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   Zen medi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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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와 깨달음
석가모니 부처님은 지금으로부터 2550여 년 전 인도의 코살라 왕궁에서 슛도다나왕을 부친으로 마야부인의 모태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생활을 하던 싯다르타였지만 마음속으론 항상 「‘나’라는 존재는 어떤 것인가?」 「생노병사의 고통에서 영구히 벗어나는 길은 없는가?」 하는 존재의 궁극적인 문제로 고민하였습니다.

어느 날 싯타르타는 성(城)의 4대문에서 각각 노인과 병자와 장례행렬 그리고 출가 사문(沙門)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이 가야할 길을 명확히 결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스물아홉 되던 해에 마침내 왕궁의 부귀영화를 헌신짝같이 버리고, 일체의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대안락의 길을 찾아 출가하였습니다.

싯다르타는 당시 인도에서 유명한 스승들을 모두 찾아가서 스승과 같은 최상의 경지에 도달했지만 ‘고통에서 영구히 벗어나는 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해답을 찾기 위해 설산(雪山)에 들어가 6년 동안 머리에 새가 집을 지어도 모를 정도로 깊은 선정(禪定) 삼매에 들었다가 어느 날 동쪽 하늘에 샛별이 반짝이는 것을 보시고 ‘참나’를 깨달아 위대한 부처가 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깨달으신 후 삼칠일(21일) 동안 깊이 생각하시고는, “제법(諸法)의 적멸상(寂滅相)은 가히 말로써 베풀 수 없는 것이니, 차라리 법을 설하지 않고 빨리 열반에 드는 것이 나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문수보살이 “부처님이시여, 깨달으신 법은 비록 그러하오나 방편이 있는 고로 하근(下根) 중생을 위해 옅은 법을 설하옵소서.” 하고 간청하니, 부처님께서 “그대의 말도 일리가 있다.” 하시고 45년 동안 중생의 근기에 따라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방편 설법, 『교(敎)』입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으셨던 골수의 진리는 팔만사천 법문 외에 따로 오직 이심전심(以心傳心),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불법의 정수(精髓)인 『선(禪)』입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많은 대중이 모인 가운데 설법을 하기 위해 법좌에 앉아계시는데 제석천왕이 우담바라 꽃을 올리니, 부처님께서 그 꽃을 들어 말 없이 대중에게 보이셨습니다. 대중들이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데, 가섭존자만이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보이신 뜻을 알고는 빙긋이 웃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을 가섭에게 부치노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염화미소(拈花微笑)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외에도 두 번 더 이심전심의 방법으로 가섭존자에게 마음을 전하였으니, 이것을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가섭존자에게 전해주신 선법(禪法)은 그 후로도 스승과 제자 사이에 오직 마음과 마음으로 법을 전하여 끊임없이 계승되었습니다. 반드시 먼저 깨달은 스승으로부터 인가받아 법을 계승하는 인증(印證)의 가풍(家風)은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부처님의 가풍입니다.
선의 역사와 간화선의 정립
부처님의 선법(禪法)은 가섭존자를 초조(初祖)로 해서, 가섭존자가 아난존자(2조)에게, 아난존자는 상나화수존자(3조)에게 전하여, 협존자(10조), 용수대사(14조), 학륵나존자(23조)를 거쳐 인도에서 스물여덟 번째로 보리달마 조사에게 전해졌습니다. 달마 조사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부처님의 선법을 전하여 동토(東土)의 첫 조사가 되었습니다.

인도에서 스물여덟 번째로 이 법을 물려받은 분은 보리달마 조사입니다. 달마 조사는 중국으로 건너와 부처님의 선법을 전하여 동토의 첫 조사가 되었습니다.

중국의 선종(禪宗)은 인도의 28대 조사이자 중국의 첫 번째 조사인 보리달마 선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부처님께서 전하신 선법은 초조 달마, 이조 혜가, 삼조 승찬, 사조 도신, 오조 홍인, 육조 혜능 선사를 통해 면면히 계승되어 선종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였습니다.

선(禪)은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마하가섭 존자에게 이심전심으로 전하고, 역대 조사들께서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왔기에, 이름하여 조사선(祖師禪)이라 합니다. 마하가섭 존자로부터 혜능 선사까지 선법을 이어온 조사(祖師)들은 모두 서른 세 분입니다. 그래서 삼십삼 조사 또는 삽삼조사(卅三祖師)라 일컫고 있습니다.

조사선을 중국에 실질적으로 정착시킨 분은 육조 혜능(六祖慧能 638~713) 선사입니다. 혜능 선사는 모든 사람이 본래 지닌 자성(自性)을 바로 보아 그 자리에서 몰록 깨치는 돈오견성(頓悟見性)을 천명하였습니다. 중국의 선종이 면면히 흐를 수 있었던 것은 혜능 선사가 이러한 돈오 선법을 온몸으로 펼쳐 냈기 때문입니다.

