賊身已露하니
 脚下三尺이로다.

강호선림의 현사들은 다른 곳에 정신 팔지 말고 발밑을 잘 살펴볼지어다.

불기2553년 하안거 해제일
대한불교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혜광종산 합장

 

목차

추천의 글  중앙일보 회장 홍석현 _18
           STX그룹 회장ㆍ전경련 부회장 강덕수 _20
           방송인ㆍ사진작가 이상벽 _22
서문       대한불교조계종 現 원로회의 의장 혜광종산 대종사 _25

 

‘참나’를 찾아서
• 랭카스터 교수와 대담 〈불교신문〉 조병활 기자 _37
• 모든 세상이 나로 더불어 한 집이요, 나로 더불어 한 몸인데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 _47
• 참선 수행서 지혜 얻으면 출세ㆍ복락 따라와요 〈매일경제〉 박동민 기자 _73
•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심을 놓지 않으면 밝은 지혜를 얻을 수 있어 〈중앙일보〉 박정호 기자 _81
• 대표적 선승 진제 스님에게 듣는 ‘부처님 오신 뜻’ 〈동아일보〉 김갑식 기자 _89
• 염화실의 향기 〈경향신문〉 김석종 선임기자 _97
• 뭇 중생에게 부처의 길을 보이시고 〈불교신문〉 박부영 기자 _105
• 법 묻는 이에겐 언제나 문 ‘활짝’ 〈현대불교〉 천미희 기자 _113

 

선향이 만 리에 
• 선종 본산을 찾아 〈불교신문〉 박부영 기자 _126
• 참사람주의 서옹(西翁) 대선사 - 한국, 대한불교조계종 제5대 종정 _131
• 무딘 도끼를 달라 하니 한 발을 드리우다 진제(眞際) 대선사 - 한국, 불조정맥 제79대 법손 _135
• 인성을 끌어올려 불성으로 돌아가자 정혜(淨慧) 대선사 - 중국 임제종ㆍ운문종의 법사자 _147
• 심인법을 선양하여 인간성을 회복하자 종현(宗玄) 대선사 - 일본 임제종의 법사자 _161

 

石人은 물을 긷고 木女는 꽃을 따네
• 부처님의 깨달은 살림살이 2009년 9월 30일 기본선원 해제법어 _167
• 덕산 선사의 탁발 2005년 11월 16일 동안거 전국 결제법어 _177
• 마조 선사의 일할 2006년 5월 12일 하안거 전국 결제법어 _183
• 복숭아꽃 2006년 12월 5일 동안거 전국 결제법어 _191
• 취암 선사의 눈썹 2007년 5월 31일 하안거 전국 결제법어 _203
• 양고기를 매달아 놓고 개고기를 팔다 2007년 11월 14일 동안거 전국 결제법어 _207
• 세 가지 법문을 전하노니 2008년 5월 19일 하안거 전국 결제법어 _215
• 임제 선사의 깨달음 2008년 11월 12일 동안거 전국 결제법어 _223
• 달을 보고 일구를 토하다 2009년 5월 9일 하안거 전국 결제법어 _237
• 성철 선사와 법의 문답을 주고받다 2007년 3월 4일 동안거 동화사 해제법어 _247
• 금오ㆍ전강 선사와 법의 문답을 주고받다 2009년 8월 5일 하안거 동화사 해제법어 _259
• 새가 하루에 몇 리를 날아가는고? 2009년 3월 11일 원담진성 대선사 일주기 추도법어(수덕사) _275

 

정법의 당간
• 불조정전비문(佛祖正傳碑文) _283
• 전법(傳法)의 원류(源流) _294
• 불조정전법맥(佛祖正傳法脈) _302
• 용어풀이 _306
• 인물자료 _339

후기 _343

 

 

‘참나’를 찾아서

 

 

랭카스터 교수와 대담


〈불교신문〉 조병활 기자(1996년 12월 24일자)

 

국제적으로 유명한 불교학자인 미국 UC버클리대학 루이스 랭카스터 명예교수가 13일 부산 해운정사를 방문하여 임제선풍의 맥을 이은 진제 스님과 ‘선불교와 전산화’에 관해 대담했다.
1979년 해인사 《고려대장경》 영문 목록을 발행해 《고려대장경》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 랭카스터 교수의 이번 방문은 ‘첨단 기술을 이용해 불전을 전산화하고 있는 학자와 선승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특히 향곡 선사로부터 인가받은 진제 스님과 현대문명과 종교, 한국불교의 특징과 전망, 수행론 등에 대해 폭넓은 대화를 나눠 이목을 집중시켰다.
랭카스터 교수는 대장경 목록작업을 완료한 후 캐나다 토론토대학 유재신 교수와 함께 영문판 《불교의 한국전래》(1989), 《통일기의 불교》(1989), 《고려불교-국가종교》(1996), 《조선불교-억압과 변형》(1996) 등을 펴내 한국 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데 많은 역할을 해왔다.
선의 생활화를 강조해 온 진제 스님은 현재 세계불전전산화협의회 후원자를 맡아 전자시대에 한국 선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진제= 불교학 발전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 여러 전통의 불교를 접할 기회가 많았을 텐데 한국불교의 특색과 장단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랭카스터= 뿌리 깊은 전통과 통일된 교단이 있는 한국불교는 비구와 비구니스님 간에 균형이 잡혔고, 선의 가풍이 널리 확산돼 있어 다른 나라들보다 불교부흥의 잠재력이 더 돋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선 수행을 해 오신 스님께서 어떻게 전산화나 세계불전전산화협의회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요?

 

진제= 인간의 정신생활에 가장 크게 영향을 주는 것이 종교라 할 때 한국불교, 한국선을 전 세계인에게 알려야겠다고 평소에 늘 생각했습니다. 인연이 있어 그런지 불전전산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세계가 동일체가 될 수 있고, 한국불교를 세계적으로 포교하는 데 가장 적합한 것이 전산화라고 생각해 지원하게 됐습니다.

 

랭카스터= 이곳에 와보니 선원에 많은 스님과 신도들이 수행하고 있는데, 주로 어떤 부분에 치중하여 수행을 이끌고 계신지요?

 

진제= 참선하는 이는 일체의 반연과 분별을 놓아버리고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참구하되 흐르는 물과 같이 일념(一念)이 지속되어야 하며, 밤이 되었는지 낮이 되었는지 모를 정도로 매진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

 

랭카스터= 전통적인 한국선을 오랫동안 수행했고 임제선풍을 전법했다고 들었습니다. 선종 특히 임제선풍의 특색은 무엇입니까?

 

진제= 억![할(喝), 스님은 갑자기 두 눈을 부릅뜨고 오른손을 움켜쥔 채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이 할 속에는 살활종탈(殺活縱奪), 즉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자유자재한 기틀을 갖추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임제의 선풍입니다.

 

랭카스터= 스님의 인상적인 말씀 깊이 새기겠습니다. 물질만능 풍조가 만연하고 사회적으로 소외현상이 심화되는 것이 세계적 추세인데 이러한 시대에 불교의 역할, 특히 선 수행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진제= 물질이 풍요로워지면 정신세계는 쇠퇴하기 마련입니다. 사회적인 범죄도 그 근본 원인은 정신의 황폐화에 기인합니다. 불교의 역할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정신세계에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겠지요. 참선하게 되면 모든 번뇌, 망상, 불안 등이 봄볕에 눈 녹듯 저절로 다 사라집니다. 또 참된 인간의 본연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시비와 갈등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선 수행이 궁극에 이르면 반목과 다툼이 없는 세계가 현전합니다. 이것은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랭카스터= 저도 그 점에 동의합니다. 국제 불교계도 일상생활에서 수행을 병행할 수 있는 생활불교, 생활선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수행방법도 다양해지고 있죠. 일례로 최근 미국에서는 일부 불자들이 사찰에 가지 않고 소모임을 형성해 집을 하나 빌려 수시로 선 수행 장소로 사용하는 등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의문도 있습니다. 임제종(臨濟宗)의 선풍은 최상승을 추구하는 일종의 뛰어난 수행력을 필요로 하는데, 평범한 사람들도 일상에서 이와 같은 최상승의 선 수행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진제= 배고프면 밥 먹고 잠이 오면 잠잘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남녀노소, 승속에 관계없지요. 참선이라 하면 좌선만 생각하는데 참선은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느 경계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어떤 경계에서도 참구할 수 있어야만 옳은 참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랭카스터= 얼마 전 한국에는 돈오돈수, 돈오점수 등 수행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이것이 국제사회에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또 현대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논쟁이어서 관심을 많이 모았습니다. 스님은 이 논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진제=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뜻있는 논쟁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대도를 깨닫고 삼칠일 동안 사유한 끝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법을 설하는 것은 법을 설하지 않고 열반에 드는 것만 못하다” 여기에는 돈오돈수니 점수니 하는 게 어른거릴 수 없는 경계입니다. 이때 문수보살이 어리석은 중생들을 위해 법을 설하여 달라고 간청합니다. 부처님은 이에 하근 중생을 위해 인연과 그릇에 따라 방편의 법을 설하셨습니다. 그러나 열반하실 때 “내가 49년간 법을 설했으나 한 법도 설한 것이 없다”고 하셨어요. 깨닫고 보면 여타 방편의 법은 실다운 법이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육조혜능 선사 이후에도 5종의 선가(禪家)가 생겼는데 모두 다 돈오돈수를 제창했습니다.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는 것은 부처님의 제 32대 제자인 중국의 홍인 대사 때부터 논란이 있었지요. 홍인 대사가 법을 전해줄 제자를 찾기 위해 대중에게 공포했습니다.
“그동안 공부한 바를 글로 바쳐라. 만약 진리에 합하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법을 전해 33대조로 봉하리라.”
그러자 신수 상좌가 게송을 지어 벽에 붙였습니다.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의 대와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요
심여명경대(心如明鏡臺)하니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하야
막사야진애(莫使惹塵埃)하라.

 

홍인 대사가 이 게송을 보고 진리의 문안에는 들지 못한 문외한이라 했습니다. 모두 게송을 지어 바친다는 소문을 듣고 방아 찧던 노(盧) 행자가 게송을 지어 벽에 붙였습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
밝은 거울 또한 대가 아닐세.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번뇌가 있으리오.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요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라.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어늘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리오.

 

이를 본 홍인 대사는 한밤중에 몰래 노 행자를 불러 법을 전하여 제33대조로 봉했습니다. 이분이 육조혜능 대사이지요. 신수와 혜능의 게송에서 돈오점수와 돈오돈수는 분명히 드러난 것입니다. 한 번 뛰어 여래지에 이르면 다시 더 닦고 번뇌와 습기를 제거할 것이 없게 됩니다.

 

랭카스터= 그러면 스님은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중 어느 것이 옳다고 봅니까?

 

진제= 오구진일우봉춘(五九盡日又逢春)이라. 동지일로부터 45일이 다할 것 같으면 봄을 만남이로다.

(한참 후) 평생 불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해오신 학자가 전산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가 궁금하군요. 전산화에 헌신하는 목적이 무엇이며, 새로운 기술이 가져올 미래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랭카스터= 새로운 기술을 이용하면 많이 변화될 거라고 봅니다. 이는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승불교의 흥기도 새로운 기술의 발전에 기인한다고 지적하는 학자가 많습니다. 사실 기독교도 인쇄술의 발전으로 현대적인 의미의 포교가 가능했습니다. 불교도 인쇄술이 개발됐을 때 더욱 발전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불전전산화는 앞으로의 종교 발전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니 스님께서도 불교의 국제적인 우호관계를 위해 전산화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진제= 계속 관심을 가지겠습니다. 앞으로도 한국불교와 한국선을 국제사회에 소개하는 데 노력해주셨으면 합니다.

 

랭카스터= 20세기에 우리는 동구 공산주의의 몰락 등 숱한 역사의 반전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불교가 세계적으로 침체현상을 보이고 있지만 21세기가 되면 또다시 반전이 일고 불교가 부흥할 것으로 봅니다. 특히 다가오는 새 시대에는 모든 종교가 새로운 매체를 통해 자리매김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불교학자로서 불전전산화 작업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세계적 표준화를 모색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한국불교계가 좀 더 세계적인 안목을 갖고 수행과 포교에 정진해 세계불교에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모든 세상이 나로 더불어 한 집이요, 나로 더불어 한 몸인데···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2009년 4월 27일자)

 

진제= 몸뚱이란 숨 한 번 들이쉬지 못할 때 주인공이 딱 나가버리면 사흘 이내에 썩어 화장하고 묻어버립니다. 뼈와 살은 흙으로, 대소변은 물로, 호흡은 바람으로, 따뜻한 기운은 불로 돌아갑니다. 본고향으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주인공인 ‘참나’는 우주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고, 우주가 멸(滅)한 후에도 항시 여여(如如)하게 있습니다. 이를 바로 보아야 진리의 도가 그 가운데 다 있음을 알게 됩니다.

 

절 뜰 위로 연등(燃燈)들이 둥둥 떴다. 바닷바람이 부는 부산 해운정사에서 한 시간째 양반다리로 앉아 있었다.

진제 스님(동화사ㆍ해운정사 조실)은 ‘하하하’ 웃었으나 나는 참호 속에 갇혀 악전고투하는 기분이었다. 불교계에서 ‘남 진제 북 송담(인천 용화선원의 송담스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당대 최고의 선승(禪僧)이다. 내게 익숙한 분석과 논리의 말을 선(禪)은 우습게 본다.

 

기자= 깨달음이란 ‘참나’를 보는 것입니까?

 

진제= 그 가운데 모든 진리가 다 있습니다. 이 몸뚱이는 썩어 없어지니 ‘참나’가 아닙니다. ‘이 몸 부모에게 받기 전 어떤 것이 참나던고?’ 석가모니 부처님도 이를 아셔서 위대한 진리의 스승이 되었고, 모든 스님네도 이를 알아가지고 도인이 됐지요.

 

 

남보다 더 구하려는 욕망에서 무한한 고통이 다투어 일어나

 

기자= 설령 ‘참나’를 찾은들 우리 인생에서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진제= ‘나’라는 허세, 시기, 질투, 욕망, 공포, 불안 등에 찌들어 정신없이 생을 살다가 죽는 게 중생입니다. 어리석은 마음에서 온갖 것을 다 자기 것으로 이루고 삼으려고 하니, 아무리 명문대학을 나오고, 대통령ㆍ장관을 지내도 번뇌와 갈등은 제거할 수 없어요. ‘참나’를 알게 되면 이런 중생의 용심(用心, 마음 씀)이 없어집니다. 모든 세상이 나로 더불어 한 집이요, 나로 더불어 한 몸인데, 내가 더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다 같이 한 몸뚱이인데.

 

기자= 그렇다면 큰스님의 ‘참나’는 무엇입니까?

 

진제= 하하하. 차(茶) 한 잔 들어보세요.

 

이 무슨 말씀인가. 나는 찻잔을 들고서 “지금 육신이 없어지면 저 자신도 소멸되니, 저의 ‘참나’는 오직 여기 앉아 있는 이 모습입니다”라고 말했다. 일상의 어법으로 끌어오려고 했지만 그는 ‘하하하’ 웃었다.

 

진제= 그래, 맛을 잘 보았소?

 

기자= 신문으로 예를 들겠습니다. 독자가 이해를 못하는 기사는 그 기사를 쓴 기자도 사실 잘 모르고 쓴 경우가 많습니다. 간혹 높으신 스님들의 말씀을 듣고 나면 그 모호함이 이와 같습니다.

 

진제= 진리의 세계란 말로써 다 전할 수 없으니…. 내가 그걸 잡아줘도 모르거든요.

 

기자= 다시 질문을 드립니다만 ‘참나’의 정체가 뭡니까?

 

진제= ‘참나’의 정체라? 하하하. 해운대 앞바다 물을 한 입에 다 마셔 올 것 같으면 그대를 향해 일러주리라. ‘참나’는 심안(心眼)이 열려야 보게 됩니다.

 

그는 스무 살 때 출가했다. 오촌 당숙을 따라 동네에서 십 리쯤 떨어진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석우(石友) 선사(조계종 초대 종정 역임)를 만났다. 친견하는 자리에서 선사께서 묻더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나오지 않은 셈치고 도를 한번 닦아보는 게 어떻겠는가?”
“도를 닦으면 어떻게 됩니까?”
“범부(凡夫)가 위대한 부처가 되네.”
그 한마디 말에 감화돼 “위대한 부처가 되는 법이 있다는데 중놀이를 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부모와 상의한 뒤 행장을 꾸렸다고 한다.

 

기자= 큰스님께서는 어떤 욕망에 휩싸여 본 적이 없습니까?

 

진제= 나는 ‘참선해서 도를 뚫어야겠다, 알아야겠다,’ 거기에 심취해서 중놀이를 했습니다. 스물여섯 살 때 그동안 공부한 것을 점검받겠다고 팔공산의 파계사로 성철(性徹) 선사께 가니 “나는 몰라, 나는 몰라” 하며 응대를 안 해요.그래서 쌍벽을 이루던 향곡(香谷) 선사를 찾아갔어요. 선사께서 대뜸 “일러도 삼십 방이요, 이르지 못해도 삼십 방이다”라고 했습니다. 진리의 바른 답을 해도 삼십 방 맞고, 못해도 삼십 방을 맞는다는 거지요. 이에 우물쭈물하니 “그것도 척 못 나오면서 뭘 알았다고 하느냐?”라며 쫓았습니다.

 

그 뒤 눈 덮인 오대산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일생을 이렇게 허송세월할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향곡 선사를 찾아갔다고 한다.
“화두를 하나 내려주십시오. 화두를 타파하기 전까지는 산문(山門)을 나가지 않겠습니다. 생사를 떼어놓고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러자 선사께서는 이런 화두를 내렸다.
“중국의 향엄 선사께서 법문하시기를, 높은 나무에 입으로 가지를 물고 매달려 있을 때 밑에 지나가는 이가 ‘달마 스님이 서역에서 중국으로 오신 까닭이 무엇인고?’ 하고 물으면 어떻게 답을 하려는고?”
그가 2년5개월 걸려 이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 화두를 해결하자 다른 화두가 주어져 또 5년을 씨름했다.

 

기자= 그렇게 해서 속세 나이 서른셋에 도를 깨쳤다고 들었습니다.

 

진제= 여름 해제일에 대중을 위해서 향곡 선사께서 법상(法床)에 오르셨어요. 제가 예를 올리고 “모든 부처님과 모든 성인이 알지 못하는 심오한 일구(一句)를 일러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99는 81이니라.”
“이는 모든 부처님과 모든 성인이 다 아신 진리입니다.”
“66은 36이니라.”
제가 가타부타 말을 안 하고 큰절을 하고 나와 버리니, 선사께서 “오늘 법문은 이걸로 끝이다” 하시더니 일어섰어요.

 

기자= 이게 다 무슨 뜻입니까?

 

진제= 일상생활이 그대로 진리의 도입니다. 목마르면 차 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고….

 

기자= 한번 도(道)를 깨치게 되면 그걸로 평생 갑니까? 흔들림이 없습니까?

 

진제= 허공은 사시사철 허공이지 어디 변합니까? 태풍이 아무리 불고 풍우가 쳐도 그 위에 허공은 항시 맑듯이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 금생뿐만 아니라 세세생생 가지요. 나고 날 적마다 가지요.

 

기자= 깨닫고 나서 보니까 ‘세상이 별거 아니구나, 삶도 별거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까?

 

진제= 아니요. 세상 온 천지가 진리의 꽃이구나. 하하하. 진리를 찾아서 몇 생을, 몇 년을 헤맸는데, 바로 목전(目前)에 다 진리가 아님이 없구나. 그런데 이것은 아는 자만이 알지 다 모릅니다.

 

기자= 큰스님은 진리를 보고 계시니 홀로 즐길 수 있지만 일반 중생은 처자식을 먹여 살린다는 이유로 혹은 다른 이유로 그런 낙을 누리질 못합니다.

 

진제= 이는 우리가 지은 과보(果報)로 받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출세해야지, 돈 많이 벌어야지, 호화로이 생활해야지, 남보다 더 구하려는 욕망에서 무한한 고통이 머리를 다투고 일어납니다. 출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에 살아도 좋은 인연을 좇아서 좋은 설교를 듣고, 미덕을 베풀고, 하루하루 수행하는 거기에 삶이 윤택해지고 마음의 번뇌가 없어집니다.

 

기자= 하지만 절집을 먹여 살리는 것은 그렇게 아등바등 경쟁하고 욕심을 내는 중생이 아니겠습니까?
진제= 그렇지요, 하하하. 그 대가로 바른 용심과 바른 행동, 복이 되고 덕이 되는 지혜와 법을 가르쳐 보시하지 않습니까?

 

 

대인(大人)은 취사(取捨)가 없어야 한다[心無取捨]

 

기자= 바깥세상 돌아가는 것도 관심 있게 지켜보십니까?

 

진제= 승속(僧俗)이 둘이 아니고, 어디에 있든 마음을 깨달으면 곧 부처입니다. 나는 참의심을 갖고 찾아오는 사람을 막지 않습니다.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깨달은 자의 본분입니다.

 

기자= 정치권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다 모였는데, 왜 늘 우리를 실망시킬까요?

 

진제= 지난 대선 때 이명박 후보가 오셨는데, 그때 “대인(大人)은 취사(取捨, 취하고 버림)가 없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당 안에서도 박근혜 측과 대립하고 있습니다. 여야는 원수가 서로 만난 듯 반대에 반대를 합니다. 너니, 나니 하는 허상[人我相, 나와 남을 분별하는 생각]에 매인 이런 소인배들은 방망이[棒]로 때려서라도 깨우쳐야 합니다.

 

기자= 그런데 종교인들조차 명성이나 권력, 사적 이해에 집착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진제= 속심(俗心)이 그대로 차 있어서 그래요. 먹물 옷을 입었다고 다 중이 아닙니다. 바른 신앙을 가져야지 허깨비 신앙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응당 서릿발같이 계율을 지키고 내실 있는 수행이 근본이 되어야 합니다.

 

기자= 삶의 궁극점은 죽음이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문제에 대해 어떤 답을 찾을 수 있을까요?

 

진제= 도를 알면 죽음은 ‘환화(幻花)’입니다. 허공 꽃, 눈을 때리면 번쩍하고 허공 꽃이 많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게 실제 있는 게 아니거든요. 일시적으로 눈병 때문에 헛것이 보이는 거지요.

 

기자= 원래 산 것도 아니니 죽은 것도 아니라는 뜻 같은데, 그러면 왜 큰스님이 열반할 때 제자들은 그렇게 슬퍼합니까?

 

진제= 그것은 중생의 틀을 못 벗어서 그렇지요, 하하하. 두려워하는 것은 도를 몰라서 그래요. 도를 모르니까.

 

기자= 지금도 새벽 2시 반에 기상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진제= 9시 반에 자고 새벽 2시 반에 일어납니다. 새벽 3시에 예불을 모시니까. 어른의 일거일동에 다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내가 시집살이를 해야 대중이 따라오거든요. 하하하.

 

 

‘부처님 오신 날’에 꽃구경하는 마음 갖기를

 

기자= 이번 주말 ‘부처님 오신 날’인데 중생들에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

 

진제= 숱한 꽃들이 피는 것은 누구를 위함인가,
 자고새 우는 곳에 온통 꽃들의 향기네.
 백화쟁발위수개(百花爭發爲誰開)오
 자고제처백화향(鷓鴣啼處百花香)이라.

 

부처님 오신 날에 꽃들을 구경하는, 그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십시오.

 

이날 승용차로 5시간 반 걸려 스님을 만난 뒤 다시 5시간 반 걸려 상경했다. 긴 하루였다.

 

 

경허-혜월-운봉-향곡 선사로 전해온 정통법맥 이어

 

진제 스님은 1934년 경남 남해에서 출생했다. 농사를 지었고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했다. 1954년 해인사에서 석우 선사를 은사로 출가했다. 1967년 향곡 선사에게서 법을 인가받았다. 당시 스승 향곡 선사와 이런 선문답이 오갔다.
“부처의 눈과 지혜의 눈(慧眼)은 묻지 아니하거니와 납승(衲僧)의 눈은 어떤 것입니까?”
“사고원래여인주(師姑元來女人做)니라.[나이 많은 비구니는 원래 여자가 한다.]”
“금일에야 선사님을 바로 보았습니다.”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봤느냐?”
“관(關, 빗장)!”
“옳고, 옳다!”

그는 경허(鏡虛)-혜월(慧月)-운봉(雲峰)-향곡(香谷) 선사로 전해 내려온 정통법맥을 잇고 있다. 현재 해운정사와 팔공산 동화사, 조계종 기본선원의 조실(최고 어른)이다.

 

 

(다음은 인터뷰한 내용 가운데 지면에 싣지 못한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기자= 큰스님께서는 스스로 ‘나는 깨달았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진제= 많지요. 낱낱의 법문이 다 그렇습니다. 모든 부처님이나 일체 도인이 깨달은 과정은 똑같습니다. 무엇을 깨달았느냐? 자기의 심성(心性)을 바로 보면 곧 부처를 이루고 진리를 이루고 진리를 이룬다는 겁니다. 진리의 자체는 심성 가운데 다 갖춰져 있기 때문에, 눈을 바로 떠서 심성을 바로 보면 그 깨달은 경계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장부(彼丈夫) 아장부(我丈夫), 즉 너도 장부요 나도 장부가 되고, 너도 도인이요 나도 부처가 되는 것이지요.

 

기자= 그런데 큰스님, 깨닫게 되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진제= 진리의 낙이 그대로 일상생활이 됩니다. 일상생활이 그대로 진리인 것이지요. 목마르면 차 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고, 가지가지의 자연과 더불어 둘이 아닌, 그러한 때묻지 않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희유한 것을 구하지만, 진리의 자체는 별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러냐? 인아상(人我相)이 다 없기 때문이지요. 너니, 나니, 아만, 교만, 시기, 질투, 갈등, 미워하고 고와하는 이러한 중생의 용심(用心)은 싹 없어지고, 평등한 용심, 활발발(活鱍鱍)한 용심, 고하(高下)가 없는 용심, 세계가 한 집이 된 용심, 모든 인류가 나로 더불어 둘이 아닌 그러한 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도(道)의 세계, 진리의 세계입니다.

 

기자= 깨달은 분들은 삶 자체가 늘 즐거운 겁니까?

 

진제= 그렇지요. 일상생활이 그대로 진리가 되기 때문에. 이 도를 알면 세상에 살아도 때묻지 아니하고, 공포·불안·갈등이 없는 용심을 하며 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기, 질투, 아만 등 온갖 것에 찌들지만 깨달으면 그대로 소화시켜버립니다. 소화시키니까 때가 안 묻지요. 그러니 종일 말해도 말한 바가 없고, 종일 걸어도 걸은 바가 없는 그러한 용심을 합니다. 온 세계가 한 집이요, 온 인류가 나로 더불어 둘이 아닌데 거기에 무슨 갈등이 있겠습니까? 상부상조해서 대자대비의 사랑하는 마음으로 항시 서로 나누며 즐기면서 사는 것이 진리의 도입니다.

 

기자= 그러면 결국 큰스님께서 깨달으신 게 ‘불이(不二)’, 즉 ‘만물과 하나다’ 이것 아니겠습니까?

 

진제= 그게 아닙니다. 그건 얕은 진리지요. 진리에도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온 삼천대천세계 형형색색(形形色色),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그대로 청정(淸淨)의 진리다’ 하는 그런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삼라만상 온 천지 법계가 다 공(空)해서 한 티끌도 없다. 성인(聖人)도 없고 범부(凡夫)도 없다.’ 성인도 없고 범부도 없는데 천당, 지옥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이 하나 있습니다.

또 그 한 단계 위에는 ‘향상(向上)의 일구(一句)’라고 해서, 모든 부처님이 깨친 심오한 진리가 있습니다. 모든 부처님이 바른 진리를 깨달아서 법을 전한 그 과정은 ‘향상의 일구’라는 진리의 세계입니다. 거기에 이르러야 견성(見性)해서 참으로 진리의 도를 깨달았다 하며 인증서(印證書)를 주고 제자로 봉합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만 사람의 눈을 안 멀게 하고, 만 사람을 바른 진리의 문에 이르게 해서 진리의 전(廛)을 주고, 받고, 펴고, 거두고 마음대로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전해 내려오는 법칙입니다.

 

기자= 그 최고 단계에 가 있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진제= 최고 단계에 가서는 크게 쉬는 땅을 얻어서 억만 년이 다하도록 진리의 고요한 적멸(寂滅)의 낙을 누리게 됩니다. 모든 부처님과 도인도 마찬가지지요. 고요한 적멸의 낙이라는 것은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공자(孔子)의 제자가 물었습니다.
“유사 이래 가장 위대한 성인이 누구입니까?”
“석가모니니라. 석가모니는 말하기 전에, 법을 설하기 전에 만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다스리기 전에 만 사람이 스스로 다스려져버리는 위대한 덕화(德化)를 가졌다.”
공자도 이렇게 석가모니 부처님을 칭찬하셨습니다.

 

기자= 어리석은 질문입니다만, ‘참나’를 찾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진제= 평강(平康)을 누리고 안락을 누리기 위해서지요. 세상 사람들은 고통 가운데 자살도 하고, 근심ㆍ걱정ㆍ공포ㆍ불안 속에서 편안한 날이 없습니다. 이 도를 닦아 ‘참나’를 알게 되면 마음이 평안해서 태평해지고 모든 갈등이 봄바람에 눈 녹듯 싹 없어집니다. ‘나’라는 허세, 많이 가지려는 욕심, 미워하는 마음, 공포심, 불안심, 갈등 등 중생의 습기(習氣)와 악조건이 다 없어지는 것이지요.

인빈지단(人貧智短)이요, 마수모장(馬瘦毛長)이라. 사람들이 빈한하게 사는 것은 지혜가 짧기 때문이요, 말이 야위면 털이 길다. 야윈 말은 항시 털이 길거든요. 즉 틀림없는 말이고 거짓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든 분이 생활 속에 ‘참나’를 찾는 참선, 지혜를 밝히는 선 수행을 꾸준히 닦으면 ‘나’라는 허상이 싹 없어지고 지혜의 눈이 열려 사리판단도 정확하게 될 것입니다.

 

기자=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합니까?

 

진제= ‘참나’는 육안으로는 보지 못합니다. 심안(心眼), 즉 마음의 눈이 열려야 ‘참나’를 보게 됩니다. 심안이 열리면 모든 부처님과 모든 도인이 설한 심오한 무진(無盡) 법문이 다 내 살림이 됩니다. 그러면 어떤 진리의 법문을 물어도 석화전광으로 척척 바른 답이 나와 대장부 활개를 치고 걸림이 없는 생활, 평화로운 생활, 안락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쾌활 명랑하게 사는 것이 진리의 도입니다.

 

기자= 어떻게 해야 ‘참나’를 찾을 수 있습니까?

 

진제= 우리 절집에는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하는 바른 참선 수행법이 있습니다. 화두를 들고 일념삼매(一念三昧)가 되어 바른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이지요. 이 몸뚱이는 백년 이내에 썩어 없어지니까 ‘참나’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 몸을 부모에게 받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인가?

밥을 지으나, 빨래를 하나, 농사를 지으나, 산책을 하나, 직장생활을 하나, 밤낮으로 쭉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어떤 것이 참나던고?’ 하루에 천번 만번 의심을 밀어줍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참의심이 시동이 걸립니다. 참의심이 시동이 걸리면 흐르는 시냇물과 같이 밤낮으로 화두 한 생각만 흘러갑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분별은 다 재[灰]가 되고, 앉아 있어도 밤이 지나가는지 낮이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잠깐 앉아 있는데 며칠이 지나갑니다.

이렇게 무르익은 상태가 오면 사물을 봐도 보는 감각이 없고, 소리를 들어도 들은 감각이 없고, 화두일념(話頭一念)에 푹 빠져서 흐르고 흐르다가 홀연히 사물을 보는 찰나, 소리를 듣는 찰나 화두가 박살납니다. 거기서 자기의 참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기자= 그러면 저희가 그런 단계를 알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제= 반드시 깨달은 스승에게 바로 알았는지 아닌지 점검받아야 합니다. 가령 서울이 ‘향상의 일구’라는 넓은 진리의 세계인데, 대전이나 대구에 이르러 안주하면 안 되기 때문이지요. 선지식은 그러한 점검을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비유를 하면, 진리의 고향 서울은 경기도 복판에 있는데, 아는 자가 아니면 거기에 이르게 하지 못하고, 이른 자가 아니면 서울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이목구비를 분명히 갖춘 이가 남산의 봉우리에 올라가서 보면, 서울ㆍ경기 사방이 한 눈에 다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서울 장안을 한 눈으로 다 보게 되면 진리의 고향에 이른 겁니다.

그러면 스승 없이 깨달은 이, ‘알았다’ 하는 사람은 어떤 모습이냐? 깜깜한 밤중에 육로도 개척이 안 됐고 교통편도 없는데, 부산이라는 도시가 생기기도 전 갯벌가에서 ‘진리의 고향 서울을 찾아가야겠다’ 생각하고 혼자서 여기저기 헤매는 꼴과 똑같습니다. 길도 없고 교통편도 없이 그렇게 헤매다보면 일생뿐만 아니라 몇 생이 다 가버립니다. 이 진리의 도는 눈 밝은 선지식(善知識, 도를 깨친 이)을 만남으로써 몇 생을 건너뛰고 금생에 다 이룰 수 있는 여건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승 없이 공부하는 이들은 어떠냐? 깜깜한 밤중에 저 대구쯤 이르러서 전깃불이 번쩍번쩍하니까 ‘여기가 진리의 고향이구나!’ 해서 거기서 안주하여 머무는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또 혹자는 깜깜한 밤중에 서울을 찾아가다가 대전쯤 이르러서 보니 광야에 도시가 형성되어 있는데, ‘아, 여기가 진리의 고향이구나!’ 해서 거기서 안주하는 수가 허다합니다. 진리의 고향 서울은 따로 있는데 엉뚱한 데 안주해서 ‘알았다’ 하고 ‘내가 진리의 고향에 다 왔다’ 하여 전(廛)을 벌려 만 사람을 그릇 지도하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처님께서 법칙을 세워놓았습니다. “스승 없이 깨달은 자는 다 천마외도(天魔外道)다” 다 마구니 소견(所見)에 떨어진 자라는 뜻입니다. 진리의 고향에 이르지도 못하고 ‘진리의 고향에 이르렀다’ 면서 만 사람을 그릇 지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법칙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전등(傳燈)의 법이 오늘날 한국에 남아 있습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왔다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흘러와서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지요. 중국에서는 공산화 60년 동안 모조리 없어졌고, 인도도 그렇고, 오직 한 가닥 한국에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중국, 일본의 선사들을 모셔놓고 2002년에 국제무차선대법회를 개최했습니다.

 

기자= 큰스님, 진리의 낙 말고 일상생활의 낙은 어떤 것입니까?

 

진제= 진리의 낙이 일상생활의 낙이고, 일상생활 그 가운데 진리의 낙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목마르면 차 마시고, 고단하면 쉬고, 산책하고, 손님 만나면 대담하고, 그 외에 다른 진리의 낙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 가운데 다 있지요.

 

기자= 그럼 사는 게 뭐가 재미있습니까?

 

진제= 하하하. 그 가운데 큰 진리의 낙이 있습니다. 너니, 나니 하는 인아상이 없고 구속이 없는 대자유인의 낙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참나’를 바로 보라, ‘참나’를 바로 보는 그 가운데 모든 진리가 다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수교, 천주교는 하나님을 찾는 종교이지만 불교는 다릅니다.

불교는 진리를 깨달아야 진리의 낙을 누린다고 가르칩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태산이 가리고 있어 진리의 세계와 항시 거리가 멀지요. 진리의 눈이 열려야 모든 도인과 모든 성인과 더불어 동참하는 낙을 누리게 됩니다.

근래에 서구의 많은 지식인들이 불교와 선을 좋아하는 것은, 예수교를 믿고 하나님을 찾아 봐야 마음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선(禪)을 해 보니 공포, 불안, 초조, 갈등 같은 모든 잡념이 다 소멸되고 아주 밝은 화두 한 생각만 흘러가거든요. 사람들이 거기에 매료된 것입니다.

내가 1980년대 유럽에 여행 가니, 예배당을 다 창고로 만들어 쓰고 있기에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하고 물으니 “과학에 뒤떨어진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하더군요. 우리가 이 대문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자= 죽음을 두려워하는 일반 중생에게 어떠한 위안의 말을 해주실 수 있습니까?

 

진제= 모든 사람이 죽음 앞에는 다 공포를 느낍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참나’를 찾는 이 수행에 몰두하면 힘을 얻습니다. 정력(定力)의 힘을. 그러면 모든 공포, 불안, 환상이 없어집니다. 숨이 떨어지면 맑은 정신으로 몸뚱이를 벗어버리지요.

운봉 선사는 저의 노스님이신데, 임종 한 달 전에 제자가 물었습니다.
“스님, 언제 사바세계를 여의고 열반낙에 드시렵니까?”
그러자 대뜸 말씀하셨습니다.
“토끼 꼬리 빠진 날 가지.”
정월은 범달이요, 이월은 토끼달이요, 삼월은 용달이라 ‘토끼 꼬리 빠진 날 가지’ 하는 것은 ‘이월 마지막 날 간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음력으로 이월 그믐날 제자들을 가까이 다 불러놓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오늘 마지막 법문을 하고 가리니, 의심처(疑心處)가 있으면 물어라.”
그러니 제자가 물었어요.
“어떤 것이 진리의 도입니까?”
“진리의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님일세.”
“스님이 가시면 누구를 의지해서 바른 진리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까?”
그러니 선사께서는 장단에 맞추어 육자배기를 한 수 읊으셨어요.
“저 건너 갈비봉(峯)에 비가 묻어오는데, 우장 삿갓을 두르고 논에 김을 매러 갈거나.”
마지막 가는 무렵에 이런 멋진 시조를 읊는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공포, 불안이 호리도 없습니다. 그러자 좌우에서 “스님! 스님!” 하고 부르니 “나를 불러 무얼 하려고 하느냐?” 하고는 그만 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포 불안이 없는 열반상의 모습입니다.

