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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진제대선사 - 폴니터교수 본대담
법문장소 동화사 설법전 (법문일자 : 2010.12.31 / 조회 : 5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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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제 대선사 - 폴 니터 교수 대담

 

(녹취본)

 

 

(동화사 설법전, 2010.12.31 오후2시~4시)

 

사회자 : 이제부터 2011년 초조대장경 천년 평화메세지, 진제 큰스님과 폴니터 교수의 평화 대담을, 첫번째 막을 열겠습니다. 먼저 사회를 맡은 저는 박경희라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보도자료를 배포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후 시간에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제 연락처로 연락주시면 추가 보도자료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질문은, 아까 제가 질문지 나눠드렸었는데요, 모으셨습니까? 개별적으로 우후죽순 질문하는 것을 자제하기 위해서 미리 질문지를 쪽지를 적어주시면, 이쪽에서 질문을 겹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한분 한분 돌아가면서 하는 시간을 나중에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중간에 두 분 어르신의 대화를 방해하는 질문은 안 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싶어서 준비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협조 부탁드립니다. 질문입니까?
지금 매일경제하고 서울신문에서 질문지 들어왔는데요, 나머지 신문사에서는 질문 없습니까?
혹시 필요한 질문 있으시면 대화 중에 쪽지로 해서 저에게 전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 여기 뒤에 있겠습니다.
먼저 참석하신 분들 소개부터 드리겠습니다. 이번 행사를 위해서 먼길 오신 분부터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폴니터 교수님은 미국 유니언 신학교에서 종교간의 대화를 가르치시는 다원주의 종교학자이십니다. 학문적인 이론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종교간의 대화에도 깊이 관여해오신 학자이십니다. 달라이 라마, 데스몬드 투투 주교 등과 함께 평화평의회국제위원회의 이사로 활동하고 계시며, 그간 세계를 돌면서 많은 종교 지도자들과 대화를 이어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에 선불교를 대표하시는 진제큰스님을 이번에 뵈러 방한을 하신 것입니다.
지난 30년 동안 선수행을 직접 해오셨다고 하는데요, 그 부분에 관해서 관심있으신 분은 이따가 교수님께 질문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 진제 큰스님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한국 선불교를 대표하여서 이번 행사를 이끌어가실 진제 법원 대선사님은 1954년 석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1967년 대오견성 후 향곡 선사로부터 깨달은 도인으로 인가를 받아 법을 이어받으셨습니다.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유일한 법맥인 경허-혜월-운봉-향곡선사로 이어지는 한국 선불교의 정통법맥을 이어오고 계신 대선사이십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정신 지도자로서 이번 평화의 대화를 총괄 주관하고 계시기도 합니다.
다음에 함께 하실 분들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번 진행을 돕기 위해서 자리에 함께 해 주신 분입니다. 방식은 두 분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중심으로 하되 중간중간 끊어지는 흐름에 대해서는 종교학자이자 폴니터 교수님과 함께 유니언 신학교의 교수로 계시면서 불자로도 관음선종에서 법사로 활동을 하셨던 정현경 박사님이 진행 맡아주시겠습니다. 중간쯤에.
그 다음에 통역으로는 니터 교수님의 제자이기도 하고 함께 이번에 미국에서 들어오신 정경일씨 맡아주시겠습니다.
저희 쪽에 진제 큰스님의 통역은 지철스님이 맡아주시겠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신 분들은, 동화사에 금당선원과 동화사 승가대학교 소임자 스님들 다 함께 오셨구요, 저희 동화사를 대표해서 주지 성문스님이 간단한 인사말씀 해주시겠습니다.

 

성문스님 : 제 인사는 계획에 없던 거라서 간단히 말씀해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에 큰 선지식이신 진제 법원 대종사님께서 팔공산에 주석하고 계십니다. 미국에서 폴니터 교수님이 눈도 많이 오고 추운 날씨에 어제 저녁 늦게 도착하셔가지고 오늘 오전에 인사를 나눴는데요.
오늘날 지구상에서 종교현상이 여러 가지 복잡하기도 하고 또 한국 간화선, 한국 선불교, 이것을 세계에 널리 알릴 시기적으로 그럴 필요가 있는 이 시점에, 오늘 폴니터 교수님과 저희 진제 큰스님의 대담은 대단히 의미가 있지 않나 봅니다. 여러분 많이 도와주십시오.
(박수)

 

사회자 : 그러면 이제 마이크를 정현경 교수님께 맡기고 저는 뒤에 있겠습니다.

 

정현경 : 안녕하십니까? 정현경입니다. 오늘 이렇게 귀한 자리가 마련되어서 너무 기쁜데요, 일단 시작하기 전에 폴니터 선생님하고 같이 오신 폴니터 선생님의 사모님, 캐티 코넬 여사를 소개하겠습니다.
(대중 박수)
캐티 코넬 여사는 티벳 불교를 공부하시고 가르치시는 선생님이십니다. 그리고 오늘은 두 분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하다고 하십니다. 우리 한번 축하하는 의미로 박수 한번 쳐드리죠.
(대중 박수)
그럼 지금부터 우리 스님과 박사님을 모시고 불기2555년 초조대장경 천년 밀레니엄 평화대담 “가슴을 열어 빛을 보다” -Open the Mind, To see the Light- 대화모임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폴 니터 선생님께 여쭤보겠습니다.