육조 혜능 선사의 제자인 남악 회양(南岳懷讓 677~744) 선사와 청원 행사(靑原行思 ?~741) 선사에게 각각 법을 전해받은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와 석두 희천(石頭希遷 700~790) 선사는 양자강 남쪽에 위치한 강서(江西)와 호남(湖南) 지방을 중심으로 조사선풍을 크게 진작시켰습니다. 마조와 석두 선사는 뛰어난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여 선종을 역사 속에 확고히 뿌리내리게 하였습니다.

마조 선사는 역사상 가장 많은 제자인 84인의 도인 제자를 두었습니다. 그의 법을 이은 상수(上首)제자인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814) 선사는 선원(禪院)의 청규(淸規)를 제정하고 중국에 최초의 선 수행공동체인 총림(叢林)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생활 원칙을 스스로 실천하여 자급자족하면서 수행에 전념하는 선원공동체의 기틀을 다져 선종을 역사의 반석 위에 우뚝 서게 하였습니다.

9세기에서 10세기 중반에 이르면 석두계에서는 조동종ㆍ운문종ㆍ법안종이, 마조계에서는 임제종ㆍ위앙종의 오가(五家)가 성립되었고, 다시 11세기 중반에 들면 임제종에서 황룡파와 양기파가 분립되니 이른바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는 중국 선종의 황금기를 누리게 됩니다. 이 오가칠종 가운데 위앙ㆍ법안ㆍ운문 3종은 차츰 쇠퇴하여 그 법맥이 단절되었으나, 임제ㆍ조동 2종은 후대에 더욱 번성하였습니다. 현재 한국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법맥도 임제종의 법맥입니다.

이후 오가칠종이 점차 쇠퇴하여 12세기 중반이 되면 조동종 계통의 굉지 정각(宏智正覺 1091~1157) 선사가 묵조선(默照禪)을 선양하게 되었고, 임제종 계통의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는 이를 비판하면서 간화선(看話禪)을 체계화하여 널리 확산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조사선은 다시 수행방법상 묵조선과 간화선으로 나뉘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에 이릅니다.

대혜 종고 선사가 체계화한 간화선은 조사선의 핵심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수행법입니다. 즉 간화선은 조사선이 강조하는 견성 체험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사스님들께서 마음의 본래 면목을 바로 드러내 보였던 말길이 끊어진 말씀을 ‘화두(話頭)’라는 형태로 잘 정형화해서 이 화두를 참구하여 마음을 깨치게 하는 탁월한 수행법입니다.
한국의 간화선
한국에 처음 선법이 전래된 때는 통일신라시대로, 당나라에서 유학한 구법승(求法僧)들이 혜능 선사의 제자들에게 선법을 받아 와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이루었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宗祖)인 도의(道義) 국사는 육조 혜능 선사의 4세인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 선사에게 선법을 받아옴으로써 조사선이 최초로 한국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고려시대에 이르자 이 구산선문을 통칭하여 조계종(曹溪宗)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혜능 선사가 머물며 돈오선법을 펼쳤던 산 이름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혜능 선사의 선법을 이은 선종이라는 뜻입니다.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 선사는 대혜 종고 선사가 체계화한 간화선을 처음으로 도입하였고, 진각 혜심(眞覺慧諶 1178~1234) 국사는 한국 최초의 공안집(公案集)인 선문염송(禪門拈頌)을 편찬하여 수행승들이 화두를 공부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간화선이 한국에 확고하게 정착된 것은 고려 말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1) 국사에 의해서입니다. 태고 보우 국사는 각고정진 끝에 선지(禪旨)를 깨닫고 중국 원(元)나라로 건너가서 임제정맥의 법등(法燈)이신 석옥 청공(石屋淸珙 1272~1352) 선사로부터 법을 인가받아 불조정전 57조로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中興祖)가 되셨습니다.

태고 보우 국사가 대한불교조계종의 중흥조로 숭앙받는 이유는 이러한 간화선의 수행체계를 확립한 점과 더불어 중국에서 임제종의 정맥을 이어와서 이 법맥이 현재까지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간화선법은 태고 보우 국사에 의해 한국에 완전히 정착되었고 주된 수행법으로 확고히 자리잡았습니다. 보우 국사의 선맥은 환암 혼수(幻菴混修 1320~1392), 구곡 각운(龜谷覺雲), 벽계 정심(碧溪正心), 벽송 지엄(碧松智嚴 1464~1534),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 선사로 이어졌고, 영관 선사에 이르러 다시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 선사와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 선사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게 됩니다.