혜월 선사는 운봉 선사의 스승입다. 일제가 36년간 우리나라를 통치할 무렵, 남[南次郞, 미나미 지로] 총독이 새로운 총독으로 일본에서 건너올 적에, 한국에 가거든 선사와 도인을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어요. 임진왜란 당시에 삼천리강산을 다 집어삼켰다가 서산ㆍ사명 대사 두 분 때문에 평화조약을 맺었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남 총독이 건너와서는 남방에 혜월 선사가 유명하다 하니 수하 몇몇을 데리고 혜월 선사를 방문했습니다. 인사를 나누고는 아주 고준한 일문(一問)을 던졌어요.
“스님께 한 가지 묻고자 합니다. 어떠한 것이 부처님의 가장 높고 깊은 진리입니까?”
여기에 혜월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높고 깊은 부처님의 진리? 귀신 방귀에 털이 났지.”
그 한 마디에 남 총독이 무슨 소린지 몰라 얼떨떨해져 돌아갔어요.
남 총독이 혜월 선사에게 방망이를 맞고 돌아갔다는 소문이 우리나라는 말 할 것도 없고 일본에까지 퍼졌거든요. 그러니 남 총독의 병사 제자가 듣고는 분개해서 장검을 차고 건너왔지요. 그러고는 혜월 선사 계시는 방에 노크도 안 하고 구둣발로 들어와 장검을 빼서 혜월 선사 목에다 딱 갖다 댔어요.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칼을 대니 혜월 선사께서 바로 손가락으로 병사의 등 뒤를 가리켰어요. 죄 없는 선사의 목을 베려고 하니 자기도 불안했지요. 선사께서 뒤를 가리키니 자기를 해치려는 사람이 있나 싶어 뒤를 돌아보는 찰나, 혜월 선사께서 번개같이 일어나 “내 칼 받아라!” 하고 병사의 등을 쳤습니다. 그러자 병사는 칼을 거두고는 큰절을 하면서 “과연 위대합니다” 하고는 돌아갔습니다. 만약 거기서 혜월 선사가 우물쭈물하면 즉시 목이 달아납니다. 그 당시에는 인권이 없었습니다. 그와 같이 석화전광의 바른 지혜의 눈을 갖추면 상대를 꿰뚫어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노령(老齡)에는 산에 가서 떨어진 솔방울을 주워 와서 방에 불을 지피고 생활하셨는데, 솔방울을 지고 내려오다가 앉아서 항시 쉬는 자리가 절 밑에 있었지요. 하루는 그 자리에서 솔방울 포대를 지고 반쯤 일어나는 자세로 몸뚱이를 벗어버렸습니다. 그때 카메라가 있었으면 멋지게 촬영했을 텐데. 보통 사람은 숨이 떨어지면 거꾸러져버립니다. 이것이 일생 도를 닦은 저력입니다. 도의 힘이 거기서 생기는 거지요.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기자= 세속의 중생은 살아가는 게 왜 이리 힘듭니까?

 

진제= 중생의 고뇌는 전생의 업의 소산입니다. 그러니까 법문을 듣고 ‘참나’를 찾는 수행을 하면서 농사를 짓든, 직분을 하든 자기 의무에 충실해야지요. 농사를 짓는 이가 부지런히 가꾸고 거름하고 물주고 해야 수확을 하는 것과 같이, 인생의 모든 것이 동일합니다. 자기 직분에 맞게 아주 성실하게 열심히 해야지 그러지 않고 동료들은 열심히 일하는데 혼자 게으름을 피우고 눈치만 본다면 다들 싫어해 그 자리를 잃게 되지요.
그래서 잘사는 데는 ‘성실’이 제일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 ‘참나’를 찾는 수행을 꾸준히 연마하면 인간의 허상이 다 녹아 없어지고 직장생활이 내 생활이 되어 주인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성실하고 화목하며 모든 동료와 총애(總愛)를 이루어 잘 지내게 되지요.

 

기자= 큰스님, 늘 웃고 늘 마음이 편안하시니까 건강하신 듯합니다.

 

진제= 예. 마음이 편안하면 건강에도 좋습니다.

 

기자= 저희는 늘 세상사(世上事)에 찌들어 살고 다투고 하니까 출가하지 않는 이상 그렇게 살기가 어렵습니다.

 

진제= 그러니까 일상생활에서 항상 ‘참나’를 찾으며 살면 마음속에 온갖 찌든 생각이 싹 없어집니다.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모든 국민에게 그러한 화두 드는 법을 유포해주세요. 그러면 편안한 극락세계가 될 겁니다.

 

 

참선 수행서 지혜 얻으면 출세ㆍ복락 따라와요


〈매일경제신문〉 박동민 기자(2006년 5월 2일자)

 

“고통의 근본은 탐하고 많이 가지려는 데 있습니다. 참선 수행을 하면서 가지가지의 집착과 욕심을 버리고 지혜를 계발한다면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으며 나날이 보람 있는 생활이 될 것입니다.”

지난달 22일 대구 팔공산 동화사.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당대 ‘선지식(善知識)’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진제 대선사를 만나 뵙기 위해 길을 떠난 기자에게는 왠지 모를 기대감이 그득했다.
‘선지식’은 불도(佛道)를 깨치고 덕이 높아 사람을 불도에 들어가게 교화하고 선도하는 큰스님을 뜻하는 말. 속세의 세계에서 벗어나 불도에 들어가는 것이 진정 가능할까? 그리고 그런 가르침을 베푸시는 큰스님은 어떤 분일까 하는 궁금한 마음이 교차했다.
동화사에 들어서자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절 전체가 연등으로 울긋불긋 아름답게 물들어 있었다.
‘연등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도 잠시, 큰스님을 만나기 위해 염화실(拈花室)로 오르는 길에서는 속세와 다른 맑은 공기와 청정한 계곡 물소리를 접할 수 있었다. 세상살이에 찌든 마음을 깨끗이 닦아내야 큰스님을 만나 뵐 수 있기라도 하듯….
동화사 조실(祖室, 선승들의 수행을 책임지고 점검하며 가르치는 선사)인 진제 스님은 “진정한 행복은 돈을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불우이웃을 돕는 등 돈을 얼마나 잘 쓰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라며 활짝 반겨주셨다.

 

 

물질이 풍요해질수록 욕심 커지고 정신 나약

 

기자= 사는 것이 더 풍족해지고 편해졌지만 예전보다 자살하는 사람이 많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스님께서는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진제= 요즘은 물질 풍요시대라 생활이 윤택하고 수십 년 전에 비해 말할 수 없는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물질의 풍요와 정신적 풍요가 같이 가야 하건만 물질이 풍요해질수록 정신은 나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만족을 모르고 항상 부족하다는 인식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지요. 욕심은 어리석음을 낳기에 불행하다는 생각을 냅니다.

우리 모든 국민은 많이 가지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많이 가진 이가 못 가진 이에게 베푸는 데 행복이 있고, 못 가진 이는 노력하고 노력하다 보면 자연히 나아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분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마음을 닦고 닦아 크고 밝은 지혜를 계발할 것 같으면 나고 날 적마다 만인이 우러러보는 출세와 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자= 사회에서 기업인들의 책임과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경제계를 이끌어가야 할 기업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진제= 우리나라는 국토는 좁은데 인구가 많습니다. 석유나 광물 등 자원이 많이 부족한 나라지요. 또한 6.25라는 큰 전쟁을 겪으면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폐허가 됐지요. 이러한 백지상태의 절대 악조건 속에서 그 짧은 시간에 ‘한강의 기적’ 이라 불리며 세계적인 경제대국을 이룩한 데는 맨바닥에서 일어나 앞만 보고 달려온 경제인이 있었고 우리 국민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때 국민을 먹여 살리고 경제를 이끈 것은 경제인들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자원을 수입에만 의존하는 이 나라가 부국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둥 역할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이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된 것은 기업인들과 모든 근로자가 성과 열을 다해 노력한 결과입니다. 그들의 고뇌를 일반인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덜어주도록 노력하며 격려해야 합니다.

반면에 경제인들의 성공은 국민의 지지와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의 세계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급변화의 흐름 속에 있습니다. 국민들의 삶의 질도 다각도로 변하고 높아졌지요. 과거의 노력과 현재의 결과물에 만족한다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안주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그렇기에 경제인들은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깊이 살펴야 합니다. 힘들지만 기업하는 많은 분들이 우리나라 안에서 사업을 확장하는 것이야말로 실업자를 줄이고 국민이 모두 더더욱 잘 사는 길이 되리라고 봅니다. 또 우리 국민은 기업인과 근로자의 고마움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이 땅에서 마음껏 기업체를 세우고 사업을 확장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주고 진정한 마음으로 격려하고 도와주는 것이 우리가 모두 잘 살게 되는 길이라고 봅니다.

 

 

‘참나’ 존재 묻고 또 물어 진리의 주인이 되어야

 

기자= 정치, 경제, 교육, 국방 등 우리 사회 곳곳에는 여전히 수많은 갈등이 있습니다. 이 같은 갈등을 해소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진제= 갈등을 해소하는 길은 모든 국민이 일상생활에서 지혜를 계발하는 참선 수행을 꾸준히 연마하는 데 있습니다. 지혜가 열림으로써 모든 갈등이 해소될 수 있지요. 세상의 모든 출세와 복락의 가장 큰 요체는 밝은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참선 수행을 통해 지혜가 열리게 되면 모든 허세와 아집(我執)은 찾으려야 찾을 수 없습니다. 내가 곧 상대요, 상대가 곧 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넓은 시야로 모든 분들이 상부상조하고 직무에 임하면 세계 속에 일등 국민이 되리라 봅니다.

 

기자= 부처님 오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부처님이 오신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요?

 

진제= 마음을 낼 것 같으면 가지가지 진리(眞理)의 법이 현전하고
마음을 내지 않으면 가지가지의 진리의 법이 없음이라.
심생(心生)하면 종종법생(種種法生)이요
심멸(心滅)하면 종종법멸(種種法滅)이라.

이러한 고로 마음은 만 가지 진리의 법의 주인이로다.

우리 부처님께서 이러한 마음의 주인을 증득하시어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위대한 진리의 스승이 되셨습니다. 마음은 만 가지 진리법의 주인입니다.
이 마음을 깨달아 알면 가지가지 진리의 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지만, 알지 못하는 고로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온갖 번뇌가 쉴 날이 없으므로 불안과 고통 속에서 헤어날 기약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참선수행을 통해 각자 지니고 있는 이 마음을 밝힌다면 큰 지혜를 얻어 만 가지 진리의 법의 당당한 주인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기자= 마지막으로 저희 〈매일경제〉 독자와 국민에게 좋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진제= 길이 생각건대 강남땅 삼사월에
자고새가 우는 곳에 백가지 꽃이 향기롭도다.
장억강남삼사월(長憶江南三四月)에
자고제처백화향(鷓鴣啼處百花香)이로다.

이 게송(偈頌)의 내면에는 무한한 진리의 뜻이 있는데, 설사 내면의 진리는 모른다 해도 외면만 보더라도 자연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는 좋은 시절(時節)입니다.
아름다운 백 가지 꽃과 향기를 만끽하면서 화두를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라고 들되, ‘참나’ 라는 존재는 과연 어떠한 것인가 하고 일상생활에서 꾸준히 의심하며 연마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심을 놓지 않으면 밝은 지혜를 얻을 수 있어

 

〈중앙일보〉 박정호 기자(2004년 1월 31일자)

 

한국 불교의 유구한 전통인 선불교(禪佛敎)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조계종은 올해 역점 사업으로 선의 생활화ㆍ대중화ㆍ세계화를 꼽았다. 특히 서암ㆍ월하ㆍ덕암ㆍ청화ㆍ서옹 스님 등 대표적 선승들이 지난해 잇따라 입적하면서 뒤를 이을 스님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한국 간화선(看話禪, 화두를 들고 하는 참선)의 큰 맥을 이어가고 있는 선지식을 찾아가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선지식(善知識)’은 불도를 깨치고 덕이 높아 사람을 불도에 들어가게 교화ㆍ선도하는 큰스님을 뜻한다.

지난 27일 항도 부산은 봄의 전령이 놀러온 듯했다. 강추위가 잠시 물러간 그날, 장수산 해운정사의 햇살은 제법 따뜻했다. 조실 진제 스님이 계시는 소담한 방에 들어서니 지난해 12월 열반한 서옹(西翁) 스님이 남긴 ‘수처작주(隨處作主, 어디에 있든 내가 주인)’ 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선불교의 당당한 자신감이 물씬 느껴졌다. 성격이 호탕한 진제 스님이 “잘 오셨습니다” 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기자= 서옹 스님과 인연이 각별하셨죠?

 

진제= 나이는 20여 년 차이나지만 서로 문답(問答)이 통하는 사이였습니다. 밤 12시에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갔습니다. 좋은 분이 가셨습니다.

 

기자= 해운정사는 참선도량입니다. 그런데 시내 한복판에 있네요?

 

진제= 1971년 창건 당시만 해도 이런 곳은 없었습니다. 대중 가운데 선을 포교하려고 이곳에 사찰을 세웠지요. 청명한 날에는 쓰시마 섬도 보인답니다. 부처님의 법문은 다름 아니라 심성을 계발하는 겁니다. 사람마다 그것에 크게 눈을 뜨고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편안한 지상낙원을 이루자는 뜻이 컸습니다.

 

 

일상생활ㆍ세간살이가 참선

 

해운정사는 1년 열두 달 참선하는 곳이다. 동안거 기간인 현재 30여 명의 스님과 80여 명의 일반인이 수행하고 있다. 매주 토요일엔 일반인을 대상으로 철야정진도 열린다.

 

기자= 아직도 중생에겐 참선이 어렵습니다.

진제= 일상생활, 세간살이가 다 참선이지요.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목욕을 하거나 항상 화두(話頭) 하나를 갖고 정진하면, 즉 ‘나는 누구인가?’ 라는 의심을 놓지 않으면 밝은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기자= 화두가 한자투성이라 요즘 사람들에겐 잘 다가오지 않습니다.

진제= 그래서 요즘엔 ‘참나’ 라는 한글 화두를 많이 줍니다. 부모에게 태어나기 전의 내 본모습이 뭔지 생각하라는 겁니다. 제가 출가 뒤 받았던 첫 화두지요.

기자= 스님은 그것을 깨달으셨습니까?

진제= 그래요, 그래. 하하하.

기자= 그게 뭐죠?

진제= 우리 몸은 길어야 백년이 지나면 없어집니다. 온 세계가 한 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진리를 닦고 닦으면 세상의 투쟁과 전쟁은 사라집니다. 사람들이 빈한하게 사는 건 지혜가 짧기 때문이지요. 말이 야위면 털만 길어집니다.

기자= 어렵습니다.

진제= 그래서 참선에는 스승이 필요합니다. 간혹 혼자 깨달았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믿을 수 없습니다.

 

스님은 올해 출가 50년을 맞는다. 지난 반세기를 ‘할(喝, 고막이 터질 정도의 고함)’과 ‘방(棒, 몽둥이 찜질)’을 친구 삼아 수행해온 그는 이 같은 지혜를 갖추면 이른바 ‘출세’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했다. ‘참나’를 바로 알면, 즉 세상을 꿰뚫어 보는 지혜를 갖추면 국회의원도, 장관도, 대통령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참선=출세? 잘 듣지 못했던 말이다.

 

기자= 그래도 정치인은 욕만 먹는데요.

 

진제= 아집(我執)과 욕망에 가려져 있어 바른 소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민주주의를 50년 했다고 하지만 진정 ‘나를 비우는 정치’를 했다면 세계 민주주의의 종주국이 됐을 겁니다.

 

기자= 4월 총선에 대한 우려와 기대가 교차하고 있습니다.

 

진제= 무엇보다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를 알아야 해요. 좋은 행동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고, 나쁜 행동에서 나쁜 결과가 나옵니다. 노인을 공경하고, 병든 자를 보살피고, 이런 게 선행입니다. 사업을 잘 해서 실업자를 줄이는 것도 선행이지요. 정치의 시작도 그런 마음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기자= 노무현 대통령을 어떻게 보십니까? 일부에선 ‘편 가르기’를 비판합니다.

 

진제= 대통령은 온 국민의 대통령이 아닙니까? 내가 보건대 그간 신세진 일에 고루고루 인사치레를 했을 겁니다. 앞으론 넓은 시야를 가지고 그런 인사를 하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지켜봅시다.

스님은 이날 뜻밖에 현실 문제를 많이 언급했다. 예컨대 북한 핵에 강력히 반대했다. 핵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 나아가 무생물까지도 몰살하는 엄청난 재앙을 부른다는 이유에서다.
얘기는 다시 선(禪)으로 돌아갔다.

 

 

‘세상은 하나’ 알면 선행 가능

 

기자= 불교에선 물질에 대한 욕망을 거부합니다. 그런데 물질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진제= 참선(參禪)은 세상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수양(修養)에 몰두하면 자기 직업에도 성실해지고, 책임감도 강해지지요. 세상 전체가 한 몸뚱이라는 진리, 모든 인류가 부모ㆍ형제라는 사실에 눈을 뜨면 자연스럽게 베풀 줄도 알게 됩니다.

 

기자= ‘몸짱’이 유행합니다. 들어보셨죠? 외모가 실력인 세상입니다.

 

진제= 형상은 허망합니다. 여기에 집착하는 건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주가 생기기 전의 ‘참나’를 봐야 합니다. 내면을 바로 관찰하면 남자도 여자도,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시작도 마침도 없습니다.

 

기자= 뜻이 통하는 지음자(知音者)를 기대한다고 자주 말하셨는데요.

 

진제= 아직도 그렇습니다. 박수를 치려면 두 손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아직 마주칠 손을 찾지 못했습니다. 시절 인연이겠지요.

 

기자= 그렇게 자신이 있습니까?

 

진제= 문답을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하하.

 

기자= 세상을 다 아신 모양입니다. 갈등이 없으니 심심할 것 같은데요?

 

진제= 아닙니다. 오히려 바쁘지요. 항상 산문(山門)을 열어놓고 찾아오는 사람을 맞이합니다. 묻는 사람도 많고 가르칠 사람도 많아 항상 바쁩니다.

 

기자= 그래도 외국에선 한국 불교를 잘 모릅니다.

 

진제= 그래서 2년 전 국제무차선대법회를 열지 않았습니까? 결과적으로 한국 선불교의 저력을 만천하에 보였습니다.

 

기자= 그런 한국에 틱낫한이나 달라이라마 같은 세계적 스님은 왜 없나요?

 

진제= 그들 스님은 선의 진리를 모릅니다. 단지 자비(慈悲)의 보살행(菩薩行)을 펼 뿐이지요. 맑은 가을 하늘처럼 하나의 티끌도 없는 부처님의 심인(心印, 깨달음)은 참선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오면, 안목(眼目)이 상통하는 이를 만나면, 무차선회(無遮禪會) 같은 자리를 다시 열 생각입니다.

저 멀리 청해(靑海)로부터 기운 센 바람이 불어왔다. 스님은 59년 오도송(悟道頌)에서 이렇게 읊었다.

두 칸 토굴에 다리 펴고 누웠으니,
바다 위 맑은 바람 만년토록 새롭도다
이간모암신각와(二間茅庵伸脚臥)하니
해상청풍만고신(海上淸風萬古新)이로다.

 

 

대표적 선승 진제 스님에게 듣는 ‘부처님 오신 뜻’

 

〈동아일보〉 김갑식 기자(2002년 5월 17일자)

 

이 시대의 대표적인 선지식으로 꼽히는 진제 스님

 

19일은 불기 2546년 부처님 오신 날이다. 부산 해운정사 금모선원과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의 조실인 진제 스님. 스님은 한국 불교의 선풍을 진작시킨 ‘봉암사 결사’로 유명한 봉암사 태고선원의 조실을 지내기도 했다. 16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이 시대를 대표하는 선지식을 찾아 길을 떠났다. 목적지는 부산도 대구도 아닌 천년 고도 경주였다. 진제 스님은 곧 선원이 개설되는 경주 ‘금천사(金泉寺)’에 머무르고 계셨다. 울산에서 경주까지, 다시 금천사가 있는 남산 기슭까지 차로 1시간 남짓 걸렸을까. 스님은 숙소인 ‘금장실(金杖室)’에서 가부좌를 튼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금장은 부처님의 법을 상징하는 금빛 주장자를 가리킨다.

 

기자= 귀한 시간을 내주셔 고맙습니다. 먼저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뜻을 가르쳐 주십시오.

 

진제= ‘참 부처님’은 오신 바도 없고 가신 바도 없습니다. 자기의 참모습을 알면 부처요, 모르면 범부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의 본성을 모르고 허상(虛相)을 찾아다니는 겁니다. 부처님이 오신 뜻은 중생들이 수행을 통해 자신의 참 모습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기자= 자신의 참모습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제= 진리의 눈이 열린 자만이 부처님의 ‘살림살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른 진리를 아는 스승을 찾아 바른 수행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 수행을 하면서 ‘한 번 죽었다 살아나면’ 바른 눈(正眼)이 열립니다. 본디 인생에는 무한한 전생과 후생이 있습니다. 80, 90세 된 노인에게 물어보십시오. ‘벌써 그렇게 됐나’ 라고 할 겁니다. 하지만 길게 보여도 인생 100년은 ‘휙’ 지나가고 곧 무한한 후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허상을 탈피해 ‘참나’를 밝히는 꾸준한 연마로 지혜를 얻으면 참된 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기자= 그 수행법이 참선입니까? 요즘 참선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진제= 그렇습니다. 참선은 마음의 갈등을 던져버리는 것이지요. 참선은 꼭 앉아서만 하는 게 아닙니다. 앉고 눕고 걷고 일하고 돌아다니면서 언제나 화두를 드는 것이지요. 최근 서양 지식인들이 참선에 관심을 갖는 것도 참선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수행자가 되지 않더라도 참선의 ‘맛’을 알면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진제 스님은 경허-혜월-운봉-향곡으로 이어지는 법맥(法脈)을 이었다. 스님은 20세이던 1954년 석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뒤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라는 화두를 들고 각고정진했다.
특히 진제 스님과, 석우 스님의 열반 뒤 법사(法師)스님이 된 향곡 스님이 선문답으로 법력을 겨룬 ‘법거량(法擧揚)’은 유명하다.

기자= 스님이 젊은 수좌시절 향곡 스님과 벌인 법거량은 유명합니다. 불가에서는 사제(師弟) 관계가 엄격하지 않습니까?
진제= 진리는 광대무변(廣大無邊)합니다. 동쪽만 보고 깨달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동서남북상하 전체를 다 봐야지요. 그래서 참선하는 자는 스승 앞에서 문답 점검을 받고 깨달아야 합니다. 혼자 도를 깨달았다고 자부하다보면 다른 길로 빠지기 쉽습니다. 이렇듯 사제 관계는 엄격하지만 법을 논하는 것은 백정이 서로 마주쳐 칼질하는 것과 같아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살불살조(殺佛殺祖)’가 선 수행자의 원칙입니다. 인정사정도 없고, 우물쭈물하는 것이 통하지 않지요. 즉답(卽答)이 나오지 않는다면 공부가 부족한 것입니다.
기자= ‘남 진제 북 송담’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제= ….(웃음)
기자= 들어보셨습니까?
진제= 허허, 들었습니다.
기자= 혹시 두 분이 법거량을 하신 적은 있습니까?
진제= 송담 스님은 젊은 시절 동화사에서 수행할 때 만난 적이 있지요. 따로 법을 논해본 적은 없습니다. 오래된 일입니다만, 가깝게 지내는 숭산(崇山) 스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셋이 한번 만나면 어떠냐는 이야기를 한 적은 있습니다.
기자= 스님은 평소 뜻이 통하는 지음자를 만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만나셨는지요?
진제= 아직 못 만났습니다. 지금도 동화사와 해운정사 선방의 문을 열어 놓는 것은 나이에 관계없이 지음자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진제 스님은 바깥세상을 멀리하고 은둔하는 선승들과 달리 스님을 찾는 이들을 마다하는 적이 없다. 스님은 눈 밝은 스승, 이른바 ‘명안종사(明眼宗師)’를 찾는 이들이 방문하면 신분 여하에 관계없이 언제나 선문답(禪問答)으로 점검한다.

기자= 바깥세상이 혼란스럽습니다. 권력형 부정비리로 시끄럽고 올해 말에는 대통령선거가 있습니다. 지도자의 덕목을 말씀해 주신다면.
진제= 세상의 지도자가 되려는 분들은 바르게 살고 덕행(德行)을 쌓아야 합니다. 지혜와 덕행이 겸비되지 않으면 지도자 자질이 없습니다. 특히 지혜가 없다면 선과 악을 가리지 못합니다.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가 50여 년이라지만 오늘날까지 ‘갈지자’ 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지도자가 수행으로 지혜를 얻는다면 온 국민이 부모가 되고, 아들딸이 됩니다. 거기에 친소(親疎)관계가 있을 수 없지요. 적이 있을 리 없으니 모든 사람이 지도자를 따르게 됩니다.
기자= 한국 선불교의 세계화를 위한 방안이 있습니까?
진제= 중국은 공산화로 선의 맥이 단절되다시피 했고, 일본은 불교가 전반적으로 약합니다. 선불교의 맥은 오직 한국에만 남아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오는 10월 20일 해운정사에서 ‘국제무차선대법회’를 열 계획입니다. 서옹 스님(고불총림 백양사 방장)과 산승(山僧, 진제 스님), 중국 정혜(淨慧) 스님, 일본 임제종의 고승 등 한ㆍ중ㆍ일 3개국 선사들이 모여 법문을 나눌 계획입니다. 선불교의 실체와 진수를 세계에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무차선회(無遮禪會)는 성인과 범부, 상하 귀천에 관계없이 모두 평등하게 불법을 논하는 자리다. 이 대회는 1912년 방한암 스님이 금강산 건봉사에서 개최한 데 이어 서옹 스님이 1998년, 2000년 백양사에서 개최한 바 있다. 하지만 3개국의 내로라하는 선승들이 참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기자= 독자들을 위한 법문을 남겨 주십시오.

진제= 한 주먹 버들가지 잡아 얻지 못해서
 봄바람에 옥난간 벽에다 걸어둠이로다.
 일파유조수부득(一把柳條收不得)하야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로다.

기자= 풀어주신다면.
진제= 하하하.
기자= 좀 알기 쉬운 법문은 없습니까?
진제= 쉬우면 법이 아닙니다. 이 법문에 산승이 평생 공부해서 얻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한번 풀어보십시오. 꼭 도인이 되지 않더라도 화두를 품고 살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즉문즉답(卽問卽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스님의 말은 시종일관 내려치는 칼끝처럼 예리했다. 아무런 장식 없이 방석만 있는 금장실에 갑자기 빗소리와 함께 차가운 바람이 밀려오는 듯했다.

 

염화실의 향기
 

〈경향신문〉 김석종 선임기자(2007년 3월 31일자)

대구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金堂禪院)과 부산 장수산 해운정사 금모선원(金毛禪院)의 조실인 진제 스님. 그는 최근 법전(法傳) 스님이 재추대된 조계종 종정추대회의에서 종정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옛 못에서 달을 건진다》(글로연)라는 제목의 법어집을 펴냈다. 모두 81편으로 구성된 법어집은 역대 선승들이 베풀어놓은 가르침을 진제 스님의 안목(眼目)으로 점검하고 재해석한 책이다.
28일 봄기운이 완연한 팔공산 동화사 염화실에서 영남의 선맥을 우뚝 세우고 있는 진제 스님을 만났다. 그는 찾는 사람을 내치는 법이 없다는 소문대로 염화실 문을 활짝 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하루 전 팔공산 포행길에 불어 닥친 찬바람으로 몸살 기운이 있다고 하면서도 평소의 활발발한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가부좌를 튼 자세도 끝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
기자= 요즘 서양에서도 선사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선이 무엇인지 일반인이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십시오.
진제= 자기의 참모습을 아는 것이 선입니다. 선사상은 세계 정신문명의 근원적인 대안이 될 수 있어요. 모든 사람이 마음의 갈등을 해소하고 지혜를 키워 무한한 희망과 생명력을 불어넣기 때문에 세계평화를 이루는 새로운 바탕이 되는 거지요.
기자= 스님은 오래전부터 선의 대중화와 ‘생활선’을 강조했는데 생활 속의 바른 참선법은 무엇입니까?
진제= 사람의 몸뚱이는 호흡지간에 무너지고 백 년 이내에 썩어 한줌 흙으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참나’가 아닙니다.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 즉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의 자기를 돌이켜봐야 ‘참나’를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이나 여건을 탓하지 말고 자기 직분에 충실하면서 화두를 잡으면 그 순간만큼이라도 세상 모든 시비 분별이 떠나고 크고 밝은 지혜가 계발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어디에서든 자기가 주인이 되는 공부이면서 세세생생 행복을 누리는 공부입니다.
스님은 “선 수행이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공포, 불안, 갈등을 말끔히 씻어 없애 큰 그릇으로 만들어준다. 정신이 맑아져 치매가 예방되고 건강에도 좋다” 라고 말했다. 이번에 펴낸 법어집의 부록에는 경허 선사가 혜월 선사에게, 혜월 선사가 운봉 선사에게, 운봉 선사가 향곡 선사에게, 향곡 선사가 진제 선사에게 내린 친필 전법게(傳法偈)뿐만 아니라 스승이 직접 상수제자에게만 법맥을 써서 내려주는 등등상속(燈燈相續, 법맥도)을 사진으로 싣고 전법(傳法)의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해놓았다. 법어집에 따르면 마하가섭으로 시작된 불조정맥(佛祖正脈)이 28조 보리달마(중국 선종 초조)와 38조 임제의현을 거쳐 56조 석옥청공 선사에 의해 고려의 태고보우(太古普愚)로 이어져 향곡 스님의 법을 받은 진제 스님이 제 79조 법손이 됐다고 한다.
스님은 깨달음을 인가받은 후 1971년 부산 해운대 근처에 해운정사를 창건해 대가람으로 일구고 참선 대중화의 길을 열었다. 1994년에는 역대 선지식들의 중요한 수행처였는데도 20여 년 동안 방치됐던 동화사 금당선원의 조실을 맡아 참선도량의 선풍을 다시 일으켰다. 진제 스님은 성철 스님과 마찬가지로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한다. 한번 확연하고 명백하게 깨닫는 확철대오(確徹大悟)하면 일절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기자=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는 어떻게 달라집니까?
진제= 세상사 집착이 끊어져 항상 평온한 마음상태가 됩니다. 먹고, 자고, 똥 누는 모든 일상이 그대로 평상심(平常心)이지요. 연꽃은 진흙 속에 피지만 흙을 묻히지 않는 것처럼, 일체중생과 한 몸이 되어 절대 평화를 누리는 겁니다. 대안락(大安樂)의 해탈도(解脫道)에서 자유자재한 용심이 나오는 것이지요.
어느 날 “중생은 업(業)으로 사는데, 도인은 원력(願力)으로 산다” 라는 어느 큰스님의 말을 듣고 의심이 든 제자가 물었다. “깨우쳤는데 무슨 원력이 더 있습니까?” “열반 중에 안 있나? 중생구제의 원(願)을 세워 다음 생에 다시 온다면 모를까.” 그 한마디에 제자는 의심을 풀었다. 이미 열반의 경지에 있으므로 금생에 더 많은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그 뜻을 이해한 것이다.
기자= ‘뜰앞의 잣나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차 한잔 하게’ 등 선문답은 일반인이 보기엔 동문서답 같습니다. 스님의 법어집에도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 ‘사료간(四料揀)’, ‘수고우(水牯牛)’ 등 너무 어려운 이야기가 많습니다.
진제= 선의 언어는 절대 동문서답이 아닙니다.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살활(殺活)의 칼날이지요. 히말라야 산 상봉에 올라야 전체를 다 한눈으로 볼 수 있듯이 사방이 환해지는 마음자리에서 전광석화처럼 바른 답이 튀어나옵니다.
상식을 깨는 역설의 논리로 기존의 사유를 뒤엎는 선사들의 문답을 따라가기는 어렵다. 깨달음의 순간을 쉽게 풀어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진제 스님은 어느 누가 법거량을 청해도 거절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진제 스님 회중의 수좌들은 여름, 겨울에만 안거를 지내는 다른 선원과 달리 사계절 가부좌를 틀고 정진한다. 산철인 현재에도 금당선원에 20여 명, 금모선원에 20여 명이 참선 중이다.
진제 스님은 새벽 2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새벽예불을 드린다. 오전, 오후 한 차례씩 선원을 찾아 선원수좌들을 향해 장군죽비를 내리치며 공부를 점검하고 경책한다. 스님은 임제선의 가풍대로 사자후(獅子吼)와 방(棒), 할(喝)을 써서 수좌들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오후에는 팔공산 정상까지 포행을 한다.
기자= 이제 제자에게 법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제= 나에게 남은 일이 부처님 심인법(心印法)인 선종의 맥을 이을 법기(法器)를 찾는 거지요. 날마다 선방과 염화실의 문을 열어놓고 법제자로 삼을 지음(知音)을 기다리고 있어요. 문을 두드리는 이들은 부지기수로 많지만 ‘향상일구(向上一句)’의 최상승 경지를 얻은 이를 만나지 못했어요.
기자=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데 정치 지도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지요.
진제= 지혜와 덕행이 겸비되지 않으면 선과 악을 가리지 못합니다. 지도자들이 허세와 아집으로 용심이 바르지 못하고, ‘나’를 앞세워 국민을 동쪽, 서쪽으로 잡아끄니 불화와 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이지요. 분단도 지도자들의 아집이 만든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화두’, ‘선문답’ 같은 말은 곧잘 써먹지만 선문답은 그렇게 한가한 잡담이 아닙니다. 자기가 자기한테 곧이곧대로 물으면 거짓과 조작이 통하지 않아요. 그것이 진짜 화두와 선문답입니다.
스님은 이렇게 봄소식을 물었다.

 추위가 한 번 뼈에 사무치지 않을 것 같으면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향기를 얻을 수 있겠는가.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番寒徹骨)하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동화사 매화는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돌아 나오는 대구 시내 가로수 벚꽃만 환하게 눈부셨다.

 

뭇 중생에게 부처의 길을 보이시고


〈불교신문〉 박부영 기자(2003년 5월 3일자)

20살에 출가해 33세 때 공안(公案)을 깨쳐 오도송(悟道頌, 깨달음의 시)을 읊고, 부처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이어가는 대선사. 지난 3월 한국불교의 선지식들로 구성된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되었다. 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오신 날의 참의미를 들었다.

진제= 부처님께서는 2547년 전에 도솔천궁 호명보살(護明菩薩)로 계시다가 사바세계의 인도 가비라성 정반왕궁에 하강하시어 마야부인 태중에 잉태하셨습니다.
10개월이 되어 오른쪽 옆구리로 출태하셔서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눈으로는 사방을 살피시며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말씀하시기를,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눈으로 사방을 살피시고 일곱 걸음을 떼시니 당당함이 드러남이요, 하늘세계, 인간세계에 짝할 자 없음이로다.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땅을 가리키니
 하늘과 땅이 빛을 잃고
 만 가지 형상 있는 것이 변질이 됨이로다.
 천상천하에 내가 제일이라 하시니
 소리를 낮추고 소리를 낮추소서.
 사방에 사람이 없는 것이 심히 다행이로다.
 사람이 없는 것이 다행함이여,
 산은 스스로 높고 물은 스스로 깊음이로다.
 주행칠보로당당(周行七步露堂堂)이요
 천상인간무등필(天上人間無等匹)이로다.
 일수지천일수지지(一手指天一手指地)에
 건곤실색(乾坤失色)하고
 만유변질(萬有變質)이로다. 유아칭독존(唯我稱獨尊)하시니
 저성저성(抵聲抵聲)하소서.
 사방무인(四方無人)이 심행(甚幸)이로다.
 무인행(無人幸)이여,
 산자고혜 수자심(山自高兮 水自深)이로다.

부처님 오신 날 상당법어(上堂法語)를 당부하자 진제 스님은 이 법문을 내렸다.

기자= 스님, 향상(向上)의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어리석은 중생들로서는 고준한 법문의 참뜻을 쉽게 헤아리기 힘듭니다. 무슨 뜻인지 풀어서 말씀해 주실 수 없으신지요?
진제= (빙긋이 웃으시고)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오신 뜻을 옅은 법문으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으니, 기자께서는 잘 적어서 독자들께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허망한 인생, 나를 놓아야 고통 없어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오신 뜻은, 사람 사람의 심성 자체에는 나와 더불어 동일한 지혜와 덕상(德相)이 갖추어져 있건만 중생이 자기 업에 가려 바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부처님의 지혜와 덕상이 모든 중생에게 갖춰져 있으므로 만 중생이 부처님과 같은 행을 하면 위대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사바세계에 오셨습니다.
사람 사람의 몸뚱이는 백 년 이내에 한줌 흙으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없지만 ‘부모에게 이 몸 받기 전에 어떤 것이 참 나인가’ 하는 도리를 알면, ‘참나’에 우주의 모든 진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참나’를 아셔서 위대한 부처가 되셨고 우리도 모두 일상생활에서 ‘참나’를 밝히는 선 수행을 잘 연마해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이 우주가 생기기 전 ‘참나’의 모습이 드러나니 그것이 바로 참부처요, 우주의 진리가 그 가운데 있는 것이지요. 이런 고준한 진리법을 바로 지도하기 위해 2547년 전 사바세계에 오신 것입니다.
기자= 그러면 스님, 출세간의 법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제= 우리 인생은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나(我)라는 허상(虛相)을 놓아야 해요. 허상을 좇아 귀중한 세월을 허송하지 말고 아만심을 다 버려야 합니다. 시방세계가 한 집이요 만유(萬有)가 나와 더불어 한 몸인데 ‘나’와 ‘너’ 둘로 나누고 자타를 분리할 수 있을까요.
수천만 생 아집(我執)에 살고 고통 가운데 살고 윤회고통을 해결 못했으니, 남은 인생 참되게 살기 위해 수행에 힘써야 합니다. 부처님의 돈오견성법(頓悟見性法)은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라. 한 번 뛰어서 여래지(如來地)에 이르는, 바로 닦는 수행법입니다.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하는 한 생각으로 일념이 지속되는 과정이 오면 홀연히 일기일경상(一機一境上)에 자기의 참모습이 드러나 부처님 법에 이르게 됩니다. 바른 수행법이 부처님 법 가운데 있으니 나도 장부가 되고 너도 도인이 되게끔 바른 참선정진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많은 생을 살면서 지은 중생의 습기는 봄바람에 눈 녹듯이 소멸되는 동시에 만 가지 법이 가득한 보배의 창고에서 편안히 머물게 됩니다. 이러한 좋은 법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비록 진리의 바른 눈이 열린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참선정진에 노력한 인연으로 죽음에 다다라 밝은 정신, 맑은 마음으로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하는 화두에 몰두하면 고통 없이 이 몸을 바꾸는 저력을 갖추게 됩니다. 사해(四海)의 모든 분들, 이러한 좋은 법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여 나고 날 적마다 행복한 복락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옛 도인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빈한(貧寒)하게 사는 것은 지혜가 짧기 때문이요, 말이 야위면 털이 기나니라” 하셨습니다. 이 두 마디는 거짓 없는 참말이니 귀담아들어 만인에게 앞서는 지혜의 눈을 갖추게 된다면 수승한 복락을 누릴 수 있음을 명심하고 또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북한의 굶주린 동포에 자비심 내야지

기자= 스님, 전쟁이니 핵이니 하며 세상이 어지럽습니다.
진제= 무한한 과보(果報)가 있으니 절대로 전쟁은 안 됩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일이 아니지요. 도덕정치, 도덕생활 해야지 핵은 떨어지면 무수한 생명을 죽이니 그것으로도 억만 겁의 고통을 면할 수 없어요. 우리가 자비심으로 이북의 주린 사람들에게 식량을 보내면 큰 복이 되고 평화가 조성될 것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기해 자비심을 실행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스님은 마지막으로 곰곰히 생각해보라며 ‘화두’를 던지셨다.

