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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진제대선사 - 폴니터교수 대담 (KBS촬영)
법문장소 해운정사 금장실 (법문일자 : 2011.01.03 / 조회 : 4293)

 

 

진제 대선사 - 폴 니터 교수 대담

(녹취본)

 

 

KBS PD : 이런 조사가 있습니다. ‘나는 행복하다’고 느끼는 한국인이 7%라는 조사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데, 구도(求道)의 삶과 연구의 삶을 사시는 두 분이신데, 사시면서 어떤 순간에 행복한 느낌을 가지셨는지, 그런 구도의 삶을 통해서 행복의 조건은 뭐라고 생각하시는지 대담을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폴 니터 : 저는 언제 행복하다고 느꼈느냐 하면, 다른 분들과 삶을, 생명을 나눌 때 제일 행복하다고 느꼈습니다.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과 나의 생명력, 삶의 에너지를 주고받을 때 제일 행복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엘 살바도르에서 농민들이 독재정권에 반대해서 자기네 권리를 외칠 때, 그들과 함께 서서 도와주면서 그때 주고받았던, 그들을 도와주는 것만 아니라 또 그들을 도와줌으로써 내가 받았던 그 생명감, 그걸 느꼈을 때가 제일 행복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제가 느꼈던 그런 생명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고, 또 큰스님은 어떨 때 행복감을 느끼십니까?

 

큰스님 : 우리나라 해방 전후에 그때 모든 생활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의식주가 궁핍하고, 삼시 세때 밥을 못 먹는 그러한 시기였습니다. 모든 국민이 그런 생활을 겪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6.25가 터지고, 그런 후에 박정희 정권이 들어섬으로 인해서 서서히 민생이 안정이 되고, 경제가 서서히 살아나고, 모든 국민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이 이만큼 잘 사는 것은 다 박정희 대통령의 선정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국민이 살아가는 데 물질풍요도 중요하지만, 정신풍요가 더 앞서야 된다고 봅니다.
옛 성인들도 말씀하시기를, “부족하다 하면 한이 없고, 넉넉하다 하면 아주 여유가 많은 법이다.” 하셨습니다. 모든 국민이 이러한 좋은 말씀에 의지해서 생활을 해 가실 것 같으면 마음도 즐겁고 모든 국민이 일체가 되어서 세계 속의 일등국민이 되리라 봅니다.

 

폴 니터 : 스님께서 정신세계가 물질세계보다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겪어보니까 기본적인 의식주나 건강, 병원에 갈 수 있는 능력이라든지 그런 기본적인 물질적인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행복하기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특히 어린 아이들이 있을 때, 가족이 있을 때, 가족의 의식주와 건강문제를 챙길 수 있는 물적인 기반이 없다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그래서 물질적인 기반만으로 행복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게 너무나 필요하고 그 필요가 충족돼야 그 다음에 정신적인 행복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스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큰스님 : 니터 교수님 생각이 옳습니다. 모든 인류는 생활 속의 풍요를 누려야 만족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첫째 행복의 조건이 물질풍요지요. 일상 살아가는데 모든 것이 부족하면 고뇌를 느끼고 허무를 느끼고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처님 말씀과 같이 인과응보를 생각해야 됩니다. 금생에 우리가 이웃과 같이 잘 베풀면서 착한 마음으로 사는 이러한 씨앗을 뿌릴 때 좋은 행복의 결과가 옵니다. 착한 씨앗을 뿌리지 아니하면 고통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항시 모든 분들은 이웃을 도우면서 착한 행을 해서 베푸는 그러한 용심을 하면 그것 이상 더 행복한 게 없습니다. 주는 자도 행복하고, 받는 자도 행복하고. 또 그러한 가운데 인과응보라는 것은 삼생(三生)이 연결이 되어 돌아갑니다. 과거가 있으면 현재가 있고, 현재가 있으면 미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삼생 가운데 항시 모든 사람들은, 나고 날 적마다 출세와 복락을 누리고자 할진대, 좋은 인연, 많이 베푸는 복과 덕을 지어야 되고, 또 한편으로는 아무리 물질이 풍요하다고 해도 중생은 욕심이 하늘을 찌릅니다. 그런 때문에 그 욕심이 하늘을 찌르는 데 있어서는 고(苦)가 따르는 법이거든요. 고통이. 그러니까 부처님 말씀과 같이 ‘참나’를 밝히는 이 선 수행을 꾸준히 연마하는 여기에, 하늘을 찌르는 아상과 탐심이 다 없어지고 가지가지 고통도 서서히 잠재워지고, 아주 좋은 수행법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든 분들은 생활 속에 참나를 찾는, 이 지혜를 계발하는 선 수행을 꾸준히 함으로 해서 이로 좇아서 모든 고통이 다 없어지고 만족을 이룹니다. 만족을 이룰 뿐만 아니라 모든 이웃과 같이 베푸는데, 그게 내 일과 같이, 내 살림과 같이, 내 식구와 같이 베푸는 그러한 선행을, 착한 행을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는 생활 속에 한편으로는 큰 지혜를 계발해서 참나를 바로 봄으로 해서 세계가 한집이요, 만유(萬有)가, 모든 형(形)이 있고 형이 없는 그것이 나로 더불어 둘이 아닌 때문에 이러한 마음 용심을 함으로 인해서 세계가 극락이 되고 천당이 돼서 멋진 생을 누리게 되리라고 봅니다.