“니터 선생님께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시고 이번 한국 방문을 결정하게 되셨는지요?”

 

폴니터 : 저는 오랫동안 제자인 정경일과 함께 불교-그리스도교 대화를 연구해왔고, 최근에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 불교의 존경받는 스님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국을 방문을 했습니다.
지금 제가 방문했을 때는, 제가 알기로는 남과 북에 군사적 긴장과 또한 최근에 그리스도인들과 불자들 사이의 갈등도 있는 시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최근 봉은사와 동화사를 들어와서 무례한 행동을 한 그리스도인들은 사실 전체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고,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동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불교에 대해 행한 무례에 대해서 깊이 사죄를 드립니다.
남과 북의 최근 긴장과 관련해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스위스 신학자인 한스 큉이 오래 전부터 말해왔던 “종교 간의 평화없이 세계 나라 간에 평화 없다.” 그리고 “종교 간의 대화 없이 종교 간의 평화 없다.” 이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러한 시점에서 그리스도인들과 불자들이 서로를 깊이 존중하고 이해하는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이것이 남과 북 사이에도 대화를 나누게 할 수 있는 하나의 예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정현경 : 폴 교수님, 감사합니다. 큰스님, 우리 폴 선생님 말씀 들으시고 어떻게 느끼셨는지 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구요, 그리고 또 스님께서 우리 폴 선생님한테 여쭤보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 수만 리 장도에 오신다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아시다시피 남북이 대치해 있는 이러한 시기에, 또 종교 갈등이 또 겸해서 모든 국민에게 불안을 안기고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그리스도인 폴니터 교수가 수만리 장도에 오셔가지고 한국을 염려해주시고 하니 대단히 반갑습니다.
앞으로 불교인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합심해가지고 인간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갈등을 해소하는 길은 오직 모든 종교가 머리를 맞대고 모든 세인(世人)을 인도해서 평화로운 국토를 만드는 것이 우리 종교인들의 책임이며 의무인 줄로 생각합니다.
폴 니터 교수님, 서구에 선불교가 유포돼가지고 수행을 더러 한다는 그러한 말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서구에 모든 분들이 이 선(禪)을 어떻게 수행을 하고 있는지 그것을 궁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폴니터 : 미국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와 정의를 위해 활동을 하고 있고, 평화와 정의는 어느 하나를 빼놓지 않고 항상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부터 저와 제 아내 캐이티가 엘 살바도르에 평화와 정의를 위해 활동을 해오면서 깨달은 것은, 평화와 정의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평화로와져야 한다는, 평화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동료 불자들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일할 때, 평화 액션 행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명상과 기도와 같은 영적인 수행도 함께 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명상과 행동은 늘 함께 가야된다는 것을 알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큰스님 : 잘 들어 알았습니다.

 

정현경 : 폴 니터 선생님한테 질문이 있는데요, 폴 니터 선생님께서는 카톨릭 신앙을 가진 집에서 태어나셔서 어린 시절에 사제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서른 살에 다시 사회로 돌아와서 학문적으로 신학을 연구하시며 비교종교학자로서 신앙에 다원주의적 시각을 갖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하느님이라는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적 전통 속에서 다원적 시각을 갖고 계시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으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갖게 되셨는지요?

 

폴니터 : 큰 질문인데요. 저는 아직도 로마 천주교인입니다.
저는 1922 ~ 1926년까지 로마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던 때에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특혜를 받았습니다.
2000명 이상의 카톨릭 주교들이 전세계에서 참석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굉장히 새로운 생각과 가르침들이 많이 나왔고, 그 중에 가장 중요했던 것은, 다른 종교 안에서도 하느님이 일하고 계시고, 다른 종교 안에도 진리가 있다는 것을 2000명 카톨릭 주교들이 함께 회의와 대화를 통해서 나눠졌었고,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다른 종교를 배우고 다른 종교와 대화하는 것은 단순한 기회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는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결정되고 만들어진 새로운 생각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궁극적 실재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내졌지만,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궁극적 실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른 종교들에서 다른 모습으로 저희들에게 다가왔다고 믿습니다.

 

정현경 : 폴 교수님, 진제 대선사님께 질문이 있으십니까?

 

폴니터 : 하나의 종교만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다원주의적 사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다른 종교들 안에도 당신을 나타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받는다 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그리고 이 구원이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도 다른 방식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구원은 불교에서는 아마 해탈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불교의 해탈이 다른 종교인들에게도 경험될 수 있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큰스님 : 종교의 자체가 인류를 구원하는 데 있습니다.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 그러한 요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종교는 개개인의 종교의 특징이 있지만, 그 가운데 다소의 심천(深淺)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어지로운 세상에 모든 종교인이, 심천은 차치하고, 모든 인류로 하여금 평화와 안락국토에 필경에 인도하는 데 촛점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 고로 불교의 진리는, ‘참나’ 가운데 우주의 진리가 다 있다고 봅니다. 그 참나는 모든 사람들이 개개인이 동등하게 갖추어져 있건마는, 알지 못하는 고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선불교는 동양의 정신문화의 자체를 만인류에게 바로 제시하는 그러한 간화선입니다.
사람 사람이 가지고 있는 참나는 시(始)와 종(終)도 없으며, 모든 우주의 생멸이 참나의 근원에서 다 이루어지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인류는 일상생활 가운데 참나를 발견하는 이 선수행을 꾸준히 일용(日用)에 연마하는 여기에, 밝은 지혜와 자비와 안락국토를 십분 이루리라고 봅니다.