 낙화는 정이 있어 흐르는 물을 따라감이나
 흐르는 물은 정이 없어 떨어진 꽃만 흘려보냄이로다.
 낙화유정수유수(落花有情隨流水)나
 유수무정송낙화(流水無情送落花)로다.

무슨 뜻인지 몇 차례 물어도 스님은 웃기만 하셨다.

 

법 묻는 이에겐 언제나 문 ‘활짝’


〈현대불교신문〉 천미희 기자(2006년 1월 1일자)

조계종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을 지낸 범룡(梵龍) 스님이 입적(入寂)하여 분주한 동화사. 조실 진제 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는 동화사 염화실에도 조문하러 동화사를 찾은 스님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보통 때 같으면 금당선원 수좌들의 오전 정진을 경책한 후 발우공양을 할 시간이지만 범룡 스님 장례로 이날 점심에는 상공양을 따로 받았다. 된장국, 콩나물무침, 오이무침 등 깔끔한 반찬으로 차려진 상을 받은 진제 스님의 공양 시간은 10분 내지 15분. 발우공양에 익숙해진 탓이라 공양 시간이 매우 짧다. 도(道)를 위해 살아왔을 뿐 평생 몸을 보살피지 않았다는 스님에게 음식은 몸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양식일 뿐이다.
보통 아침 공양으로는 시자가 후원에서 가져온 죽을 드시고 점심에는 선원 수좌들과 발우공양을 하시고 저녁에도 역시 후원에서 먹는 그대로를 분별없이 드신다.
“도를 위해 절집에 왔지, 편안하게 지내려고 절에 온 것이 아니니까 음식이든 입는 것이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도를 위해 산다는 그 신조가 그대로 이어져왔지요.”
누가 언제 찾아와도 항상 바른 참선법을 지도해주는 진제 스님은 화두와 의심이 한 덩어리가 되어 일념삼매가 될 것을 당부했다.
진제 스님은 건강에도 무심했다. 20세 출가 이후 깨달음을 인가받았던 33세까지는 모든 반연을 쉬고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했다. 이 공부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고 망망대해를 홀로 거니는 것과 같다고 표현할 정도로 치열한 구도 행각을 이어온 스님에게 건강을 돌볼 겨를이 허락될 리 만무했다. 깨달음을 인가받은 후 1971년 부산에 해운정사를 창건하고 후학들을 지도하느라 세수 일흔을 넘긴 지금까지 또다시 건강은 뒷전이다.
그러다보니 목 뒤에 군살이 생겨 5~6개월 전부터는 소나무 홍두깨로 이리 저리 지압 삼아 미는 것으로 건강관리를 대신한다.
새벽 2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영산전 법당에서 새벽예불을 드리고 돌아오면 한 시간여 동안 홍두깨 운동을 빼놓지 않으신다.
“뒷목의 굳은살이 아무리 주물러도 없어지질 않아요. 그래서 소나무 홍두깨를 만들어서 부드럽게 굴리다보니 목도 가볍고, 머리도 가볍고 효과가 좋아요. 나만의 건강비법이지요. 허허허.”
홍두깨 운동을 마친 스님의 다음 일과는 참선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하는 참선과는 다르게 ‘깨달은 세계를 그대로 누리는 참선’ 이라고 하셨다.
깨닫기 전과 깨달은 후의 차이를 묻자 스님은 “깨닫고 나면 중생의 습기(習氣)는 없어지고 항시 밝은 진리의 즐거움이 지속된다” 라고 답했다.
“‘나’라는 아상이 없고 바른 진리의 눈을 갖추었기 때문에 세상법에 초연해지고, 밥을 먹고 물을 마셔도 집착이 없으며, 진리의 낙이 함께해서 그게 생활화되고 그대로 일상의 살림살이에 수용된다”는 것이었다.
매일 오전, 오후 두 차례 금당선원 수좌들을 향해 장군죽비를 내리치며 경책하는 스님은, 이 시간을 제외하면 언제든, 또 누구든 법을 묻는 사람들을 맞아 바른 참선법을 지도하는 일을 하루도 빼놓지 않으신다. 특히 스님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공부에 진실하고 간절한 이를 각별히 반기신다.
“법을 묻는 사람에겐 언제든 내 방문이 열려 있어요. 별별 사람이 많이 오지요. 와서 달려들고, 딴소리 하는 사람도 많아요. 자기가 옳다고 우기고 큰소리치고 가지만 시간이 흐르면 다시 와서 참회합니다. 이제 동화사에 머물면서 잘 지도해 내 밑으로 한개 반개의 ‘법기(法器)’는 만들어놓고 가야지요.”
하루해가 저물어가는 저녁시간. 진제 스님과 시자스님은 세숫대야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는다. 저녁예불이 끝나면 이어지는 이 시간은 시자스님이 스승의 발을 씻어드리는 일로 스승과 제자의 내밀한 정이 오가는 순간이다. 스승의 발에 비누를 칠하거나, 비누를 물로 헹구어 낼 때도 제자의 화두는 끊이지 않아야 한다. 발을 씻는 짧은 순간이지만 진제 스님은 그날의 간단한 일상사를 챙겨 물으며 드러나지 않은 은근한 사랑으로 제자의 공부를 점검하신다.
세수(歲壽)가 많아질수록 제자를 야단치는 일이 줄어든다는 진제 스님. “화두와 의심이 한 덩어리가 돼 일념삼매(一念三昧)가 지속되도록 하라”는 당부로 일관하는 진제 스님의 하루는 ‘손뼉을 마주 칠 지음인(知音人)을 찾아가는 한 길’로 통하고 있었다.


진제 스님의 가르침

새해에는 마음을 새롭게 해서 허송세월을 안 해야 합니다. 허송세월을 안 하기 위해서는 바른 참선을 해서 일념이 지속되게끔 혼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른 선지식을 가까이하고, 바른 지도를 받고, 바르게 참구해 실행에 옮기는 게 제일입니다.
참선이 일생생활에서 무르익어야 합니다. 가나오나, 앉으나 서나, 장사를 하나, 농사를 지으나 화두가 흐르는 물처럼 항상 흘러가야 합니다. 그렇게 일념이 지속되면 밝은 지혜의 눈을 갖추게 되는데 그러면 자동으로 마음의 갈등이 없어지는 동시에 사물도 정확하게 판단하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아주 명랑하고 자신만만하고 근심걱정이 다 없어지게 됩니다.
참선해서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발심했으면 앉아서 익히는 것이 출발선입니다. 좌선할 때 바른 자세가 정립돼야 몸뚱이에 끄달림이 없고, 화두 드는 데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자세가 바르지 않고 화두를 챙기는 데 힘이 들어가면 병이 오고 상기(上氣)가 되어 참선을 못하게 돼요. 그만큼 바른 자세가 중요한데, 평좌(平坐)로 앉아서 양손을 포개 아랫배에 붙이고 가슴과 어깨를 펴고 허리를 곧게 하고 앉아야 합니다. 그리고 2미터 앞 아래에 화두를 두고 시선은 편안하게 두되 눈을 뜨고 생각으로만 화두를 챙기면 돼요.
그러면 바른 자세가 유지되면서 화두가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되고 상기도 방지됩니다.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하고 흘러가다가 혼침과 망상이 침범하면 다시 또렷또렷하게 챙기면 됩니다. 그렇게 반복하다보면 나중에는 한 번 챙기면 한 시간이 흐르고, 몇 시간이 흐르게 되는 때가 옵니다.
그러한 경지는 쉽게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무한한 노력을 계속한 끝에 마음속의 화두가 시냇물처럼 밤낮없이 흘러가는 때가 오는데, 그때는 몸은 자기가 할 일을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화두가 이어지게 됩니다. 지혜를 밝히는 이 일에 열중해서 마음속에 간절히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하고 일상생활에서 오매불망 정진하다보면 마음속의 갈등이 봄바람에 눈 녹듯이 없어지면서 지혜가 밝아져 탕탕자재하게 됩니다.
비고 비어서 걸림이 없는 무애(無碍)의 그 맛을 봐야 되는데 그 때가 고비입니다. 목숨을 다해서라도 대도(大道)를 알아야겠다는 간절한 발심이 선 사람만이 그 맛을 볼 수 있습니다. 금생에 이 일을 해결해 대장부의 활개를 쳐야겠다는 용단을 내린 이는 한 3년, 길게는 10년만 하면 해결이 됩니다.
나도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내신 석우 스님을 만나 발심 출가했고, 공부 도중 남방 제일의 대선지식 향곡 선사의 바른 지도를 받으며 법의 방망이를 맞고 오로지 화두와 씨름한 끝에 오늘날 ‘진제’가 됐습니다. 두 분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진제’는 없어요. 그러니까 부처님의 대도(大道), 즉 바른 공부는 먼저 깨달은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들여서 도를 위해서 일생을 바치겠다는 확고한 신심(信心)과 발심(發心)으로 해야 합니다. 허공보다 더 넓은 진리의 세계에 스승 없이는 도저히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인가받은 선지식을 찾아가 공부를 점검받고 인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나라에 대도시가 많지만 서울특별시를 당하지 못하듯이 부산ㆍ대전ㆍ대구 등에 이르러 서울에 다 왔다고 착각하고 우기는 현상이 생깁니다.
나를 찾아와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이들 중에는 ‘진리’라는 서울이 경기도 한복판에 있는데 수원, 대전이나 대구에 와서 이곳이 ‘진리의 고향’ 서울이라 착각하는 이가 더러 있어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진리의 고향인 경기도 한복판에 이르러서 남산에 올라 전체를 다 바라봐야 사방이 환해지고 동문서답을 멈추고 비로소 바른 문답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문답을 할 때 선지식이 아니면 가리지를 못합니다.
찾아오는 이가 부지기수지만 아직 바른 답을 하는 이가 없어요. 여래선 경지의 답을 하는 이가 몇 있지만 그것으로는 안 되거든요. 모든 부처님이 비밀히 전한 ‘향상일구(向上一句)’의 눈이 열려야 허락을 하고, 제자로 삼고 법을 전하는 것이지, 법신(法身)의 진리나 여래선(如來禪)의 진리 가지고는 안 돼요.
나도 처음 공부를 시작했을 때 ‘알았다’는 그릇된 지견(知見)이 나서 그 길로 공부를 그만두고 전국의 큰스님이라는 큰스님은 다 찾아 물으며 시간을 허비한 적이 있어요. 어떤 스님은 ‘옳다’ 하고 어떤 스님은 ‘그르다’ 해서 한 3년을 허비했지요.
그런데 향곡 스님만이 내 말문을 막아버렸거든요. 그래도 수긍을 않고 오대산으로 공부하러 들어갔는데 그때는 절집 생활이 아주 어려웠어요. 밥 한 끼도 근근이 먹고, 석 달 내내 김치 한 가지로 생활하고, 침구도 없이 오로지 화두만 붙들고 씨름했어요.
9시쯤 자려고 하면 침구가 없으니 좌복을 배에 깔고 새우잠을 자다가 다시 새벽 3시쯤 일어났지요. 혜암(慧菴) 스님, 활안(活眼) 스님 등과 용맹정진하면서 정진을 이어가던 어느 날, 혹한이 풀리면서 푸근한 날이었어요. 양지바른 마루에 앉아 ‘내가 알았다고 끄덕거리는데 참말로 바로 알았는가? 모든 고인의 법문을 바로 보고 막힘이 없는가?’ 자문(自問)을 하게 됐어요.
자기가 자기한테 물으면 거짓이 통하지를 않아요. 이걸 가지고 내가 ‘알았다’고 허송세월하면 내 신세가 말이 아니다 싶어 백지 상태로 돌아가 다시 공부하기로 했습니다. 그 길로 향곡 스님을 찾아뵙고 그곳에서 10년 세월을 보내면서 화두를 타파해 동문서답에서 벗어나 바로 보는 눈을 갖춰 전법게(傳法偈)를 받게 된 것입니다.
향곡 스님께 전법게를 받은 후 내 생애 남은 일은 오직 한 가지, 법을 전할 법기(法器)를 키워내는 일 뿐입니다. 그래서 법을 묻는 이라면 누구에게든 문을 열어놓았고, 내가 동화사에서 12년 동안 조실로 있으면서 후학 지도에 열의를 다하는 것이지요. 해운정사에도 30여 명이 공부 중이니 지도를 계속하면 법을 이을 법기가 ‘한 개’는 나올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하하하!

 열반적정이 본래 이름이 없으니
 여여라고 분별 지을 것 같으면 문득 변한 것이라.
 경 가운데 어떠한 것이 최고의 진리냐고 물으면
 돌사람이 밤에 나무로 깎은 닭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
 열반적멸본무명(涅槃寂滅本無名)커니
     환작여여조시변(喚作如如早是變)이라.
 욕문경중하극칙(欲問經中何極則)하면
 석인야문목계성(石人夜聞木鷄聲)이라.

돌사람이 밤에 나무로 만든 닭울음소리를 듣는 경지를 아시겠습니까?
부지런히 정진해 이 뜻을 알아 모든 부처님과 조사스님이 비밀히 전한 심인(心印)을 이을 장부가 되시길 바랍니다.

 

 

선향이 만 리에

 

 

선종 본산을 찾아


〈불교신문〉 박부영 기자(2002년 10월 5일자)

중국 전역 탐문 끝 겨우 찾아 

20일 해운정사서 두 번째 만나 해운정사의 국제무차선대법회에 참여하는 중국 선사가 전통 법거량 과정을 거쳐 ‘선발’ 됐다고 해서 화제다.
국제무차선대법회를 마련한 진제 스님은 중국 선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찰 아홉 곳을 직접 답사하여 달마(達磨)ㆍ혜가(慧可)ㆍ승찬(僧璨)ㆍ도신(道信)ㆍ홍인(弘忍)ㆍ혜능(慧能) 등 육조의 발자취가 어린 사찰과 운문종의 종장 운문문언(雲門文偃) 선사의 운문사, 조주(趙州) 선사의 조주원, 임제종의 발원지 임제원 등을 거쳤다.
사찰을 지키던 방장들은 진제 스님의 느닷없는 질문에 교리를 설명하거나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어떤 스님은 “선사들의 깊은 뜻을 내가 어찌 알겠느냐” 하며 짜증을 부렸으며, 임제원에서는 여든이 넘은 방장에게 “임제(臨濟)의 가풍은 보이지 않고 고탑만 우뚝하구나” 했더니 아무 말도 못해 밥만 먹고 나온 일도 있었다.
어느 절 방장은 3조 승찬 스님이 ‘신심명(信心銘)’에서 말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니라[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라는 구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그 뜻만 늘어놓기도 했다.
그 가운데 조주백림선사(寺)의 한 스님만 달랐다. 진제 스님이 응접실에 걸린 ‘끽다거(喫茶去)’ 라는 글을 보고는 그 유명한 조주 스님의 ‘끽다거’를 인용하며 물었다. “조주 스님이 온 적이 있다고 해도 ‘차 한 잔 마시게’, 온 적이 없다고 해도 ‘차 한 잔 마시게’ 했는데 조주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랬더니 그 스님은 조용히 차를 내밀었다 한다. 바로 중국을 대표해서 국제무차선대법회 법석에 오르는 중국의 정혜 스님이다.
33년생인 스님은 어려서부터 절에서 성장해 임제종과 운문종의 법사자(法嗣者)가 되었으며, 10년 전부터 생활선을 펴고 있다. 현재 중국불교협회 부의장이다. 진제 스님은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중에 가장 나았다. 이번 법석에서 그 그릇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본은 직접 법거량을 하지 않고 임제종단에 일임했다. 1948년생인 종현(宗玄) 스님은 임제종의 법사자로 인가받아 현재 후쿠오카 시 숭복사 조실로 주석하고 있다.

무차선대법회는 원래 인도에서 널리 행해졌는데, 아쇼카 왕과 같은 유력한 국왕들이 선지식들을 모시고, 차별 없이 법재(法財)를 보시하는 자리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의 삼장(三藏) 법사도 논쟁을 불식하기 위한 무차선대법회를 연 적이 있다. 각종 선서(禪書)에도 무차선대법회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데, 하택신회(荷澤神會)가 육조의 법통을 세우기 위해 개최한 무차선대법회는 선종의 역사를 바꾸어놓을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국은 1912년 한암(漢巖) 스님이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에서 개최한 무차선대법회를 끝으로 사라졌다가 1998년 서옹(西翁) 스님이 다시 개최하여 맥을 잇게 됐다.

 

참사람주의


서옹(西翁) 대선사 - 한국, 대한불교조계종 제5대 종정

오늘 국제무차선대법회에 참석하신 사부대중 여러분!
현대는 인간주의 시대인데 인간이 과학문명을 개발하므로 과학문명 시대라고도 합니다. 이 인간주의는 이성보다 욕망이 인간의 생명력이라 말해 인류는 욕망으로 타락하고 서로 투쟁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세계역사를 창조하면 인류는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류는 역사상 일대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동양의 조사선(祖師禪)은 인간을 근원적으로, 전체적으로 완전히 해결하였습니다. 본래 생사도 없고 죄악도 없는, 활발하고 자유자재한 본래면목 그 자리를 참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참사람은 자유자재하고 자비심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이 참사람주의[眞人主義]로 세계 역사를 창조해 나갈 때 과학문명의 노예로 전락한 인류를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참사람은 대자연도 자기생명체로 여겨 잘 보호하고 사랑하며, 인간끼리도 자비심으로 화합해 서로 협조하고, 세계역사도 투쟁이 아니라 평화적으로 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래는 인간주의가 아닌 참사람주의로 이룩해야 합니다. 멸망하게 된 인류를 구제하고 인류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세계역사를 창조합시다.

끝으로 참사람의 일구(一句)를 말하겠습니다.

 천하가 크게 어지럽고 인류는 위태로움이라
 참사람의 정도로 중생을 구제할지니라.
 몸은 뜬구름 같고 마음은 청풍이라
 세계평화는 만세토록 영원할지어다.
 억!
 천하대란인류위(天下大亂人類危)라
 진인정도제중생(眞人正道濟衆生)하라.
 신사부운심청풍(身似浮雲心淸風)이라
 세계평화만세영(世界平和萬歲永)이로다.
 억[喝]!

 

무딘 도끼를 달라 하니 한 발을 드리우다


진제(眞際) 대선사 - 한국, 불조정맥 제79법손

[선사께서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한 번 치고 이르시다.]

 하늘과 땅은 나와 더불어 뿌리를 같이함이요,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한 몸이로다.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이요,
 만물여아동체(萬物與我同體)로다.

 봄에는 만물이 나고 여름에는 성장하고
 가을에는 거두고 겨울에는 갈무리함이로다.
 사람이 빈한하게 사는 것은 지혜가 짧기 때문이요,
 말이 야위면 털이 긺이로다.
 춘생하장추수동장(春生夏長秋收冬藏)이로다.
 인빈지단(人貧智短)이요, 마수모장(馬瘦毛長)이로다.

설사 이렇다 하여도 한 관문에 가려 있습니다.

[주장자로 법상을 또 한 번 치고 이르시다.]

 선(禪)을 선이라 하면, 똥 위에 똥을 더함이요[屎上加尖],
 선을 선이 아니라 하여도, 삼십봉을 맞음이로다[好與三十棒].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옳겠습니까?

 쇠를 녹이는 큰 솥에 정미로운 금이요,
 맑은 못에 밝은 달이로다.
 대야(大冶)에 정금(精金)이요,
 징담(澄潭)에 교월(皎月)이로다.

대중 여러분!
세세생생에 출세와 복락을 누리고자 한다면 일상생활에서 ‘참나’를 찾는 화두를 들어 오매불망 챙기고 의심을 지어가야 합니다.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이 화두를 의심하는 가운데 챙기고, 챙기는 가운데 의심해서 일념이 지속되게끔 노력하고 힘써야 합니다.
참선명상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힘을 덜 들이고 바른 깨달음을 얻는 것은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입니다. 누구라도 일상생활을 하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화두를 들면 앉은 자리에서 한 번 뛰어 부처님 지위에 이를 것입니다.
활구참선의 묘미는 일천 성인의 이마 위의 일구(一句)를 투과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에 이르러야 크게 쉬는 땅을 얻어 일천 성인과 더불어 어깨를 겨눌 수 있으며 미래제가 다하도록 대열반의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활구참선으로 대오견성(大悟見性)하면 수억만 년 동안 수천 생을 잉태되고 나오더라도 밝은 안목을 잃어버리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수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대중도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최상의 지혜를 계발하는 참선법을 바르게 참구하여 큰 지혜를 증득하고, 나고 날 적마다 출세와 복락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옛적에 석두희천(石頭希遷) 스님이 육조(六祖) 선사의 적자인 청원행사(靑原行思) 선사 회상에서 선사님을 수십 년간 좌우에서 시봉하며 정진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청원 선사께서 석두 스님을 불러 서신을 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남악회양(南岳懷讓) 선사께 서신을 전하고 오면 무딘 도끼를 주어 분가(分家)하여 다른 산중에 머물게 하리라.”
그러니 석두 스님이 회양 선사 처소에 이르러, 선사께 예를 갖춰 삼배를 올리고는 대뜸 물었습니다.
“위로는 모든 부처님도 섬기지 않고 자기의 영(靈)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때에 어떠합니까?”
그러자 회양 선사께서 되물으셨습니다.
“그대는 어째서 가장 고준한 향상의 진리[向上事]만 묻고, 향하의 진리[向下事]는 묻지 않는고?”
“저는 수억만 년 동안 나고 죽는 바다에 잠길지언정 모든 성인의 해탈법(解脫法)은 구하지 않습니다.”
석두 스님이 이렇게 답하니 회양 선사께서는 그냥 돌아앉아 버리셨습니다.

산승이 만약 당시의 회양 선사였다면, 그냥 돌아앉지 않고 이렇게 한마디 말을 던지겠습니다.

“고준한 선객이여, 판자를 짊어지고 천하를 다녀보게!”

회양 선사께서 돌아앉으시니 석두 스님은 즉시 절로 돌아와서 청원 선사께 예를 올리고 보고를 드렸습니다.
“다녀왔습니다.”
“서신은 잘 전하였느냐?”
“서신도 전하지 못하고, 신(信)도 통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청원 선사께 말씀드리고는 곧장 다시 청하였습니다.
“선사님께서 ‘심부름을 다녀오면 무딘 도끼를 주어서 다른 산에 머물게 하리라’ 하셨는데, 그 도끼를 주십시오.”
이에 청원 선사께서 한 발을 드리우시니 석두 스님이 예배하였습니다.

대중 여러분!
“무딘 도끼를 주십시오” 하는데 어찌하여 한 발을 드리웠습니까? 여기에 분명히 아는 이가 있으면 이 주장자를 그 사람에게 부치겠습니다. 대중은 청원 선사와 석두 선사를 아시겠습니까?

[한참을 계시다가 대중이 말이 없으니 이르시다.]

 향상의 진리와 향하의 진리를 마음대로 써야만
 하늘세계와 인간세계에 짝할 자 없음이로다.
 향상향하자재용(向上向下自在用)하야사
 천상인간무등필(天上人間無等匹)이로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내려오시다.]

 

법거량


【질문자 1】
질문= 오늘 법회가 무슨 법회입니까?
진제= 허물이 만천하에 가득하다.
질문= 개구즉착(開口卽錯)이오. 입을 연즉 그르쳤습니다. 내려오시오!
진제= 차나 한 잔 드시오!
질문= 내려오시오!
진제= 억! [일할(一喝)하시다.]

【질문자 2】
질문= 제가 ‘임제 선사의 사빈주(四賓主)’에 대해 묻겠습니다. 어떠한 것이 ‘임제사빈주’ 가운데 주중주(主中主)의 도리입니까?
진제= 구중궁궐에 앉으니 일천 부처님도 보기가 어려움이로다.
질문= 어떠한 것이 주중빈(主中賓)입니까?
진제= 만 리의 강 위에 흰 갈매기가 훨훨 낢이로다.
질문= 빈주(賓主)의 떨어져 있는 거리는 얼마나 됩니까?
진제= 밝은 달이 비치니 맑은 바람이 붊이로다.
질문= 스님 수중(手中)의 주장자는 어디로 좇아 왔습니까?
진제= 옳지 못하고 옳지 못하도다[不是不是]!
질문= 필경 그 주장자는 어디에 안심입명(安心立命) 합니까?
진제= 구구(九九)는 삼십육(三十六)이로다.

【질문자 3】
질문= 조주 사미가 처음 남전 선사를 친견하였을 당시에 만약 선사님께서 조주 사미를 대신하였다면, 남전 선사께서 “상서로운 상(相)을 봤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한마디 하시겠습니까?
진제= 산승이 만약 당시에 조주 사미가 되었던들, 동쪽에서 몇 걸음 걸어 서쪽에 섰다가 다시 서쪽에서 몇 걸음 걸어 동쪽에 서리라.
질문= 어떠한 것이 향상(向上)의 진리입니까?
진제= 만 리(萬里)에 기골퇴(起骨堆)라. 만 리에 백골이 즐비함이로다.
질문= 그러면 향하(向下)의 진리는 어떤 것입니까?
진제= 대지의 산과 물이로다.

【질문자 4】
질문= 스님께서 지금까지 하신 말씀의 소리는 어디에 담았습니까?
진제= 한 마디도 담은 바가 없도다.
질문= 그 소리가 어디서 옵니까?
진제= 한 바가 없는데 온 바가 있겠는가?
질문= 지금 오고 있는 그 소리는 어디서 오고 있습니까?
진제= 억! [일할(一喝) 하시다.]
질문= 끝도 없는 무변한 광야에 시간세월 또한 한량없습니다. 그 가운데 흔적도 없는 나는 무(無)입니다. 소리가 없는 자리에서 소리가 오고 그 소리를 만들어 쓰는 사람에 따라서 각기 만들어 써버리는데, 그 본래 소리를 말씀해 주십시오.
진제= 쿵!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다.]

【질문자 5】
질문= 부처와 중생과 마음, 이 셋이 차별이 없다 했는데 스님께서는 어떻게 증명하시겠습니까?
진제= 차별이 없다 해도 삼십 방을 맞아야 해!
질문= 예?
진제= 차별이 없다 해도 삼십 방을 맞아야 해!
질문= 스님께서 저에게 질문해주십시오.
진제= 남전 선사의 고양이 법문에 조주 선사께서 머리에 신짝을 이고 나간 뜻을 한번 일러 보시오.
질문= [선사님께 큰절로 삼배를 올리다.]
진제= 옳지 못하고, 옳지 못하도다!

 

인성을 끌어올려 불성으로 돌아가자


정혜(淨慧) 대선사 - 중국 임제종ㆍ운문종의 법사자

이곳에서 불법(佛法)을 강연하는 인연을 갖게 된 것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지 교류, 소통의 기회일 뿐만 아니라 배우고 가르침을 청하는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강연할 제목은 ‘인성을 끌어올려 불성으로 돌아가자’ 입니다. 다섯 개 방면으로 간략히 설명할까 하며 동시에 참석하신 대덕 여러분의 가르침을 바랍니다.


본(本)과 말(末)

현대의 세계는, 과학기술의 진보가 빠르지 않다고 말할 수 없고, 대중의 물질생활이 풍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그에 맞게 더욱 화락(和樂)하고 즐겁게 되지 않았으며(이혼, 자살, 색정(色情)의 거래, 정신병 등), 사회는 그에 맞게 더욱 상서롭고 화합되지 않았으며(살인, 마약 흡입, 범죄 집단, 테러행위 등), 세계는 그에 맞게 더욱 평화롭게 되지 않았습니다(민족 간 갈등, 지역 간 충돌, 종교분쟁, 군비경쟁 등). 요컨대 종종의 비화합, 비안정적인 요소가 여전히 존재하고, 심지어 이전에 비해 더욱 복잡하고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개인의 즐거움, 사회의 상서롭고 화합함, 인류의 평화는 외재적인 물질수단에만 의거해서는 해결할 수 없고, 인류는 반드시 자기에게 돌아가 구(救)해야 하고, 자기의 마음에 대한 개조(改造)를 강화해야 함을 설명해줍니다. 사람의 마음이 평온하지 않으면 세계가 평온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즐거움과 지속적인 평화는 사람의 내심(內心)의 무주(無住)ㆍ무아(無我), 사람과 사람간의 화합ㆍ평등ㆍ관용의 정신에서 오기 때문에 개인의 마음 수양을 강화하는 데서부터 실현해 나가야 합니다.

《대학(大學)》에서 말하기를, “옛날의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려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려는 자는 먼저 그 가정을 가지런히 하고, 그 가정을 가지런히 하려는 자는 먼저 그 몸을 닦고, 그 몸을 닦으려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려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참되게 하고, 그 뜻을 참되게 하려는 자는 먼저 그 앎에 이르고, 앎에 이름은 격물(格物, 사물을 연구함)에 있다. 사물 연구 후에 앎에 이르고, 앎에 이른 후에 뜻이 참되며, 뜻이 참된 후에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른 후에 몸이 닦아지며, 몸이 닦아진 후에 가정이 가지런하게 되고, 가정이 가지런해진 후에 나라가 다스려지며, 나라가 다스려진 후에 천하가 태평해진다. 천자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몸을 닦음을 근본으로 한다. 그 근본이 어지러운데 지말(枝末)을 다스리는 것은 안 된다” 라고 했습니다.

이 단락의 말은 아주 적절합니다. “사물을 연구하고[格物], 앎에 이르르며[致知], 뜻을 참되게 하고[誠意], 마음을 바르게 하여[正心], 몸을 닦는다[修身]” 라고 하는 이 큰 근본을 파악하여 근본이 서니 개인이 자연히 기쁘고 즐거우며, 사람 간의 교제가 자연히 친근해지고, 사회가 자연히 상서롭고 화합하며, 세계가 자연히 평화롭게 됩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과거에 우리는 지말에 힘을 많이 쏟고, 근본에는 오히려 배려를 너무 못했습니다. “근본이 어지러운데 지말을 다스리는 것은 안 된다” 라는 이 말은 정말 한 마디로써 핵심을 찌른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지러운데 어찌 가정, 사회와 세계가 어지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현전(現前)하는 한 생각 마음

근본을 다스리는 것은 곧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는가? 이 문제에서 불교는 우리에게 온전히 원만한 사상과 수행체계를 제공합니다. 불교는 관용적이고 평화를 열렬히 사랑하는 종교이며, 그 평등과 자비정신을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어 보이신 사람의 마음을 정화하는 이론은, 탐ㆍ진ㆍ치 삼독(貪ㆍ瞋ㆍ癡 三毒)의 바다에 빠져 있는 현대인에게 틀림없이 하나의 훌륭한 해독제입니다.
불교는 우리 중생의 현전(現前)하는 한 생각 마음은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하며, 선(善)도 아니고 악(惡)도 아니고,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나, 무한한 묘용(妙用)이 있어 십법계(十法界)를 구족하고, 선도 행할 수 있고 악도 행할 수 있으며, 극락을 나투기도 하고 지옥을 나투기도 한다고 봅니다.
중생의 윤회가 이 한 마음에서 일어나고, 모든 부처님의 해탈 역시 이 한 마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계는 무슨 외재하는 신비한 힘이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고, 완전히 우리의 현전하는 한 생각 마음이 업에 따라 나투어낸 것입니다. 이른바 “마음이 깨끗한즉 불토(佛土)가 깨끗하고, 마음이 더러운즉 국토가 더럽다”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도리입니다.
삼라만상(森羅萬象)과 인생백태(人生百態), 그 아름다움과 추함, 깨끗함과 더러움, 화와 복, 궁함과 통함, 장수(長壽)와 요절(夭折) 모두 우리의 현전하는 한 생각 마음에 매여 있고, 이 때문에 현전하는 한 생각 마음을 잡아 쥐고 선용(善用)하는 것은 그 뜻이 아주 중대합니다. 사회가 어지러워지느냐 안정되느냐, 세계가 전쟁이냐 평화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현전하는 이 한 생각 사이에 있습니다.


중생성(衆生性)

우리의 현전하는 한 생각 마음은 무명(無明, 스스로 깨닫지 못함, 스스로 주관하지 못함) 상태에 처했을 때 우리 내심(內心)에 잠재하는 가지가지 좋지 않은 습기(習氣)와 외부 경계를 따라 휘둘려서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ㆍ교만 등의 번뇌를 일으키고, 살생ㆍ도둑질ㆍ음행ㆍ거짓말 등의 악업을 짓습니다. 이것이 곧 마음속의 중생성(衆生性)이 나타난 것입니다.
중생성은 중생의 깨닫지 못함(‘만법(萬法)이 오직 마음’이라는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에 연유합니다. 중생의 현전하는 한 생각의 마음(여래장(如來藏)이라고도 하고 자성(自性)이라고도 함)은 습기, 업력의 작용 아래 인연을 따라 가지가지 선악의 내외경계를 나투어내는데, 이러한 경계(우리의 신체와 처한 사회환경, 자연환경 포함)는 본질상 일종의 가유(假有, ‘의타기상(依他起相)’이라고 함)입니다. 중생은 이 도리를 알지 못하여 외재(外在)하는 실유(實有)로 착각하고, 이 기초 위에 명상(名相)을 세우고, 가지가지의 분별과 집착을 일으키는데, 실제로 중생이 분별하고 집착하는 이러한 명상개념(‘인아상(人我相)’과 ‘법아상(法我相)’을 벗어나지 않음)은 완전히 허망전도(虛妄顚倒)의 산물로, 일종의 망유(妄有,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고 함)입니다.
중생성의 핵심은 바로 인아집(人我執)과 법아집(法我執), 즉 명상개념이 실재성이 있다고 보고, 실재하는 나와 실재하는 법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사람의 일체의 번뇌(탐욕, 진에, 우치, 교만, 괴롭힘, 질투, 의심, 사견, 공포, 절망 등등)와 갖가지 나쁜 행위(살생, 도둑질, 사음, 거짓말, 마약흡입, 양설, 악구 등등)는 모두 이 아(我)ㆍ법(法) 이집(二執)이 책동을 부리는 것이라고 봅니다.
현실 생활 중에 중생성은 종종 다음과 같은 몇 개의 방면으로 나타납니다.
① 아애(我愛, 자기사랑): 일체를 자기를 중심으로 하고, 이기적이며,
② 아만(我慢): 자기가 남보다 우월하며, 남은 모두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기고 얕잡아 보며,
③ 외향적인 확장사유: 환경과 충돌이 발생한 때, 외재하는 물질수단을 통하여 타인과 자연을 정복하고, 더욱 많은 물질적 부와 명예를 움켜잡아 최대한도로 자기의 욕심을 충족시키되, 자기 마음을 조절하여 스스로 환경에 적응하고 환경과 화합을 유지하려고 하지 않으며,
④ 괴롭힘과 공포: 환경이 자기가 원하는 바와 같이 될 수 없을 때는 곧 괴롭힐 마음을 내고, 심지어 폭력에 호소합니다. 자기의 역량이 환경에 대처하기에 부족할 때는 공포의 심리를 낳습니다.
중생성의 가장 주요한 특징은 출생과 더불어 곧 일체처에 두루한 이기심, 분별력, 집착심, 밖을 향하여 추구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따라서 평등심, 관용과 자비심은 드러나 발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세히 한번 반성해보면, 인류의 일체의 고통과 화란은 작게는 개인 한 몸의 번뇌에서 크게는 자연환경의 파괴, 사회환경의 악화, 세계 형세의 긴장에 이르기까지 사람 내심의 아, 법 이집에 연원(淵源)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개인은 잠시 논하지 않고, 국가ㆍ민족과 문화ㆍ종교에 대해서만 말해보겠습니다. 국가ㆍ민족과 문화ㆍ종교는 모두 개체를 떠날 수 없는데, 개체의 아ㆍ법 이집에서 출발하는 한 국가ㆍ민족과 문화ㆍ종교도 곧 필연적으로 ‘아애, 아만’을 나타내게 됩니다.
‘국가와 민족의 아애, 아만’의 가장 전형적인 표출이 바로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인데, 예를 들면 어떤 민족과 국가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과 국가이니 마땅히 세계의 주인이 되어야 하고, 기타 민족과 국가는 곧 무조건 복종하거나 정복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문화의 아만과 종교의 아만’은 곧 문화의 배타성과 종교의 유아독존으로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어떤 민족의 문화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화이니 마땅히 세계의 주도문화가 되어야 하고, 기타 민족문화는 이에 동화되고 개조되어야 하며 심지어 소멸되어야 한다고 내놓고 말하는 것을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또 예컨대 어떤 종교가 우주의 진정한 유일의 진리이니 마땅히 전 인류의 신앙이 되어야 하고, 기타 종교는 모두 마설(魔說)이니 마땅히 폐지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주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현대세계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충돌 중 어느 하나가 민족, 국가, 문화 내지 종교의 아애, 아만과 연계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요컨대 우리의 현전하는 한 생각 마음 중의 중생성이 철저히 바뀌지 않는 한 개인은 진정한 행복이 있을 수 없고, 사회는 진정한 안정이 있을 수 없고, 세계는 진정한 지속적인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불성

현전하는 한 생각 마음은 중생이 될 수도 있고, 부처를 이루고 조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중생에게 육도(六道) 중에 윤회하게 하는 중생성이,  현전하는 한 생각 마음의 오염된 용(用)이고, 무명(無明)의 용이라고 한다면, 중생에게 고해를 벗어나 구경의 해탈을 얻게 하는 불성(佛性)은 곧 현전하는 한 생각 마음의 청정한 용이고, 깨달음의 용입니다. 양자(兩者)는 체(體)가 같고 용(用)이 다르나, 서로 관계없이 병립하는 두 개의 정신실체는 아닙니다.
중생성과 반대로 불성은 주로 현전하는 한 생각 마음이 무명을 깨뜨려 없애고, 아ㆍ법 이집을 멀리 떠나며, 제법의 실상을 깨닫는 청정기능을 갖추는 것으로 구현됩니다. 그 주된 표출은 아래와 같은 몇 개의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① 깨달음: 청정심으로부터 생기는 반야지혜는 능히 만법이 유심(唯心)이며, 인연으로 생하고 자성이 없는 실상(實相, 원성실상(圓成實相)이라고 함)을 증득하여 알고, 명상 개념 등 허망분별을 멀리 떠나며, 생각생각에 깨닫고, 생각생각에 자주(自主)하며, 눈앞의 가유의 현상에 미혹되지 아니하고, 처하는 곳을 따라 주체가 되고, 선 곳이 모두 참됩니다.
② 무주(無住): 인아집과 법아집을 멀리 떠나는 것은 곧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ㆍ인상ㆍ중생상ㆍ수자상(壽者相)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상에 머물지 않음’ 으로, 곧 영원히 탐, 진, 치, 교만 등의 번뇌를 끊고, 심신이 궁극적으로 청정하며, 대자재를 얻습니다.
③ 평등: 미워하고 사랑함을 멀리 떠나고, 마음에 교만이 없으며, 취하고 버림도 없고, 고하(高下)와 우열의 나눔도 없으며, 일체를 동등하게 봅니다.
④ 자비: 까닭 없는 큰 사랑이고, 일체를 한 몸으로 보는 큰 사랑이며, ‘나’가 없고 남을 이롭게 합니다.
불성은 온갖 선(善)이 함께 돌아가는 것이고, 우리의 진정한 ‘자아’이며, 또한 우리의 진정한 귀의처로 선종에서는 ‘무위진인(無位眞人)’,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 합니다. 불성은 중생 해탈의 근본이기도 하고, 인간정토를 건립하는 최후 근거이기도 합니다. 불성을 등지고는 개인이 얻을 수 있는 해탈이 없으며, 사회 역시 말할 만한 평화가 없습니다.