 

폴 니터 : 간화선이 얼마나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진아를 찾을 수 있는지 정말 동의합니다. 그런데 제가 마음에 항상 갖고 있는 질문이 있습니다. 서양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너무 욕망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욕망을 내려놓고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겠지만, 세상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인 먹을 것도 못 먹는 사람들, 매 맞는 여성들이라든지, 남자에게 억압당하는 여성들, 고문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삶의 기반적인 조건이 되지도 않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간화선이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그 간화선이 주는, 자기의 ‘진아(眞我)’를 찾아가는 세상과, 그리고 이렇게 고문당하고 배고프고 얻어맞고 이런 사람들에게는 욕망을 버리는 것보다는, 자기의 못 채운 기본적인 욕망을 채우는 게 행복의 조건이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하는데, 스님은 그 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큰스님 : 중생의 고통과 불안, 이것은 인과응보로서 자기가 전생에 지어서 금생에 받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느님을 원망할 수도 없고, 부처님을 원망할 수도 없고, 조상을 원망할 수도 없고, 낳아준 부모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전생에 지은 바에 따라 금생에 사대육신(四大肉身) 이목구비가 형성됩니다. 복을 많이 짓고, 덕을 많이 쌓고, 좋은 일을 많이 한 이는 태어날 때도 사대육신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복을 못 짓고 사사건건 전생에 악한 짓을 하고 박복한 짓을 한 이는 이목구비가 복된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 집집마다 가정에 아들 딸 사위를 삼고 며느리를 삼기 위해서 이목구비 사대육신 이걸 먼저 봅니다. 코와 입, 사대육신이 반듯하게 생긴 이는 전생에 복을 지어서 금생에 복 받은 이거든요. 하느님이 복을 준 게 아니고, 부처님이 준 게 아닙니다. 전생에 좋은 일 하고, 많이 덕을 쌓고 한 그 그림자가 이 몸뚱이로 금생에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길흉과,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자기가 베풀어서 결과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해야 됩니다. 그래서 금생에 못 사는 많은 분들은, 다 같이 노력을 하고 같은 학교를 나오고 명문대학을 나와도 출세하는 사람, 출세 못하고 의식주가 넉넉하지 못한 사람, 어째서 그렇느냐? 전생에 지은 게 그것 뿐입니다. 전생에 복을 못 지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과응보 이런 것을 분명히  받아들이고 금생에 성실하게 살아야 됩니다. 감옥 속에 가서 고통을 받는 그 ‘전생에 내가 죄를 얼마나 지어서 금생에 이런 고통을 받느냐! 다시는 이런 못난 행동을 안 해야 되겠다.’ 라고 참회하는 생각에서 여생을 아주 멋지게 살아야 됩니다. 성실하게. 그러면 금생에, 전생에 지은 죄의 고통이 싹 사라집니다. 그런 때문에 이 부처님 법에는 인과응보라 합니다. 인과응보. 좋은 일을 베풀면 좋은 결과가 자연히 이루어지고, 못나고 박복한 짓을 하면 고통뿐입니다. 모든 인류는 이러한 신앙을 바로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그 참나 가운데 모든 진리가 다 있다 하니 나도 참나를 바로 닦아 알아서 세세생생 고통이 없고 아주 평화롭고 안락한 그러한 생을 살아야 되겠다" 딱 법문을 듣고는 직장생활 가운데 오매불망 간절히,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어떤 것이 참나던고?’ 참나 가운데 모든 진리와 행복이 다 있습니다. 참나를 알면 모든 고통이 없습니다. 참나를 모르기 때문에 그로 좇아서 팔만사천 번뇌가 일어나거든요. 미워하고 고와하고 시기, 질투, 욕심, 이게 다 중생의 용심입니다. 고통의 근본입니다.