 

폴니터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안에 참된 나가 있다고 할 때, 그리스도 성령이 우리 안에 있는 것, 그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나가 있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큰스님께서 우리 안에 불성을 구현한다고 하실 때, 그리스도인들도 우리 안에 말하자면 그리스도성을 구현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안의 그리스도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스승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스승으로 하듯이. 우리 바깥에 우리의 그리스도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고 지도하고 안내할 우리 바깥에 스승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큰스님 : 부처님 법에는, 우리 부처님께서도 진아(眞我)를 깨달으셨거든. 참나. 마야 부인 모태에서 나오면서 천상천아유아독존이라고 외쳤거든요. 그 진아 가운데 모든 진리가 갖춰져 있습니다. 동양의 간화선은 부처님 깨달은 골수인데...
모든 지혜와 모든 덕상이 갖춰져 있는 것을 만중생에게 드러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처님과 같은 지혜와 덕상을 모든 분들이 수용하고자 할진댄, 일상생활 속에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간화선의 화두 참구법인데, 이 화두 참구법을 일용에 참구하고 의심하고 의심해서 일념삼매가 지속되는 과정이 오면, 한걸음도 옮기지 않고 진리의 문에 들어가서 위대한 진리의 안목의 스승이 되는 법입니다.
그 참나 가운데는, 성인(聖人)도 없고 중생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미(迷)함도 없고, 항상 여여해서 일용사에 만인 앞에 진리의 전을 펴기도 하고, 만인앞에 진리의 전을 거두기도 하고, 만인 앞에 진리의 전을 쥐어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고 자재하게 씀이로다.

 

폴니터 : 불교에서 참 자아를 찾고자 하고 그것을 수행하고 명상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배울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마음으로 질문드리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불자들로부터 배울 것이 무엇보다도 명상이라고 하는데, 불자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불자들로부터 배울 수 있고 배우려고 하는 것은, 어떻게 참 자아를 찾고 어떻게 평화로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원과 깨달음을 위해서 노력을 하지만, 또한 이 세상에 무수한 고통과 불의가 있는 세상에서 세상을 바로 세우고 정의로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구조적 변화를 만드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큰스님 : 우리 불교에서는 첫째, 자아원성(自我圓成)을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자아원성을 뚜렷이 이루면 위대한 부처가 되고 위대한 도인이 됩니다. 모든 인류로 하여금 평화와 안락국토에 인도한다 그 말입니다.
자아의 밝은 진리를 갖추지 못하면 만중생을 인도할 그러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만 사람으로 하여금 일상생활 가운데 진아를 발견하는 간화선을 참구하라고 그렇게 항시 지도하고 있습니다.
간화선을 해서 진리의 언덕에 이를 것 같으면 팔만 사천 지혜와 팔만 사천 법문을 다 갖춰져가지고, 만중생을 지혜의 언덕, 열반의 언덕에 인도하는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 깨달은 자의 의무입니다.
우리 불교에서 보건대는, 예수교와 천주교에서는 봉사와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 것을 아주 감탄을 합니다. 내면의 세계를 바로 보는 그러한 선 수행을 쫓아서 자아완성을 이룸으로 인해서 천상천하의 유아독존의 자격을 갖추게 되는 법입니다. 한국 선불교의 독특한 일미(一味)가 바로 유아독존의 그 위상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폴니터 : 감사합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믿고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제가 세상에 나가서 일을 하기 전에 참 자아를 찾는 노력을 해야한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을 믿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자리에 앉아서 수행을 할 때 지금 바깥에서는 아이들이 굶어죽어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받고 있고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제가 더 수행을 해야, 지금 바깥에서는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제가 이 자리에서 수행을 해서 제 자아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큰스님 : 불교에 있어서도, 보현의 행(行)이 있고 문수의 지혜를 닦는 두 가지 양 수레바퀴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보현의 정신사상을 받들어가지고 일용에 일체중생을 한 분도 빠짐없이 다 부처님 국토에 인도해놓고 자기는 마지막에 성불을 한다 하는 그런 원력의 한편의 수행법이 있고, 한편은 모든 것을 다 이타행을 접어놓고 자기 우선으로서 대정안(正眼)을 갖추어가지고, 바른 진리의 눈을 갖추어가지고 일체의 중생의 지도자의 자격을 갖춰가지고 부처님 언덕에 인도하는 그러한 수행법이 또 형성이 되어 있습니다.