불법으로 인성을 끌어올림

현전하는 한 생각 마음은 중생이 되는 공능(功能)을 갖고 있고, 또한 불과(佛果)를 성취하는 공능[佛性]도 갖고 있습니다. 중생성은 비록 시작이 없고, 뿌리가 없으며, 성품이 공하여 무상(無相)하지만 반야지혜를 깨달아 비춤과 전화(轉化, 바뀜)를 거치지 않는다면 저절로 멈추지는 않으며, 마치 폭포수의 흐름과 같이 틈새 없이 이어지고 끊임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불성은 사람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고 불생불멸하나, 자각적으로 실증(實證)하지 않으면, 그 평등, 무주와 자비이타의 묘용과 공덕도 자연히 현전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불교의 ‘십법계(十法界)’의 각도에서 볼 것 같으면, 인도(人道)는 단지 육도의 하나로 아직 생사의 범위 내에 있고, 따라서 이른바 ‘인성(人性)’은 위에서 기술한 ‘중생성’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여 중생성의 가지가지 번뇌와 결함을 갖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인성은 하나의 완전한 궁극적 개념이 아니므로 더 나아가 전화하고 끌어올려야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정식(情識)을 바꾸어 지혜를 이루고, 범부(凡夫)를 바꾸어 성인(聖人)을 이루고, 생사를 바꾸어 열반(涅槃)이 되게 하고, 번뇌(煩惱)를 바꾸어 보리(菩提)가 되게 한다” 라는 것은 바로 이 뜻입니다.
따라서 자각적으로 불법으로써 자기 마음을 정화하는 이 과정은 개인의 행복과 인류의 평화라는 차원에서 모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불법전체가 바로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이 주제를 둘러싸고 전개됩니다.

중국에서 저는 늘 네 마디의 말로써 불교 정신을 개괄합니다. 그것은 “불ㆍ법ㆍ승 삼보(佛ㆍ法ㆍ僧 三寶)에 귀의하고, 계ㆍ정ㆍ혜 삼학(戒ㆍ定ㆍ慧 三學)을 부지런히 닦으며, 탐ㆍ진ㆍ치 삼독(貪ㆍ瞋ㆍ癡 三毒)을 멸하고, 신ㆍ구ㆍ의 삼업(身ㆍ口ㆍ意 三業)을 정화한다” 라는 것입니다. 이 네 마디 말은 동시에 마음을 정화하고, 인성을 제고(提高)하는 착수처(着手處)를 명확히 가리켜줍니다.
그 밖에 저는 또 늘 “자기의 소질을 향상해 자타관계를 조화롭게 한다”는 이 한 구절로 불법을 배우는 요점을 제시합니다. 이른바 자기 소질을 향상한다는 것은 자기 마음을 정화하고 인격을 아름답게 하며, 자기의 지혜를 훌륭하게 하고 역량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자타관계를 조화롭게 한다는 것은 불법의 지혜로써 가정관계, 교제관계, 단체관계, 민족관계, 국가관계, 종교관계 내지 사람과 자연의 관계 등을 잘 처리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소질을 향상하는 것은 자타관계를 조화롭게 하는 전제입니다. 자기의 탐·진·치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자타관계는 진정한 화합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총괄하면, 외재적인 평화는 내재하는 마음의 평화를 전제로 합니다. 마음의 평화가 없고서는 외재적인 평화는 반드시 오래갈 수 없습니다. 내재적인 평화는 우리의 지금 당장의 한 생각을 잘 잡아 쥐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인류가 새 세기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된 지금 가지가지의 형적(形迹), 전쟁과 평화는 여전히 사람들이 당면한 시대적인 ‘기로’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어떻게 하면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보호하느냐는 정치가들이 관심을 가지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 개개인의 절실한 이익과 직결됩니다. 이 문제에서 부처님은 우리를 위해 아주 많은 가르침을 남겨 놓으셨고, 우리 모두 신수봉행(信受奉行)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법거량】

질문= 옳다 해도 맞지 않고 그르다 해도 맞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참진리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정혜= 억[喝]!
질문= 지금 ‘할(喝)’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정혜 대선사는 이미 법상을 내려가고 있었다.]

 

심인법을 선양하여 인간성을 회복하자


종현(宗玄) 대선사 - 일본 임제종의 법사자

심인법선양, 인간성회복, 세계평화, 남북평화통일성취

우선 오늘 여기 해운정사에서 조사선(祖師禪)의 초조(初祖)인 보리달마(菩提達磨) 대사와 임제혜조(臨濟慧照) 선사의 법을 이은 중국, 한국 그리고 일본이 함께하여 국제무차선법회를 개최하게 된 데 대해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아직 젊은이로, 일본 남부에 있는 큐슈 후쿠오카 켄 하카다에 있는 수우후쿠지[崇福寺]에서 참가하게 된 우사미 소우겐[宇佐見宗玄]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렇게 귀중한 시간을 주셨으니 《벽암록》에서 조금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운문 선사께서 수시(垂示)하셨습니다.
“15일 이전의 일은 묻지 않거니와, 15일 이후의 일에 대해 한 마디 일러보라.”
그리고 스스로 대답하셨습니다.
“날마다 좋은 날이니라.”
(本則) 雲門垂語云, 十五日已前不問汝, 十五日已後道將一句來, 自代云, 日日是好日
- 《벽암록》 제6칙, 운문(雲門) 15일

법당에 대중이 가득 모인 어느 날, 그때도 오늘과 같은 설법이 행하여진 법석이 있었습니다. 많은 대중들에게 운문(雲門) 스님이라는 분이 법상(法床)에서 물었습니다. 때마침 밤에 보름달을 볼 수 있는 날이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날그날 지내면서 자신들의 힘이 부족하거나 해서 실패도 수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와의 사이에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동안 수많은 폐를 끼치기도 했을 것입니다. 지나간 모든 일은 묻지 않겠습니다. 오늘부터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면 옳겠습니까?”
운문 스님이 물음을 던졌는데 갑작스러운 물음에 누구 한 사람 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운문 스님은 많은 대중들을 향해 일렀습니다.
“날마다 좋은 날이니라.”
그런데 오늘의 주제인 ‘심인법선양(心印法宣揚) 인간성회복 세계평화 남북평화통일성취’와 운문 선사께서 말씀하신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은 공통의 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만민화락(萬民和樂)의 극락정토는 어디에 있을까요? 조용히 호흡을 고르면 보입니다. 지금 이 장소에서 가지런히 맞추어 심호흡을 되풀이합시다. 천천히 크게 합시다.
중국어로 一(이), 二(얼), 三(싼)
한국어로 一(일), 二(이), 三(삼)
일본어로 一(이찌), 二(니), 三(산)
눈을 감고 한 번 더,
중국어로 一, 二, 三
한국어로 一, 二, 三
일본어로 一, 二, 三
극락정토는 지금 이 장소에 역연(歷然)하게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웃는 얼굴로 부드러운 말을 쓰고 서로 손을 맞잡는다면, 먼 옛날 선조님들께 받았던 있는 그대로의 우리가 부처님과 똑같은 청정법신(淸淨法身)인 것입니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남기지 않고 모든 사람이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이 대법회를, 이곳 해운정사 금모선원의 조실로 계시는 진제 좌주(座主=法主) 큰스님께서 많은 열성을 기울여 개최해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차선대법회에 참석해주신 모든 사람은 우리가 의지해야 할 대선지식이요 최장로(最長老)이신 백양사 방장 서옹 큰스님, 중국 불교회 부회장 백림사 주지 정혜 큰스님, 그리고 이곳 해운정사 진제 좌주(座主) 큰스님의 발자취를 우러러 받들어 정진해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러한 자리에 저와 같이 젊은 사람에게 귀중한 기회를 내려주신 전 묘심사파(妙心寺派) 관장(管長) 마쯔야마 칸에[松山寬惠] 큰스님, 현 묘심사파 관장 니시카타 기호[西片義保] 큰스님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일본에서 참가해 주신 20여 명의 동료 여러분들께서도 틀림없이 크나큰 감동을 맛본 행사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대회에 다리를 놓아주신 일본 오사카 보엄사(寶嚴寺) 주지 노리타케 코우토쿠[法岳光德] 화상 그리고 오늘 설법한 원고를 한국어로 번역해준 법념 비구니 스님에게도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서투른 제 말을 끝까지 열심히 들어주시고 자리를 같이해주신 여러분에게 마음속 깊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법거량】

질문= 깊은 잠에 빠졌을 때는 마음을 어떻게 챙깁니까?
종현= 언제 어디서나 누구라도 평상심으로 ‘이것이다!’ 라고 하면 됩니다.

 

 

石人은 물을 긷고 木女는 꽃을 따네

 

 

부처님의 깨달은 살림살이


[선사께서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다.]

모든 출가 수행자는 어떻게 하면 부끄러움 없이 멋지게 회향하고, 죽음에 다다라서도 환희심으로 이 몸뚱이를 벗을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중놀이를 해야 합니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중노릇을 한다면 뜬구름에 불과한 삶을 살다 가게 됩니다.
그러자면 부처님은 왜 출가하게 되셨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카필라성 태자로 태어나셨지만, 왜 인간은 생노병사를 해결할 수 없는가라는 의심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침내 부귀공명을 박차고 나와 설산에 들어가서 참된 고행의 길을 걸으신 것입니다. 수행자들이 고행을 많이 하지만 헛된 고행은 아무 쓸 곳이 없습니다.
인생은 왜 생노병사가 있으며, 이를 면하는 길은 없는가?
도대체 ‘나’라는 존재는 어떤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설산에서 6년 동안 혼신의 정진을 다하셨으며, 그 정진 끝에 일념삼매가 지속되어 6년이 흐르는 동안 새가 머리에 집을 지어도 모르셨습니다. 중생은 먹어야만 사는 줄 알지만 선정 가운데 고요한 삼매를 누리면 먹는 것과 무관하게 됩니다.
그렇게 6년이 흘러가는 줄 모르고 삼매 가운데 있다가 12월 8일 동쪽 하늘에 샛별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대오견성하셨으니, 비로소 자기 존재를 알게 되신 것입니다. 알고 보니 생로병사는 허깨비로, 본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삼칠일간 깊이 생각하고 생각해보아도 법을 설하는 것이 법을 설하지 않고 열반에 드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후 맨 처음 하신 말씀입니다. 진리에 세계는 언설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문수보살이 옆에서 듣고는 간청하였습니다.
“부처님이시여, 깨달으신 법은 비록 그러하오나 방편이 있으니 하근기의 중생을 위해서 삼승(三乘)에 물러나 옅은 법을 설하여 주옵소서.”
“그대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리하여 삼승으로 물러나서 49년간 인연에 따라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법을 설하신 것입니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대중을 위해 법상에 올라 좌정해 계시는데, 문수보살이 대중 가운데 나와서 예를 갖춰 삼배를 올리고 말하였습니다.
“법왕의 법(法王法)을 자세히 보니, 법왕의 법이 이와 같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즉시 법상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이처럼 오직 부처님 같은 진리의 눈을 갖춘 자만이 문수보살의 뜻을 바로 알지, 천하의 영웅이나 예수, 소크라테스, 공자와 같은 성인도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성자 중에 성자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간 가지가지의 법을 설하시다가 열반에 드실 즈음, 하루는 법을 설하기 위해 좌정해 계시는데 제석천왕이 부처님께 우담바라 꽃을 올리니, 부처님께서 이 꽃을 들어 대중에게 말없이 보이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가섭 존자가 빙긋이 웃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른 깨달음의 눈, 열반의 깊고 묘한 진리[正法眼藏 涅槃妙心]를 마하가섭에게 부촉한다.”
꽃을 든 뜻을 1,200대중이 아무도 몰랐지만 오직 가섭 존자만이 그 뜻을 안 것입니다.

또 하루는 모든 대중이 법문을 듣기 위해 좌정하고 있는데, 부처님께서 가섭 존자가 맨 나중에 들어오는 것을 보시고 자리를 반쯤 비켜 앉으시니, 가섭 존자가 그 뜻을 알고 올라가서 그 자리에 같이 앉았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가섭 존자와 가사를 같이 두르고 앉아 이 모습을 말없이 대중에게 보이셨습니다. 꽃을 들어 보이고 자리를 나눠 앉은 이것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살림살이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즈음이었습니다. 수십 리를 걸어오다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사라쌍수(두 그루의 사라나무) 앞에 이르렀습니다.
“내가 여기에서 열반에 들리니, 가사를 네 겹으로 깔아다오.”
부처님께서는 누워 열반에 드실 준비를 하시자 사부대중은 몹시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슬퍼하지 말라. 모든 대중이 진리에 의지해서 닦고 닦으면, 모든 적멸의 불국토에 편안히 안주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후 옆으로 누워 열반에 드시니, 국왕이 부처님을 칠촌 두께의 금관에 모셨습니다. 그 당시 가섭 존자가 먼 지역에서 교화를 펴다가 부처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일주일 만에 당도하여 합장하고 관을 세 바퀴 돌고는 말했습니다.
“삼계의 큰 스승이며 모든 생명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신 부처님이시여. 항상 모든 대중에게 법문하시기를 ‘생사가 본래 없다’고 하셨는데 왜 이렇게 가셨습니까? 이렇게 가신 것은 49년 설법이 모든 인류를 기만한 것이 아닙니까?”
이에 부처님께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밀어 보이셨는데, 가섭 존자가 합장 예배를 하니 부처님께서 발을 안으로 거두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왜 두 발을 관 밖으로 내미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의 법문을 바로 보고, 바로 알아야만 부처님이 깨달은 세계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르면 헛된 중노릇이요, 일생 시줏밥만 소비했으니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서 혼쭐나고, 지옥과 축생에 떨어지는 처분을 받을 것입니다. 
산승이 중노릇의 목적을 이렇게 분명히 들어 말했으니, 우리 기본선원 모든 대중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정진에 정진을 더해야 합니다. 부처님과 같이 삼매에 들어가면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부처님 지위에 이르니, 이것을 견성이라고 합니다.
한 달간 선원장, 선감, 주지스님 외 칠직(七職) 스님 모두 자신의 공부를 뒤로 미루고 외호해주셨으니, 공부를 잘 해서 정안을 갖출 때 모든 빚을 다 갚고 회향을 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대장부가 대장부의 뜻을 갖추었으면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지 절집에서 정신없이 시간만 보내면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 가지 법문 외에 무수한 세월이 흘러도 천하의 여우들이 알지 못하도록 가장 어려운 최고의 법문을 설해놓으셨습니다. 세월이 흐른 미래에 지식이 발달해 각자 자기의 분별대로 해석하더라도, 사량분별로는 도저히 알지 못하는 높고 깊은 법문을 하나 베풀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법문을 마치시니 모든 대중이 각자 처소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법상 앞에 앉아 일어나지 않자 문수보살이 이 모습을 보고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모든 대중이 각자 처소로 돌아갔는데, 저 여인은 무슨 이유로 저렇게 부처님 가까이에 앉아 있습니까?”
“문수야, 저 여자가 정(定)에 들어 있는데, 네 실력으로 저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끔 해 보아라.”
문수보살은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스승으로, 그의 크나큰 법에 의지해 모두 큰 깨달음을 성취하였습니다. 이러한 문수보살이 백천 신통으로 백천 문수를 나투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면서 예경을 하고, 손가락을 튕겨도 그 여인은 정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광경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수야, 네 실력으로는 저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 하지 못하느니라. 하방세계의 사십이 국토를 지나면 망명이라는 초지보살(初地菩薩, 가장 낮은 초발심 보살의 단계)이 있는데, 그 이라야 능히 저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 하느니라.”
말이 떨어지자마자 망명 초지보살이 땅에서 솟아나와 부처님께 합장 예배를 올리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 여인이 정에 들어 있는데, 망명 네가 정에서 나오게 해보아라.”
“예!”
망명 보살이 여인 앞에 가서 손가락을 세 번 튕기니 여인이 정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면 문수보살은 과거칠불의 스승으로 온갖 신통을 나투었어도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 하지 못했는데, 망명 초지보살은 무슨 장처(長處)가 있어 손가락을 세 번 튕기는데 여인이 정에서 나왔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이처럼 화두 가운데 가장 알기 어려운 고준한 법문을 베풀어 놓으셨습니다. 부처님 이후로 인도와 중국에 무수한 도인이 출현했지만 이 법문을 식파한 이는 암두ㆍ덕산 두 도인뿐입니다. 이 견성법은 모든 부처님의 깨달은 살림법이라 다시 다른 법이 있는 게 아닙니다. 모든 도인이 이 세 가지 법문 내에서 법을 쓰셨으며, 이를 여의고 다른 법은 없으므로 견성법은 천불 만조사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대중은, 일념삼매가 지속되어 며칠이고 몇 달이고 흐르다가 홀연히 사물을 보는 찰나에 죽었다 살아나면, 모든 부처님의 살림살이인 이 법문부터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면 안 됩니다. 바르게 견성하여 바른 눈이 열리면 모든 부처님과 도인의 살림살이를 한 꼬챙이에 꿰어버리게 되는데, 성품이 천차만별이 아니라 다 똑같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살림살이를 알아야만 대장부의 활개를 칠 수 있는 것이지, 이것을 모르면 염라대왕에게 처분받아야 합니다. 그러니 기본선원 모든 대중은 천상천하에 유아독존한 대장부의 활개를 치기를 간곡히 바랄 뿐입니다.

그러면  문수보살은 과거칠불의 스승인데 무엇이 부족해서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 하지 못했으며, 망명 보살은 이제 초발심 단계의 보살인데 과연 어떠한 장처가 있어서 손가락을 세 번 튕겨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 했습니까?
여기 모인 대중은 아시겠습니까?

[한참을 계시다가 대중이 말이 없으니 스스로 답하여 이르시다.]

 바다가 마름에 마침내 바다 밑은 볼 수 있음이나
 사람은 죽어도 그 마음은 알지 못함이로다.
 해고종견저(海枯終見底)니와
 인사부지심(人死不知心)이로다.

이 마지막 한마디를 잘 간직하십시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내려오시다.]

2009년 9월 30일 기본선원 해제법어

 

덕산 선사의 탁발


[선사께서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다.]

대중이 이 주장자의 진리를 안다면,

 당당한 기운은 우뢰를 달음박질치게 하고
 늠름한 위풍은 서리와 눈을 움켜쥠과 같음이로다.
 장군의 명령 아래 초목이 빛을 잃고
 보검을 한 번 휘두르매 천리가 피바다로다.
 당당기우주뢰정(堂堂氣宇走雷霆)하고
 늠름위풍국상설(凜凜威風掬霜雪)이라
 장군영하초목변(將軍令下草木變)하고
 보검일휘천리혈(寶劍一揮千里血)이로다.

이러한 당당한 수완과 날카로운 지혜, 기상을 갖추게 된다면 조금의 막힘도 없고 걸림도 없이 자유자재하여[任運騰騰 騰騰任運] 대장부의 활개를 칠 것입니다.

옛적에 약산유엄(藥山惟儼) 선사께서 회상을 열고 계실 때, 수 개월 동안 법문을 하지 않으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하루는 대중이 법문 듣기를 간청하여 법상에 오르셨는데, 법상에 앉아 선정에 드셨다가 홀연히 법상에서 내려오셔서 조실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원주가 뒤따라가서 여쭈었습니다.
“모처럼 법상에 오르셨는데 어찌 일언반구도 법을 설하지 않고 내려오셨습니까?”
이에 약산 선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경(經)에는 경의 스승이 있고 논(論)에는 논의 스승이 있음이로다.”

여러분! 이 말의 낙처(落處)가 어디에 있습니까?
만약 이러한 법문을 알지 못한다면, 이번 동안거 석 달 동안 각자 화두를 성성하게 들어 일념이 지속되게끔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깨달음은 일념삼매(一念三昧)가 지속되어야 오는 것이라서, 선방에 앉아 혼침과 망상으로 시간을 낭비하면 삼생 육십겁(三生 六十劫)을 닦아도 견성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한국에서 제일가는 참선도량, 이 금당(金堂)에서 견성대오하게끔 노력하고 노력하십시오.
화두를 간절히 들어서 일념이 지속되면 소리를 들어도 들은 것이 아니요, 물체를 봐도 보는 것이 아니요, 앉아 있으되 밤이 지나가는지 낮이 지나가는지 모르게 됩니다. 이러한 화두삼매(話頭三昧)가 며칠 동안, 몇 달 동안 지속되는 과정이 오면 홀연히 사물을 보는 찰나, 소리를 듣는 찰나에 화두가 타파됩니다. 화두가 타파되면 백천 공안(百千 公案)이 한 꼬챙이에 다 꿰어져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안목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옛적에 덕산(德山), 암두(巖頭), 설봉(雪峰) 3부자(父子)가 있었는데, 암두 스님은 참선하여 깨달은 바도 없이 그대로 생이지지(生而知之, 태중에서 나올 적에 이미 지혜의 눈이 밝아 있는 것)이고, 설봉 스님은 1,500대중을 거느린 대선지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덕산 선사는 이같이 훌륭한 눈 밝은 두 제자의 스승이었습니다.
하루는 공양주인 설봉 스님이 덕산 선사께서 공양 시간이 되기 전에 발우를 들고 식당으로 가시는 것을 보고 여쭈었습니다.
“종도 치지 않고 북도 울리지 않았는데 발우를 가지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에 덕산 선사께서는 고개를 숙이고 조실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설봉 스님이 그 광경을 사형인 암두 스님에게 말하니, 암두 스님이 듣고는 대뜸 말하였습니다.
“덕산 노인이 말후구(末後句) 진리를 알지 못하는구나!”
그 말이 덕산 선사의 귀에 들어가자 암두 스님을 불러서 물으셨습니다.
“너는 왜 내가 말후구를 알지 못한다고 했는고?”
그 말에 암두 스님이 덕산 선사의 귀에다 대고 아무도 듣지 못하게 은밀히 속삭였습니다.
다음날 덕산 선사께서 법상에 오르시어 법문을 하셨는데 종전과 판이하게 당당하게 법문을 하셨습니다. 법문을 다 마치고 법상에서 내려오시니, 암두 스님이 덕산 선사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정말 반갑고 즐겁습니다. 스님의 법은 천하에 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3년 밖에 세상에 머물지 못합니다.”
과연 3년 뒤 덕산 선사께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 덕산선사의 탁발)’ 이 공안은 백천 공안 가운데 가장 알기 어려운 법문이어서 천하 선지식도 바로 보기 어렵습니다. 이 공안을 바로 보는 눈이 열려야 대오견성했다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 모인 대중은 아시겠습니까?

[한참을 계시다가 대중이 말이 없으니 스스로 점검하여 이르시다.]

그러면 산승이 양팔을 걷어붙이고 이 법문을 점검해 천하에 공개하겠습니다.

 한 망아지가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이니
 그 대단한 임제 선사도 백염적이 못됨이로다.
 마구답살천하인(馬駒踏殺天下人)하니
 임제미시백염적(臨濟未是白拈賊)이로다.

 * 백염적(白拈賊): 백주대낮에 교묘하게 남의 물건을 가로채는 도적.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내려오시다.]

2005년 11월 16일 동안거 전국 결제법어

 

마조 선사의 일할


[선사께서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다.]

 온전한 기틀과 큰 용(用)은 생각하고 의논하지 못하는지라.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모든 부처님과 조사도 삼천리 밖에 거꾸러짐이로다.
 뜻 기운이 있는 때에 뜻 기운을 더하고
 풍류가 없는 곳에 또한 풍류가 있게 함이로다.
 전기대용부사의(全機大用不思議)라
 삼세불조도삼천(三世佛祖倒三千)이로다.
 유의기시첨의기(有意氣時添意氣)하고
 불풍류처야풍류(不風流處也風流)로다.

풍류가 없는 곳에 풍류가 있게 한다는 것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고[殺活縱奪], 기(機)와 용(用)을 가지런히 쓰는 수완을 갖추게 되는 것[機用齊施]이니, 자재하고 멋진 풍류를 쓴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임제(臨濟)의 가풍입니다.

오늘은 병술년(丙戌年) 하안거 결제일입니다. 모든 사부대중은 이 석 달 안거 중에 ‘어떻게 하면 대오견성할 것인가’ 하는 이 뜻에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합니다. 이생에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어느 생에 또다시 이 고귀한 해탈법(解脫法)을 만나겠습니까?
우리가 부모 형제를 여의고 부처님 전에 출가한 것은 위없는 대도를 성취하기 위함이니,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이번 석 달 안거 동안에, 어떻게든 일념삼매를 이루어 대오견성하여 천불 만조사와 어깨를 겨누는 그러한 도인이 되겠다는 확신을 가지고, 거닐고 머물고 앉고 눕는 일상의 사위의(四威儀) 가운데 혼신의 정력을 쏟아 용맹정진 하십시오.

옛적에 84인의 도인 제자를 배출한 위대한 마조(馬祖) 선사 회상에 전국의 발심한 납자들이 다 모여 밤낮으로 용맹정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백장(百丈) 스님이 시자로 있었는데, 하루는 마조 선사를 모시고 산골의 들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때 못에 있던 오리들이 인기척에 놀라 푸르륵 날아가니, 이를 보시고 마조 선사께서 물으셨습니다.
“저것이 무엇인고?”
“들오리입니다.”
“어디로 날아가는고?”
“저 산 너머로 날아갑니다.”
백장 시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조 선사께서 시자의 코를 잡아 비틀었습니다.
“아야!”
시자가 아파서 소리를 지르자 마조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찌 날아갔으리오!”
이에 백장 스님이 큰 분심이 일어나 절에 돌아와서 방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는 일주일간 용맹정진하여 코를 잡아 비튼 도리를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마조 선사의 방 앞에 와서 말하였습니다.
“조실스님! 어제까지는 코가 아프더니 오늘은 코가 아프지 않습니다.”
 이에 마조 선사께서 다른 시자를 불러 운집종을 치게 하였습니다. 수백 명 대중이 다 운집하자 마조 선사께서 법상에 올라 좌정하고 계시는데, 문득 백장 스님이 앞으로 나오더니 절하는 배석자리를 둘둘 말아 어깨에 메고 나가버렸습니다. 그러자 마조 선사께서는 즉시 법상을 내려와 조실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여기에 모인 대중은 아시겠습니까?
백장 스님이 배석자리를 어깨에 메고 나간 뜻은 어디에 있으며, 마조 도인이 대중을 위해 법상에 오르셨다가, 백장 스님이 배석자리를 메고 나간 즉시 법상에서 내려와 조실방으로 돌아간 뜻은 또한 어디에 있습니까?

[한참을 계시다가 대중이 말이 없으니, 스스로 점검하여 이르시다.]

 어의(御衣, 임금이 조회 때 입는 옷)의 소매를 떨치는데 전체가 드러남이요,
 수미산이 반 허공중에 거꾸로 꽂힘이로다.
 용수불개전체현(龍袖拂開全體現)이요
 수미도탁반공중(須彌倒卓半空中)이로다.

몇 년이 흐른 뒤, 백장 스님이 다른 산중에서 지내다가 다시 마조 선사를 친견하게 되었습니다. 마조 선사께서 백장 스님이 들어오는 것을 보시고는 법상 모서리에 걸어둔 불자(拂子)를 들어 보이셨습니다. 이에 백장 스님이 물었습니다.
“이를 바로 쓰십니까, 이를 여의고 쓰십니까?”
그러자 마조 선사께서 불자를 본래 자리에 걸어두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장차 입을 열어 후학을 어떻게 지도하려는고?”
마조 선사의 물음에 백장 스님이 법상 모서리에 걸어 둔 불자를 들어 보였습니다. 이번엔 마조 선사께서 물으셨습니다.
“이를 바로 씀인가, 이를 여의고 씀인가?”
백장 스님이 불자를 본래 걸려 있던 곳에 다시 걸어두자 마조 선사께서 벽력같이 일할(一喝)을 하셨습니다.
“억[喝]!”
이 소리에 백장 스님은 3일간 귀가 먹고 모든 의식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3일 만에 귀가 뚫리니 바로 그 자리에서 대오견성하였습니다.

모든 대중은, 백장 스님이 코를 비틂에 당해서는 어떠한 진리를 깨달았으며, 마조 선사의 일할에 3일간 귀가 먹었다가 깨어나서는 어떠한 진리의 눈이 열렸는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구경법(究竟法)인 최고의 향상일구(向上一句)의 눈이 열려야 일을 다해 마친 것이지, 법신변사(法身邊事)나 여래선(如來禪)은 태산에 가려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백장 스님은 바로 두 번째 친견에서 철벽이 무너진 것입니다. 
광대무변한 진리의 세계는 도저히 혼자서는 깨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스승 없이 깨친 이는 모두 천마외도(天魔外道)’ 라고 못을 박아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조그마한 소견에 만족하지 말고 반드시 눈 밝은 선지식을 친견하여 점검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선지식께서 아니라고 점검하면 즉시 ‘알았다’ 하는 것을 다 놓고 다시 공부해야 바른 안목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마조 선사께서는 열반에 드시고, 백장 선사께서 회상을 열어 선법을 선양하고 계실 때였습니다. 어느 날, 황벽(黃檗) 스님이 백장 선사를 참배하고 하루를 머물고 나서 떠나려고 인사를 올리니 백장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는 어디를 가려는고?”
“마조 선사를 친견하러 가려 합니다.”
“마조 선사께서 열반에 드신 지 이미 몇 년이 흘렀네.”
“아! 복(福)의 인연이 엷어서 위대한 선지식을 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황벽 스님이 이처럼 한탄하고는 물었습니다.
“마조 선사께서는 평소에 어떠한 고준한 법문을 하셨습니까?”
이에 백장 선사께서는 마조 선사와의 재참인연(再參因緣, 위의 두 번째 만남)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벽력같은 마조 선사의 일할에 내가 3일간 귀가 먹었네.”
그 말을 듣고 황벽 스님이 혀를 쭉 내미니, 백장 선사께서 물으셨습니다.
“그대는 후일에 마조 선사의 법을 잇지 않겠는가?”
이에 황벽 스님이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선사님을 만남으로써 마조 선사의 큰 기틀의 작용은 보았으나 마조 선사는 친견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마조 선사의 법을 이으면 뒷날 제 자손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전기대용(全機大用)의 임제가풍을 증득하여 큰 스승[一方之師]이 되고자 한다면, 마조 선사의 ‘일할’의 낙처를 알아야 합니다. 이 마조 선사의 일할을 좇아서 백장ㆍ황벽ㆍ임제로 이어지는 임제정맥(臨濟正脈)의 가풍이 형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결제를 맞아 모인 모든 대중은 벽력같은 마조 선사의 일할의 낙처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마조 선사의 일할에 백장 선사가 3일간 귀가 먹은 그 살림살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억[喝]!

[일할하시고 내려오시다.]

2006년 5월 12일 하안거 전국 결제법어

 

복숭아꽃


[선사께서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다.]

 법의 깃발을 세우고 향상(向上)의 종지(宗旨)를 세움은
 비단 위에 꽃을 더함이요,
 가시덤불을 뚫어 지나가고
 부처님과 조사의 얽힘을 풀어 열면
 은밀한 땅을 얻으리니,
 모든 하늘 천신이 꽃을 올리려 해도 길이 없고
 외도들이 가만히 엿보려 해도 문이 없음이로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옴인고?
 건법당입향상종지(建法幢立向上宗旨)는
 금상첨화(錦上添花)요
 투과형극림(透過荊棘林)하고
 해개불조박(解開佛祖縛)하면
 득은밀전지(得隱密田地)리니
 제천봉화무로(諸天捧花無路)하고
 외도잠규무문(外道潛窺無門)이라.
 십마인(什麽人恁麽來)오.

 이 뒤에 드는 것을 보라!

오늘은 병술년(丙戌年) 동안거 결제일입니다. 모든 사부대중은 석 달 동안 용맹정진해서 자기의 이 일을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이라는 것은 생사에 자유자재하는 힘을 갖추고 역겁세월이 지나도록 진리의 낙을 수용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오매불망 간절히 뼈골에 사무치는 각자 화두를 들어 일념이 지속되도록 혼신의 정력을 다 쏟아야 합니다. 일념이 지속되는 과정이 오지 않으면 수천 수만 생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중생은 여러 겁의 생 동안 중생의 습기만 익혀왔기 때문에 큰 신심과 큰 용맹심을 내어 화두를 챙기는 가운데 의심을 쭉 밀어주고, 또 밀어주고 해서 번뇌와 망상이 들어올 틈이 없도록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게 정성껏 잡도리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익어져서 밤낮으로 화두가 흘러가다가 문득 참의심이 발동 걸리게 됩니다. 그때는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잊어버리고, 앉아 있어도 밤이 지나가는지 낮이 지나가는지 모르게 되니, 이러한 일념삼매의 과정이 와야만 홀연히 보는 찰나, 듣는 찰나에 화두가 박살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떠한 법문에도 석화전광으로 바른 답이 흉금에서 흘러나와 대장부의 활개를 치게 됩니다.

요즈음 제방에서 ‘활구(活句)’와 ‘사구(死句)’를 잘못 인식하여 그릇되게 지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화두상에 의심이 있으면 ‘활구’라 하고, 화두상에 의심이 없으면 ‘사구’라고 하니, 이는 후학들을 그릇 지도해 눈을 멀게 하는 일입니다. 눈 밝은 선지식을 의지하여 바르게 깨달아 마치면 도저히 이 같은 잘못된 견해가 나올 수 없습니다. 선법(禪法)은 있으나 바르게 지도할 스승이 없으니 참으로 슬프고 슬픈 일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활구냐?
일천 성인의 이마 위의 일구(一句)를 투과해야만 활구의 세계를 알고 활구의 눈을 갖추어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의 스승이 되는 것이고, 일천 성인의 이마 위의 일구를 투과하지 못하면 낱낱 법문에 알음알이[情解情識]의 시비분별이 항상 따라다니므로 이것을 사구라고 합니다. 
그래서 옛사람이 말씀하시기를, “활구하에 알아갈 것 같으면 불조의 스승이 됨이라” 했고, “사구하에 알아갈 것 같으면 자기도 구원하지 못한다” 했습니다. 활구와 사구의 차이가 이와 같습니다. 이렇듯 사구하에, 즉 일천 성인의 이마 위의 일구를 투과하지 못하고서 ‘알았다’ 하는 이는, 선지식께서 아니라고 하면 응당히 받아들여 다시 참구해 투과해야 옳습니다. 여기 모인 대중은 산승이 위에 지적한 이 말을 마음에 잘 새겨 바르게 참구하십시오.
겨울 석 달 안거 중에 모든 대중이 활구참선으로 대오견성하여, 주고 빼앗음에 자유자재하고[與奪自在], 죽이고 살리고 놓아주고 빼앗고[殺活縱奪], 마음의 기틀과 작용을 가지런하게 쓰는[機用齊施] 등 이러한 자재의 수완을 갖추면, 활구의 대종사가 되어 불조의 스승이 되고 인천의 스승이 될 것입니다.

2002년 10월 20일에 국내에서 열릴 국제무차선대법회를 준비하기 위해 산승이 2001년 봄에 20여 명의 비구ㆍ비구니 스님들과 같이 중국대륙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넓은 대륙에서 눈 밝은 선지식을 초빙하기 위해 선종본산(禪宗本山)의 9개 사찰을 참방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달마 대사께서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첫 번째 주석하신 중국 남단의 광덕사(廣德寺)를 방문하여 그 유래를 들은 후에, 이조사(二祖寺)를 방문하였습니다. 이조사를 방문하니 주인은 없고 몇몇 객들만 있어 그 걸음으로 다시 삼조사(三祖寺)를 방문하였습니다. 아주 넓은 대륙이라 밤 10시가 다 되어 도착했는데, 15~16명의 스님이 산문에서 마중하고 있고 방장스님도 의자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참배하고 차 대접을 받는 자리에서 산승이 방장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옛날 삼조(三祖, 僧璨) 선사께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나
 오직 간택을 꺼림이로다.
 다만 증애가 없으면
 텅 비어 명백하리라. 
 지도무난(至道無難)이나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
 단막증애(但莫憎愛)하면
 통연명백(通然明白)하리라.