 

통역자 : 그럼, 스님은 어떨 때 제일 행복하세요?

 

큰스님 : 나는 행복, 불행이 없지요. 지금.

 

통역자 : 없으세요? 진짜 한 번도 불행해본 적이 없으세요?

 

큰스님 : 도를 깨달은 후에는 그게 없습니다. 항시 일여(一如)합니다. 내가 요전에 그러지 않았습니까. 깨닫기 전에는 ‘나’라는 것도 있고, 취(取)하는 것도 있고, 공포ㆍ불안 가지가지 초조ㆍ갈등이 있어서 그 가운데 편안한 나날을 못 보냈지만, 깨닫고 나면 텅텅 비어서 항상 여여(如如)하다. 변함이 없다. 변함이 없는 가운데 성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고통도 없고, 다 없거든. 얼마나 좋은 이 깨달은 세계는 아는 자만이 알지, 이른 자만이 알지, 맛을 본 자만이 그 맛을 알지, 세상 지식 가지고는 모릅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에게 항시 생활 속에 참나를 깨닫는 이 선 수행을 꾸준히 직분(職分)을 따라서 하라는 겁니다. 서울이 여기 부산에서 천리 길이지만, ‘멀어서 어찌 걸어가겠느냐’ 하지만, 쉬지 않고 걸어가면 한 달이면 갑니다. ‘멀어서 어찌 천리 길을 걸어가느냐’ 포기하면 절대 못 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활 속에 직분을 따라서 참선을 하는 이는 자기의 직분에 충실합니다. 모든 선악의 분별이 다 없어지고, 공동체의식이 딱 서있기 때문에 서로 상부상조하고 직분에 충실할 것 같으면, 념념(念念) 하루가 다르게 마음이 안정이 되고, 모든 조건이 좋아지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렇게 될 것입니다.

 

PD : 많은 사람들이 좋은 차가 있고, 좋은 집에 살고, 통장에 돈이 많고... 이것으로 자기가 성공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에 만족하지 못해서 더 가지려고 애를 쓰고, 또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의 행복을 보류하기도 하는데, 그런 고민과 갈등의 순간, 경제적으로 또는 명성을 쌓기 위해서 그런 데 매달리거나 갈등을 해보신 경험이 있으신지요?

 

폴 니터 : 저는 교수이다 보니 기본적인 의식주의 문제는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고통을 받지 않았는데, 이렇게 성공을 했지만 항상 밖에서 보았을 때, 내가 정말 잘 가르치는 교수인가, 나의 글이 정말 잘 쓴 글인가, 그리고 우리 학생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줄 수 있는 교수인가, 이런 문제를 가지고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에 두려움이나 불안, 나는 가치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자존감 같은 문제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특히 부인과 이해가 안 된다든가, 갈등이 있다든가, 부인이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불안해지고 두려움이 생기고, 나는 정말 충분히 성공한 남자가 아니다 그런 생각에 자신감을 잃어버리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불교 수행을 하면서 뭘 배웠느냐 하면, ‘이건 생각일 뿐이다.’ ‘이것은 감정일 뿐이다.’ 이렇게 정념 수행을 자꾸 하다가 ‘내가 나 자신을 괴롭히는구나.’ ‘내가 내 아내와 동료에 대해서 잘못 생각했구나.’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그러면 내 ‘진아(眞我)는 무엇인가?’ 그걸 자꾸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점점 깊이 나의 진아를 보면서 ‘나는 부처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이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있고, 그리스도성(性)이 나에게도 있다.’ 하는 것을 믿으려고 자꾸 수행을 합니다. 그렇게 믿게 되면, 지금도 괴로움을 당하지만, 내가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라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고, 화가 나거나 두려움이나 갈등이 생길 때, 정념수행을 하면서 ‘나는 붓다다. 나는 하느님의 자녀다’ 하면서 극복을 합니다.