 

폴니터 : 제가 큰스님 말씀을 바르게 이해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우리는 ‘수행’과 ‘행동’ 두 가지가 함께 필요한데, 큰스님께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적인 것은 ‘수행’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큰스님 : 불가(佛家)에 있어서는 바른 수행을 해서 일체중생을 건질 수 있는 바른 진리의 눈을 갖추는 것이 우선입니다. 자기의 눈이 어두운데, 모든 중생을 안락국토에 인도할 수가 없거든요. 자기 눈이 밝아야 모든 중생을 이끌어서 안락국토에 인도할 수가 있고 바른 지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부처님법에 있어서는 ‘자기를 바로 보라.’ 자기 가운데 모든 진리가 있으니, 자기를 바로 봄으로 인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자격을 다 갖춘다. 그래서 전국에 우리 대한민국의 큰 사찰에는 다 선방이 있어가지고 자기의 자체를 바로 보는 선 수행을 깨달아가지고 모든 인류로 하여금 다 이끄는 그러한 정안을 갖추는데 촛점을 맞추어가지고 정진을 하고 있습니다.
제방(諸方)에서 참선하는 우리 선객(禪客) 스님네들은 자기가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데 촛점을 먼저 맞추고, 또 주지(住持) 등 외호(外護)하는 스님네들은 모든 이타(利他), 모든 일체 사람을 이롭게 선행을 닦는 데 촛점을 맞춰가지고 양 수레바퀴와 같이 함께 굴러나가고 있습니다.

 

정현경 : 그러면 진제 큰스님께서 폴 니터 박사님한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은 없으신가요?

 

큰스님 : 동양의 선(禪)이 서양에 유포가 더러 되고 있는 줄 압니다. 그 동양의 선의 맛을 어느 정도 보았는가, 만인에게 또 어떻게 선의 바른 지도를 하고 계시는가 궁금합니다.

 

폴니터 : 아시다시피 미국과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종교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불교이고, 하나는 이슬람교입니다. 그런데 이슬람교는 보통 이민자들이 들어오면서 성장하고 있지만, 불교의 성장은 개종(改宗)에 의해서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개종은 주로 유대교나 기독교와 같은 아브라함 신앙이라고 하는 서구 기독교나 유대교 전통에서 개종하는 불자들이 많습니다.
큰스님, 저는 불교를 매우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불자와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ㅎㅎㅎ)
제가 불교공부와 수행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깨닫고 발견한 것은, 1980년대부터 매일 명상을 해왔습니다. 불교는 제가 여태까지 가장 힘들게 씨름해왔던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의 여러 가지 것들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번에 스님께 한 부 보내드렸던 “부처님 없이 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다.” 라는 이상하지만 진실한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제가 그 책을 출간한 지 2년째가 되어가는데, 미국에 저의 많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제가 쓴 책의 내용과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고, 불교를 통해서 자신들의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을 새롭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비유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저는 불교의 안경으로 인해 제가 그동안 못 보아 왔던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새롭게 보고 있습니다.
최근의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상황을 여러분만큼 잘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저의 동료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한 그리스도인들으로서 불교의 ~했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복음은 진정한 복음이 아니고 예수님의 메세지를 완전히 이해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따르고 있지 않은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사랑받을 이웃만이 아니라,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웃들, 심지어 나의 적이 될 수 있는 이웃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의 성소(聖所)에 방문해서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들은 예수님의 복음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불자-그리스도인 대화를 매우 좋아하지만, 동시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도 매우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대화하는 것보다 큰스님과 대화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 같군요. (ㅎㅎㅎ)

 

큰스님 :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사실대로 잘 짚으셨네요. 우리 불교는 부처님 이후로 오늘날까지 투쟁을 부추기고 전쟁을 일으키고 이러한 일이 전혀 없습니다. 한 건도.
만중생이 선수행을 꾸준히 연마해서 마음의 고향에 이르면, 지구촌이 한집이고, 형상이 있고 모든 형상이 없는 것이 나로 더불어 둘이 아닙니다.
너와 나가 둘이 아닌데 무슨 투쟁이 있고 반목이 있겠느냐 그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도 며칠 전에 로마 교황청 교황을 만나고 서로 대담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모든 세계 종교인들을 2013년도 초청해가지고 평화의 공존을 이루게끔 모든 이 세상에 다툼이 없고 싸움이 없고 전쟁이 없는 그러한 평화로운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총무원장이 동분서주하며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폴 니터 교수님도 2013년도에 동참하셔서 모든 인류에게 평화의 선물을 선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폴니터 : 초청에 정말 감사드리며,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다하겠습니다. 동시에 여기 계신 유니언 신학교의 정현경 교수를 비롯하여 유니언 신학교도 함께 협력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큰스님 : 감사합니다.

 

정현경 : 그러면 20분간 휴식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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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경 : 2부 순서를 시작하겠습니다. 폴 선생님, 큰스님께 두 가지 질문이 있다고 하셨죠?

 

폴니터 :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스님께서 어떻게 수행해오셨고,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수행을 해오셨고, 깨달음은 어떤 것이었는지요?

 