라고 법문을 하셨는데, 방장스님께서는 간택이 없을 때에는 어떻게 보십니까?”
“이 신심명(信心銘)을 잘 번역해 포교에 주력하겠습니다.”
방장스님께서 이렇게 답하니 일어서서 사조사(四祖寺)로 갔습니다. 사조사에 가서 방장스님을 찾아뵙고 물었습니다.
“달마 대사께서 소림굴에서 9년 면벽(面壁)하신 것을 어떻게 보십니까?”
방장스님이 여기에 답을 못하였습니다. 그 걸음으로 다시 오조사(五祖寺)를 방문하여 참배를 마치고 공양을 마친 후 방장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옛날 오조(五祖, 弘忍) 선사께서는 때로는 점수법(漸修法)을 설하시고 때로는 돈오무생법(頓悟無生法)을 설하셨는데, 지금은 어떠한 법문을 설하십니까?”
이곳 방장스님 역시 물음에 답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 걸음으로 육조(六祖, 慧能) 선사께서 주석하셨던 보림사(寶林寺)를 방문하여 방장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육조 선사께서는 ‘본래 한 물건도 없다[本來無一物]’ 라는 법문을 자주 하셨는데,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것을 어떻게 보십니까?”
이곳 방장스님 역시 명쾌한 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운문(雲門) 선사께서 주석하셨던 운문사(雲門寺)를 방문하여 방장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옛날 운문 도인이 취암(翠巖) 선사 회상에 있을 때 취암 선사께서 해제 시에 법상에 올라 ‘석 달 동안 모든 대중을 위해 가지가지 법을 설했는데, 시회대중은 노승의 눈썹을 보았느냐?’ 하고 대중에게 물으시니, 운문 선사가 여기에 ‘관(關)’이라 답했는데, 이 ‘관’ 자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에 방장스님이 대답하였습니다.
“불조의 밀전(密傳)의 경지를 우리가 어찌 논할 수 있겠습니까?”
이같이 답하니, 그 걸음으로 나와서 임제원(臨濟院)을 방문하였습니다. 저녁예불을 마치고 방장스님과 함께 탑전을 거닐면서 산승이 한마디 말을 던졌습니다.
“절 도량에 옛 탑만 우뚝하고 임제의 가풍은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질 않는구나!”
그러나 이곳 방장스님도 역시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조주원(趙州院, 백림선원)을 방문하였습니다. 일행이 참배를 마친 후 조주원 방장스님이 일행 모두에게 차 대접을 하였는데, 응접실 벽에 ‘끽다거(喫茶去, 차 한 잔 하고 가라)’ 라는 문구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산승이 물었습니다.
“옛날 조주 선사께서는 일생토록 ‘끽다거’ 법문을 많이 하셨는데, ‘끽다거’ 법문은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에 방장스님이 찻잔을 들어 산승에게 내밀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산승이 말했습니다.
“그 차는 산승이 먹거니와 산승의 차 한 잔도 화상께서 먹어야 옳습니다!”
이렇게 아홉 군데 선종의 본산을 참방하여 각각 일구(一句)를 던졌으나 모두 빈 골짜기의 메아리였습니다. 그러나 조주원의 방장스님은 그나마 찻잔을 내미는 것을 보이기에 국제무차선대법회에 중국의 대표 선사로 초빙하고 차비와 초청장을 전달하고 돌아왔습니다.
중국은 선종의 본산국인데, 어찌 이렇게 안목이 다 메말랐겠습니까? 공산화 50년 치하에 모든 수행법이 다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일본 임제종 묘심사(妙心寺)는 오늘날까지 형식적으로 명맥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만, 우리나라 서옹 선사께서 젊은 시절에 일본 임제종의 대학에서 수료한 연고가 있으셨기에 서옹 선사의 서첩(書帖)을 가지고 일본의 임제종 총본산에 가서 초청장을 전했습니다. 이에 허락을 받아 일본 임제종의 대표로 종현 선사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동양 삼국의 대표 선사를 모시고 국제무차선대법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법문을 들어보니 중국이나 일본에 실다운 안목을 갖춘 이가 없고, 부처님의 심인법(心印法)이 오직 한 가닥 한국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사부대중은 한 가닥 밝은 부처님의 심인법이 단절되지 않고 천추만대에 면면히 이어지도록 정진에 정진을 더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옛적에 위산(潙山) 선사 회상에서 영운(靈雲) 스님이 30년간 지내면서 정진에 몰두하였는데, 어느 봄날에 복숭아꽃이 만발해 있는 것을 보고 대오견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위산 도인께 오도송을 지어 바쳤습니다.

 삼십여 년 간 진리의 보검을 찾는 객이여,
 몇 번이나 잎이 떨어지고, 몇 번이나 가지가 빼어났던고?
 이로 좇아 복숭아꽃을 한 번 본 후로
 곧 지금에 이르도록 다시 일체 법문에 의심이 없더라.
 삼십년래심검객(三十年來尋劍客)이여
 기회엽락기추지(幾廻葉落幾抽枝)오.
 자종일견도화후(玆從一見桃花后)로
 즉지여금갱불의(卽至如今更不疑)로다.

위산 도인께서 보시고는 다음과 같이 극찬하셨습니다.
“자연 인연을 좇아 깨달은 자는 만년토록 매(昧)하지 아니함이라.”
그러나 당시에 현사(玄沙) 선사께서는 그 오도송을 보시고 평을 달리하셨습니다.

 합당하고 심히 합당하나,
 나이 많은 형이 깨닫지 못한 것을 보존하고 있도다.
 제당(諦當)하고 심(甚)히 제당(諦當)함이나
 노형(老兄)이 감보미철재(堪保未徹在)로다.

위산 도인은 1,500명의 선지식으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을 하셨는데, 현사 선사는 어째서 수긍하지 않았는가?
여기 모인 대중은 아시겠습니까?

[한참을 계시다가 대중이 말이 없으니 스스로 답하여 이르시다.]

 노호가 앎을 허락하고
 노호가 앎을 허락하지 아니함이로다.
 지허노호지(只許老胡知)하고
 불허노호회(不許老胡會)로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내려오시다.]

2006년 12월 5일 동안거 전국 결제법어

 

취암 선사의 눈썹


[선사께서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다.]

 철우가 울부짖음에 하늘과 땅이 진동하고
 옥마가 소리쳐 우는 바람에 바다 묏뿌리가 달아남이로다.
 어젯밤 삼경에 해가 정오가 됨에
 영롱한 빛이 백운촌(白雲村)을 높이 비춤이로다.
 철우효후진건곤(鐵牛哮吼震乾坤)이요
 옥마시풍해악분(玉馬嘶風海岳奔)이로다.
 작야삼경일륜오(昨夜三更日輪午)에
 유휘고조백운촌(流輝高照白雲村)이로다.

여기 모인 대중 여러분!
밝고 어두운 진리의 본체, 이것을 살림살이로 삼아야 옳습니다.
오늘은 정해년 하안거 결제일입니다. 90일 동안 모든 대중은 각자 화두에 혼신의 정력을 쏟아 화두일념이 지속되게끔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이생에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어느 생에 이 고귀한 견성법(見性法)을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간절한 일념으로 뼈골에 사무치는 화두를 참구하시기 바랍니다.

옛적에 취암 선사 회상에 수백 명이 모여 정진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선사께서 법상에 올라 대중에게 멋진 법문을 하셨습니다.
“여름 석 달 안거 중에 대중을 위하여 가지가지 법문을 설했는데, 여기 모인 대중은 노승의 눈썹을 보았느냐?”
이에 운문(雲門) 선사께서 답하셨습니다.
“관(關, 빗장 관)!”
장경(長慶) 선사께서 답하셨습니다.
“남이로다[生也].”
그리고 보복전(保福展, 보복종전) 선사께서 답하셨습니다.
“도적을 짓는 사람의 마음이 허함이로다[作賊人心虛].”

여기 모인 대중은 아시겠습니까?
취암 선사의 멋진 법문에 운문 선사는 어째서 ‘관(關)!’ 이라 답하셨고, 장경 선사는 어째서 ‘남이로다’ 고 하셨으며, 보복전 선사는 어째서 ‘도적을 짓는 사람의 마음이 허하다’ 고 하셨는지. 이 세 분의 답처를 알 것 같으면 진리의 한쪽 눈[一隻眼]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필경에는 세 분 선사의 답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참 계시다가 대중이 말이 없으니 선사께서 이르시다.]

 시자야, 차를 달여 오너라.
 시자전다래(侍者煎茶來)하라.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내려오시다.]

2007년 5월 31일 하안거 전국 결제법어

 

양고기를 매달아 놓고 개고기를 팔다


[선사께서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다.]

 과거ㆍ현재ㆍ미래 삼세의 모든 부처님,
 양의 고기를 매달아 놓고 개고기를 팖이요,
 역대의 모든 천하 선지식,
 역시 양의 고기를 매달아 놓고 개고기를 팖이로다.

여기에서 분명히 알아 갈 것 같으면 일대사(一大事)를 다 마친 요사인(了事人)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양의 고기를 매달아 놓고 개고기를 파는 것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구름이 없으니 산마루가 드러나고
 밝은 달은 물결 위에 떠 있음이로다.
 무운생령상(無雲生嶺上)하고
 유월낙파심(唯月落波心)이라.

오늘은 정해년(丁亥年) 동안거 결제일입니다. 사부대중이 모여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삼동결제 석 달 안거에 들어가는 날입니다.
결제에 임하는 그 마음의 자세는 하늘을 찌를 용기가 있어야 하고, 바위와 같은 부동의 마음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자세를 갖추지 못할 것 같으면 석 달 동안 사사시주(四事施主, 거주처ㆍ음식ㆍ의복ㆍ의약품 네 가지 시주물)의 은혜를 녹일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소가 되고 말이 되어 다음 생에 갚아야 하니, 소가 되고 말이 되는 것을 면하고자 한다면 모든 대중이 각자 화두를 간절하게 챙겨서 일념이 지속되도록 혼신의 정력을 쏟아야 합니다. 일념이 지속되지 않으면 깨달음이란 불가능합니다.
이 석 달 동안 간절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화두를 챙기고 의심하고, 챙기고 의심하면, 시냇물이 밤낮으로 끊어짐 없이 흐르듯 화두가 마음속에 간절히 흘러 무르익습니다. 그러면 모든 사물을 봐도 보는 감각이 없고 모든 소리를 들어도 듣는 감각이 없게 되니, 이렇게 화두를 지어가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금당선원에는 하루 14시간 용맹정진으로 생사를 떼어놓고 공부하여 견성하고자하는 수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일념삼매에 빠지지 아니하면 대오견성은 불가능하니, 몸뚱이에 끄달리지 말고, 먹는데 끄달리지 말며, 시비장단에 끄달림이 없이, 오로지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간절히 화두일념이 지속되게끔 정진에 정진을 더하십시오.

옛적에 1,500대중을 거느리고 부처님의 심인법을 선양한 위대한 위산(潙山) 도인 문하에 앙산(仰山)ㆍ향엄(香嚴)이라는 출중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앙산 선사께서 사형인 향엄 선사께 물으셨습니다.
“사형은 요즘 깨달은 견처(見處)가 어떠하십니까?”
“한 법(法)도 마음에 합당함이 없습니다.”
“한 법도 마음에 함당함이 없다는 이것이 무엇입니까?”
앙산 선사의 이 같은 되물음에 향엄 선사께서 꽉 막혀서, 먹고 자는 것을 다 놓아버리고, 용맹정진으로 간절히 화두와 씨름하여 일주일 만에 해결해 곧장 앙산 선사를 찾아가 답하셨습니다.
“지난해의 빈한(貧寒)함은 빈한함이 아니요,
올해의 빈한함이 가장 빈한한 것이로다.
지난해의 빈한함은 송곳은 있고 송곳 꽂을 땅이 없더니,
올해의 빈한함은 송곳도 없고 송곳 꽂을 땅도 없음이로다.”
이에 앙산 선사께서 점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사형이 여래선(如來禪)은 알았지만 조사선(祖師禪)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 같은 문답의 과정에서는 부처님과 천하 도인도 전신에 땀을 흘리고, 돌사람과 철사람도 땀을 흘린다 하였습니다. 허튼소리는 아무 쓸 곳이 없고 오직 백발백중의 정곡을 찔러야만 하는 것입니다.

앙산 선사께서 ‘여래선은 알았지만 조사선은 알지 못했다’ 하니, 향엄 선사께서는 여기에 또 벙어리가 되어 삼칠일간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하여 해결해냈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곧장 앙산 선사를 찾아가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한 기틀이 있어서 눈 깜짝한 것으로써 그대에게 보이노니, 그대가 만약 알지 못하면 ‘사미승 아무개야’ 하고 부르리라.”
이에 앙산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형이 조사선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차별의 법문을 밝히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법담을 두고 제방에서는 여래선과 조사선에 차등이 있는 것으로 인식하나, 그것은 옛사람의 뜻을 잘 보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법문 문답의 골수를 바로 알아야만 부처님의 정법정안(正法正眼)을 갖출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래선과 조사선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여래선을 분명히 알 것 같으면 조사선도 분명히 아는 법이요, 조사선을 분명히 알면 여래선을 바로 아는 법입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여래선이 곧 조사선이고, 조사선이 곧 여래선입니다.
부처님의 진리 가운데는 옅은 진리인 법신변사(法身邊事), 중간의 여래선 진리, 그 위에 향상일구(向上一句)의 진리, 이렇게 세 단계의 진리가 있는데, 최고의 경지인 향상일구의 진리를 알아야만 전신자재(轉身自在, 도인이 진리의 살림살이를 자유자재하게 쓰는 일)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법신의 진리나 여래선의 진리 가지고는 도저히 우러러 바라보아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로써는 모든 불조와 도인이 설해놓은 가지가지 법문을 바로 볼 수 없고, 오직 향상일구의 눈이 열려야만 천불 만조사와 더불어 어깨를 겨눌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불교계의 ‘알았다’ 하는 이들이 법담을 나눌 때 서로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래선의 진리로 견성을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에게서 비밀히 전해 내려온 그 진리는 향상의 일구이지 여래선과 법신의 진리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최고의 관문인 향상의 일구를 투과해야만 대장부의 활개를 칠 수 있고 억만년이 다하도록 모든 부처님과 도인과 더불어 동참할 수 있으니, 이곳 금당선원의 대중은 ‘알았다’ 하는 조그마한 소견들은 다 놓아버리고 오로지 향상의 일구를 뚫어 얻는 데 목표를 삼고 정진에 몰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모인 대중은 앙산 도인과 향엄 도인의 살림살이를 아시겠습니까?

[한참 계시다가 대중이 말이 없으니 스스로 답하여 이르시다.]

 물음은 답하는 곳에 있고,
 답은 묻는 곳에 있음이로다.
 문재답처(問在答處)요,
 답재문처(答在問處)로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내려오시다.]

2007년 11월 14일 동안거 전국 결제법어

 

세 가지 법문을 전하노니


[선사께서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다.]

 한 몽둥이 휘둘러 비로정상을 거꾸러뜨리고
 벽력같은 일할로써 천만 갈등을 문대버림이로다.
 두 칸 띠 암자에 다리 펴고 누웠으니
 바다 위 맑은 바람 만년토록 새롭도다.
 일봉타도비로정(一棒打倒毘盧頂)하고
 일할말각천만측(一喝抹却千萬則)이라.
 이간모암신각와(二間茅庵伸脚臥)하니
 해상청풍만고신(海上淸風萬古新)이로다.
 
오늘은 무자년(戊子年) 하안거 결제일입니다. 모든 사부대중은 석 달 동안 용맹정진해서 자기의 이 일을 해결해야 합니다. 이 일이라는 것은 생사에 자유자재하는 힘을 갖추고 무한한 세월이 지나도록 진리의 낙을 수용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려면 일체 분별과 시비장단을 다 놓아버리고, 몸뚱이에 대한 애착도 다 놓아버리고, 오매불망 간절히 뼈골에 사무치는 각자 화두를 들어 일념이 지속되도록 혼신의 정력을 다 쏟아야 합니다. 일념이 지속되는 과정이 오지 않으면 수천 수만 생을 해도 바른 견성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고준한 견성법을 성취하려면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서 바른 지도를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일생토록 허송세월을 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무한한 세월 속에 고통받을 것이니 법문을 잘 받아들여 마음에 바른 수행법을 정립하십시오.
중생은 여러 겁의 생 동안 중생의 습기만 익혀왔기 때문에 큰 신심과 큰 용맹심을 내어, 이 철에 반드시 화두가 순일하게 되어 대오견성하리라는 확고한 신심을 가져야 합니다. 일거수일투족 성성하게 화두를 챙기는 가운데 의심을 쭉 밀어주고, 또 밀어주고 해서 번뇌와 망상이 들어올 틈이 없도록 공부하십시오.
이렇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의심으로 화두를 챙기고 의심하고, 챙기고 의심해서 일념이 지속되도록 노력하다보면 문득 보는 것, 듣는 것도 잊어버리고, 앉아 있어도 앉아 있는 줄 모르고, 밤과 낮이 지나가는 것도 모르게 됩니다. 이렇게 몇 날, 몇 달이 흐르고 흐르다가 홀연히 사물을 보는 찰나, 소리를 듣는 찰나 화두가 박살나게 되는데 이로써 모든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의 백천 공안을 한 꼬챙이에 꿰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물음이 와도 척척 바른 답을 내놓을 수 있게 되니, 모든 부처님, 모든 조사스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살림살이를 수용하여 대안락과 대자유의 분(分)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옛적에 건봉(乾峯) 선사께서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습니다.
“법신(法身)에 삼종병(三種病)과 이종광(二種光)이 있으니 모름지기 일일이 다 뚫어 지나가야만 비로소 편안하게 앉음을 알리라. 비록 이와 같더라도 다시 모름지기 조(照)와 용(用)을 동시에 쓰는 향상일구가 있는 것을 알아야만 옳도다.”
그러자 운문(雲門) 선사가 대중 가운데 나와서 물었습니다.
“암자 안의 사람이 어째서 암자 밖의 일을 보지 못합니까?”
이에 건봉 선사께서 소리 내어 크게 웃으셨습니다.
“하하하[㰤㰤大笑]!”

대중 여러분,
운문 선사가 “암자 안의 사람이 어째서 암자 밖의 일을 보지 못합니까?” 라고 말한 뜻이 어디에 있는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옛적에 취암 선사께서 해제일에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습니다.
“노승이 석 달 동안 모든 대중을 위해 가지가지 법을 설했는데, 모든 대중은 노승의 눈썹을 보았느냐?”
이에 대중 가운데서 운문 선사가 답하였습니다.
“관(關, 빗장 관)!”

이 답변에 대해 천하의 선지식들이 명답을 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그러면 운문 선사가 어째서 ‘빗장 관자(字), 관(關)’ 이라 했습니까? 이 뜻을 알아야 합니다.

옛적에 조주(趙州) 선사 회상에서 한 학인이 해제일이 되자 조실채를 찾아와서 예배를 올리고는 하직인사를 하였습니다.
“삼 개월 동안 선사님의 지도를 잘 받고 갑니다.”
그러니 조주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처 있는 곳에도 머물지 말고, 부처 없는 곳에서도 급히 달아나서 삼천 리 밖에서 사람을 만나거든 방금 한 말을 그릇 들어[擧] 말하지 말게.”
이에 학인이 말했습니다.
“그러한 즉은 가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조주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버들잎을 따고 버들잎을 땀이로다[摘楊花摘楊花].”

대중 여러분, “이러한 즉은 가지 않겠습니다” 하는데, 어째서 “버들잎을 따고 버들잎을 딴다” 했습니까?
산승이 말한 이 삼전어(三轉語, 진제 선사가 대중에게 들어 보인 위의 세 가지 법문)를 바로 보는 이가 있을 것 같으면 참학사(參學事)를 마쳐서 모든 부처님과 조사스님들과 더불어 어깨를 같이하는 안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삼전어를 모를 것 같으면 바른 견성이 아니요, 선을 지도할 바른 눈이 없어서 만 사람을 그릇 지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모인 대중 여러분!
조주 선사께서 “버들잎을 따고 버들잎을 딴다” 라고 말씀하신 그 뜻을 아시겠습니까?

[한참을 계시다가 대중이 말이 없으니 스스로 답하여 이르시다.]

 버들잎을 따고 버들잎을 땀이여,
 천리 오추마라도 따라가지 못함이로다.
 적양화적양화(摘楊花摘楊花)여
 천리오추추부득(千里烏騅追不得)이로다.

 * 오추마(烏騅馬): 초나라 항우가 탄 하루에 천 리를 간다는 준마.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내려오시다.]

2008년 5월 19일 하안거 전국 결제법어

 

임제 선사의 깨달음


[선사께서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다.]

 이 주장자 이 진리를 몇 사람이나 알꼬.
 삼세의 모든 성인도 다 알지 못함이라.
 자개주장기인지(這箇拄杖幾人知)아
 삼세제성총불식(三世諸聖摠不識)이라.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이르시다.]

 뜻 기운이 있는 때에 뜻 기운을 더하고
 풍류가 없는 곳에 풍류를 일으킴이로다.
 유의기시첨의기(有意氣時添意氣)하고
 불풍류처야풍류(不風流處也風流)로다.

오늘은 무자년(戊子年) 동안거 결제일입니다. 모든 대중이 이 석 달 동안 부끄러움 없이 아주 진실되게 각자 화두를 들고 매일같이 천번 만번 의심을 밀어붙여야 합니다. 이 간화선에서 깨달음의 열쇠는 의심에 있습니다. 의심이 없으면 깨달을 분(分)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도인이 “의심이 크면 클수록 크게 깨달음이 열린다”고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석 달은 몸뚱이에 끄달리지 말고, 먹는 데 끄달리지 말고, 모든 시비장단을 놓아버리고, 오로지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간절한 화두가 쭉 흘러가도록 정진에 몰두하십시오. 그리하면 석 달 이내에 대장부의 활개를 칠 수좌들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각자 화두를 성성하게 들어서 일념이 지속되게끔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옛적에 황벽(黃蘗) 선사 회상에서 목주(睦州) 스님이 유나(維那, 사찰에서 대중의 질서와 위의를 책임지는 소임) 소임을 보고 있을 때, 임제 스님이 삼 년동안 묵묵히 정진에 몰두하며 화두와 씨름하였습니다. 하루는 유나스님이 황벽 조실스님을 찾아가 말하였습니다.
“우리 회중에 큰 인재가 하나 와 있습니다. 장차 큰 산마루에 큰 정자나무가 되어 만 사람이 쉬어가도록 할 그러한 인재이니 조실스님께서 경책을 잘 내려주십시오.”
“나도 벌써 알고 있네.”
“그러면 내일 아침 공양 끝에 그 수좌를 들여보내겠습니다.”
유나스님이 물러나와 임제 스님을 불러서 물었습니다.
“그대가 삼 년 동안 이 회상에서 정진을 잘 하고 있었는데, 조실스님을 몇 번이나 친견했는고?”
“한 번도 단독으로 친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내일 공양 끝에 가서 친견하게.”
“친견하라시면 어떻게 친견해야 합니까?”
“불법의 적적대의(的的大意)를 묻게.”
이에 임제 스님은 순수하게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음 날 조실방을 찾아가 예를 갖춰 삼배를 올리고는 물었습니다.
“어떠한 것이 부처님의 밝고 밝은 큰 진리입니까?”
물음이 떨어지자마자 조실스님이 주장자로 이십 봉을 내리 갈기셨습니다. 이십 주장자를 맞으니 몸이 다 부서진 듯해 간신히 기어 나와 간병실에서 쉬는데, 유나스님이 찾아왔습니다.
“갔던가?”
“예, 다녀왔습니다. 스님이 시키신 대로 불법의 적적대의를 물었는데, 이십 봉을 갈기셔서 이 몸이 제 몸이 아닙니다.”
“대도(大道)를 위해서는 이 몸을 잊어야 하네, 몸을 추슬러서 내일 다시 친견하여 묻게.”
유나스님이 간곡히 타이르자 임제 스님은 순수한 마음으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예, 그리 하겠습니다.”
다음 날 가서 또 종전과 같이 불법의 적적대의를 물었습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조실스님이 이십 주장자를 때리시는데, 어제 맞은 이십 봉에 또 이십 봉을 맞으니 전신이 무너져 도저히 몸을 가눌 여력조차 없었습니다. 조실방에서 간신히 기어 나와 간병실에서 쉬는데 유나스님이 찾아왔기에 말하였습니다.
“어제 이십 봉을 맞고 오늘 또 이십 봉을 맞으니 도저히 제 몸이 아닙니다.”
“대도를 깨닫기 위해서는 이 몸뚱이를 헌신짝처럼 버려야 하네. 큰 용기를 내서 한 번 더 가게.”
유나스님이 간곡히 타이르니 여기에 감화를 받아서 대답했습니다.
“네, 가겠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또다시 조실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어떠한 것이 부처님의 밝고 밝은 큰 진리입니까?”
말이 떨어지자마자 조실스님이 또다시 이십 봉을 내리 갈기셨습니다. 이렇게 사흘 동안 육십 봉을 맞으니 온몸이 다 부서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근근이 기어 나와 간병실에 쉬는데 유나스님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다녀왔는가?”
“예, 다녀왔습니다. 세 번을 찾아가서 육십 봉을 맞았는데 전신이 부서져서 망가졌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여기에 인연이 없는 것 같습니다. 천성 다른 곳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데로 갈 뜻이 있거든 갈 때는 꼭 조실스님께 하직인사를 하고 가게.”
임제 스님은 유나스님이 간곡하게 일러주는 데 감화하여 며칠 조리를 잘 하고는 조실스님께 하직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대가 어디로 가려고 왔는고?”
“갈 곳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고안(高安) 강변에 대우(大愚) 선사를 찾아가거라.”
그래서 몇 달을 걸어 대우 선사를 찾아가는데 걸음걸음에 화두 한 생각뿐이었습니다. ‘불법의 큰 뜻을 물었는데,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십 봉씩 세 번을 때리는 뜻이 어디에 있는고?’ 이 한 생각에 모든 의심이 집중되었습니다.
마침내 대우 선사 회상에 이르러 삼배를 올리니 대우 선사께서 물으셨습니다.
“그대가 어디에서 왔는고?”
“황벽 선사 회상에서 왔습니다.”
“황벽이 평소에 어떻게 지도하던고?”
“제가 불법의 밝고 밝은 큰 진리를 물었는데, 세 번을 이십 봉씩 때려서 전신이 무너진 것 같아 간신히 조리하고 나왔습니다. 헌데 제게 무슨 허물이 있어서 이렇게 육십 봉을 때리신 것입니까?”
“이 오줌싸개 어린아이 같은 놈이 뭐라고 지껄이는고?”
대우 선사께서 크게 호통치고는 말씀하셨습니다.
“황벽이 혼신의 정력을 쏟아 잘 가르쳤구나!”
그러면서 크게 웃으셨습니다.
“하하하[㰤㰤大笑]!”
순간, 임제 스님은 화두가 타파되어 활연대오(豁然大悟)하였습니다.
“황벽의 불법이 별것 아니구나!”
임제 스님이 이렇게 말하니 대우 선사께서 호통치셨습니다.
“이 오줌싸개가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고?”
그러자 임제 스님이 대우 선사의 옆구리를 세 번 쥐어박았습니다. 이에 대우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은 나와 관계된 일이 아니네, 황벽 선사를 찾아가게.”
임제 스님이 그 걸음으로 돌아와서 황벽 선사를 모시고 20여 년을 연마하였습니다.

하루는 임제 스님이 산문 앞에 소나무를 심고 있는데, 황벽 선사께서 산문에 다다라 물으셨습니다.
“자연 경치가 이렇게 허다한데, 그대는 무엇을 하는고?”
“한 그루는 산문 앞에 경치를 돋우기 위해 심고 있고, 한 그루는 후래에 표방을 남기기 위해서 심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괭이로 땅을 세 번 쪼니 황벽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대가 나의 주장자를 삼십 방망이 맞았다.”
“허허허[噓噓聲]!”
임제 스님이 괭이로 땅을 쪼고 허허로운 소리를 내니, 황벽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종풍이 앞으로 크게 흥하리라!”

당시 1,500대중을 거느린 위산 선사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는, 동양의 소석가(小釋迦)라고 불리는 제자 앙산 스님을 불러 물었습니다.
“황벽이 임제의 법 쓰는 것을 보고 ‘나의 종풍이 앞으로 크게 흥한다’고 했는데, 임제의 당대에 속한 것인가? 그대는 연대를 얼마나 보는고?”
“연대가 하도 멀어서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알고자 하네. 한번 말해보게.”
“임제의 영(令)이 오나라와 월나라 땅을 행하다가 바람[풍혈(風穴) 선사를 뜻함]을 만나면 곧 그칩니다[令行吳越 遇風卽止].”

스승의 물음에 앙산 스님은 백년 후까지 크게 흥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풍혈(風穴) 선사는 임제의 정맥을 이은 분으로 회상을 열어 20여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수백 명의 대중을 지도하였는데, 한개 반개의 도인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매가 한 마리 날아서 당신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날이 새니 납자 하나가 바랑을 짊어지고 와서는 거량을 하는데, 흡족하게 상통하여 제자로 삼고는 법을 전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선종은 태고보우 선사께서, 임제 선사의 법을 이어받은 석옥청공(石屋淸珙) 선사로부터 법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니 임제의 자손입니다. 임제의 진정한 자손이 되기 위해서는 황벽 선사와 임제 선사가 주고받은 이 심오한 문답을 바로 보는 안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천하 사람의 눈을 멀게 하지 않고 부처님의 심인법을 천추만대에 이을 수 있습니다.

후에 임제 스님이 20년 만에 사자(獅子)의 모든 조아(爪牙, 발톱과 어금니)를 갖추어 다른 처소로 가기 위해 하직인사를 올리니 황벽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시자야, 주장자와 불자(拂子)를 가져오너라.”
그러자 임제 스님이 즉시 대구하였습니다.
“시자야, 불[火]을 가져오너라.”
법을 전하기 위해서 주장자와 불자를 가져오라 하는데, 왜 불을 가져오라 했습니까? 한 산중의 지도자가 되려면 이처럼 당당하고 빠른 기봉을 갖추어야 합니다.
후에 임제 선사께서 회상을 열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청한 이것이 부처요, 마음의 광명, 이것이 진리의 법이로다.
 진리의 도는 처처에 걸림이 없는 깨끗한 광명, 이것이 진리의 도로다.
 심청정시불심광명시법(心淸淨是佛心光明是法)이요
 도자처처무애정광시도(道者處處無碍淨光是道)로다.

또 하루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중하근기가 오면 문득 그 경계를 빼앗고, 그 사람은 빼앗지 않음이요,
 중상근기가 오면 경계와 사람을 함께 빼앗고,
 상상근기가 오면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지 아니함이로다. 
 중하근기래(中下根器來)하면 변탈기경(便奪其境)하고 불탈기인(不奪其人)이요
 중상근기래(中上根器來)하면 경인구탈(境人俱奪)하고
 상상근기래(上上根器來)하면 인경구불탈(人境俱不奪)이라.

만약 사람이 있어 산승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어떤 것이 사람은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아니한 것인고?
 청산에 길은 있음이나 이르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여하시탈인불탈경(如何是奪人不奪境)이닛고?
 청산유로무인도(靑山有路無人到)로다.

 어떤 것이 경계는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아니한 것인고?
 목동이 소를 타고 피리를 부니 천지가 놀람이로다.
 여하시탈경불탈인(如何是奪境不奪人)이닛고?
 목동취적천지경(牧童吹笛天地驚)이로다.

 어떤 것이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는 것인고?
 만 리에 왕래가 끊어짐이로다.
 여하시인경구탈(如何是人境俱奪)이닛고?
 만리절왕래(萬里絶往來)로다.

 어떤 것이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지 아니한 것인고?
 오곡풍년에 임금과 국민들이 축하연을 함이로다.
 여하시인경구불탈(如何是人境俱不奪)이닛고?
 오곡풍년(五穀豊年)에 왕민축하연(王民祝賀宴)이로다.

임제 선사께서 하루는 발우를 들고 마을에 탁발을 가셨습니다. 어느 집 앞에 가서 문을 두드리니, 노 보살이 나와서 물었습니다.
“어찌 오셨소?”
“탁발하러 왔습니다.”
“염치없는 중이로구나!”
노 보살이 대뜸 이렇게 호통치고는 왈카닥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여기에서 그 위대한 임제 도인이 한마디 하고 돌아서야 하는데 말없이 돌아오신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 모인 대중 여러분!
누가 임제 선사를 대신해 한마디 이를 자가 있습니까? 

이러한 물음에 번갯불보다 빠르고 돌불보다 빠르게 바른 답이 척척 나와야만 일을 다해 마친 요사장부(了事丈夫)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알았다’ 하는 것은 만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자기 자신도 구제하지 못합니다.

[한참을 계시다가 대중이 말이 없으니 이르시다.]

대중이 말이 없으니 산승이 대신 답하겠습니다. 잘 간직하여 대장부의 활개를 치게끔 혼신의 정력을 쏟아 정진에 몰두하십시오.

 삼십여 년 간 말을 타고 희롱해왔더니
 오늘 당나귀에게 크게 받힘을 입음이로다.
 삼십년래농마기(三十年來弄馬騎)러니
 금일각피려자박(今日却被驢子撲)이로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내려오시다.]

2008년 11월 12일 동안거 전국 결제법어

 

달을 보고 일구를 토하다


[선사께서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다.]

 팔만사천 법문은 그대를 좇아 통함이나
 한 티끌이 눈을 가릴 것 같으면 허공 꽃이 가득함이라.
 진리의 보검을 한 번 휘두름에 범부와 성인의 자취가 없음이니
 백 가지 물줄기가 천만 파도를 이루는 것이 다 근본진리로다.
 팔만교해종군통(八萬敎海縱君通)이나
 일예재안화만공(一翳在眼花滿空)이라.
 보검일휘범성단(寶劍一揮凡聖斷)하니
 백천만파진조종(百川萬波盡朝宗)이로다.

오늘 기축년(己丑年) 하안거 결제일에 모든 대중이 이러한 게송의 진리를 환하게 깨달아 얻으면 영겁토록 진리의 편안한 낙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인생은 오늘 있다 내일 가는 허무한 것이라, 영구불변의 진리를 깨달아야만 억만 년이 다하도록 매(昧)하거나 잃어버리지 않는 대안락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니 모든 대중이 억만 년 동안 써도 다함이 없는 견성법을 달통하여 임의자재하게 쓰는 대장부가 되십시오.

중생은 다겁의 생 동안 중생의 습기만 익혀온 연고로 이생에 이 일을 밝히지 못하면 부처님의 고준한 법을 또다시 만나기 어렵습니다. 이 일을 해결하는 가장 수승한 지름길은 바로 화두를 참구하는 참선법입니다. 이 참선법은 바르게 익혀 일념삼매만 지속된다면 반드시 진리의 문에 이르게 되지만, 일념삼매가 도래하지 않고는 절대로 진리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참선하는 이는 각자 화두를 챙기고, 화두가 없는 이는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이 화두를 드십시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아주 간절한 의심으로 화두를 챙기면서 의심을 밀어주고, 챙기면서 밀어주기를 하루에 천번 만번 빈틈없이 반복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무르익으면 참의심이 시동이 걸려 사물을 보는 감각과 소리를 듣는 감각이 다 없어지고, 흐르는 시냇물과 같이 밤낮으로 끊어지지 않고 흘러가게 됩니다. 그러면 홀연히 사물을 보는 찰나, 소리를 듣는 찰나 화두가 박살나게 되고,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진리의 문에 이르게 되는 법입니다. 이 깨닫는 과정은 역대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도인이 다 동일합니다. 이렇게 일념삼매가 되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그때는 산승의 목을 내놓겠습니다.
대중 여러분, 이 공부는 일념삼매만 지속된다면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선하는 이는 많은데 어찌하여 일념삼매가 안 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느냐? 그것은 간절한 마음으로 밀어주는 의심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체 시비장단을 다 놓아버리고, 몸뚱이에 끄달리지 말고, 먹는 것에 끄달리지 말고, 오로지 일거수일투족에 뼈골에 사무치는 화두의심과 씨름하면, 자연히 무르익어 일념삼매가 지속되어 홀연히 견성대오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부처님과 도인이 설한 가지가지 심오한 진리의 법문에 번갯불처럼 빠르게 바른 답이 나와서 한 꼬챙이에 다 꿰어버립니다. 이는 사량ㆍ분별ㆍ배움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일념삼매가 지속되는 이 활구참선은 성불의 가장 빠른 경절문(徑截門, 바로 질러가는 문)이라,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진리의 문에 들어가서 천불 만조사와 더불어 자리를 같이하게 되고, 우주가 다 멸하더라도 그 깨달음은 뚜렷이 밝아 있는 것입니다.
대중 여러분, 이러한 좋은 시기에 훌륭한 외호대중과 가장 많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최고의 수행터, 그리고 무엇보다 부처님의 정법맥을 이어받은 대선지식이 주석하는 이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견성하지 못하면 어느 곳에서 견성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모든 대중은 이번 철에 기필코 이 일을 마쳐야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뼈골에 사무치는 화두의심을 지어나가도록 정진에 정진을 더하십시오.

옛적에 84인의 도인 제자를 배출한 마조 도인께서 하루는 뛰어난 제자 세 명을 데리고 밝은 달이 비치는 도량을 거닐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달 밝은 밤에 각자 한마디씩 일러보게.”
서당지장(西堂智藏) 선사가 말하였습니다.
“바로 공양하는 때[正供養時]입니다.”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가 말하였습니다.
“바로 수행하는 때[正修行時]입니다.”
그러자 남전보원(南泉普願) 선사는 양팔을 흔들면서 걸어가 버렸습니다.
이에 마조 도인께서 멋지게 점검하셨습니다.
“경(經)은 지장으로 돌아가고, 선(禪)은 백장으로 돌아가고, 사물 밖에 홀로 뛰어난 것은 오직 남전이로다.”

산승이 만약 당시에 마조 도인의 세 제자와 함께 동행했다면 이와 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달 밝은 아래에 다리 펴고 누웠으니,
 달 밝고 맑은 바람 부니 이 풍류의 일미를 누구와 같이할꼬.

남전보원 선사의 상수(上首) 제자 조주(趙州) 스님은 10세 미만의 아이였을 때 조그마한 암자에 출가하였습니다. 그 절의 노승은 스스로 평생토록 중노릇을 잘했다고 자부하며 살았는데, 그 어린 사미승을 가르쳐보니 도저히 자신의 식견과 중노릇으로는 미치지 못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남전 도인께 인도하여 훌륭한 도인 제자를 하나 만들어야 되겠다 싶어 수백 리를 걸어 남전 도인 회상에 사미승을 데리고 갔습니다.
회상에 당도하여 남전 도인께 사미승을 들여보내니, 사미승이 누워 쉬고 계시는 남전 도인께 나붓하게 큰 절을 올리는데, 남전 도인께서 누워서 절을 받으면서 물으셨습니다.
“그대가 어디서 왔는고?”
“서상원(瑞祥院)에서 왔습니다.”
“그대가 서상원에서 왔다면 상서스러운 상(相)을 보았는가?”
“상서스러운 상은 보지 못했으나 누워계시는 부처님은 보았습니다.”
이에 남전 도인께서 벌떡 일어나 앉으시고는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대가 주인공이 있는 사미승인가, 주인공이 없는 사미승인가?”
“선사님, 정월달이 무척 추우니 귀하신 몸 유의하옵소서!”
어린 사미승이 이처럼 답하니 남전 도인께서 그대로 아이 도인이 온 것을 아시고는 원주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깨끗한 방에 이 사미승을 잘 모셔라.”

아이가 절집에서 참선하여 도를 깨달은 것도 아닌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진리를 깨닫고 나면 몸을 천번 만번 받는다 해도 그 깨달은 지혜의 눈은 항상 밝아 있으므로 가능한 일이라. 이는 오직 부처님의 깨닫는 법에만 있는 것입니다.