 

통역자 : 교수님은 성공의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폴 니터 : 일단 의식주라든가 기본적인 생활의 조건을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첫째입니다. 어느 정도 이상 돈을 버는 것은 더 이상 행복이 증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까지만 돈이 중요하지, 그 다음부터는 돈이 늘어나는 게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번 째는 내가 자신에 대해서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라’ 하는 자존감, 자애감,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그런 마음이 있는 게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그 다음에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게 교수일 수도 있고, 학자일 수도 있고, 스님일 수도 있고, 노동자일 수도 있지만,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나는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게 사회적으로 말했을 때, 글을 썼을 때 베스트셀러가 되던 말던 상관없이 내가 최선을 다해 글을 썼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님께선 제가 생각하는 성공과 행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큰스님 : 잘 들었습니다. 우리 교수님 말씀 조목조목이 세상 사람의 바라는 것과 똑같습니다. 거기는 다시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나는 출가인이고, 부처님의 제자고 해서 그 세상 행복과는 또 다릅니다. 내 생의 살아온 것을 얘기할까요? 이것은 세상 밖의 일입니다. 출가인이 부처님의 진리의 세계에서 생활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알아야 되거든요.

 

나는 남해의 농촌에서 살았지만, 이십 세 되기까지는 항시 부모님이 농사짓는 것을 거들고, 서당에서 한문공부도 하고 그렇게 생활을 해왔는데, 정월달이 되면 요즘이나 몇십 년 전이나 항시 부처님 전에 기도를 올려서 가정이 편안하고 일년 내내 가족이 다 건강하고 재수있고 풍요로운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촌 당숙이 선비이신데, 초대(初代) 종정스님이 되기 전 석우(石友) 선사가 남해 해관암이라는 암자에 주석하고 계셨는데, 남해 일원에 훌륭한 도인 스님이 와서 계신다는 소문이 분분했습니다. 그래서 오촌 당숙이 정월달이 되면 항시 가고, 또 시간이 있으면 훌륭한 도인이 와서 계시니까 가서 대화도 하고 법문도 듣고 자주 출입을 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친분이 두터웠는데.
하루는 정월달 초에 오셔서 “훌륭한 도인이 계시는데 너 한번 같이 가보자.” 그러는 겁니다. 도인이라 하면 추앙의 대상이거든요. “저도 그러면 가겠습니다.” 촌에는 그때 돈도 귀하고 해서 쌀을 한 말 해서 불공을 드리러, 부처님 전에 기도드리러 갔습니다. 가니까 마루에 앉아 계시는데, 틀이 아주 좋았습니다. 생김새가 아주 좋은데, 인사를 하니까 인사를 받고는 하시는 말씀이 “젊은이, 세상에 사는 것도 좋지만, 한번 출가를 해서 부처님 제자가 돼서 대도의 진리를 닦는 것은 어떠한고?” 내 모습을 보고 그러셨습니다.
“출가해서 대도의 진리를 닦으면 결과가 어찌됩니까?” 그러니 “범부 중생이 위대한 부처 되는 법이 있네.”
그러시거든요. ‘범부 중생이 위대한 부처가 된다.’ 그래서 거기에 눈이 뜨이는 거야. 하하하. 그래서 “부모님도 계시고 하니까 가서 상의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하고는 스님네 일거일동 생활을 한번 살펴봤어요. 다 같은 사람들이지만 세상 밖의 생활을 하고 있어. 세상에는 가정을 이뤄가지고 부부지간에 온갖 살림을 꾸려가는데, 여기는 개개인이 다 밥짓고, 빨래하고, 채소 가꾸고, 나무 하고, 또 그 가운데 참나를 찾는 참선수행을 하고, 다 같이 밥을 먹고 살지만 세상 밖의 생활을 하고 있단 말이여. 그래서 ‘도인이 되는 수행법이 이 집에 있는가 보다.’ 해가지고 그날 불공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이렇게 도인을 친견하니, 중이 돼서 부처가 되라는, 도인이 되라는 권고를 하시는데, 그 길로 가도 되겠습니까?” 하니, 형제가 아들 딸이 일곱이거든. 일곱에 위에 형님도 있고 아래 동생도 있고, 누님도 있고 하니까, "그러면 도인이 한번 돼봐라." 남해 촌사람들은 도인이라고 하면 굉장히 추앙을 합니다.
그래서 가서 나무하고, 밥 짓고, 그때는 생활이 하도 궁핍해가지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습니다. 서홉을 쌀을 되서 하는데, 밥을 잘 못해서 눌어버리면 공양주 밥은 없습니다. 그만치 모든 세상에나 절에나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항시 밥을 하다가 눌어버리면 밥이 없단 말이여. 하하하. 누룽지만 늘 먹곤 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그때 배가 굶주렸느냐 하면, ‘내가 중이 돼서 큰절 주지를 하면 밥 좀 많이 먹고 공부하게 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가지고 행자생활을 한 7,8개월 했는데, 해제가 되니까 제방의 선객(禪客)들이, 남해에 훌륭한 선사님이 계신다 하니, 공부를 점검받고 법문도 듣고, 신심도 돋우기 위해서 7~8명이 찾아왔습니다.
수좌들이 방에 쭉 둘러 앉으니, 석우 선사께서 “여름 석 달 동안 수좌들이 얼마만큼 공부를 잘 했는지 내가 밥값을 받아야 되겠다. 시줏밥을 먹었으니까.” 하시고는 옛날 삼한시대 과거시험 문제를 하나 제시하셨습니다. “일출동산대소(日出東山大笑), 해가 동쪽 산에 떠서 크게 웃더라. 거기에 한 자를 놓아라.” 하거든. 옛날에 삼한시대에 ‘나 아(我)’ 자를 놓아가지고 재상으로 그대로 등용을 했다는 겁니다.
‘동쪽 산에 해가 떠서 크게 웃는 모습이 내다’ 해서 온 천하를 비추는 모습이거든요. “너희는 무슨 자를 놓겠느냐?” 원래 석우 선사는 선비고, 한문에 박식하고, 훌륭한 인격자입니다. 7~8명 선객들이 십년 간 참선한 선객들인데, 거기 답을 못하는 거야. 그렇게 벙어리가 돼있으니, 내가 맨 꼴찌에 앉았는데, “행자 네가 한마디 해봐라.” 하거든. 나는 바로 “없을 無자를 놓겠습니다.” 그랬거든. ‘해가 동쪽 산에 떠서 온 천하를 밝게 비추지만 호리도 ‘나’라는 상이 없습니다.’ 놓으니까 극찬을 했어요. “네가 장차 큰 도인이 된다.” 하하하. 그래가지고 해인사로 조실로 모신다고 그래서 석우 선사를 따라가서 시봉을 했는데, 거기서 행자생활을 1년 하다가 중이 됐지요. 그때도 절에 들어옴으로써 희열에 생활을 하는 기여.