큰스님 : 산승은 20세 당시에 출가를 했습니다. 3~4년 동안 화두와 씨름을 해가지고 공부하는 도중에 홀연히 알았다는 망견이 떠올라가지고, 이것을 진가를 가려야겠다는 그러한 생각이 나서 남방에 제일 가는 한국의 주류의 선맥을 이으신 위대한 향곡 대선사가 있었습니다.
향곡 선사를 찾아가서 예삼배를 올리고
“제가 공부하다가 지견이 나서 진가를 가리려고 왔습니다.”
하니, 향곡선사께서 즉시 물으시기를,
“진리의 바른 답을 해도 30방망이를 맞고, 바른 답을 못해도 30방을 맞는다”
그러시거든요. 그렇게 당당하게 물어오는데 벙어리가 됐습니다.
그러니 향곡 선사가
“수좌, 그런 것도 답을 못하면서 무얼 가지고 알았다고 하는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또 하나 묻겠네. 옛날 남전 도인 회상에 7백명 대중이 모여서 참선 정진을 하셨습니다. 법당을 기준해서 동편에 큰 선방이 있고, 서편에 큰 선방이 있어서, 7백 명 대중이 참선에 몰두하고 있는 차제에 그 절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는데, 동쪽 선방에서 참선하는 스님네는 그 고양이를 동쪽 선방 고양이라 하고, 서쪽 선방에서 참선하는 스님네는 그 고양이를 서쪽 선방 고양이라 해서 시비가 분분하더라. 남전 도인이 그 광경을 보고는 시자를 보고 ‘운집종을 쳐라’ 하니 7백명 대중이 다 모여들었다. 남전 도인이 대중을 위해 법문을 하시기 위해서 법상에 앉으셔가지고 시자를 불러서 ‘시자야, 고양이 잡아오너라. 칼 가져오너라.’ 함이로다. 시자가 고양이와 칼을 남전 도인에게 갖다 올리니, 남전 도인께서 고양이를 들고는 ‘동당에서 참선하는 스님네는 이 고양이를 동당 선방 고양이라 하고, 서쪽 선방에서 참선하는 스님네는 서쪽 선방 고양이라 하니, 금일에 이 고양이에 대해서 분명히 한 마디 이르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고양이를 살려두거니와 만약 바른 답을 못하면 이 고양이를 두 동강이 내리라.’ 하고 영을 내렸다. 7백명 대중이 ‘내고양이 네고양이’만 했지 남전도인이 고양이를 들고 이르라는 뜻은 아무도 몰랐다. 답을 못하니 약속과 같이 한 손은 고양이를 들고 한 손은 칼을 가지고 두 동강이 내쳐서 던져버렸다. 고양이를 두 동강이 내서 던져버리고 당신 조실방에 가서 편안히 쉬고 있는 차제에 당신 사랑하는 제자가 밖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돌아와서 ‘다녀왔습니다.’ 인사를 올리니, 남전 도인이 말하기를, ‘오늘 대중에게 고양이 법문이 있었는데, 그대가 만약 그 자리에 참여했던들 고양이를 들고 이르라고 할 때에 뭐라고 답을 한마디 하려는고?’ 그러니 조주 스님이 신을 머리에 이고 밖으로 나가버리니, 남전 도인이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그 대중가운데 물을 적에 참여했던들, 고양이를 살릴 뻔 했다.’ 신짝을 이고 나간 것이 바른 답을 했다 그 말이라. 그러니 향곡 선사께서 산승에게 묻기를, ‘조주 도인이 머리에 신짝을 이고 나간 것을 한번 일러봐라.’ 하거든. 그런데 그 묻는 데 있어서 답을 못하고 쩔쩔 매니 ”에잇 이 수좌, 그것도 모르면서 무슨 알았다고 하느냐 쫓겨났습니다.
한 2년 동안 제방 선방에서 참선을 하다가, ‘눈밝은 선지식을 찾아가서 바른 공부를 지어가야겠다’ 해가지고 바랑을 지고 향곡 선사를 다시 찾아갔습니다.
그 때 나이가 26살인데, 찾아가서
“선사님, 화두를 하나 내려주옵소서.” 했거든요.
그러니 향곡 선사께서
“이 어려운 관문을 네가 어찌 해결할 수 있겠느냐?”
하셨습니다.
“생명을 떼놓고 이 견성대도를 깨닫는 이 일에 몰두하겠습니다.”
했습니다.
“이 화두를 깨닫기 전에는 바랑을 지지 않겠습니다.”
2년 5개월 동안 일구월심 화두를 가지고 씨름을 했는데,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부처님전에 예불을 하러가는 차제에 도량이 어두워서 돌에 받혀가지고 넘어져서 홀연히 일어나는 차제에 화두가 타파되었습니다.
어떤 화두를 들어서 참구했냐 할 것 같으면,
중국에 향엄 도인이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서 나무가지를 잡지 않고, 나뭇가지를 의지하지 않고 밟지도 않고, 나뭇가지를 입으로 물고 드리워져 있을 적에, 밑에 지나가는 스님이 ‘달마스님이 서역에서 중국으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 데 있어서, 답을 하려니 몇십 길 밑에 떨어져 몸뚱이가 박살이 날 것이고, 답을 안 하려니 묻는 데 어기고.”
그 화두를 줘서 2년 5개월간 참구를 했습니다.
새벽 3시에 어두운 도량을 올라가다가 넘어져서 일어나는 찰나에 그 화두가 해결이 돼가지고 깨달은 경계를 글로 지어서 향곡 선사께 바치기를,
이 주장자 이 진리를 몇 사람이나 알꼬?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성인들도 이 주장자 진리를 알지 못함이로다.
한 막대기 주장자가 금빛 용이 되어서
용의 조화를 임의자재하게 부림이로다.