남전 도인 회상에는 항상 700여 명의 대중이 정진했는데, 하루는 고양이 한 마리를 두고 동쪽 선방 대중과 서쪽 선방 대중이 서로 자기네 고양이라고 주장하며 시비가 분분하였습니다.
남전 도인께서 그 광경을 보시고는 시자를 불러 운집종을 치게 하였습니다. 전 대중이 법당에 다 모이니, 시자를 부르셨습니다.
“고양이를 잡아오고 칼을 가져오너라!”
시자가 고양이와 칼을 갖다드리니 남전 도인께서 한 손으로는 고양이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칼을 들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쪽 선방 대중은 이 고양이를 동쪽 선방 고양이라 하고, 서쪽 선방 대중은 이 고양이를 서쪽 선방 고양이라 하니, 오늘 이 고양이에 대해 분명히 이르는 자가 있으면 이 고양이를 살려 두거니와, 분명히 이르는 자가 없을 것 같으면 고양이를 두 동강이 내리라.”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일러라! 일러라! 일러라!”
세 번 물으시는데, 법당에 모인 700명 대중이 다 꿀 먹은 벙어리라. 남전 도인께서 이르라는 그 뜻을 아는 이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남전 도인께서 약속과 같이 칼로 고양이를 두 동강이 내어 던져버리고는 방으로 돌아가 버리셨습니다. 남전 도인께서 방에서 쉬고 계시는데, 바깥에 볼일을 보러 나갔던 조주 스님이 돌아와 인사를 올리니, 남전 도인께서 오전의 일을 들어 물으셨습니다.
“오전에 이러한 고양이 법문이 있었는데, 그대가 만일 그 대중 가운데 있었다면 무어라고 한마디 하려는고?”
이에 조주 스님은 머리에 신짝을 이고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습니다. 그러니 남전 도인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대가 당시에 있었다면 고양이를 살렸을 것이로다.”

고양이를 들고 이르라는데 왜 머리에 신짝을 이고 방문을 열고 나갔느냐?
여기에 모든 부처님의 진리가 다 있습니다. 백천 공안이 펼쳐져 있으나 이 한 공안을 일념삼매 중에 투득할 것 같으면, 천불 만조사가 설한 심오한 법문이 일시에 다 무너져버리니 이것을 견성이라 합니다.

여기 모인 대중 여러분!
남전 도인이 고양이를 들고 이르라는 뜻은 어디에 있으며, 조주 도인이 머리에 신짝을 이고 나간 뜻은 또한 어디에 있습니까?

[한참을 계시다가 대중이 말이 없으니 스스로 답하여 이르시다.]

 진제가 연성 땅의 천하 제일가는 보배구슬을 빼앗아 가지니
 진나라 임금과 상여(相如)가 다 몸을 상함이로다.
 진제탈득연성벽(眞際奪得連城璧)하니
 진주상여총상신(秦主相如總喪身)이로다.
  
이 말의 낙처가 어디에 있는지 모든 대중은 깊이 참구하십시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내려오시다.]

2009년 5월 9일 하안거 전국 결제법어

 

성철 선사와 법의 문답을 주고받다


[선사께서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다.]

 선지식의 온전한 기틀은 격조가 참으로 높고 높은지라
 주장자 머리에 눈이 있어서 가을철 털끝을 가려냄이로다.
 여우와 토끼를 쓸어 없애니 가풍이 준걸함이요
 변화의 어룡을 번갯불에 사름이로다.
 지식전기격조고(知識全機格調高)여
 봉두유안변추호(棒頭有眼辨秋毫)로다.
 소제호토가풍준(掃除狐兎家風峻)이요
 변화어룡전화소(變化魚龍電火燒)로다.
  
 사람을 살리는 칼과 사람을 죽이는 검이여!
 하늘을 비껴 번쩍이니 날카로운 취모검이로다.
 일등의 영(令)을 행함은 그 맛이 특별함이니
 십분 아픈 곳을 이 누가 만나리오.
 활인도살인검(活人刀殺人劍)이여!
 의천조설리취모(倚天照雪利吹毛)로다.
 일등영행자미별(一等令行滋味別)이니
 십분통처시수조(十分痛處是誰遭)오.

어느덧 병술년(丙戌年) 동안거 해제일입니다. 해제일이 도래하면 염라대왕이 석 달 간의 사사시주(四事施主) 밥값을 추심합니다. 그러니 얼마만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부를 지어서 일념삼매가 지속되었느냐, 혼침ㆍ망상에 떨어져 시간을 낭비하지 아니하였느냐, 시줏밥만 축내면서 허둥지둥 보내지 아니하였느냐, 반성하고 다시금 정신을 바짝 차려 큰 신심을 발해야 합니다. 해제하였다고 바랑을 짊어지고 동분서주하여 이 산중, 저 산중 팔경유람만 해서는 안 됩니다. 이 공부를 마칠 때가 비로소 해제임을 굳게 명심하여 일거수일투족에 화두를 성성하게 들고 끊어짐이 없게끔 화두를 챙기십시오.
일념삼매가 도래하여 견성하게 되면, 하루아침에 모든 밥값을 다 갚고 삼세의 업이 그 자리에서 다 탕진되는 법입니다. 이같이 좋은 진리의 법은 오직 부처님 법에만 있습니다. 그러니 오매불망 간절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의심으로 화두를 챙기고, 의심하고 챙겨서 일념이 되도록 노력하다보면 문득 보는 것, 듣는 것도 잊어버리고, 앉아 있어도 앉아 있는 줄 모르고, 시간이 흘러가는 줄도 모르고 흐르게 되는데, 마치 돌사람 같고 나무사람처럼 되어 모든 감각을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몇 날 몇 달이 흐르고 흐르다가 문득 사물을 보는 찰나, 소리를 듣는 찰나에 화두가 박살나니,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의 백천 공안을 한 꼬챙이에 꿰어버릴 뿐만 아니라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여래지(如來地)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물음이 와도 척척 바른 답을 내놓을 수 있으니, 모든 부처님과 조사스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살림살이를 수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성대오법은 사람 몸을 천번 만번 얻더라도 만나기 어렵고, 바른 법문 또한 듣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이 견성법을 만난 김에 모든 분들이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이 화두를 들고 오매불망 씨름해야 합니다. 이 ‘참나’ 가운데 모든 부처님의 진리가 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처님도 ‘참나’를 아시어 위대한 부처님이 되셨고, 모든 도인도 ‘참나’를 알아 위대한 도인이 되셨습니다. 여기 법당에 모인 모든 대중도 조금도 다름이 없는 ‘참나’를 갖추고 있으나, 알지 못해서 쓰지 못할 뿐입니다.

향곡(香谷) 선사와 퇴옹성철(退翁性徹) 선사는 누구보다도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두 분은 20대 때부터 도반으로, 발심 출가하여 운봉(雲峰) 선사 밑에서 10여 년 동안 지도를 받아 공부하였습니다. 운봉 선사 열반 후 봉암사에 모여 ‘종전에 안 것은 다 덮어두고 대오견성을 법칙으로 삼아 멋진 회향을 하자’ 하여 용맹정진하다가 두 분 모두 대오견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두 분은 누구보다도 서로 상통하는 분(分)이 있었습니다.
마조 도인 이후로 무수한 도인이 중국에서 쏟아져 나왔고 우리나라는 신라시대 때부터 구산선문(九山禪門)이 내려와 오늘날에 이르렀지만, 중국 대선지식의 심오한 법문을 점검하고 평하여 대중에게 거량(擧揚, 깨달음의 견처를 서로 주고받는 진리의 대화)한 이는 이 두 분 선사뿐입니다. 역대의 모든 법어집을 찾아보면 확연명백합니다. 그만큼 봉암사에서 당당한 안목이 열린 것입니다.

산승이 33세 때 향곡 선사께 인증의 전법게를 받고 난 후, 퇴옹성철 선사께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가야산 백련암 성철 스님께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다녀오너라.”
그래서 가야산 해인사 백련암을 찾아가서 예를 갖춰 삼배를 올렸습니다.
“선사님께 한 가지 묻고자 합니다.”
그리고는 마조 도인의 사구법문(四句法門, 有句ㆍ無句ㆍ非有句ㆍ非無句ㆍ非非有句ㆍ非非無句)을 여쭈었습니다.
마조 도인께 어떤 수좌가 여쭈었습니다.
“모든 사구(四句)를 여의고 백 가지 그릇됨이 끊어진 자리에서 달마 스님이 서역에서 오신 뜻을 일러주옵소서.”
“오늘은 생각이 없으니 지장(地藏)에게 가서 물어라.”
그래서 수좌가 지장 선사를 찾아가 전과 같이 물으니, 지장 선사께서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오늘은 머리에 두통이 있어서 말할 수 없네. 백장회해(百丈懷海) 사형스님께 가서 묻게.”
다시 백장 선사를 찾아가 물으니, 백장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법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그 수좌가 다시 마조 도인을 찾아가 아뢰니, 마조 도인께서 점검하셨습니다.
“지장의 머리는 희고 백장의 머리는 검다[藏頭白 海頭黑].”

산승이 이 대문을 들어 성철 선사께 여쭈었습니다.
“마조 도인께서 ‘지장의 머리는 희고 백장의 머리는 검다’ 하신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네 아비에게 가서 물어라.”
이에 산승이 그냥 물러나왔습니다.
‘너의 스승에게 가서 물어라’는 말이니, 바로 여기에 성철 선사와 향곡 선사의 차별이 있는 것입니다. 향곡 선사는 누구든지 법을 물어오면 석화전광으로 점검하시는 사자(獅子)의 조아(爪牙)를 갖추신 분이었습니다.

28년의 세월이 흘러 향곡 선사께서 열반에 드시고 난 후 산승이 향곡 선사의 법어집을 정리해놓고 서문을 받기 위해 누구보다도 친했던 문수보살ㆍ보현보살 같은 향곡 선사의 위대한 도반인 성철 선사를 찾아갔습니다.
“서문을 하나 내려주십시오.”
산승이 청하니 그때서야 방에 들어가 법어집을 들고 나와 펴놓고는 가장 알기 어려운 세 가지 고준한 법문을 산승에게 물으셨습니다. 성철 선사는 육조(六祖) 선사 이후의 모든 법어집을 다 보신 분인데, 식견이 뛰어난데다가 선지(禪旨)까지 밝으신 분이라 누구보다도 꿰뚫어보는 눈이 밝은 분이셨습니다.
성철 선사께서 ‘영운(靈雲) 선사의 오도송’을 들어 산승에게 물으셨습니다.
“당시에 현사(玄沙) 선사께서는 영운 선사의 오도송을 보시고 ‘합당하고 심히 합당하나, 나이 많은 형이 깨닫지 못한 것을 보존하고 있도다[諦當甚諦當 老兄堪保未徹在]’ 하고 위산 도인과는 다르게 평하였는데, 현사의 뜻이 어디에 있느냐?”
 산승이 답하였습니다.
“종사들이 회호하는 시절입니다[宗師家 回互底時節].”
또 성철 선사께서 건봉 선사의 법문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건봉 선사께서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습니다.
“법신(法身)에 세 종류의 병통(病痛)과 두 종류의 광(光)이 있으니, 일일이 투득해야만 편안한 자리에 앉음이로다. 비록 이와 같다 하더라도 조와 용을 동시에 쓰는 향상일구[照用同時 向上一句]가 있는 것을 알아야만 옳다.”
그러니 운문 스님이 대중 가운데 나와서 예를 갖춰 삼배를 올리고 물었습니다.
“암자 안에 있는 사람이 어찌하여 암자 밖의 일을 보지 못합니까?”
이에 건봉 선사께서 크게 웃으셨습니다.
“하하하[㰤㰤大笑]!” 

이 법문을 들어 성철 선사께서 두 번째 물으셨습니다.
“운문 스님이 ‘암자 안에 있는 사람이 어찌하여 암자 밖의 일을 보지 못합니까?’ 하니, 건봉 선사께서 ‘하하하’ 크게 웃으셨는데, 운문 스님의 묻는 뜻이 어디에 있는고?”
여기에 산승이 척 답을 하였습니다.
산승이 이 답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선원에 이 화두로 공부하는 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철 선사께서 이처럼 두 가지를 물으시고, 세 번째로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 암두밀계기의(岩頭密啓其意)’ 법문을 들어 물으셨습니다. 이 공안은 천하 공안 중에 가장 보기 어려운 법문입니다.
성철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스승의 귀에다 대고 비밀히 속삭인 이 대문을 한번 점검해보게.”
그러니 산승이 점검하였습니다.
“한 망아지가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이니 위대한 임제 선사도 백염적이 못 됩니다.[馬駒踏殺天下人 臨濟未是白拈賊].”
그러나 검하(劍下)에 분신(分身)은 의견이 달랐습니다.

두 분의 법안(法眼)은 한국 선종사에 큰 획을 그어놓으셨습니다. 신라 이후로 무수한 도인이 출현했지만 두 분의 살림살이를 능가하는 분은 없습니다. 산승이 10여 년 동안 향곡 선사 회상에 머물면서 제방의 평을 다 들었습니다만, 제방의 살림살이는 여래선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여래선 위에 있는 향상의 일구를 투과해야만 모든 부처님과 도인의 전신자재처(轉身自在處)의 살림살이를 수용할 수 있으니, 대오견성으로써 법칙을 삼아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십시오.

중국 당(唐)나라 때 위산 도인께서 1,500대중을 지도하셨는데, 그 대중 가운데는 위대한 임제 도인의 제자인 삼성혜연(三聖慧然) 스님도 함께 정진하고 있었습니다.
삼성 스님은 3년 동안 묵묵히 정진에만 몰두하고 일체 살림살이를 드러내지 않았는데, 위산 도인께서는 벌써 간파하시고 하루는 시자를 시켜 점검해보셨습니다.
시자가 삼성 스님의 방문 앞에 이르러 조그마한 막대기를 들어 보이면서 물었습니다.
“스님께서 이 막대기를 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삼성 스님이 말했습니다.
“조실스님께서 일이 있으시구나!”
시자가 돌아가서 사실대로 아뢰니, 위산 도인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가서 종전과 같이 말해 보아라.”
시자가 삼성 스님의 방문 앞에 가서 다시 조그마한 막대기를 들어 보이면서 물었습니다.
“이것을 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삼성 스님이 답했습니다.
“다시 범하면 용서치 않음이로다[再犯不容].”
시자가 돌아가서 아뢰니, 위산 도인께서 몹시 좋아하셨습니다.
며칠 지나서 삼성 스님이 위산 도인께 하직 인사를 드리니, 위산 도인께서는 삼성 스님에게 법을 전하려고 하셨습니다.
“시자야, 주장자와 불자(拂子)를 가져오너라.”
그러자 삼성 스님이 말했습니다.
“조실스님, 저는 스승이 있습니다.”
“누구인가?”
“임제 선사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제자를 두었으니, 임제 선사는 복도 많으시구나!”
위산 도인은 감탄하시며 임제 도인을 칭찬하셨습니다.

그 당시 위산 도인 회상에 상수제자 앙산혜적(仰山慧寂) 선사가 있었는데, 그 법이 날카롭고 밝아서 과거ㆍ현재ㆍ미래 삼생을 꿰뚫는 안목을 갖추고 있으므로 동양의 소석가(小釋迦)라 불렸습니다.
하루는 앙산 선사께서 삼성 스님에게 물으셨습니다.
“수좌의 이름이 무엇인고?”
“혜적(慧寂)입니다.”
삼성 스님이 묻는 스님의 이름을 대니, 앙산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혜적은 내 이름일세.”
“예, 제 이름은 혜연(慧然)입니다.”

여기 모인 대중들은 앙산 선사와 삼성 선사 두 분의 대선사를 아시겠습니까?

[한참을 계시다가 대중이 말이 없으니 스스로 점검하여 이르시다.]
 
 용과 범이 서로 만나서
 거두고 놓음을 자재하게 씀이니,
 이를 아는 이가 천상세계와 인간세계에 몇몇이나 될꼬?
 용호상면(龍虎相面)하여
 수방자재용(收放自在用)하니
 천상세계인간세계능기기(天上世界人間世界能幾幾)아.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내려오시다.]

2007년 3월 4일 동안거 동화사 해제법어

 

금오ㆍ전강 선사와 법의 문답을 주고받다


[선사께서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다.]

 옛 나루터에 바람 맑으니 한 조각 가을이요,
 달빛과 강빛이 차게 서로 비춤이로다.
 묘하고 깨끗하고 뚜렷이 밝은 눈을 헤쳐 열어서
 길상하고 편안한 사람을 알아 취할지어다.
 고도풍청일편추(古渡風淸一片秋)요,
 월색강광냉상조(月色江光冷相照)라
 발개묘정원명안(撥開妙淨圓明眼)하여
 식취길상안락인(識取吉祥安樂人)어다.

우리가 석 달 안거에 들어가 정진하는 것은 이러한 게송의 참맛을 알아서 억만년이 다하도록 그 즐거움을 수용하기 위함인데, 어느덧 석 달이 지나 해제가 도래했습니다. 석 달 동안 진실로 뼈골에 사무치는 화두의심과 씨름했다면 공부를 마친 대장부가 많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반살림이 지나고 해제가 도래했건만 조실방을 찾아와 당당한 일구(一句)를 내놓는 이가 한 사람도 없으니, 이는 모두가 공부를 십분 바로 지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대오각성하고 더욱더 용맹심을 발하여 실다운 화두로써 뼈골에 사무치는 의심을 지어 씨름해야 할 것입니다.
빈틈없이 실답게 공부를 지어갈 것 같으면 나도 모르게 참의심이 발동 걸리는데, 밤이 지나가는지 낮이 지나가는지, 한 달이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무르익어지는 시절인연이 도래합니다. 그때가 되어야 홀연히 사물을 보는 찰나, 소리를 듣는 찰나에 화두가 박살나고 태산이 무너지는 경계가 옵니다. 그리하면 모든 부처님과 도인이 설한 심오한 법문에 석화전광으로 답이 쏟아져 나오게 되는데, 이러한 안목을 갖추지 못하면 아무 쓸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옛 도인들이 “기틀에 당하여 석화전광으로 나오는 바른 답의 일구는 만년토록 빛남이로다” 하셨으니, 이것을 일러 견성이라고 합니다. 묻는 데 칠전팔도한(七顚八倒漢, 일곱 번 구르고 여덟 번 거꾸러진 이, 마음의 눈이 열리지 못하여 부딪히는 경계에 자유롭지 못한 공부인)이 되어 여기에 거꾸러지고 저기에 거꾸러지면 이러한 살림살이는 아무런 쓸 곳이 없으니, 오로지 대장부의 활개를 치게끔 대오견성에 목표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해제가 되었다고 해서 반연을 따라 춤을 추지 말고, 이 산중 저 산중 유람객이 되지 말고, 오로지 이 일을 해결하는 데 일편단심으로 정진에 정진을 더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산승이 금오(金烏) 선사와 거량한 문답처를 대중에게 드러내 보일 것이니, 모든 대중은 더욱더 발심하여 옛사람과 같이 고준한 안목을 갖추고, 경허 선사의 자손이 천하를 덮어 선풍을 크게 드날리도록 하십시오.

금오 선사는 만공(滿空) 선사의 손법제자(孫法弟者)로, 16세에 금강산 마하연으로 출가하여 선방에서 열심히 수행에 몰두하셨습니다. 당시에 만공 선사께서 조실로 계셨는데, 만공 선사를 따라 수덕사로 와서 다년간 용맹정진하여 일가견을 이루었습니다. 그리하여 만공 선사의 총애를 받았던 수제자 보월(寶月) 선사로부터 법을 이어받았습니다.
산승이 28세 당시 하안거 해제 즈음에 일이 있어 묘관음사에서 향곡 선사를 모시고 팔공산 동화사에 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동화사에는 효봉(曉峰) 선사께서 금당선원의 조실로 주석하고 계셨는데, 도착하니 마침 효봉 선사와 금오 선사께서 법담을 나누고 계셔서 향곡 선사도 동참하여 세 분이서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 법담을 나누게 되셨습니다. 무더운 여름이라 조실방을 활짝 열어 놓고 있어서 마루와 마당에서 많은 수좌들이 이 법담을 보고 듣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덕산탁발화’ 법문은 부처님 이후로 베풀어진 법문 중 가장 심오한 공안이요, 최고의 관문으로 대오견성한 사람이라야 그 살림살이를 볼 수 있지, 법신변사나 여래선의 살림살이로는 바로 볼 수 없는데, 이 고준한 법문을 점검해 보라 하니 서로 큰 소리가 오갔습니다.
법담을 마치시니 향곡 선사께서는 산내 암자에 가신다 하셔서, 산승 혼자 월내 묘관음사로 돌아가기 위해 대구역에서 기차에 올랐는데, 우연히도 기차에는 불국사로 가시는 금오 선사께서 시자를 데리고 앉아계셨습니다. 산승이 금오 선사께 인사를 올리고는 월내 묘관음사에서 향곡 선사를 모시고 왔다 하니, 향곡 선사 밑에 훌륭한 제자가 나왔다는 소문이 제방에 자자했던 터라, 산승을 처음 보시는 것이었지만 척 아시고는 시자를 옆 칸으로 보내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났으니 견처(見處)를 서로 주고받는 게 어떻겠는가?”
“예, 그렇게 하시지요.”
그리하여 한참 동안 서로 법담을 주고받게 되었는데, 산승이 화두를 타파한 깨달음의 경지를 향곡 선사께 글로 써서 바친 일화를 말씀드렸습니다.

 이 주장자 이 진리를 몇 사람이나 알꼬?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다 알지 못함이로다.
 한 막대기 주장자가 문득 금빛 용으로 화해서
 한량없는 용의 조화를 마음대로 부림이로다.
 자개주장기인회(這箇拄杖幾人會)오.
 삼세제불총불식(三世諸佛總不識)이라.
 일조주장화금룡(一條拄杖化金龍)하야
 응화무변임자재(應化無邊任自在)로다.
 
산승이 이렇게 글을 써서 바치니, 향곡 선사께서 보시고는 벽력같은 물음을 던지셨습니다.
“너 문득 용을 잡아먹는 금시조(金翅鳥)를 만나서는 어떻게 하려는고?”
산승이 석화전광으로 답하였습니다.
“몸을 굽히고 당황해서 세 걸음 물러갑니다[屈節當胸 退身三步].”
이에 향곡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옳고 옳다!”

산승이 이러한 문답의 과정을 들어 금오 선사께 여쭈었습니다.
“향곡 선사의 물음에 산승이 답한 것을 어떻게 보십니까?”
“용이 살아가는구나!”
금오 선사께서 이렇게 답하시니, 서로 상통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금오 선사께서 산승에게 ‘남전참묘(南泉斬猫)’법문을 들어 물으셨습니다.
“남전 선사가 고양이를 들고 ‘이르라’ 하니 조주 선사가 신짝을 머리에 이고 나간 뜻을 어떻게 생각하는고?”
“태평세월은 본래 장군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짐이나, 장군이 태평세월을 보고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합니다[太平本是將軍致 不許將軍見太平].”
금오 선사께서는 명답을 했다고 아주 좋아하시며 또 물으셨습니다.
“운문 선사께 한 수좌가,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아니할 때 어떠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운문 선사께서 ‘허물이 수미산과 같다’고 하셨는데, ‘허물이 수미산과 같다’고 하신 뜻을 어떻게 보는고?”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음을 어느 곳에 씻음인고? 금강보검으로써 즉시에 절단해 버림입니다.”
산승이 이렇게 답하니, 금오 선사께서는 참으로 기뻐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조주 선사의 법문을 들어 다시 산승에게 물으셨습니다.

조주 선사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는지라, 오직 간택하는 것만을 꺼리나니 말이 있으면 간택이며 명백함이라. 노승은 명백함 가운데에도 있지 않는데, 너희들은 두둔하고 보호해 가지느냐?”
그러자 대중 가운데 한 스님이 물었습니다.
“명백함 가운데에 있지 않으면 무엇을 두둔하고 보호해 가지라 합니까?”
“나 또한 알지 못한다.”
“화상이 알지 못하면 어찌 명백함 가운데에도 있지 않다고 합니까?”
“그렇게 묻는 것은 옳으나, 예배하고 물러가라.”
 
이 법문을 들어 금오 선사께서 산승에게 고준한 물음을 던지셨습니다.
“조주 선사께서 ‘그렇게 묻는 것은 옳으나, 예배하고 물러가라’ 하신 것을 어떻게 보는고?”
“만약 임제 선사 같았으면 봉(棒)과 할(喝)로써 행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상통이 되니, 금오 선사께서는 매우 흡족해 하시고 참으로 좋아하셨습니다.

산승의 은사이신 석우 선사의 추모 일주기에 효봉 선사께서 법상에 올라 대중에게 물음을 던지셨습니다.
“옛날 보화(普化)는 전신을 관 속에다 벗어버리고 허공에 요령소리만 남기고 가셨는데, 지금의 보화(普化)는 어떻게 열반에 드셨느냐?”
옛날 보화 존자는 임제 선사와 쌍벽을 이루어 선법을 크게 선양한 위대한 도인이었는데,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내신 석우 선사의 법명도 똑같은 ‘보화’였습니다.

옛적에 보화 존자께서 열반하실 때가 가까워지자 요령을 흔들며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고 다니셨습니다.
“누가 나에게 곧은 바지[直綴]를 만들어줄 자가 없느냐?”
그래서 여러 사람이 장삼을 지어 드렸는데 존자께서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임제 선사께 말씀드리니, 선사께서는 원주를 시켜 관(棺)을 하나 사오게 하셨습니다. 그 때 마침 보화 존자께서 오시자 임제 선사는 관을 내놓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주려고 곧은 바지를 하나 준비해두었네.”
“임제가 과연 내 심정을 아는구나!”
보화 존자께서는 곧바로 그것을 짊어지고 시내 사거리로 나가서 큰 소리로 외치고 다니셨습니다.
“임제가 나에게 곧은 바지를 만들어 주었으니, 내가 동문에 가서 열반에 들리라.”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는 “미친 스님 열반하는 모습 좀 보자”며 다투어 동문으로 몰려가 기다렸습니다. 종일토록 기다려도 존자께서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시더니, 저녁 무렵에야 관을 짊어지고 와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일진이 나쁘니 내일 남문에 가서 열반에 들리라.”
그 이튿날, 사람들이 다시 남문에 모였는데도 존자께서는 열반에 드시지 않았습니다. 또 그 다음날에 서문에서 열반하겠다고 하셔서 사람들이 몰려갔으나, 그날도 역시 허탕이었습니다. 그러고는 다음 날 다시 북문에서 열반하겠다고 선언하셨지만 3일  계속 이와 같이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믿지 않았습니다.
나흘째 되는 날, 북문에는 사람이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보화 존자께서는 아무도 없는 그 곳에서 스스로 관 속에 들어가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관 뚜껑에 못을 쳐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못을 쳐서 관을 봉해드리고는 성내에 와서 그 사실을 이야기하니,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사람들이 다투어 북문으로 몰려왔습니다.
보화 존자께서는 이미 열반에 드셔서 몸뚱이는 관 속에 벗어놓으셨는데, 공중에서는 일생 흔들고 다니신 그 요령소리가 나더니 허공으로 사라졌습니다.

효봉 선사께서 석우 선사와 법명이 같은 중국의 보화 선사의 이 같은 열반상을 들어 물으시니, 당시 동화사 금당선원 입승 소임을 보던 명허(明虛) 스님이 일어나서 벽력같은 ‘할(喝)’을 했습니다.
“억[喝]!”
그러자 효봉 선사께서 호통을 치셨습니다.
“그런 쓸데없는 ‘할’을 함부로 하지 마라!”
“제가 ‘할’ 한 뜻도 모르시면서 어찌 부인하십니까?”
이에 효봉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중국에 흥화존장(興化存獎) 선사 회상에서 대중이 동당(東堂)에서도 ‘할’을 하고 서당(西堂)에서도 ‘할’을 해대니, 흥화 선사께서 법상에 오르시어 ‘만약 대중이 할을 해서 노승(老僧)을 33천(天)까지 오르게 하고, 거기에서 땅에 떨어져 숨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난다 해도, 그 할을 옳지 못하다고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고인의 말씀을 들면서 ‘할’을 그만하라 하셨지만, 대중이 ‘옳다’, ‘아니다’ 하며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그러자 효봉 선사께서 대중에게 다시 물으셨다.
“대중 가운데 누가 다시 답할 자가 없느냐?”
그래서 산승이 일어나 답하였습니다.
“옛날 보화도 이렇게 가셨고, 지금의 보화도 이렇게 가셨습니다.”
그러니 효봉 선사께서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름지기 답은 이러해야 한다.”
이처럼 법문의 문답은 낙처를 분명히 알아 서로 상통해야지 태산이 가려서 횡설수설하면 아무 쓸 곳이 없습니다.

산승이 29세 때, 동화사 주지로 계시는 월산 스님이 조실로 전강(田岡) 선사를 모신다 하여, 바랑을 지고 동화사 여름안거에 방부를 들였습니다. 금당선원에 열일곱 분이 방부를 들였는데, 지금도 살아계시는 원로회의 의장이신 종산 스님과 원로의원이신 활안 스님도 같이 정진에 동참하셨었습니다.
결제 후, 반살림을 일주일 앞두고 전강 선사께서 법문을 하러 오셨습니다. 수좌들 인사를 받으시고 나서 이름을 쭉 물어보셨는데, 산승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진제입니다.”
“향곡 선사 회상에서 공부 잘한다는 소식을 많이 들었네. 우리가 이렇게 만난 김에 멋진 탁마를 하세.”
“스님, 탁마하기 위해 제가 바랑을 짊어지고 왔습니다.”
“요즘 내가 배탈이 나서 밥을 잘 먹지 못하네.”
며칠 지나서 반살림을 이틀 앞둔 날, 종산 스님과 함께 조실채로 건너가 인사를 드리니, 전강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수좌들은 자기가 신(信)하는 스님만 믿고, 문중을 나누고, 편을 가르니 정말 한심한 일이다!”
“스님, 정말 부끄럽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나 공부 인연을 지었으니, 탁마를 한번 멋지게 하면 어떻겠느냐?”
“스님, 참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탁마는 좋은데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탁마를 하되 대중들이 다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하셨으면 합니다.”
“이것은 여래의 비밀법이기 때문에 단둘이 산에 올라가서 해야 되네.”이처럼 전강 선사께서 다른 이가 있다고 마다하시니 둘이서 다시 선원으로 건너왔습니다. 그 뒷날 저녁 예불 종소리가 울리자 혼자 조실채에 건너가 인사를 올리니, 어제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즘 수좌들은 자기가 신(信)하는 스님만 믿고, 파벌을 만들고 정말 한심한 중노릇을 한다!”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산승이 이렇게 말씀드리니 조실 스님께서 위대한 남전ㆍ조주 선사의 고준한 법문을 물으셨습니다. 남전 도인은 위대한 마조 선사의 법을 이어 700명의 대중을 거느린 대선지식이고, 조주 도인은 삼생(三生)을 조사 문중에 출현하여 종풍을 크게 드날린 고불(古佛, 옛 부처의 화현)이라고 칭송받는 대선지식이었습니다.
“남전 선사께 조주 스님이 아침마다 ‘밤새 존후가 어떠하십니까?’ 하고 문안인사를 올렸는데, 하루는 남전 선사께서 ‘어젯밤 삼경에 문수ㆍ보현을 각각 30방씩 때려서 철위산 지옥에다 던졌네’ 라고 대답하시니, 조주 스님이 받아서 ‘선사님은 누구의 방망이를 맞으시렵니까?’ 하고 물으셨네. 남전 선사께서 ‘왕노사(王老師, 남전 선사 본인)는 허물이 어디에 있는고?’ 하고 되물으시니, 조주 스님은 말없이 큰절을 하고 나갔네. 이 문답처를 그대가 일일이 점검해보시게.”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내가 척척 가닥을 잡아 말씀드리니, 전강 선사께서는 한참을 좋아하며 웃으셨습니다.
“내가 30년 동안 조실을 지냈는데 이 법문에 척척 답한 이를 처음 만났네.”

전강 선사께서 이처럼 ‘남전ㆍ조주’의 고준한 법문의 문답처를 당시로부터 30년 전에 식파(識破)하셔서 제방 납자들을 제접하신 것은 참으로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과연 전강 선사께서는 북방 선지식의 안목을 갖추신 분입니다.
금오 선사와 전강 선사는 이처럼 일가견을 갖추어 대선지식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모인 대중은 금오 선사와 전강 선사를 아시겠습니까?

[한참을 계시다가 대중이 말이 없으니 이르시다.]

우리나라의 선법이 실낱같이 내려오다가 경허 선사로 인하여 선풍이 크게 흥하게 되었습니다. 경허 선사 문하에 혜월(慧月)ㆍ수월(水月)ㆍ만공(滿空)ㆍ한암(漢巖) 등 기라성 같은 선지식이 출현하였고, 그 밑에 또 훌륭한 제자들이 많이 출현하여 오늘날까지 한국 선풍을 진작하고 있습니다. 금오ㆍ전강 선사께서는 위대한 만공 선사의 법을 크게 진작시킨 대선지식입니다.

 평생토록 심담을 사람에게 기울여서
 만인의 마음 밭에 반야의 종자를 심음이로다.
 평생심담향인경(平生心膽向人傾)하여
 만인심전식반야(萬人心田植般若)로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내려오시다.]

2009년 8월 5일 하안거 동화사 해제법어

 

새가 하루에 몇 리를 날아가는고?


여기 모인 대중들은 원담진성(圓潭眞性) 대선사를 아시겠습니까?

 평생토록 만인에게 불법을 전하는 데 심혈을 기울임이여,
 한 몽둥이를 때리는 분명한 그 뜻 그려서 이루지 못한지라.
 만약 몸을 뒤쳐 법문의 낙처를 알 것 같으면
 물에 비친 하늘은 비고 넓고, 달은 맑고 맑음이로다.
 평생심담향인경(平生心膽向人傾)이여
 일봉분명화불성(一棒分明畵不成)이라.
 약야번신지낙처(若也飜身知落處)하면
 수천공활월징청(水天空闊月澄淸)이라.

원담 대선사께서 부처님과 조사의 심인법을 선양하여, 만 중생으로 하여금 무위의 참된 즐거움을 누리게 한 그 큰 공덕에 머리 숙여 분향합니다.
수덕사는 한국 선종사에 길이 남을 선풍을 진작한 일번지로, 옛적에 만공 대선사께서 주석하시며 크게 선풍을 진작한 대도량입니다. 그 당시 만공 선사와 몇몇 수좌들이 마루에서 좌담할 때 집 처마 끝에서 새 한 마리가 날아가니, 만공 선사께서 물으셨습니다.
“저 새가 하루에 몇 리나 날아가는고?”
이에 보월 선사가 답하였습니다.
“촌보(寸步)도 처마를 여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만공 선사께서 몹시 좋아하셨습니다.

대중은 만공 선사와 보월 선사를 아시겠습니까?

[한참을 계시다가 대중이 말이 없으니 스스로 답하여 이르시다.]

 물음도 멋이 있고 답도 멋이 있음이로다.

만공 선사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용음(龍吟) 선사께서 다섯 철을 조실로 지내셨는데, 그 후 조실 자리가 비니 고봉(古峰) 선사를 조실로 모시려고 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봉 선사께 결제법문을 청하니, 고봉 선사께서 법상에 오르려는 때에 금오 선사가 나와서 고봉 선사의 장삼자락을 붙잡고 말하였습니다.
“법상에 오르기 전에 한 말씀 이르십시오.”
“장삼자락 놔라!”
“법상에 오르기 전에 한 말씀 이르십시오.”
그러니 고봉 선사께서 또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장삼자락 놔라!”
이렇게 범과 같고 용과 같은 스님들이 모여 부처님의 심인법을 거량하시니 다른 산중에서는 볼 수 없는 드문 광경이었습니다.

40여 년 전 향곡 선사께서 이 일화를 들어 산승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진제 네가 만약 당시 고봉 선사라면, 법상에 오르려는 때 장삼자락을 붙잡고 ‘법상에 오르기 전에 한마디 이르라’고 하면 너는 어떻게 하려는고?”
“억[喝]!”
산승이 문득 ‘할’을 하니, 향곡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리하면 부산 시민의 눈을 다 멀어가게 하리라.”
“소승의 허물입니다.”
“노승의 허물이니라.”

옛적에 조주 선사 회상에서 한 수좌가 석 달 동안 공부를 잘해 마치고 해제일에 이르러 하직인사를 올리니 조주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처 있는 곳에서도 머물지 말고 부처 없는 곳에서도 급히 달아나서, 만약 삼천 리 밖에서 사람을 만나거든 잘못 들어[擧] 말하지 말게.”
이에 그 수좌가 말하였습니다.
“그러한 즉은 가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조주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버들잎을 따고 버들잎을 땀이로다[摘楊花摘楊花].”

여기 모인 대중 여러분!
“버들잎을 따고 버들잎을 딴다” 라는 그 뜻을 아시겠습니까?

[한참을 계시다가 대중이 말이 없으니 스스로 점검하여 이르시다.]

 조주 선사의 일구는 옛적에도 빛났고 지금도 빛남이로다.
 조주일구 휘고등금(趙州一句 輝古騰今)이로다.
  
 버들잎을 따고 버들잎을 땀이여!
 천 리를 달리는 오추마라도 따라잡기 어려움이로다.
 적양화적양화(摘楊花摘楊花)여
 천리오추추부득(千里烏騅追不得)이로다.

전국 선원 조실 대표 팔공산 동화사 조실 진제 분향
  
2009년 3월 11일 원담진성 대선사 일주기 추도법어(수덕사)

 

 

정법의 당간

 

 

불조정전비문(佛祖正傳碑文)


 일천 성인의 신령한 기틀도 쉽게 친하지 못한지라
 용은 용 새끼를 낳는다고 따르지 말라.
 진제가 연성의 보배구슬을 빼앗아 가지니
 진나라 임금과 상여가 다 몸을 상함이로다.
 천성영기불이친(千聖靈機不易親)이라
 용생용자막인순(龍生龍子莫因循)하라.
 진제탈득연성벽(眞際奪得連城璧)하니,
 진주상여총상신(秦主相如總喪身)이로다.

 한 주먹으로 쳐서 황학루를 거꾸러뜨리고
 한 발로 차서 앵무주를 뒤친지라.
 뜻 기운이 있는 때에 뜻 기운을 더하고
 풍류가 없는 곳에 또한 풍류케 함이로다.
 일권권도황학루(一拳拳倒黃鶴樓)하고
 일답답번앵무주(一踏踏翻鸚鵡洲)라.
 유의기시첨의기(有意氣時添意氣)하고
 불풍류처야풍류(不風流處也風流)로다.