 

그러다가 24살 때 음력 12월 27일 날, 석우 선사께서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셔서 동화사에서 한 3년 기거하셨는데, 선사께서 열반에 드셨다는 부고가 날아왔습니다. 마침 그때는 내가 도리사에서 7~8명 수좌스님들과 참선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도량을 걷다가 홀연히 ‘알았다’는 생각이 떠올라가지고 ‘해제만 되면 가서 점검을 받아야 되겠다.’ 하고 있던 참이었지요.
점검받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돌아가셨다니 허전하고, 스승이 돌아갔으니... 그래서 동화사에 가서 장례를 다 마치고는,
그 당시 남쪽에는 향곡 선사가 대단한 진리를 깨달아서 독보의 존재였고, 또 팔공산 성전암에서 성철 선사가 10년간 철조망을 두르고 동구불출하며 정진하고 있을 때입니다. 성철 선사가 명성이 대단했지요. 7일간 장례가 끝나니까 거기 모인 점잖은 구참스님들이 새해도 되고 했으니 “성철스님을 뵈러 가자.” 해가지고 따라서 같이 동행을 했어요.
다른 스님들이 인사를 하고 나온 다음에 내가 맨 뒤에 들어가서 “제가 공부를 하다가 이렇게 소견(所見)이 났는데, 제가 바로 알았는지 바로 알지 못했는지 자비심으로 점검을 좀 부탁합니다.” 하니 “나는 몰라. 나는 몰라.” 하시며 다른 데로 가라 하시더군요. 그때는 성철 선사가 모든 분들을 접대를 안 할 땝니다.

그래서 그 걸음으로 기장 월내(月內) 묘관음사로 갔습니다. 지금은 부산시가 되었지만, 그때는 동래군(郡)이었지요. 가서 인사를 드리고는, “제가 공부하다가 소견(所見)이 나서 이렇게 점검을 받으러 왔습니다.” 하니, 향곡 선사께서 대뜸 “진리의 바른 답을 해도 30방을 맞고, 바른 답을 못해도 30방을 맞는다.” 대번에 그러거든. 성철 선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향곡 선사는 그대로 사자(獅子)입니다. 우물쭈물 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답이 척 나와야 되는데, 내가 우물쭈물하니 “에잇, 이 사람. 그것도 몰라.” 하시고는 또 하나 물으셨어요.