이 네 글귀를 써서 향곡 선사께 올리니, 앞의 두 글귀는 묻지 아니하고, 뒤의 글귀를 물으시기를,
“너 문득 용 잡아먹는 금시조를 만나서는 어떻게 하려느냐?”
벼락같은 물음이 왔습니다.
금시조라는 것은 어떠한 새냐? 구만 리 장천 높은 하늘을 날다가 배가 고프면 두 날개로 바닷물을 치면 40리가 쪼개지면 용을 잡아먹고 해서 사는 금시조인데, 그러한 무서운 금시조를 만나서는 어떻게 하려느냐?
굴절당흉퇴신삼보(굴절당흉퇴신삼보)니이다.
움츠려가지고 당황해가지고 몸을 세 걸음을 물러갑니다.
그렇게 답을 하니, 향곡 선사께서 “옳고, 옳다.” 했습니다.
이 공안이 해결됨으로 해서 모든 부처님과 도인이 설한 심오한 진리의 법문을 석화전광으로 주고 받았다.
모든 법문에 걸림이 없이 척척 답을 했으나, 몇년 후에 마조 도인 불안(不安)에, 임종시에
“밤새 선사님 편히 주무셨습니까?
항시 문안을 드리는데, 어느날 그렇게 문안을 드리니 대뜸 하시는 말씀이,
“일면불 월면불이니라.”
과거 부처님 두 분의 명호를 들어 말했다.
향곡 선사께서 마조 도인이 ‘일면불 월면불’이라 한 뜻이 어디에 있는고?
모든 부처님과 도인의 심오한 진리의 문답은 척척 답을 했는데, 거기에 막혀가지고 5년 동안 씨름을 했다.
‘어째서 일면불 월면불이라 했는고?’ 이 화두를 들고 5년 동안 씨름을 했다.
그래가지고 5년 세월이 흘렀는데, 해운대나 월내 묘관음사나 남방이 돼서 눈이 잘 안옵니다. 내가 부산 해운대에 40년을 살았지만, 눈 많이 온거 한 번 봤습니다.
월내 묘관음사에 9년여 동안 참선정진하며 지냈지만 눈 오는 때가 없었는데, 거기에 음력으로 정월달에 마당에다 큰 통에다 물을 잔뜩 담아놨는데, 아침에 자고 나오니까, 산과 바다에 눈이 자욱하게 있었는데, 그 통 안에 물이 가득하니 눈이 한 송이도 없더라. 물에 다 녹아서.
그 통에 물을 보는 찰나에 ‘일면불 월면불’ 화두가 해결이 되었다. 5년 만에 그 화두가 해결이 돼가지고 향곡 선사께 글을 지어 바치기를,
한 몽둥이를 휘둘러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정상을 거꾸러뜨리고
벽력같은 할을 해서 천만의 부처님과 모든 도인의 심오한 진리를 싹 문대버린다.
거기 공부하는 토굴 띠암자에 다리를 펴고 누웠으니
바다 위에 맑은 바람 만년토록 새롭구나
이렇게 깨달은 경지를 글로 써서 바치니,
“부처님의 심인법이 쭉 내려와서 육조, 마조, 임제를 좇은 그 가풍이 이 글 속에 다 있구나!”
하고 극찬을 하셨습니다.
정미년(1967년) 해제일에 대중을 위해서 해제법문을 하기 위해서 법상에 앉아계시는 차제에, 나가서 예삼배를 올리고,
“선사님께 한 가지 묻고자 합니다.”
“모든 부처님과 모든 성인이 아신 진리는 묻지 아니하거니와, 모든 부처님과 모든 성인이 알지 못한 심오한 진리의 한 마디를 일러주십시오.” 했거든.
향곡 선사께서 답을 하시기를,
“구구는 81이니라.” 하시거든.
“그것은 모든 부처님과 성인이 아신 진리입니다.”
그러니 향곡 선사께서
“육육은 36이니라.” 하시거든.
‘육육은 36이니라’ 하는 데 있어서는 가타부타 안하고 큰 절을 하고 나오니, 향곡 선사께서
“오늘은 해제법문을 다해 마쳤다.” 하고 법상에서 내려옴이로다.
뒷날 장삼과 위의를 갖춰가지고 조실방을 찾아가서 다시 묻기를,
“부처의 깨달은 진리의 눈과 지혜의 눈은 묻지 아니하거니와, 어떤 것이 납승의 깨달은 눈입니까?”
향곡 선사께서,
“사고가 원래여인주니라. 나이 많은 비구니는 원래로 여자가 중노릇 하느니라.”
그래서 산승이
“금일에야 선사님을 바로 친견했습니다.” 9년간 한 절에서 살았거든.
9년간 한 절에서 살면서 일거일동 같이 생활을 했는데, 금일에야 선사님의 진짜 깨달은 살림살이를 바로 봤습니다. 하니까
“너게 어느 곳에서 나를 봤는고?” 하거든.
“빗장관자 관(關).”했습니다.
그렇게 답을 하니 흡족하게 진리의 눈을 갖췄다 하시면서 인증서를 내려주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내려오는 깨달은 바른 진리의 인증서를 내리시기를,
진제에게 부치노니,
부처님과 조사의 큰 깨달은 진리는,
전할 수도 없고 또한 받을 수도 없나니
이제 그대에게 전하노니
만사람에게 진리의 전을 펴거나 거두거나 그대에게 맡긴다.
이것이 부처님으로 좇아서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한가닥 한국의 간화선의 골수를 전하고 받은 과정입니다.
이 깨달은 살림살이는 오늘날 중국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고 오직 한가닥 한국에만 쟁쟁하게 살아있습니다.