서산 대사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청허 휴정 선사 문하에는 편양 언기(鞭羊彦機 1581~1644) 선사와 사명 유정(四溟惟政 1544~1610) 선사가 나왔고, 이 가운데 편양 언기 선사의 문파가 후대에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이 선맥은 다시 편양 선사에서 풍담 의심(楓潭義諶 1592~1655), 월담 설제(月潭雪霽 1632~1704), 환성 지안(喚惺志安 1664~1729) 선사로 이어집니다.

근세에 와서 조계종의 간화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분은 경허 성우(鏡虛惺牛 1846~1912) 선사입니다. 경허 선사는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조선시대 500년 암흑기를 몰아내고 한국 선불교를 중흥시킨 위대한 선지식입니다.

경허 선사 밑에서 훌륭한 제자들이 배출되어 네 분이 법을 전해 받았으니, 혜월(慧月)ㆍ만공(滿空)ㆍ침운(枕雲)ㆍ한암(漢岩) 선사입니다. 그 중 상수제자인 혜월 선사의 법맥이 운봉, 향곡 스님을 거쳐 오늘날 부처님의 제79대 법손이신 진제 선사에게 한 가닥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혜월 혜명(慧月慧明 1862~1937) 선사는 12세에 출가하여 후에 경허 선사로부터 “눈앞의 한 물건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받아 3년 동안 일념에 잠겨 참구하다가, 24세 되던 어느 날 신골을 치는 소리에 홀연히 화두를 타파하고 경허 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았습니다. 경허 선사의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안목이 투철했던 상수제자(上首弟子)로서 무심도인(無心道人)으로 유명했습니다.

운봉 성수(雲峰性粹 1889~1944) 선사는 13세에 출가하여 경율론삼장(經律論三藏)을 모두 섭렵했으나 진리의 본체에 한 걸음도 다가서지 못함을 통감하고 참선에 입문하여 정진하던 중, 35세 되던 1923년 부처님전에 대용맹의 발원을 세워 백일기도를 올리고 용맹정진하여 화두를 타파하고 혜월 선사로부터 인가받았습니다.

향곡 혜림(香谷蕙林 1912~1978) 선사는 16세에 출가하여 운봉 선사 문하에서 화두를 타서 정진하던 중 행자시절에 이미 화두를 타파하고 안목이 열렸습니다. 그 후 젊을 때부터 서로를 탁마하며 함께 수행하던 절친한 도반 퇴옹 성철(退翁性徹 1912~1993) 선사 등과 함께 봉암사 에서 더욱 정진하던 중 21일 동안 일념삼매에 빠졌다가 깨어나면서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진리를 깨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불조(佛祖)의 정문정안(頂門正眼)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으며, 한국 선종사에 향상일로의 깨달음의 세계가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전국 선원의 초청을 받아 납자를 지도하면서 월내 묘관음사에서 주석하고 계시던 중 ‘진제(眞際)’라는 뛰어난 제자를 얻게 됩니다.
진제선사의 수행과 깨달음
진제 선사께서는 1934년에 경남 남해에서 출생하시어, 20세 되던 1954년에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내신 석우 선사를 은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셨습니다.

이후 법(法) 스승이신 향곡 선사 문하에서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 화두를 받아 2년여 동안 용맹정진하여 화두관문을 타파하고 다음과 같이 오도송(悟道頌)을 지어 향곡 선사에게 바쳤습니다.

這箇拄杖幾人會(자개주장기인회) ..... 이 주장자 이 진리를 몇 사람이나 알꼬
三世諸佛總不識(삼세제불총불식) .....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다 알지 못하누나.
一條拄杖化金龍(일조주장화금룡) ..... 한 막대기 주장자가 문득 금룡으로 화해서
應化無邊任自在(응화무변임자재) ..... 한량없는 조화를 자유자재 하는구나.

향곡 선사께서 오도송을 보시고 벽력같은 물음을 던지셨습니다.
“용이 홀연히 금시조(金翅鳥)를 만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이에 진제 선사께서,
“당흉하여 몸을 굽히고 세 걸음 물러가겠습니다.[屈節當胸退身三步]”라고 답하시자, 향곡 선사께서는 “옳고, 옳다.” 하시며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역대로 내려오는 모든 법문에 확연명백하셨으나 ‘일면불 월면불(日面佛月面佛)’ 화두에 막혀 다시 5년여 동안 신고하신 끝에 마침내 화두를 타파하고 다시 오도송을 지으셨습니다.