부처님께서 설산(雪山)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正覺)을 이루시어 21일간 깊이 생각하고 생각하시다가
“내가 법을 설하지 않고 열반에 드는 것과 같지 못하다.”
하시니 문수보살이,
“깨달으신 법은 그러하오나, 방편이 있는 고로 하근중생을 위하여 삼승(三乘)에 물러가서 법을 설하옵소서.”
하고 청함이라, 이에 부처님께서
“문수 네 말도 일리가 있음이라.”
말씀하시고 49년간 근기를 따라 법을 설하시다가 마지막 열반에 드실 즈음에 다다라, 대중에게 법을 설하기 위해 사자좌에 좌정해 계실 때 제석천왕이 우담바라 꽃을 올리니,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말없이 보이심에 가섭 존자만이 빙긋이 미소를 지으니, 부처님께서,
“정법안장 열반묘심(正法眼藏 涅槃妙心)을 가섭에게 부치노라.”
하심이로다. 가섭 존자는 아난 존자에게 전하고 아난 존자는 상나화수 존자에게 전하니 이로 좇아 불심인법(佛心印法)이 전해옴이로다.
인도 28대 보리달마에 이르러 동토에 선법(禪法)이 장차 흥행함을 예지하시고 중국으로 건너 오셨도다. 게송에 이르기를,

 내가 본래 이 땅에 옴은
 법을 전해 미한 중생을 구제함이라.
 한 꽃에 다섯 잎이 열리니
 열매가 자연히 이루어짐이로다.
 오본래차토(吾本來此土)는
 전법구미정(傳法救迷情)이라.
 일화개오엽(一花開五葉)에
 결과자연성(結果自然成)이라.

하시니 동토초조 보리달마로부터 육조까지 예언한 대문이로다.
육조 선사 송(頌)에

 보리의 도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
 밝은 거울 또한 대가 아닌지라.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어느 곳에 티끌이 있으리오.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요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라.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하니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리오.

이로 좇아 육조가 됨이니 육조 선사 아래 회양ㆍ행사 선사가 출현하여 두 분의 아손(兒孫)들이 중국의 선풍(禪風)을 천하에 떨치었도다.
마조 문하에서 84인의 선지식이 출현함이라. 마조 선사께서 백장 스님이 재참(再參) 친견차 들어오는 것을 보시고는, 마조 선사께서 법상각에 걸어둔 불자(拂子)를 들어 보이셨다. 이에 백장 스님이
“이를 바로 쓰십니까? 이를 여의고 쓰십니까?”
하고 물으니, 마조 선사께서 불자를 본래 자리에 걸어두고 말씀하시기를,
“네가 장차 입을 열어서 후학을 어떻게 지도하려는고?”
하심에, 백장 스님이 법상각에 걸어둔 불자를 들어서 보이거늘, 마조 선사께서,
“이를 바로 씀인가, 이를 여의고 씀인가?”
하고 물으시니, 백장 스님이 불자를 본래 자리에 걸어두었다.
이에 마조 선사께서 벽력같이 ‘일할(一喝)’을 하시니, 백장 스님이 3일간 귀가 먹었다.
사흘 만에 귀가 뚫리니, 바로 여기에서 대오견성(大悟見性)하였다. 이로 좇아 마조의 법을 이음이니, 백장을 좇아 황벽ㆍ임제로 이어짐이로다.
임제 선사께서 대중에게 이르시되

 때의 일할은 금강왕의 보배 칼이요
 때의 일할은 사자가 땅에 걸터앉음과 같음이요
 때의 일할은 영초로써 탐간하는 것과 같음이요
 때의 일할은 일할을 짓지 않고 씀이라.
 때로는 먼저 비추고 뒤에 쓰고
 때로는 먼저 쓰고 뒤에 비추며
 때로는 조와 용을 동시에 하고
 때로는 조와 용을 동시에 아니함이로다.
 말 가운데 주인과 벗을 나누고
 할 아래 용과 뱀을 정하며
 야호의 길을 끊으니
 봄바람이 땅을 스침에 온 대지에 꽃이로다.
 때의 일할(一喝)은 금강왕보검(金剛王寶劍)이요
 때의 일할(一喝)은 여거지사자(如踞地獅子)요
 때의 일할(一喝)은 여탐간영초(如探竿影草)요
 때의 일할(一喝)은 부작일할용(不作一喝用)이라.
 때로는 선조후용(先照後用)하고
 때로는 성용후조(先用後照)하며
 때로는 조용동시(照用同時)하고
 때로는 조용부동시(照用不同時)로다.
 언중(言中)에 분주반(分主伴)하고
 할하(喝下)에 정룡사(定龍蛇)하며
 획단군호로(劃斷羣狐路)하니
 춘풍불지화(春風拂地花)로다.

임제 아래 면면히 이어 석옥청공에 이르러, 고려 말 태고보우 선사가 원나라로 건너가 석옥 선사를 친견함에 석화전광(石火電光) 중에 불조(佛祖)의 명근(命根)인 살활여탈(殺活與奪)을 자재하게 주고받으니, 와력(瓦礫)이 생광(生光)하고 진금(眞金)이 실색(失色)이로다.
그리하여 불심인법(佛心印法)을 이어 이 땅에 불조의 혜명(慧命)을 전등(傳燈)함이로다.
환암, 구곡으로 이어져 서산, 언기로 이어 내려온 실낱같은 선풍이 경허 선사의 오도(悟道)로 크게 사해(四海)에 떨치었도다.

 홀연히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몰록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들사람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는구나.
 홀문인어무비공(忽聞人語無鼻孔)하고
 돈각삼천시아가(頓覺三千是我家)라.
 유월연암산하로(六月燕巖山下路)에
 야인무사태평가(野人無事太平歌)로다.

그 문풍(門風)이 고준(孤峻)하여 혜월, 수월, 만공, 한암 등 제사(諸師)가 배출되었나니, 혜월 문하에는 운봉, 향곡 선사가 출현하여 고준(高峻)한 가풍이 더욱 빛남이로다.

 밝고 밝은 해는 하늘에서 빛나고,
 솔솔 부는 맑은 바람은 땅을 두루함이로다.
 이러해도 옳고 이렇게 아니해도 옳음이여,
 초목과 티끌이 큰 광명을 놓음이요,
 이렇게 해도 옳지 못하고 이렇게 아니해도 옳지 못함이여,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삼천리 밖에 거꾸러짐이로다.
 명명고일(明明杲日)은 여천(麗天)하고
 삼삼청풍(颯颯淸風)은 잡지(匝地)로다.
 임마야시(恁麽也是)며 불임마야시(不恁麽也是)여,
 초목진애(草木塵埃)가 방대광명(放大光明)하고
 임마불시(恁麽不是)며 불임마불시(不恁麽不是)여,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도퇴삼천리(倒退三千里)로다.

산승이 향곡 선사께 묻되
“불안(佛眼)과 혜안(慧眼)은 묻지 아니하거니와, 어떤 것이 납승(衲僧)의 안목(眼目)이닛고?”
“사고원래여인주(師姑元來女人做, 나이 많은 비구니는 원래가 여자)니라.”
“오늘에야 선사님을 바로 친견했습니다.”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보았느냐?”
“관(關, 빗장)!”
하니,
“옳고, 옳다!”
하시면서

 부처님과 조사의 크고 산 진리는
 전할 수도 없고 또한 받을 수도 없는지라.
 이제 산 진리를 부치노니
 거두거나 놓거나 그대에게 맡기노라.
 불조대활구(佛祖大活句)는
 무전역무수(無傳亦無受)라.
 금부활구시(今付活句時)에
 수방임자재(收放任自在)로다.

하고 전법(傳法)하셨다.

 애석타.
 길이 생각건대 강남땅 삼월에
 자고새가 우는 곳에 백 가지 꽃이 향기롭도다.
 돌(咄).
 장억강남삼월리(長憶江南三月裏)에
 자고제처백화향(鷓鴣啼處百花香)이로다.

불기2554년 9월 불조법손 진제 삼가 지음

 

전법(傳法)의 원류(源流)


경허 선사 → 혜월 선사(임인년, 1902년)

[사진] 경허 선사께서 혜월 선사에게 내리신 친필 전법게
[사진] 등등상속(燈燈相續) - 경허 선사께서 상수제자인 혜월 선사에게만 내리신 친필 법맥도

혜월혜명에게 부치노니

 일체법을 요달해 알 것 같으면
 자성에는 있는 바가 없는 것
 이같이 법성을 깨쳐 알면
 곧 노사나불을 보리라.
 세상법에 의지해서 그릇 제창하여
 문자와 도장 없는 도리에 청산을 새겼으며
 고정된 진리의 상에 풀을 발라 버림이로다.

                  수호 중춘 하한일에
                  만화문인 경허 설함


부(付) 혜월혜명(慧月慧明)

 요지일체법(了知一切法)하면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라.
 여시해법성(如是解法性)하면
 즉견노사나(卽見盧舍那)라.
 의세제도제창(依世諦倒提唱)하여
 무문인청산각(無文印靑山脚)하며
 일관이상도호(一關以相塗糊)로다.

수호(水虎) 중춘(仲春) 하한일(下澣日)
만화문인(萬化門人) 경허(鏡虛) 설(說)


혜월 선사 → 운봉 선사(을축년, 1925년)

[사진] 혜월 선사께서 운봉 선사에게 내리신 친필 전법게
[사진] 등등상속 - 혜월 선사께서 상수제자인 운봉 선사에게만 내리신 친필 법맥도

운봉성수에게 부치노니
 
 일체의 유위법은
 본래 진실된 모양이 없으니
 저 모양 가운데 모양이 없으면
 곧 이름 하여 견성이라 함이라.

            세존응화 2951년 4월
           경허문인 혜월 설함


부(付) 운봉성수(雲峰性粹)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은
 본무진실상(本無眞實相)이니
 어상약무상(於相若無相)이면
 즉명위견성(卽名爲見性)이라.

세존응화(世尊應化) 二九五一年 四月
경허문인(鏡虛門人) 혜월(慧月) 설(說)


운봉 선사 → 향곡 선사(신사년, 1941년)

[사진] 운봉 선사께서 향곡 선사에게 내리신 친필 전법게
[사진] 등등상속 - 운봉 선사께서 상수제자인 향곡 선사에게만 내리신 친필 법맥도

향곡혜림 장실에게 부치노니

 서쪽에서 온 문인(文印)이 없는 진리는
 전할 수도 받을 수도 없나니.
 만약 전하고 받을 수 없는 것조차 여의면
 까마귀는 날고 토끼는 달리느니라.

세존응화 2967년
혜월문인 운봉 설함


부(付) 향곡혜림(香谷蕙林) 장실(丈室)

 서래무문인(西來無文印)은
 무전역무수(無傳亦無受)라.
 약리무전수(若離無傳受)하면
 오토부동행(烏兎不同行)이라.

세존응화(世尊應化) 二九六七年
혜월문인(慧月門人) 운봉(雲峰) 설(說)


향곡 선사 → 진제 선사(정미년, 1967년)

[사진] 향곡 선사께서 진제 선사에게 내리신 친필 전법게
[사진] 등등상속 - 향곡 선사께서 상수제자인 진제 선사에게만 내리신 친필 법맥도

진제법원 장실에게 부치노니

 부처님과 조사의 산 진리는
 전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라
 지금 그대에게 활구법을 부촉하노니
 거두거나 놓거나 그대 뜻에 맡기노라.

세존응화 2993년 8월 10일 
운봉문인 향곡 설함


부(付) 진제법원(眞際法遠) 장실(丈室)

 불조대활구(佛祖大活句)는
 무전역무수(無傳亦無受)라
 금부활구시(今付活句時)에
 수방임자재(收放任自在)로다.

세존응화(世尊應化) 二九九三年 八月 十日
운봉문인(雲峰門人) 향곡(香谷) 설(說)

 

불조정전법맥(佛祖正傳法脈)


초조(初祖) 마하가섭(摩訶迦葉)
제2조 아난존자(阿難尊者)
제3조 상나화수(商那和修)
제4조 우바국다(優婆掬多)
제5조 제다가(提多迦)
제6조 미차가(彌遮迦)
제7조 바수밀다(婆須密多)
제8조 불타난제(佛陀難提)
제9조 복타밀다(伏馱密多)
제10조 협존자(脇尊者)
제11조 부나야사(富那夜奢)
제12조 마명대사(馬鳴大師)
제13조 가비마라(迦毘摩羅)
제14조 용수대사(龍樹大師)
제15조 가나제바(迦那提婆)
제16조 라후라다(羅喉羅多)
제17조 승가난제(僧伽難提)
제18조 가야사다(伽倻舍多)
제19조 구마라다(鳩摩羅多)
제20조 사야다(闍夜多)
제21조 바수반두(婆修盤頭)
제22조 마나라(摩拏羅)
제23조 학륵나(鶴勒那)
제24조 사자존자(師者尊者)
제25조 바사사다(婆舍斯多)
제26조 불여밀다(不如密多)
제27조 반야다라(般若多羅)

중화조사(中華祖師)
제28조 보리달마(菩提達磨)
제29조 이조혜가(二祖慧可)
제30조 삼조승찬(三祖僧璨)
제31조 사조도신(四祖道信)
제32조 오조홍인(五祖弘忍)
제33조 육조혜능(六祖慧能)
제34조 남악회양(南嶽懷讓)
제35조 마조도일(馬祖道一)
제36조 백장회해(百丈懷海)
제37조 황벽희운(黃檗希運)
제38조 임제의현(臨濟義玄)
제39조 흥화존장(興化存獎)
제40조 남원도옹(南院道顒)
제41조 풍혈연소(風穴延沼)
제42조 수산성념(首山省念)
제43조 분양선소(紛陽善昭)
제44조 자명초원(慈明楚圓)
제45조 양기방회(楊岐方會)
제46조 백운수단(白雲守端)
제47조 오조법연(五祖法演)
제48조 원오극근(圓悟克勤)
제49조 호구소융(虎丘紹隆)
제50조 응암담화(應庵曇華)
제51조 밀암함걸(密庵咸傑)
제52조 파암조선(破庵祖先)
제53조 무준원조(無準圓照)
제54조 설암혜랑(雪巖惠朗)
제55조 급암종신(及庵宗信)
제56조 석옥청공(石屋淸珙)

아국조사(我國祖師)
제57조 태고보우(太古普愚)
제58조 환암혼수(幻庵混修)
제59조 구곡각운(龜谷覺雲)
제60조 벽계정심(碧溪淨心)
제61조 벽송지엄(碧松智嚴)
제62조 부용영관(芙蓉靈觀)
제63조 청허휴정(淸虛休靜)
제64조 편양언기(鞭羊彦機)
제65조 풍담의심(楓潭義諶)
제66조 월담설제(月潭雪霽)
제67조 환성지안(喚惺志安)
제68조 호암체정(虎巖體淨)
제69조 청봉거안(靑峰巨岸)
제70조 율봉청고(栗峰靑杲)
제71조 금허법첨(錦虛法沾)
제72조 용암혜언(龍岩慧彦)
제73조 영월봉율(永月奉律)
제74조 만화보선(萬化普善)
제75조 경허성우(鏡虛惺牛)
제76조 혜월혜명(慧月慧明)
제77조 운봉성수(雲峰性粹)
제78조 향곡혜림(香谷蕙林)
제79조 진제법원(眞際法遠)

 

용어풀이

[ ㄱ ]
가가대소 㰤㰤大笑 - ‘하하하!’ 하고 크게 웃음
가부좌 跏趺坐 - 수행자들이 앉는 참선자세로, 한쪽 다리 위에 다른 쪽 다리를 포개어 앉는 자세
가유 假有 - 인연因緣 따라 현실로 나타나 있는 세계의 온갖 형상
가풍 家風 - 한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서 이루어진 그 문중門中의 문지門旨와 질서, 풍습 등을 아우르는 말
간경 看經 - 하나의 경전을 수행삼아 읽는 것
간택 揀擇 - 분별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가리킴
간파 看破 - 속내를 꿰뚫어 알아차림
간화선 看話禪 - 송宋의 대혜종고 선사가 불조佛祖로부터 내려오던 최상승의 수행법을 구체적인 방법과 명칭으로 제창한 수행법으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을 근본으로 함
강원 講院 - 경전經典을 가르치는 곳으로 세속의 대학에 준함
강주 講主 - 강원講院을 이끌고 경을 가르치는 소임
강호선림 江湖禪林 - 부처를 뽑는 세상의 모든 선불장選佛場
개개장부 箇箇丈夫 - 너도 장부요, 나도 장부라는 말로 공부를 마친 대장부를 일컬음
개당 開堂 - 법을 펴기 위해 회상會上을 여는 일
거량 擧揚 - 깨달음의 견처를 서로 주고받는 진리의 대화, 법거량의 준말
격조 格調 - 사람의 품격과 바른 뜻
견성 見性 - 자신의 참성품(참나)을 보는 것
견지 堅持 - 굳게 지니는 일
견처 見處 - 수행 중에 알았다고 여기는 자리
결사 結社 - 뜻있는 이들이 한 곳에 모여 깨침을 위해 용맹정진에 임하는 일
결제 結制 - 깨달음을 위해 각 3달 동안 동안거와 하안거에 들어가는 의식
경계 境界 - 사전적 의미로는 현상계를 구분하는 위치를 뜻하나, 수행 도중에 처하는 위치나 상황을 일컬음
경절문 徑截門 - 바로 질러가는 문이란 뜻으로,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부처의 지위에 이르는 수행법을 일컬음
경책 警策 - 1.좌선 시 주의가 산만하거나 조는 사람을 장군죽비로 때려서 깨우는 일  2.상대의 부족한 수행과 자세를 일깨워주는 일
고불 古佛 - 옛 부처
고인 古人 - 옛 사람, 옛 성인
고해 苦海 - 고통의 바다
공능 功能 - 공功을 쌓는 일과 그에 따르는 능력
공안 公案 - 깨달은 진리의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 보인 것으로, 상대방이 계합契合하지 못할 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된다. 고승대덕선사古僧大德禪師의 언구言句 즉 화두(話頭). 약 1700칙則의 화두가 있다.
공양 供養 - 1.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2.복을 짓기 위해 불·법·승 삼보께 시주물을 바치는 일
공양주 供養主 - 절에서 대중의 밥을 짓고 음식 일체를 만들어 시봉하는 소임
과거칠불 過去七佛 - 지난 세상에 출현한 일곱 부처님 1.비바시불毘婆尸佛 2.시기불尸棄佛 3.비사부불毘舍浮佛 4.구류손불俱留孫佛 5.구나함모니불俱那含牟尼佛 6.가섭불迦葉佛 7.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교화 敎化 - 사람을 부처님의 진리로 사람을 이끌어 고해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 줌
구경 究竟 - 가장 지극함
구경법 究竟法 - 가장 지극한 진리
구산(-선)문 九山(-禪)門 - 통일 신라 이후 중국으로부터 선법禪法을 전해 받아와서 그 문풍門風을 지켜 온 아홉 산문山門을 일컬음 [실상산문, 가지산문, 사굴산문, 동리산문, 성주산문, 사자산문, 희양산문, 봉림산문, 수미산문]
구류 九類 - 중생의 아홉가지 종류 1.태생胎生 2.난생卵生 3.습생濕生 4.화생化生 5.유색有色 6.무색無色 7.유상有想 8.무상無想 9.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
구족 具足 - 모든 것을 원만히 다 갖춤
구중궁궐리 九重宮闕裏 - 겹겹이 문으로 막은 깊은 궁궐 속
근기 根機 - 부처님의 진리의 법문을 받아들이는 그릇의 크기
금구성언 金口聖言 - 부처님이나 깨달은 성인의 말씀
금시조 金翅鳥 - 양쪽 날개의 넓이는 360만 리나 되고, 용을 잡아먹고 산다는 전설의 새
기봉 機鋒 - 칼이나 창과 같은 날카로운 지혜와 기상   
기식 氣息 - 들이쉬고 내쉬는 숨기운
기용제시 機用齊施 - 도인의 살림살이로써, 마음의 기틀과 작용을 가지런히 쓴다는 말
기틀 - 마음을 씀에 있어 근본이 되는 틀
길상 吉祥 - 아름답고 좋은 징조
끽다거 喫茶去 - ‘차 마시고 가게’라는 뜻으로 선종에서 화두로 삼고 있는 조주 선사의 가르침

[ ㄴ ]
낙처 落處 - 가르침에 숨은 깊은 뜻
납승 衲僧 =납자衲子 - 새로 닦을 것 없이 본래 부처라고 하는 도리를 깨달아 그러한 입장을 견지(堅持)하는 수도승, 사전적 의미로는 누더기 옷을 입은 수행자라는 뜻
내심 內心 - 속마음
노납 老衲 - 노스님이 자신을 겸손히 이르는 말
노안 老顔 - 노승 자신을 이르는 말
노호 老胡 - 선가禪家에서 부처님이나 조사를 일컫는 말

[ ㄷ ]
다겁 多劫 - 한 겁은 한 세계가 생겨났다가 멸하기까지의 무한한 시간개념으로, 다겁은 아주 오랜 세월을 일컬음
담대 膽大 - 용맹함이 하늘을 찌르는 성품
답처 答處 - 물음에 대한 답이 가리키는 뜻
당간 幢竿 - 사찰의 입구에 세우는 깃대로 사찰의 권위와 공간적 범위를 나타냄
당기일구 當機一句 - 도인의 살림살이로써, 기틀에 다다라 전광석화로 내뱉는 최고의 진리의 언구
대문 大文 - 내용을 다 갖춘 작은 양의 문장이나 언구
대비원력 大悲願力 - 대자비심으로 세운 큰 서원誓願
대승불교 大乘佛敎 - 깨달음의 피안彼岸에 이르는 교법敎法으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 즉 자각각타自覺覺他의 양면을 다 갖춘 보살菩薩의 도道
대신심 大信心 - 부처님 법을 온전히 믿고 의지해서 ‘참나’를 깨닫고자 하는 큰 마음
대오견성 大悟見性 - 크게 깨달아 참된 성품(참나)을 보는 것
대용맹심 大勇猛心 - 불굴의 의지와 큰 용기를 갖춘 마음
대자대비 大慈大悲 - 중생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크고 깊은 마음
대자재 大自在 - 온갖 속박에서 벗어나 얽매임이나 방해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큰 역량
대화상 大和尙 - 화상은 스님을 높이 이르는 말이니, 대화상은 덕이 높은 큰스님을 뜻함
대흥종풍 大興宗風 - 한 종파의 이름과 사상을 널리 드날림
도반 道伴 - 불도의 인연으로 맺은 벗
돈오 頓悟 - 단박에 깨침, 또는 단박에 닦아 깨쳐 마침. 돈오돈수의 줄임말
돈오돈수 頓悟頓修 - 단박에 닦아 깨쳐 마침, 곧바로 깨달음을 얻어 마친다는 사상으로 혜능계의 남종선의 사상
돈오무생법 頓悟無生法 - 완전한 깨달음을 이르는 말로, 문득 깨달아 얻는 남이 없는 진리란 뜻. 돈오는 돈오돈수의 줄임말
돈오점수 頓悟漸修 - 깨달은 후에도 습기習氣가 남아 있어 점차적으로 닦아 깨달음을 유지한다는 말로, 교리를 중요시하는 신수神秀계의 북종선의 사상
동안거 冬安居 - 수행자들이 산문 출입을 끊고 임하는 겨울 석 달 동안의 수행기간
두두물물 頭頭物物 - 일체의 모든 사물 하나하나
두호 斗護 - 두둔하고 보호함
득력 得力 - 사전적 의미로는 힘을 얻었다는 말. 선禪에서 득력이란 화두 한 생각에 깊이 빠져 모든 분별망상이 제거되고 일체 업에 끄달리지 않는 상태로, 깨달음의 시절인연만 기다릴 뿐 더 물러남이 없는 수행 단계
등등상속 燈燈相續 - 등燈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로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라는 뜻, 즉 법을 이은 스승과 그 제자가 서로 이어주고 이어 받는 법의 등불을 일컬음

[ ㅁ ]
마하가섭 摩訶迦葉 -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상수(으뜸) 제자로써, 부처님의 법을 이음
만민화락 萬民和樂 - 만 중생의 화합되고 즐거운 모습
말후구 末後句 - 철저한 깨달음에 도달하여 내뱉는 지극한 언구言句
망상 妄想 - 마음의 집착으로 인해 현상의 바른 모습을 보지 못하고 함부로 그릇되게 생각하는 것, 즉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생각
망유妄有 - 마음이 나타낸 거짓된 현상을 실재實在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집착하는 것
매昧하다 - 어둡다
면벽 面壁 - 벽을 마주하여 선정禪定에 들어 있는 모습, 또는 벽을 마주하여 앉은 모습
명근 命根 - 생명의 근본
명상 名相 - 모든 사물에는 들을 수 있는 것[名]과 볼 수 있는 것[相]이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다 거짓된 것
명암자재처 明暗自在處 - 도인의 살림살이로서, 밝고 어두운 진리의 본체
모갑 某甲 - 어른 앞에서 본인을 낮추는 말
목녀 木女 - 나무 여자, 나무 처녀
목전 目前 - 눈 앞
묘용 妙用 - 신묘한 작용
무량광 無量廣 - 끝없이 넓음
무명 無明 - 진리에 어두워 집착으로 인해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마음 상태
무명초 無明草 - 중생이 고해에서 헤매는 근본 원인이 되는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을 뜻하는 말
무문인 無文印 - 문자 없는 도장
무상 無相 - 눈·귀·코·혀·몸·생각에 대對한 상이 없는 것
무상원각 無相圓覺 - 어둠을 부수고 홀로 비추는 형상이 없는 지극한 진리
무심도인 無心道人 - 마음과 행동, 즉 안팎으로 온갖 분별과 집착을 벗어나 걸림이 없는 도인
무아 無我 - 성품性品이 본래 공空하므로 ‘나’라고 할 수 있는 어떠한 고정적인 실체가 없음
무애 無碍 - 마음에 번뇌가 없어 일체의 행에 걸림이 없음
무위진인 無位眞人 - 계급을 매길 수 없고 차별없는 참 사람
무위진락 無爲眞樂 - 함이 없는 참된 즐거움
무주 無住 - 주住는 집착하는 곳을 의미하는 것으로 집착함이 없음
무진 無盡 - 다함이 없음, 끝이 없음
무차선회·무차선대법회 無遮禪會·無遮禪大法會 - 빈부·귀천·상하를 막론하고 차별 없이 평등하게 법을 나누는 여법한 자리
문외한 門外漢 - 깨달은 바가 없어 아직 진리의 문에 들어서지 못한 사람
문인 文印 - 문자와 도장
문정 門庭 - 사전적 의미로는 대문 안의 뜰이란 말로, 한 문도門徒를 일컬음
문중 門衆 - 한 스승을 따르는 제자들의 무리, 일가一家를 이루어 세력화 된 모습
문풍 門風 - 한 문중의 면목과 풍습
밀전 密傳 - 비밀히 전함

[ ㅂ ]
바랑 - 걸망의 다른 말, 승려의 등 가방
반살림 - 동안거나 하안거의 절반이 되는 때
반야 般若 - '참나'를 찾음으로써 온갖 분별과 망상에서 벗어나 만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닫고 모든 진리의 법을 꿰뚫는 지혜
반연 攀緣 - 마음이 대상에 따라 작용을 일으키는 것
발심 發心 - 발보리심發菩提心의 준말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지극한 구도심
발우 鉢盂 - 수행자의 밥그릇
발우공양 鉢盂供養 - 수행자가 법답게 음식을 취하는 의식
발원 發願 - ‘참나’를 찾고자 하는 깨달음이나 중생구제의 서원을 세우는 일
방부 房付 - 1.스님이 다른 절에 가서 머무르기를 원하는 일 2.안거 동안 머물 수 있는지 가부可否를 결정하는 절차
방장 方丈 - 조계종단에서 방장은, 선禪·교敎·율律을 겸비한 승랍 40년 이상으로 20안거 이상을 성만盛滿한 본분종사本分宗師로 한다. 즉 높은 수행력과 덕을 갖춘 큰스님으로서 많은 사찰과 대중을 거느린 총림叢林(큰절)의 가장 어른스님
방장실 方丈室 - 방장스님이 거처하는 곳
방편 方便 - 중생구제를 위해 지혜로써 쓰는 묘한 수단과 방법
방함록 芳啣錄 - 동안거·하안거 때마다 발행하는 책으로, 전국 각 선원의 모든 대중과 소임을 상세히 기록함
배석拜席자리 - 절할 때 까는 돗자리
번뇌 煩惱 -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온갖 갈등
범부 凡夫 - 성인聖人에 대對해서 어리석은 인간
범성 凡聖 - 성인聖人과 범부凡夫
법거량 法擧量 - 깨침을 얻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문답형식의 절차
법기 法器 - 불법을 깨달을 만한 큰 그릇
법납 法臘 - 승려의 출가 나이
법담 法談 - 1.법의 참 뜻을 말하는 것  2.선사들이 법문을 문답하는 것, 즉 법거량法擧揚
법등 法燈 - 부처님께서 깨달아 전하신, 어둠을 밝히는 진리의 등불
법력 法力 - 정법의 힘이 능히 재난을 없애고 악을 굴복시키는 위력
법명 法名 - 1.출가하여 승려로써 갖는 이름  2.불자가 되어 갖는 이름
법사자 法嗣者 - 법맥을 이어받은 제자
법상 法床 - 설법하는 스님이 앉는 좌대座臺
법상각 法床角 - 법상의 각진 모서리
법석 法席 - 법회를 행하는 자리
법성 法性 - ‘참나’를 보아 깨닫는 진리의 성품
법신 法身 - 빛깔도 형상도 없는 진리와 하나가 된 부처님의 참된 몸
법신변사 法身邊事 - 진리의 세계로, 온 삼천대천세계 형형색색이 한 티끌도 없이 청정한 경지
법손 法孫 - 부처님에게 법을 부촉받아 대를 이은 제자들.
법아집 法我執 - 아집我執의 두 가지 중 하나, 일체 현상과 마음의 이치에 진실한 체성體性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
법안 法眼 - 모든 진리를 분명하게 관찰하는 눈
법은 法恩 - 진리를 가르쳐 준 은혜
법재 法財 - 법이 중생을 이롭게 함이 귀한 재물과 같으므로 법재라 함
법주 法主 - 큰 법회나 모임을 주관하여 법을 세우는 선지식
법풍 法風 - 불법을 바람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법통 法統 - 법의 계통이나 전통
보리 菩提 - 깨달음을 통하여 얻는 대지혜
보림 保任 - 수행자가 안으로는 성품이 요란하지 않게 잘 보호하고, 밖으로는 경계를 만나서 끌려가지 않게 잘 보호하는 공부
본래면목 本來面目 - 인간이 본래 갖추고 있는 진실한 모습
본래성불 本來成佛 - 일체 중생이 본래부터 부처의 성품을 갖추고 있음
본분납자 本分衲子 - 새로 닦을 것 없이 본래 부처라고 하는 도리를 깨달아서 그러한 입장을 견지堅持하는 납승
본분종사 本分宗師 - 도를 원만히 이룬 선지식으로, 한 종단의 종통을 계승한 스님
본산 本山 - 한 종파의 중심이 되는 사찰
부모미생전 본래면목 父母未生前 本來面目<화두> - 의역) 부모에게 이 몸 받기 전에 어떤 것이 참 나던고?
부촉 咐囑 - 다른 이에게 부탁하여 맡긴다는 뜻
분별식 分別識 - 나타난 대상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분별하는 인식
불공 佛供 - 불전佛殿에 공양물을 올리고 기도드리는 일
불과 佛果 - 수행한 공덕으로 깨달아 얻는 부처님의 지위
불구부정 不垢不淨 -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음
불긍 不肯 - 긍정하지 않음
불법난봉 佛法難逢 - 불법 만나기 어려움
불법적적대의 佛法的的大意<화두> - 부처님의 밝고 밝은 큰 진리
불심인법 佛心印法 - 부처님께서 실체가 없는 마음에 도장을 찍어 전하신 비밀한 법이란 뜻으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마음의 깊고 오묘한 진리
불사 佛事 - 본래 부처님의 덕을 찬탄, 선양하는 뜻이지만 후세에 와서는 사원·탑 등의 건립을 의미함
불생불멸 不生不滅 - 남이 없고 멸함도 없음
불시 不是 - 옳지 못함
불안 佛眼 - 5안眼(육안肉眼·천안天眼·혜안慧眼·법안法眼·불안佛眼) 중의 하나. 부처님을 각자覺者라 이름하며, 각자의 눈을 불안佛眼이라 함
불은 佛恩 - 부처님의 은혜
불자 拂子 - 짐승의 털이나 삼[麻] 등을 묶어서 자루에 맨 것으로, 때로는 법을 전하는 상징물로, 현재는 선종에서 위의를 드러내는 권위의 상징물로 종정宗正과 대종사大宗師에게만 주어짐
불전 佛典 - 불교의 경전
불조 佛祖 - 부처와 조사
불조정맥 佛祖正脈 - 부처님께 부촉 받아 역대조사스님들로 내려온 정통 법맥
봉封하다 - 어떠한 자리나 지위를 내려준다는 뜻
비구 比丘 - 남자 몸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된 이
비구니 比丘尼 - 여자 몸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된 이
비로정상 毘盧頂上 -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경지
빈주 賓主 - 손님과 주인

[ ㅅ ]
사구 死句 - 밝은 눈을 갖추지 못하여 지식적인 분별로 헤아리는 경계. 여기에서 구句라 함은 진리의 세계를 뜻하는 것으로, 화두에 의심이 없는 것을 일러 사구라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임
사대 四大 - 육신과 함께 만물을 이루는 네 가지 요소. 지地·수水·화火·풍風, 즉 흙·물·불·바람
사량 思量 - 생각으로 헤아림
사미·사미승 沙彌·沙彌僧 - 비구가 되기 이전의 예비승려
사미계 沙彌戒 - 비구가 되기 이전의 예비승려에게 주는 계戒
사바세계 裟婆世界 - 육도六道윤회와 함께 온갖 고통으로 꽉 찬 중생의 고해苦海의 세계
사부대중 四部大衆 - 불교의 교단을 구성하는 네 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 비구(남자 스님)·비구니(여자 스님)·우바새(남자 신도)·우바이(여자 신도)
사사시주 四事施主 - 신도들이 출가 수행자에게 제공하는 거주처·음식·의복·의약품의 네 가지 시주물
사상 四相 - 중생이 심신心身의 개체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집착하는 4가지 1.아상我相 - 자기가 실재實在한다고 집착하는 것 2.인상人相 - 나는 사람이므로 지옥취地獄趣나 축생취畜生趣와는 다르다고 집착하는 것 3.중생상衆生相 - 중생은 오온五蘊의 집합체로써 생존生存하고 있는데, 이것을 나라고 여겨 집착하는 것 4.수자상壽者相 - 태어나면서부터 일정한 수명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과 그 수명에 집착하는 것
사생 四生 - 태생胎生·난생卵生·습생濕生·화생化生의 모든 생명체
사위의 四威儀 - 네 가지의 행위(행行·주住·좌坐·와臥), 즉 거닐고 머물고 앉고 눕는 일상생활의 모든 행동
사유 思惟 - 생각하는 것
사자좌 獅子座 - 부처님의 자리를 모든 짐승의 왕인 사자의 위엄에 비유하여 나타낸 말
사자후 獅子吼- 부처님과 대도인이 베푸시는 진리의 법문을 모든 짐승의 왕인 사자의 위엄에 비유하여 나타낸 말
사제 師弟 - 스승과 그 제자
사해 四海 - 온 세계를 네 개의 큰 바다에 비유한 말
산문 山門 - 절의 관문으로, 절을 총칭하기도 함
살활 殺活 - 도인의 살림살이로, 죽이고 살림
살활여탈 殺活與奪 - 도인의 살림살이로, 죽이고 살리고 주고 빼앗음
살활종탈 殺活縱奪 - 도인의 살림살이로, 죽이고 살리고 놓아주고 빼앗음
삼경 三更 - 밤을 다섯으로 나눈 셋째 부분으로,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삼계 三界 - 중생계, 즉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
삼독 三毒 - 탐·진·치貪·瞋·癡, 즉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것으로 고통의 씨앗이 되는 마음작용
삼동결제 三冬結制 - 매년 임하는 겨울 석 달 동안의 수행기간
삼보 三寶 - 불교의 세 가지 귀한 보물인 불보佛寶ㆍ법보法寶ㆍ승보僧寶. 즉, 교주이신 부처님,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위없는 진리,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는 출가수행자
삼라만상 森羅萬象 - 우주의 모든 사물과 현상
삼생 三生 -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생
삼승 三乘 - 깨달음에 이르는 세 가지 실천법. 즉 성문승聲問乘ㆍ연각승緣覺乘ㆍ보살승菩薩乘을 말한다. 사람마다 능력이나 소질에 맞게 셋으로 나누어서 설한 것
삼십삼천 三十三天 - 불교의 세계관으로 삼계(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모든 하늘세계, 즉 욕계 11천ㆍ색계 18천ㆍ무색계 4천
삼업 三業 - 윤회의 근본인 업을 짓게 되는 세 가지. 몸[身]ㆍ입[口]ㆍ뜻[意]
삼학 三學 - ‘참나’를 깨닫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닦아야 하는 세 가지 항목, 즉 계율[戒]ㆍ선정[定]ㆍ지혜[慧]
상 相 - 눈, 귀, 코, 입, 몸, 생각과 이에 상응하는 모든 것
상거 相距 - 서로 떨어진 거리
상근기 上根器 - 상ㆍ중ㆍ하의 3단계로 나눈 중생의 수행능력 중 가장 높은 근기
상기 上氣 - 기혈氣血이 머리 쪽으로 치밀어 오르는 증상
상당 上堂 - 법문을 설하기 위해 법상에 오름
상좌 上佐 - 한 은사스님 밑으로 출가한 제자
상수제자 上首弟子 - 제자 가운데 가장 법이 수승한 이
상주 常住 - 항상 머물러 있음
상통 相通 - 서로 마음과 뜻이 막힘이 없이 통함
생로병사 生老病死 - 중생의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 고통
생사관두 生死關頭 - 죽고 사는 것이 달린 매우 위태로운 고비
생이지지 生而知之 - 현생現生에 따로 닦은 바 없이, 태중에서 나올 적에 이미 지혜의 눈이 밝아 있는 것.
서강수 西江水 - 중국의 큰 강 이름
서상원 瑞祥院 - 중국의 사찰 이름
서신 書信 - 편지
서역 西域 - 중국의 서쪽에 있던 여러 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
석상 席上 -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
석일 昔日 - 옛날
석화전광 石火電光(=전광석화) - 번갯불과 부싯돌의 빛이 번쩍거리는 순간과 같은 아주 짧은 찰나
선객 禪客 - ‘참나’를 깨닫기 위해 참선 수행하는 자를 일컫는 말
선문 禪門 - 참선 수행을 근본으로 하는 문중, 즉 불가佛家를 일컬음
선법 禪法 - 참선으로 ‘참나’를 깨닫는 수행법
선종 禪宗 - 참선으로 ‘참나’를 깨달아 부처님의 정법을 잇는 것을 종지宗旨로 하는 종파
선지 禪旨 - 선禪에 대한 바른 안목
선지식善知識 - 참나를 깨달은 도인으로, 중생을 도의 문으로 들어가게끔 가르치고 인도하는 스승
설법 說法 - 바른 도를 깨달아 중생에게 풀어서 가르치는 것
설산 雪山 - 인도 히말라야 산의 옛 이름
섭수 攝受 - 자비심慈悲心으로 일체중생을 감싸 안음
성성晟晟하다 - 정신이 매우 선명하고 맑은 상태
세존응화 世尊應化 - 부처님께서 중생교화를 위해 몸을 나투신 일. 즉, 탄신을 일컬음. 1956년 제4차 세계불교대회에서 공식적으로 1956년을 불기2500년으로 정했다. 그 이전에는 각 나라마다 쓰던 불기가 달랐다.
소견 所見 - ‘참나’를 보아 알았다고 여기는 생각
소석가 小釋迦 - 작은 석가
속가 俗家 - 세속 집안
속심 俗心 - 세속의 오욕락五慾樂에 젖은 마음
송 頌 - 고인의 법문 속에 숨겨진 의의를 드러내어 그 뜻을 알리는 간결한 운문韻文
수미산 須彌山 - 불교의 우주관에서 우주의 중심을 이루는 거대한 산
수시 垂示 - 선사가 수행자의 역량을 시험해 보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질문을 던지는 것
수좌 首座 - 대중 가운데 수행의 맏이가 된다는 뜻으로, 조실 밑에 안목자眼目者를 일컬음. 근래에는 선방에서 참선하는 승려의 통칭으로 쓰이기도 함
수중봉 手中棒 - 손에 쥔 주장자
수처작주 隨處作主 - 어디에서든 주인이 되라는 뜻
순일 純一 - 잡다함이 없이 맑고 한결같음
습기 習氣 - 다겁생에 쌓고 익혀서 의식 속에 배인 습관
시상가첨 屎上加尖 - 똥 위에 똥을 더함
시은 施恩 - 시주자施主者로부터 받은 은혜
시자 侍者 - 큰스님을 시봉하는 이
시주 施主 - 사찰이나 스님에게 보시하는 일
시회대중 時會大衆 - 오늘 여기 모인 대중
식견 識見 - 학식學識과 견문見聞
식파 識破 - 어떠한 비밀이나 깊은 뜻을 알아내어 깨뜨려버림
신수봉행 信受奉行 - 믿고 받들어 잘 실천함
신심 信心 -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어 의심하지 않음
실상 實相 - 모든 존재의 참된 본성
심담 心膽 - 온갖 정성과 자신의 모든 것을 뜻하는 말
심안 心眼 - 일체의 본성을 바로 보는 마음의 눈
심인(-법) 心印(-法) - 형체가 없는 마음에 도장을 찍는다는 뜻으로, 인印은 거짓이 없이 확실한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므로 믿는다는 뜻. 그러므로 언어나 문자로 나타낼 수 없는 마음을 온전히 깨달아 얻은 진리를 말하며, 가섭 존자가 부처님으로부터 인가를 얻어 부촉받아 내려온 정통의 법
심정 心情 -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
십법계 十法界 - 불ㆍ보살ㆍ연각ㆍ성문ㆍ천상ㆍ인간ㆍ아수라ㆍ아귀ㆍ축생ㆍ지옥의 열 가지의 일체 모든 세계