 

폴니터 : 두번째 질문은 오늘 아침 큰스님께서 제게 주신 법명과 관계된 것입니다. 그 법명은 진아(眞我)였습니다. 아침에 큰스님께서 제게 법명과 화두를 주셨을 때 무척 감동했습니다. 왜냐하면 참나, 진아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 복음서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참 자아를 찾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스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 화두인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 주신 질문은 제가 정말 진지하게 계속 씨름해야 할 질문입니다. 내가 부모를 통해서 태어나기 전에 나는 누구였는가?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나의 참자아인가를 수천번 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스님께서 그 화두를 주시고 스님께서 화두를 참구하시고 답을 얻으셨던 과정에서 2년 반, 5년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미 71세입니다. 제가 시간을 갖고 있습니까? (ㅎㅎㅎ)
스님께서 넘어지셨다 일어나시면서 깨달음을 얻으셨던 거, 그리고 눈 사이에 있는 물통에 있는 물을 바라보시면서 깨달으셨던 거.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통제하거나 만들어낼 수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제게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모든 순간에 화두를 놓치지 않고 씨름을 하고 그리고 기다리는 것. 제가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은, 아마 그리스도인으로서 드릴 수 있는 질문일텐데, 제가 이 기다림을 통해서 깨달음의 순간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신뢰하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죽기 전에.

 

큰스님 : 이 견성하고 깨닫는 과정은 시간에 구애를 안받습니다.
모든 인류가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이 화두를 들고 오매불망 간절히 삼대독자 외아들 다 키워놨는데, 홀연히 비명에 간 부모의 심정. 먹고 입고 자는 걸 다 잊었거든. 그와 같이 간절히 마음에 우러나는 의심을 밀고 밀 것 같으면 거기는 시간 공간을 초월해버립니다.
그 간절한 의심이 지속되는 이 과정에는 남녀노소 구별이 없습니다. 깨닫는 과정은 얼마만큼 간절한 일념이 지속되느냐 거기에 깨닫는 열쇠가 있습니다.
간절한 의심이 지속되면 잠깐 앉아 있는데, 며칠이, 몇달이 흘러갑니다. 이러한 경계가 오면 사물을 보는 찰나에 사람을 보는 찰나에 소리를 듣는 찰나에 화두가 박살이 나면 한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성불을 하고 부처님 지위에 이르는 겁니다.
이러한 깨닫는 과정은 눈밝은 선지식 밑에 바른 지도를 받고 바른 공부를 지어간 자만이 그러한 것을 쟁취할 수 있는 것이지, 스스로 혼자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폴니터 교수에게 한 가지 묻고자 하는데, 보통 고서에 보면 예수님이 13세에 절로 와가지고 29세까지 티벳으로 인도로 그렇게 유랑하면서 중놀이를 하다시피 했습니다.
13세에서 29세까지 절에서 기거하면서 모든 불경을 다 익히고 배웠습니다.
그이가 실지 참나를 깨달아가지고 만인에게 설교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부처님 경전을 의지해서 보고 들은 견문각지로서 모든 이들에게 교화를 하고 다닌 줄로 압니다.
그래가지고 33세에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는데, 이 진리의 세계는 실답게 깨닫고 실답게 참구해서 실답게 깨달아야 진짜 살림살이고 만인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내서 바른 지도자가 될 수가 있는 겁니다.
예수의 일생 수행의 과정이 적나라하게 진리를 깨달은 그 살림살이를 드러내놓은 게 있습니까?
그점에 대한 해명을 좀 듣고자 합니다.

 

폴니터 : 저도 예수님이 티벳에서 공부를 했다는 그런 기록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습니다. 제 지식에 비춰볼 때, 제한된 지식이긴 하지만, 그것은 역사적 자료가 없는 역사적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가 정말 티벳 혹은 인도에 갔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면, 그러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저희에게 큰 기쁨이 되겠습니다.
예수께서 그가 살던 고향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갔을 때 바로 그곳에서 그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봅니다.
바로 여기에서 깨달은 자로서의 예수와 깨달은 이로서의 부처님의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두 분 모두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 실현은 다른 방식으로 실현했다고 봅니다.
이 깨달음의 차이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묘사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서 좌선하고 계신 모습으로서 깨달음이 묘사되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힌 모습으로 깨달음이 묘사됩니다.
저는 두 묘사 중에 부처님의 모습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깨달은 모습 중에서 어느 하나가 우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붓다의 깨달음의 모습은 붓다의 참 진아를 찾아서 평정을 이루었던 그런 모습으로서 이미지를 생각할 수 있겠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깨달음의 경험은 로마의 압제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 불의의 현실 속에서 그들을 위해서 투쟁하고 저항하는 그런 모습으로서 행동으로서의 깨달음을 묘사한다고 보여집니다.
부처님과 예수님 모두 당신들께서 깨달은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세상으로 나투셨지만, 예수께서는 로마제국의 압제 속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셨고 그 불의한 정치적 질서에 맞서 싸우셨고 그 결과로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아까 말한 것을 다시 언급하지만, 부처님과 예수님은 두 분 다 깨달은 분이시긴 하지만, 두 분의 가르침의 방식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둘은 모순되거나 충돌된다기보다는 서로 보완될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먼저 자기의 참 자아를 발견할 필요가 있고 그런 후에 행동해야 된다고 말씀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정의를 위해서 또한 불의한 정치적 질서에 맞서서 타인의 고통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현실에 관여할 필요가 있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두 가지 다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큰스님.