一棒打倒毘盧頂(일봉타도비로정) ..... 한 몽둥이 휘두르니 비로정상 무너지고
一喝抹却千萬則(일할말각천만측) ..... 벽력 같은 일 할에 천만 갈등 흔적 없네.
二間茅庵伸脚臥(이간모암신각와) ..... 두 칸 토굴에 다리 펴고 누웠으니
海上淸風萬古新(해상청풍만고신) ..... 바다 위 맑은 바람 만년토록 새롭도다.

그 후 선사의 나이 34세이던 1967년, 하안거 해제 법회일에 묘관음사 법당에서 향곡 선사와 법거량(法擧揚)이 있었습니다.
향곡 선사께서 상당(上堂)하시어 묵좌(黙坐)하고 계시는데, 선사께서 나와 여쭈었습니다.
“불조(佛祖)께서 아신 곳은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불조께서 아시지 못한 곳을 스님께서 일러 주십시오.”
“구구는 팔십일이니라.”
이에 선사께서,
“그것은 불조(佛祖)께서 다 아신 곳입니다.” 하시니, 향곡 선사께서는
“육육은 삼십육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선사께서 예배드리고 물러가자, 향곡 선사께서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조실방(祖室房)으로 가셨습니다.
다음날 선사께서 다시 여쭙기를,
“불안(佛眼)과 혜안(慧眼)은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어떤 것이 납승(衲僧)의 안목(眼目)입니까?” 하니, 향곡 선사께서 이르셨습니다.
“비구니 노릇은 원래 여자가 하는 것이니라.〔師姑元來女人做〕”
그러자 선사께서,
“오늘에야 비로소 큰스님을 친견하였습니다.” 하시니, 향곡 선사께서 물으셨습다.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보았느냐?”
“관(關).”
선사께서 이렇게 답하시자 향곡 선사께서는,
“옳고, 옳다.” 하시며 임제정맥(臨濟正脈)의 법등(法燈)으로 부촉(付囑)하시며 전법게(傳法偈)를 내려주셨습니다.

付眞際法遠丈室(부진제법원장실) ..... 진제 법원 장실에 부치노라

佛祖大活句(불조대활구) ..... 부처님과 조사의 산 진리는
無傳亦無受(무전역무수) ..... 전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라.
今付活句時(금부활구시) ..... 지금 그대에게 활구법을 부촉하노니
收放任自在(수방임자재) ..... 거두거나 놓거나 그대 뜻에 맡기노라.

이로써 진제선사께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심인법(心印法)을 계승하는 79대 법손이 되셨습니다.
간화선의 현재
선사께서는 깨달음을 인가받으신 후 산중 스님들의 전유물이었던 참선법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하여 부처님과 같은 진리의 낙을 누리게 하려는 뜻에서 1971년 시변(市邊)에 해운정사를 창건하시고 선원을 개설하셨습니다. 이후 40여 년간 승속을 막론하고 참선법을 지도함으로써 선의 대중화, 생활화를 위해 진력하셨습니다.

1994년 동화사 조실로 추대되신 이후 해마다 여름안거, 겨울안거 결제에 임하는 전국 100여 개 선원, 2,000여 명의 수좌들과 재가 수행자들에게 결제법문을 내리시고, 참선 수행을 지도하며 안목을 점검해 주고 계십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해마다 여름 석 달, 겨울 석 달씩 전국 100여 개 선원에서 2,000여 명의 스님들이 부처님 당시의 안거 정신을 받들어 일제히 용맹정진에 들어갑니다. 이러한 안거 정신은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왕성한 실천수행 전통입니다.

2001년 봄에 국제무차선법회에 모실 선사를 초빙하기 위해 선의 종주국인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의 9개 대표 선찰을 방문하여 방장스님들과 법담을 나누고 깨달음의 안목을 점검하고 돌아오셨습니다.

2002년에는 한국의 부산 해운정사에서 한국불교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 일본의 선의 대종장(大宗匠)들을 초청하여 국제무차선대법회를 개최함으로써 한국 선(禪)의 역량을 세계에 알리셨습니다.

2009년에는 15,000명의 사부대중이 운집한 가운데 750년 만에 재현된 백고좌대법회의 법주로서 법문을 하셨습니다.

2011년 초 신학자 폴니터 교수와의 대담을 통해 큰스님께서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양정신문화의 정수인 한국의 간화선을 세계에 널리 전파하여 세계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80 노구에도 불구하시고 9월 15일 미국 뉴욕 리버사이드교회에서 각 종교지도자들을 비롯해 현지인들과 교포불자 1,7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세계평화를 위한 간화선 대법회'를 성대히 개최하셨습니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신 부처님께서 전해주셨던 동양정신문화의 정수인 선(禪)의 진리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와서 이제 바야흐로 서구(西歐)로 전하여지는 시절인연이 도래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