[ ㅇ ]
아손 我孫 - 나의 자손
아손 兒孫 - 한 스승을 따르는 모든 제자
아종 我宗 - 나의 종풍
아집 我執 - ‘나’라는 허상虛相에 집착하는 것
안거 安居 - ‘참나’를 찾기 위해 일정 기간 한 곳에 머물며 수행하는 것
안목 眼目 - 마음으로 꿰뚫어보는 바른 눈
안심입명 安心立命 - 마음을 편안히 하고 명을 세움, 즉 ‘참나’가 머무르는 바 없이 머무르는 안락의 자리
안주 安住 - 편안히 머무름
알음알이 - 정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생각으로 헤아려 아는 지식적인 견해
앙망불급 仰望不及 - 우러러 바라보아도 미치지 못함
애착 愛着 - 은혜와 사랑의 정에 대한 욕망으로, 떨어지기 어려운 집착
앵무주 鸚鵡洲 - 중국 후베이성 무창현 서남쪽에 양쯔강과 그 지류인 한수漢水가 만나는 곳에 만들어진 모래섬
야호 野狐 - 여우
양구 良久 - 아무런 말없이 있음
양당 兩堂 - 동ㆍ서 양쪽의 선원 두 곳
어묵동정 語黙動靜 -말하고 조용하고 움직이고 고요한 상태
어룡 魚龍 - 물고기와 용을 아우르는 말
언하 言下 - 말의 끝나는 바로 그 자리, 즉 ‘말이 떨어지자마자’
업 業 - 집착한 결과로 나타난 상相
여래선 如來禪 - 진리의 세계로, 온 삼천대천세계가 텅텅 비고 비어서 성인聖人과 凡夫가 없고, 하늘세계와 지옥도 없어서 일체의 차별의 상이 없는 경지. 사전적 의미로 여래선이란 말은 중국 당나라 이후에 조사선祖師禪이란 말과 함께 쓰게 되었는데, 여래의 교설敎說에서 벗어나지 못한 선禪을 가리킴
여래장 如來藏 - ‘참나’의 다른 명칭, 중생의 번뇌 속에 덮여 가려진 부처의 성품
여래지 如來地 - 부처님의 경지
여여 如如 - 변함없이 똑같다는 뜻으로, 과거ㆍ현재ㆍ미래가 변함없이 진실한 모습
여탈자재 與奪自在 - 도인의 살림살이로, 주고 빼앗음에 자유자재함
역겁 歷劫 - 지내 온 여러 겁劫의 세월
열반 涅槃 - 타오르는 번뇌의 불을 완전히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를 완성한 경지로 대지혜ㆍ대안락의 경지
열반묘심 涅槃妙心 - 온갖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 대자유와 대안락을 수용하는 미묘한 마음
염불 念佛 - 부처님의 위없는 공덕을 찬탄하고 생각하는 기도 방법
염불선 念佛禪 - 선정과 염불을 병행하는 수행으로, 염불하면서 ‘염불하는 이놈이 누구인가’를 찾는 공부
영산회상靈山會上 - 인도 영취산靈鷲山에서 부처님께서 《법화경法華經》을 말씀하시던 자리
영초 影草 - 도인이 상대의 안목을 알아보기 위해 쓰는 방편을 이르는 말. 달밤에 도둑이 물건을 훔치기 위해 집안의 동태를 살피는 행위로, 풀을 뜯어서 달빛에 비추어 문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행위
예토 穢土 - 부정한 것이 가득 찬 중생의 땅
오도 悟道 - ‘참나’를 보아 진리를 깨침
오도송 悟道頌 - ‘참나’를 보아 진리를 깨치고 나서 그 세계를 글로 표현한 것
오매불망 寤寐不忘 - 자나깨나 화두 한 생각을 놓치지 않음
오매일여 寤寐一如 - 자내깨나 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성성한 공부
오추마 烏騅馬 - 중국의 초나라 항우가 탄 하루에 천리를 간다는 준마駿馬
오탁악세 五濁惡世 - 말세에 발생하는 피하기 어려운 사회적ㆍ정신적ㆍ생리적인 다섯 가지 탁한 세계
옥마 玉馬 - 옥으로 된 말
와력 瓦礫 - 사전적 풀이로는 깨진 기와 조각이라는 말로, 하찮은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외도 外道 - 바르지 아니하고 삿된 무리란 뜻으로, 진리를 마음이 아닌 밖에서 찾는 무리
외호 外護 - 바깥에서 잘 살피고 보호함
외호대중 外護大衆 - 정진하는 스님들의 공부를 뒷바라지해주고 보필해주는 스님들과 신도대중
요사인 了事人(=요사장부) - 대장부로써 할 일을 다 마친 사람
요체 要諦 - 중요한 점
용맹정진 勇猛精進 - ‘참나’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용맹스럽게 정진하여 나아감
용심 用心 - 마음을 씀
우뢰 - 천둥(=우레)
운력 運力(=울력) -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일하는 것
운수납자 雲水衲子 - 도를 묻기 위하여 선지식을 찾아다니는 수행승
운자 韻字 - 한시漢詩에서 글귀의 끝에 다는 글자
운집 雲集 - 구름처럼 많이 모여듦
운집종 雲集鐘 - 대중을 모으기 위해 치는 종
원주 院主 - 절 살림을 맡아보는 소임
위요삼잡 圍繞三匝 - 오른쪽으로 세 번 돌면서 경례敬禮하는 의식으로 최상의 예
위파사나 - 일종의 관법 수행
유나 維那 - 사찰에서 대중의 질서와 위의를 책임지는 소임
유심 唯心 - 일체가 다 마음으로 지어졌다는 뜻
유위법 有爲法 - 함이 있는 법, 즉 인연으로 이루어진 생멸하는 법
육도 六道 - 업에 의해 윤회하는 세계인 천상,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여섯 세계
육진 六塵 -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인식에 상대하는 여섯 가지 대상을 일컬음, 즉 빛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
은사 恩師 - 세속의 아버지와 같은 불가의 스승으로, 자신의 출가를 받아주고 이끌어준 스승
은산철벽 銀山鐵壁 - 은과 철은 뚫기가 아주 힘든 것으로, 높은 산과 견고한 성벽은 오르기 어려움을 나타낸 것. 즉 어떻게 손도 대볼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공부
응기접물 應機接物 - 도인의 살림살이로, 기틀에 맞추어서 만물을 제접한다는 뜻
의발 衣鉢 - 부처님 법을 전하는 상징물로서 가사와 발우
의정 疑情 - 의심하는 생각
인가 印可 - 형체가 없는 마음에 도장을 찍어 증명하고 허락한다는 뜻으로, 선지식이 제자의 깨침을 옳다고 증명인가證明認可하여 법을 전하고 진리의 전廛(회상)을 폄을 허락하는 것
인과응보 因果應報 - 원인에 따른 결과로 그에 상응하는 고통과 즐거움을 받는다는 뜻
인도 人道 - 육도六道 가운데 하나로 인간의 몸을 받는 세계
인아상 人我相 - 나와 남을 분별하여 집착하는 데서 오는 그릇된 생각과 행동
인아집 人我執 - 자기에 대한 집착. 즉 자기를 주재主宰하는 아我가 있다고 고집하는 잘못된 집착
일가견 一家見 - 부처님의 정견正見을 이룬 살림살이
일구 一句 - 최고 극칙의 진리
일기일경상 一機一境上 - 한 기틀과 한 경계 위
일념 一念 - 한 가지 생각
일념삼매 一念三昧 - 온갖 분별심과 망상이 사라지고, 나와 삼라만상이 오로지 간절한 화두 한 생각으로 꽉 찬 상태
일대사 一大事 - 아주 큰 일
일미 一味 - 한 맛, 바닷물이 온갖 물을 받아들여 짠 맛의 일미가 되듯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이 가리키는 한 가지 큰 진리. 사전적 의미로는 첫째 가는 좋은 맛
일방지사 一方之師 - 회상會上을 열어 한 산중의 스승이 된 선지식
일여 一如 - 한결같음
일일 一日 - 어느 하루
일진 日辰 - 그날의 운세
일할 一喝 - 상대를 경책하거나 깨우쳐주기 위해 ‘억!’ 하고 내뱉는 한 번의 할
일향 一向 - 언제나 한결같이
임운등등 任雲等等(=등등임운) - 도인의 살림살이로, 일체행동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자재하면서도 법도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음
임의자재 任意自在 - 도인의 살림살이로, 속박이나 구애됨이 없이 자유자재함
임제선풍 臨濟禪風 - 임제 선사께서 열어 보이신 독특한 진리의 전廛 또는 가풍家風
임제정맥 臨濟正脈 - 부처님의 법맥을 이은 임제 선사를 종조宗祖로 하여 내려오는 바른 법맥
입승 立繩 - 대중을 이끌고 법도法度를 세우는 소임
입적 入寂 - 적멸寂滅에 들어간다는 뜻으로, 선지식善知識ㆍ고승高僧의 죽음을 말함

[ ㅈ ]
자문 自問 - 자기 자신에게 물어봄
자비 慈悲 - 중생에 대한 평등하고 지극한 사랑으로, 깊은 이해와 연민의 마음을 나타내는 말
자비이타 慈悲利他 - 타인을 위하는 지극한 사랑과 연민
자연인연  自然因緣 - 자연自然의 현상을 보고 듣고 느끼는 인연
장군죽비 將軍竹卑 - 정진하는 대중에게는 졸음과 망상을 깨우는 경책의 도구로 쓰이고, 기타 대중처소에서는 대중의 행좌行坐와 위열位列을 바르게 하는 데 쓰이는 도구
장부 丈夫 - ‘참나’, 즉 불성佛性의 이치를 깨달은 이
장삼 長衫 - 스님들이 입는 법의法衣
장처 長處 - 좋은 점
재가자 在家者 - 속세에 사는 이
재범불용 再犯不容 - 다시 범하면 용서치 않음
재참 再參 - 부처님이나 어른 스님을 또다시 참배함
적멸 寂滅(=열반涅槃) - 번뇌가 모두 끊어져 인因ㆍ과果가 없고, 다시는 미혹迷惑한 생사生死를 계속하지 않는 고요하고 안락한 경계
적멸보궁 寂滅寶宮 -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
적자 嫡子 - 직계 제자
적적삼매 寂寂三昧 - 진리의 낙樂에 편안히 머무는 상태
적정 寂靜 - 모든 번뇌와 고苦를 멸한 해탈ㆍ열반의 경지로, 지극히 고요한 안락의 경지
전 廛 - 사전적 의미로는 가게라는 말로, 회상會上을 일컬음
전광석화 電光石火(=석화전광) - 번갯불과 부싯돌의 빛이 번쩍거리는 것과 같은 아주 짧은 찰나
전기대용 全機大用 - 도인의 살림살이로, 온전한 기틀의 큰 작용
전등 傳燈 -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진리의 바른 법맥을 전하는 일
전법게 傳法偈 - 부처님의 오묘한 법을 깨달아 이어받은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하는 게송偈頌, 곧 증서
전신자재 轉身自在 - 도인이 진리의 살림살이를 자유자재하게 쓰는 일
점수 漸修 - 순서와 차례를 거쳐 점차로 닦아 나아감
정각 正覺 - 바른 깨달음
정력 定力 - 선정의 힘
정(-법)맥 正(-法)脈 - 부처님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정통법맥
정법 正法 - 부처님의 바른 진리의 법
정법안장 正法眼藏 -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의 법을 이르는 말, ‘참나’를 깨달아 얻은 눈으로만 알 수 있는 깊고 오묘하며 비밀스러운 진리
정식 情識 - 중생의 어리석은 마음으로 번뇌망상을 말함
정액(-상) 頂額(-上) - 이마(-위)
정토 淨土 - 부처님이 계시는 청정한 국토
정해 情解 - 정情, 즉 집착과 분별심이 떨어지지 않은 알음알이
정해정식 情解情識 - 중생의 집착심과 분별심으로 살펴 아는 알음알이와 그러한 인식작용
제고 提高 - 높이 들어 올린다는 뜻
제방 諸方 - 전국, 여러 곳
제법 諸法 - 모든 진리
제불제조 諸佛諸祖 - 모든 부처님과 모든 조사스님
제석천왕 帝釋天王 - 수미산 꼭대기 도리천忉利天의 하늘 임금으로, 불법과 불교에 귀의하는 사람을 보호하며 아수라의 군대를 정벌함
조사 祖師 - 부처님의 진리의 법을 깨달아 ‘참나’를 찾은 도인을 가리키나, 일반적으로는 후세의 승가대중에게서 귀의와 존경을 받는 도道와 덕德과 행行이 높은 스님을 칭함
조사서래의 祖師西來意(화두) -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
조사선 祖師禪 - 진리의 세계로, 부처님으로부터 달마 선사에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내려오는, 부처님의 교설敎說 밖의 참된 선을 일컬음. 부처님(佛祖)을 비롯하여 모든 조사스님의 참된 살림살이이기 때문에 조사선이라 함
조실 祖室 - 바른 깨달음을 이룬 선지식으로 한 회상會上을 이루어 후학들을 견성見性의 길로 인도하는 선사
존자 尊者 - 존중尊重하고 덕이 있는 이를 공경하는 칭호
존후 尊候 - 윗사람의 건강이나 안부를 묻는 말
종사 宗師 - 한 종단이나 종파의 종지宗旨를 바로 깨달아 인도하는 큰 스승
종정 宗正 - 조계종단의 제일 높은 어른스님. 정신적 지주의 상징이며 종통을 계승하는 분
종지 宗旨 - 한 종단이나 종파에서 내세우는 근본 취지
종풍 宗風 - 한 종단이나 종파의 종지,품격,위의 등을 아우르는 말
좌정 坐定 - 자리 잡아 앉음
좌주 座主 - 법회나 모임을 주관하는 가장 어른스님
주력 呪力 - 불가의 전통적인 수행방법 가운데 하나로 진언眞言이라고도 한다. 불보살의 위신력을 담고 있는 비밀스러운 어구語句를 이르는 말
주석 住席 - 어른스님이 머물러 지내시는 것을 이르는 말
주장자 拄杖子 - 선사들이 법을 드러내 보일 때 쓰는 나무 막대기
주중빈 主中賓 - 주인 가운데 손님
주중주 主中主 - 주인 가운데 주인
주지 住持 - 그 사찰을 주관하는 사람
준걸 峻傑 -  높고 뛰어남
중생성 衆生性 - 본래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는데 탐貪ㆍ진瞋ㆍ치癡로 무명에 빠진 성품
증애 憎愛 - 증오와 사랑
지견 知見 - 수행정진 중 알았다는 생각, 즉 깨쳤다는 착각에 빠지는 경계로 선지식이 아니면 탁마해주기 어려운 경계
지음자(인) 知音者(人) - 서로 마음과 마음이 상통하는 사람
지혜 智慧 - ‘참나’를 깨달아 마음의 본바탕을 봄으로써 얻은 마음광명
진신사리 眞身舍利 - 부처님의 신골身骨
진의 眞疑 -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의심
집착 執着 - 사물ㆍ감정ㆍ도리를 고집하여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

[ ㅊ ]
착수처 着手處 - 사전적 의미로는 손을 부딪친 곳이란 말로, 법문의 낙처落處를 일컬음
찰나지간 刹那之間 - 지극히 짧은 시간
참구 參究 - 화두로서 참선 수행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것
참방 參榜 - 찾아가 뵘
참선 參禪 - ‘참나’를 깨닫기 위해 선법禪法을 참구하는 일
참학사 參學事 - 선을 참구하고 배우는 일
참학의지 參學意志 - 선을 참구하고 배우고자 하는 의지
참학인 參學人 - 선을 참구하고 배우는 수행자
천마외도 天魔外道 - 큰 마구니와 삿된 외도外道
천진묘도 天眞妙道 - 불생불멸의 참된 마음의 묘한 도리
천진불 天眞佛 - 불생불멸의 참된 마음자리의 부처
철우 鐵牛 - 쇠로 된 소
청정계 淸淨界 - 맑고 깨끗한 세계
청정법신 淸淨法身 - 깨끗하고 일체의 더러움이 없어서 진여眞如 법계法界의 이치와 일치하는 부처님의 참된 몸
청정본원 淸淨本源 - 티 하나 없이 깨끗한 근본 자리
초고 草稿 -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글이나 원고
초지보살 初地菩薩 - 초지ㆍ이지ㆍ삼지ㆍ사지ㆍ오지ㆍ육지ㆍ칠지ㆍ팔지ㆍ구지ㆍ십지ㆍ등각ㆍ묘각의 깨달음의 단계 중 맨 처음 단계
촌보 寸步 -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지극히 짧은 발걸음
총림 叢林 - 선원禪院을 중심으로 승가대학, 율원 및 염불원을 갖추고 본분종사本分宗師인 방장方丈의 지도 아래 대중이 여법하게 정진하는 종합수행도량
최상승 最上乘 - 참선수행을 통해 얻는 가장 높은 수행의 과위果位
출격장부 出格丈夫 - 일체의 격格을 벗어난 대장부
취모검 吹毛劍 - 가을철에 새로 돋는 동물의 아주 미세한 털끝을 가르는 날카로운 칼
친견 親見 - 선지식이나 어른스님을 찾아뵙고 법을 묻는 일
칠전팔도한 七顚八倒漢 - 일곱 번 구르고 여덟 번 거꾸러진 이를 뜻하는 말로, 아직 마음의 눈이 활짝 열리지 못하여 부딪히는 경계에 자유롭지 못한 공부인을 이르는 말

[ ㅍ ]
파사현정 破邪顯正 - 삿된 것을 깨부수어 바른 길을 드러내 보이는 일
파안대소 破顔大笑 - 매우 기쁜 표정으로 크게 웃음
평강 平康 - 마음이 평화롭고 안정됨
평상심 平常心 - 일체의 분별하는 마음에서 벗어난 지극히 순수한 마음으로, 목마르면 물 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을 자는 것과 같이 일체의 꾸밈이 없는 마음
평좌 平坐 - 참선을 위해 앉는 자세로, 한쪽 발 위에 다른 발을 얹고 척추를 곧게 펴서 바르고 편안하게 앉는 자세
포행 布行 - 산란한 마음이 없이 몸을 움직이는 행동 또는 경직된 몸과 마음을 푸는 행동
풍모 風貌 - 그 사람의 높은 격이 드러나 보이는 풍채와 용모
필경 畢竟 -  마지막, 최후

[ ㅌ ]
타심통 他心通 -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신통력
타파 打破 - 화두를 참구하여 깨닫는 순간을 ‘화두가 박살이 난다’ 라고 표현하는데서 온 말로, 화두의 숨은 이치를 깨치는 것
탁마 琢磨 - 옥석을 갈고닦는다는 뜻으로, 공부를 지어가는 과정에서 선지식, 선배, 도반, 대중에게 공부를 점검받으며, 공부를 바르게 나아가게끔 하는 일
탁발 托鉢 - 스님들이 발우를 가지고 시중에 나가서 음식을 얻는 것
탄지 彈指 - 손가락을 튕김
탐간 探竿 - 도인이 상대의 안목을 살피는 행위를 이르는 말. 사람이 물을 건너갈 적에 막대기로 그 물의 깊이를 살피는 행위
탐ㆍ진ㆍ치 貪ㆍ瞋ㆍ癡 - 악업을 짓게 되는 원인인 삼독.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
탕탕무애 蕩蕩無碍 - 도인의 살림살이로, 크게 확 트여서 걸림이 없음
탕탕자재 蕩蕩自在 - 도인의 살림살이로, 크게 확 트여서 자유자재함
통연 洞然 - 막힘이 없이 트여서 밝고 환함
투득 透得 - 화두를 투과하여 깨침을 얻음

[ ㅎ ]
하근(-기) 下根(-器) - 중생의 근기를 상ㆍ중ㆍ하로 나누는데 그중 가장 낮은 단계
하안거 夏安居 - 부처님 재세시在世時부터 있어온 출가 스님들의 여름 석 달(우기雨期) 동안의 수행 기간. 이 기간에는 일체 바깥출입과 연락을 끊고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함
하좌 下座 - 법상에서 내려옴
학인 學人 - 경을 배우는 스님
할 喝 - 선가禪家에서 쓰는 방편으로 ‘억!’ 하고 고함을 치는 것
행자 行者 - 승려가 되기 위해 출가出家하여 행行을 익히는 사람으로 아직 계戒를 받지 못한 이
해제 解制 - 일정한 수행기간을 마침
해탈(-법) 解脫(-法) - 모든 수행자가 얻고자 하는 대지혜, 대자유의 세계
행각 行脚 -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도를 닦음
행주좌와 行住坐臥 - 돌아다니고 머무르고 앉고 눕는 일상의 모든 행위
향엄상수화 香嚴上樹話(화두) - 높은 나무 위에서 입으로만 가지를 물고 매달려 있을 때, 밑에 지나가는 이가 ‘달마 스님이 서역에서 중국으로 오신 까닭이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어떻게 답해야 하겠는가? (중국 당나라 향엄香嚴 선사의 법문)
향상 向上 - 위로 향한다는 말, 구경究竟의 진리를 뜻함
향상일구 向上一句 - 지극한 이치를 드러낸 진리의 언구言句
향상일로 向上一路 - 부처님께서 전하신 지극한 이치로, 향상일로는 천성千聖도 전하지 못한다 함
향상사 向上事 - 가장 고준한 진리
향하사 向下事 - 아래로 향한다는 말로, 도인이 나투는 일상사 일체요, 진리의 자리에서 나투는 작용
허상 虛相 - 인연따라 모였다 흩어지는 실재實在하지 않는 상相
허허성 噓噓聲 - ‘허허~!’ 하고 길게 내뱉는 소리
현사 賢師 - 사전적 풀이로는 어진 선비라는 말로, 수행과 덕을 갖춘 납승을 이르는 말
현양매구 縣羊買狗(화두) - 양고기를 메달아 놓고 개고기를 판다
현전 現前 - 눈 앞에 나타나 있음
형적 形迹 - 사물의 형상과 자취나 흔적
혜명 慧命 -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는 지혜智慧를 본바탕으로 하므로 혜명이라 함
혜안 慧眼 - 오안五眼, 즉 육안肉眼ㆍ천안天眼ㆍ혜안慧眼ㆍ법안法眼ㆍ불안佛眼 가운데 하나. 우주의 진리를 밝게 보는 눈으로 모든 현상의 공空함을 보아 모든 집착을 여의고 차별의 현상계를 보지 않는 지혜
호리 毫釐 - 매우 적은 분량
호왈 號曰 - 이름하여
호여삼십봉 好與三十棒 - 30봉을 때림
호호탕탕 浩浩蕩蕩 - 가없이 넓고 큼을 형용한 말.
화두 話頭 - 종장宗匠의 말에서 이루어진, 참선자가 스스로 그 뜻을 깨달아야 하는 문제
화택 火宅 - 삼계三界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번뇌로 어지러운 것을 불타는 집에 비유한 것
화상 和尙 - 덕이 높은 스님
화주(-승) 化主(-僧) - 거리에 나가 여러 사람에게 시물施物을 얻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부처님 가르침에 인연을 맺게 하는 동시에 그 절에서 쓰는 비용을 구해오는 선승禪僧
확연명백 確然明白 - 아주 정확하여 의심할 것 없이 뚜렷하고 환함
확철대오 確徹大悟 - 일체의 번뇌와 망념이 조금도 남김없이 다 사라져 의심의 여지가 조금도 없이 홀연히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 것
환화 幻花 - 실체가 없는 허공 꽃
활구 活句 - 활발발한 진리의 세계를 가리킴. 활구를 가리켜 의심이 있는 화두라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임
활연대오 豁然大悟(=확연대오廓然大悟) - 화두 한 생각으로 깊은 삼매三昧에 들었다가 문득 소리를 듣거나 사물을 보는 순간, 화두가 박살나면서 마음 문이 환하게 열리어 깨달음을 얻는 것
황학루 黃鶴樓 - 중국 후베이성 무창현 서남쪽에 양자강과 그 지류인 한수漢水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중국의 3대 명루名樓 가운데 하나
회상 會上 - 법을 펴기 위해 세운 도량
회중 會中 - 회상 가운데
회향 廻向 - 스스로 쌓은 선근善根ㆍ공덕功德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어 다 같이 함께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
회호 回互 - 사전적 풀이로는 상호 순회한다는 의미로, 이理와 사事가 상호 의존관계에 있음을 뜻한다. 회호의 논리는 긍정과 부정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주인과 객이 언제라도 자리를 바꾸어 앉되, 결코 주객의 관계가 바뀌지 않는 것
흉금 胸襟 - 가슴속 깊은 곳

 

인물자료

문수보살 文殊菩薩 - 불법의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님으로 항상 부처님 왼쪽에 자리함
보현보살 普賢菩薩 - 문수보살과 함께 보살의 우두머리로서 부처님의 진리와 선정, 실천을 상징하며 항상 부처님 오른쪽에 자리함
마하가섭 摩訶迦葉 - (인도, 생몰연대 미상) 부처님 법을 이은[불조정맥] 초조初祖
보리달마 菩提達摩 - (남북조, ?~528) 중국 선종의 초조, 불조정맥 28조
이조혜가 二祖慧可 (남북조, 487~593) 중국 선종의 2조, 불조정맥 제29조
삼조승찬 三祖僧璨 (수, ?~606) 중국 선종의 3조, 불조정맥 제30조
사조도신 四祖道信 (당, 580~651) 중국 선종의 4조, 불조정맥 제31조
오조홍인 五祖弘忍 (당, 594~674) 중국 선종의 5조, 불조정맥 제32조
육조혜능 六祖慧能 (당,638~713) 중국 선종의 6조, 불조정맥 제33조
대통신수 大通神秀 (당, 606~706) 북종선의 개조, 홍인 문하
청원행사 靑原行思 (당, ?~741) 6조 혜능의 법을 이음
하택신회 荷澤神會 (당, 670~762) 대통신수의 제자로 육조혜능의 문하로 들어감
남악회양 南嶽懷讓 (당, 677~744) 6조 혜능의 법을 이음
남양혜충 南陽慧忠 (당, ?~755) 6조 혜능의 법을 이음
석두희천 石頭希遷 (당, 700~790) 청원행사의 법을 이음
마조도일 馬祖道一 (당, 709~788) 남악회양의 법을 이음
방온거사 龐蘊居士 (당, ?~808) 재가자로 마조도일의 법을 이음
서당지장 西堂智藏 (당, 735~814) 마조도일의 법을 이음
남전보원 南泉普願 (당, 748~834) 마조도일의 법을 이음
백장회해 百丈懷海 (당, 749~814) 마조도일의 법을 이음
고안대우 高安大愚 (당, 생몰연대 미상) 귀종지상의 법을 이음 
약산유엄 藥山惟儼 (당, 751~834) 석두희천의 법을 이음
황벽희운 黃檗希運 (당, ?~850) 백장회해의 법을 이음
목주도명 睦州道明 (당, 생몰연대 미상) 황벽희운의 법을 이음 
위산영우 潙山靈祐 (당, 771~853) 백장회해의 법을 이음
영운지근 靈雲志勤 (당, 생몰연대 미상) 위산영우의 법을 이음
월주건봉 越州乾峯 (당, 생몰연대 미상) 동산양개洞山良价의 법을 이음
조주종심 趙州從諗 (당, 778~897) 남전보원의 법을 이음
진주보화 鎭州普化 (당, ?~861) 반산보적의 법을 이음
덕산선감 德山宣鑑 (당, 782~865) 용담숭신龍潭崇信의 법을 이음
임제의현 臨濟義玄 (당, ?~867) 황벽희운의 법을 이음
삼성혜연 三聖慧然 (당, 생몰연대 미상) 임제의현의 법을 이음
앙산혜적 仰山慧寂 (당, 803~887) 위산영우의 법을 이음
설봉의존 雪峰義存 (당, 822~908) 덕산선감의 법을 이음
암두전활 巖頭全豁 (당, 828~887) 덕산선감의 법을 이음
향엄지한 香嚴智閑 (당, ?~898) 위산영우의 법을 이음
현사사비 玄沙師備 (당, 835~908) 설봉의존의 법을 이음
흥화존장 興化存獎 (당, ?~924) 목주도명의 법을 이음 
장경혜릉 長慶慧稜 (당, 854~932) 설봉의존의 법을 이음
운문문언 雲門文偃 (당, 864~949) 설봉의존의 법을 이음
취암영참 翠巖令參 (당, 생몰연대 미상) 설봉의존의 법을 이음
보복종전 保福從展 (당, 867~928) 설봉의존의 법을 이음
풍혈연소 風穴延沼 (송, 896~973) 남원도옹南院道顒의 법을 이음
석옥청공 石屋淸珙 (원, 1272~1352) 급암종신及庵宗信의 법을 이음
태고보우 太古普愚 (고려 말, 1301~1382) 석옥청공의 법을 이음
서산휴정 西山休靜 (조선, 1520~1604) 부용영관芙蓉靈觀의 법을 이음
사명유정 四溟惟政 (조선, 1544~1610) 임진왜란 당시 호국 선승
경허성우 鏡虛惺牛 (한국, 1846~1912) 만화보선萬化普善의 법을 이음
혜월혜명 慧月慧明 (한국, 1862~1927) 경허성우의 법을 이은 제자 중 상수제자上首弟子로서 불조의 법맥을 이음
수월음관 水月音觀 (한국, 1855~1928) 경허성우의 법을 이음
용성진종 龍城震鐘 (한국, 1864~1940) 환성지안의 법을 이음
만공월면 滿空月面 (한국, 1871~1946) 경허성우의 법을 이음
석우보화 石友普化 (한국, 1875~1958) 대한불교조계종 초대初代 종정
한암중원 漢巖重遠 (한국, 1876~1951) 경허성우의 법을 이음
효봉원명 曉峰元明 (한국, 1888~1966) 대한불교조계종 2대 종정 
운봉성수 雲峰性粹 (한국, 1889~1944) 혜월혜명의 법을 이음
동산혜일 東山慧日 (한국, 1890~1965) 용성진종의 법을 이음
원광경봉 圓光鏡峰 (한국, 1892~1982) 통도사 극락선원 조실, 당대의 선지식
태전금오 太田金烏 (한국, 1896~1968) 보월寶月의 법을 이음
고암상언 古庵祥彦 (한국, 1897~1988) 대한불교조계종 4ㆍ5대 종정
전강영신 田岡永信 (한국, 1898~1975) 만공월면의 법을 이음
청담순호 靑潭淳浩 (한국, 1902~1971) 대한불교조계종 3대 종정
향곡혜림 香谷蕙林 (한국, 1912~1978) 운봉성수의 법을 이음
퇴옹성철 退翁性徹 (한국, 1912~1993) 대한불교조계종 7ㆍ8대 종정
서옹상순 西翁尙純 (한국, 1912~2003) 대한불교조계종 6대 종정
서암홍근 西庵鴻根 (한국, 1914~2003) 대한불교조계종 9대 종정
노천월하 老天月下 (한국, 1915~2003) 대한불교조계종 10대 종정
혜암성관 慧菴性觀 (한국, 1920~2001) 대한불교조계종 11대 종정
혜광종산 慧光宗山 (한국, 1924~ ) 現 대한불교조계종 원로회의 의장ㆍ대종사
도림법전 道林法傳 (한국, 1925~ ) 대한불교조계종 12ㆍ13대 종정
원담진성 圓潭眞性 (한국, 1926~2008)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숭산행원 崇山行願 (한국, 1927~2004) 고봉경욱古峰景昱의 법을 이음
진제법원 眞際法遠 (한국, 1934~ ) 향곡혜림의 법을 이음. 現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ㆍ대종사, 동화사ㆍ해운정사 조실

 

 

후기

 

선사님을 곁에서 모시다보니 도인(道人)의 행리(行履)에 대해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배우게 됩니다. 선사님께선 인연 따라 사시며 인연을 거스르지 않으시고, 온갖 행을 하시되 그 자취나 흔적이 없으며, 참으로 무심하시어 호리만큼도 ‘나’ 라는 상(相)이 없이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가지가지의 방편을 보이십니다.
그러나 국자가 국 맛을 모르듯 선사님의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눈먼 거북이와 같은 신세이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러한 저희에게 또다시 선사님의 법어집을 편집하는 큰 인연을 맺어주시니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저희의 미혹함으로 선사님의 법향(法香)에 혹시 누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이번 법어집 편집 작업을 하면서 많은 것을 버리는 공부를 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이 주워 담았는지.
옛 도인께서 말씀하신,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아서 오로지 분별하는 마음을 놓아버리는 데 있다는 그 가르침을 분명히 이해하면서도, 경계에 부딪힐 때마다 분별심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 아직도 놓는 수행이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고, 그만큼 일여(一如)하지 못한 저희의 공부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부족한 소승들에게 ‘화두만 하면 된다’는 지극히 단순한 이치를 깨닫게 해주시고, 그에 따른 수행의 진보를 경험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며, 생사(生死)가 없는 영원한 대안락과 대자유를 분명히 누릴 수 있다는 신심을 더욱더 견고히 해주신 선사님의 크신 은혜에 지극히 감사드립니다.

이번 법어집이 출판되기까지 많은 분들의 은덕(隱德)이 있었습니다. 귀중한 조언과 함께 고준한 안목(眼目)으로 친히 서문을 내려주신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혜광 종산(慧光 宗山) 대종사님께 먼저 예 삼배를 올립니다.
또 법어집이 나오기까지 여러 가지로 후원을 아끼지 않으신 ‘매일경제신문’ 장대환 회장님과 모든 종이를 후원해주신 ‘무림페이퍼’ 이동욱 회장님 그리고 선풍이 널리 드날리도록 훌륭한 추천의 글을 써주시고 격려와 관심을 보내주신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님, ‘STX그룹’ 강덕수 회장님, 방송인 이상벽 거사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그리고 이 법어집이 나올 수 있도록 자기 일처럼 글을 다듬고 도움을 주신 서울
보문사의 성원(成源) 스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무엇보다도 항상 흐트러짐 없는 수행인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대원행(大願行) 보살님께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 덕분에 선사님의 귀중한 법어집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선사님께서 진리의 방편으로 열어 보이신 이 법어집에, 세상의 모든 분들이 소중한 인연을 맺으시어 ‘참나’를 찾아 영원한 대안락과 대자유의 삶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기축년 동안거에 들어가며
시자 金城, 道元 예 삼배 올립니다.

 

 

 

이전글 [법어집] 고담녹월(古潭漉月)
다음글 진제대선사 - 폴니터교수 본대담
리스트

번호 제목 법문장소 법문일자 조회
    법문 다운로드 받는 방법     10614
350   경자년 음1월 지장재일 법문 해운정사 원통보전 2020.02.11 3611
349   경자년 정초산림기도 입재 법문 해운정사 원통보전 2020.01.27 4955
348   기해년 음12월 지장재일 & 향곡대선사 열반 41주기 추모재일 법문 해운정사 원통보전 2020.01.12 4645
347   기해년 음12월 초하루 법문 해운정사 원통보전 2019.12.26 1529
346   기해년 음11월 지장재일 법문 해운정사 원통보전 2019.12.14 1683
345   기해년 음10월 지장재일 법문 해운정사 원통보전 2019.11.14 1547
344   기해년 음10월 영가법문2 해운정사 원통보전 2019.11.08 1351
343   기해년 음10월 영가법문 해운정사 원통보전 2019.11.06 1241
342   기해년 음10월 초하루 법문 해운정사 원통보전 2019.10.28 1241
341   기해년 음9월 영가법문2 해운정사 원통보전 2019.10.27 1158
340   기해년 음9월 지장재일 법문 해운정사 원통보전 2019.10.16 1178
339   기해년 음9월 영가법문 해운정사 원통보전 2019.10.12 1269
338   기해년 음9월 초하루 법문 해운정사 원통보전 2019.09.29 1210
337   기해년 음8월 지장재일 법문 해운정사 원통보전 2019.09.16 1262
336   기해년 음8월 초하루 법문 해운정사 원통보전 2019.08.30 1306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