 

큰스님 : 잘 알았습니다. 종교라는 것은 만인은 안락의 국토에 인도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다 종교의 장처(長處)가 있습니다.
앞으로 모든 종교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인류를 구원하는 그러한 장을 자주 베풀면 좋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정현경 : 감사합니다. 스님이 폴 선생님을 위해서 선물을 준비하셨다고 하는데요.

 

큰스님 : 처처작주(處處作主)라. 가는 곳 마다 모든 중생의 주인을 지으소서. 광도중생을 하옵소서. 그 말입니다.
신묘년 새아침 진아거사(眞我居士)를 위해서 해운정사 진제가 선물을 드립니다.

 

폴니터 : 감사합니다. 뭐라고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큰스님 : 건강하시고, 만수무강하시고, 모든 인류를 편안한 국토에 많이 인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폴니터 :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회자 :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질문이 좀 들어왔습니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귀하신 두 분을 다시 뵈올 수 있는 시간이 없을 것 같구요. 두 분께 질문을 드리는 시간을 마련해보겠습니다.
먼저 대부분의 질문이 지금의 종교간의 갈등에 대한 질문 많으셨습니다. 그 갈등을 지금 끝까지 해소하는 방안을 여기서 해결책을 나오는 것은 무리인 것 같구요, 요번 대화가 일주일간 지속되니까, 그것은 마지막날 5일날 국제선센터에서 해답을 마련해보기로 하구요.
그리고 갈등의 이유에 대해서는 오늘 저녁 7시 반에 수좌스님들하고 동화사 스님들과 같이 얘기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께는 지금 현대불교신문의 이상은 기자님 질문을 드리겠는데요,
폴 니터교수님께 “한국에서 기독교가 왜 다른 종교와 또는 기독교간의 대화가 어렵다고 보는지 그 질문에 대해서 답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폴니터 : 그것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하는 역할에 대한 이해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깨달음은 예수를 통해서 받을 수 있고 실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예수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발전하면서 이제는 로마 제국의 종교로 발전해갑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의 원래 메세지는 로마 제국에 맞서는 반대하는 메세지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 제국에 반대했던 예수님의 메세지가 로마 제국의 메세지와 동일시 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말하는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로마 제국 안에서 발전하게 됩니다.
정치적으로 로마 제국이 유일한 정치권력으로 이해되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진리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종교로 이해되게 되고, 그 결과 마치 로마가 다른 나라들을 정복했듯이 기독교 역시 다른 종교를 정복하려는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하여 그리스도인 신학자들이 노력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원래 복음의 메세지였던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것 그것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리스도교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하는 그런 주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의 한 가지 현상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곳 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복음주의적, 보수적이고, 근본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깨달아가고 있는 것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종교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 종교들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그들 스스로도 알기 때문에 두려움을 갖게 되는데, 그 두려움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어 왔던 유일성-진리를 유일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잃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다른 종교들에게 맞서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자님들께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불자님들이 아셔야 할 것은, 지금 보수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다른 종교에 맞서서 대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본래 복음의 메세지를 알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오히려 불자님들이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자비로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불자들을 미워할지라도 그것을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원래 복음의 메세지로 돌아올 수 있도록.

 

사회자 : 감사합니다. 이것으로서 서울신문 박록삼 기자님 등의 질문은 모든 게 답변이 된 거 같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큰스님께 여쭤볼 영남일보 김은경 기자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물질만능 시대로 가고 있는데요, 이때 종교의 역할은 무엇인지 큰스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큰스님 : 물질 풍요는 한량없이 모든 인류가 누리고 있지요. 그러나 중생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끝없는 욕망을 잠재우는 데 있어서는 우리가 일상생활에 꾸준히 지혜를 밝히는 선수행이야말로 큰 행복을 갖다주고 모든 인류로 하여금 한마음으로 뭉쳐가지고 평화를 이루는 원동력이 되리라 봅니다.
인생은 오늘 있다가 내일 가는 것이 인생인데, 그러하나 물질만능주의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면 다음 생이 불행하기가 한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맑은 정신 밝은 마음에 수행을 잘 길들일 것 같으면 다음 생에 좋은 여건에 태어나서 복락을 누리리라고 봅니다.
옛 도인들이 말씀하시길,
“사람들이 빈한하게 사는 것은 지혜가 짧아 그렇다. 말이 야위면 털이 길다.”
하셨습니다. 밝은 지혜를 갖춰서 나고 날 적마다 출세와 복락을 누리고자 할진댄, 모든 국민이 일상생활 속에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이 화두를 들고 오매불망 씨름을 함으로 인해서 모든 마음의 갈등은 다 없어지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닦아 행복을 누리는 밝은 지혜를 증득하기 위해서 꾸준히 생활속에 참선정진에 몰두하면 평화로운 가정과 평화로운 세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떤 것이 참나던고?’ 이 화두를 들고 오매불망 씨름을 하면 모든 업이 다 소멸이 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업이 소멸이 되고, 일월과 같은 밝은 지혜가 현전해가지고 나고 날 적 마다 멋진 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인류여! 참나를 찾는 이 수행을 멋지게 멋지게 잘 지어가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이 마지막 말을 모든 분들에게 제의합니다.

 

사회자 : 자 이것으로서 오늘 기자간담회와 두 분 첫번 째 평화의 대화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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