 

남전 도인이 7백 명 대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법당을 기준으로 동편 서편으로 큰 선방이 있어서 몇 백 명 대중이 정진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사중(寺中)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고양이를 두고 동쪽 선방에서 참선하는 스님네는 동쪽 선방 고양이라 하고, 서쪽 선방에서 참선하는 스님네는 서쪽 선방 고양이라 하며 서로 ‘내 고양이, 네 고양이’ 시비(是非)가 분분하니, 남전 도인이 그 광경을 보고는, "운집종(雲集鐘)을 쳐라" 해서 대중이 다 모여드니, 시자를 보고 ‘고양이 잡아오고, 칼 가져오너라.’ 해서 시자가 가져오니까, 고양이를 들고 하시는 말씀이, ‘동쪽 선방에서 참선하는 스님네는 이 고양이를 동쪽 선방 고양이라 하고, 서쪽 선방에서 참선하는 스님네는 이 고양이를 서쪽 선방 고양이라 하니, 금일 모든 대중 가운데 이 고양이에 대해서 분명히 바른 답을 하는 이가 있을 것 같으면 고양이를 살려두거니와, 바른 답을 못하면 두 동강이 내리라.’ 하고는 ‘일러라!’ ‘일러라!’ ‘일러라!’ 세 번을 해도 묵묵부답이라. 7백 명 대중이 ‘내고양이 네고양이’만 했지 남전 도인이 고양이를 들고 이르라는 뜻을 아는 이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약속과 같이 고양이를 두 동강이 내어 던져버리고 당신 조실방에 가서 쉬고 있으니, 당신 사랑하는 제자가 밖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돌아와서 ‘다녀왔습니다.’ 하고 남전 도인께 인사를 올리니, ‘오늘 오전에 대중에게 이러한 고양이 법문이 있었는데, 그대가 만약 대중 가운데 있었다면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고?’ 하니, 신짝을 머리에 이고 나가버리거든. 그러니 남전 도인이, ‘그대가 있었던들 고양이를 살릴 뻔 했다.’ 바른 답을 했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신짝 이고 나간 여기에 바른 진리가 있는데, 그걸 봐야 도가 열리는 겁니다.

 

그래 그걸 묻는데 또 거기에 답을 못하고 벙어리가 된 겁니다. 거기서 쫓겨 나와서 한 2년 동안 제방(諸方)에서 공부한다고 다녔는데, 공부가 순일(純一)이 되어 흐르는 물과 같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쭉 흘러가야 되는데, 그렇게 안 되더라. 그래서 ‘이렇게 공부해서 안 되겠다. 선지식 스님을 찾아가서 법(法)방망이를 맞으면서 화두를 잡아가지고 공부해야 되겠다.’ 해가지고, 바랑을 짊어지고 가서 "스님, 화두를 하나 내려주십시오. 이 화두가 해결되기 전에는 다른 처소로 가지 않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라는 화두를 내려주셨는데, 이걸 해결하면 진리의 도를 성취해서 도인이 된다 그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뭇가지를 물고는 전신(全身)이 드리워져 있는데, 밑에서 어떤 스님이 지나가다가 '달마스님이 서역에서 중국으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하니 답을 하려 하니 나뭇가지를 물고 전신이 늘어져 있는데 떨어져서 전신이 박살이 날 것이고, 답을 안 하려고 하니 묻는 데 어기고.> 이 화두를 들고 2년 5개월 동안 씨름을 했습니다. 씨름을 해가지고 해결을 했거든. 해결이 되니까 모든 법문이 얼음에 박 밀듯이 척척 주고받고 했습니다. 종전에는 동문서답을 했는데, 이 화두가 해결이 되니까 모든 법문이 척척 말 떨어지자마자 바른 답이 나오고, 전에는 말 떨어지자 우물쭈물해서 쫓겨나오고 했는데, 얼음에 박 밀듯이 척척 나오거든. 그래가지고 일년 동안 (법문을) 주고받으면서 멋지게 생활을 했어요.

그러다가 하루는,

 

마조 도인이 연세가 많아서 불안(不安)할 때, 아침마다 원주(院主)가 ‘밤새 존후가 어떠하십니까?’ 항시 문안을 올렸는데, 하루는 대뜸 마조 도인이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이니라.’ 하고 옛날 부처님 명호(名號)를 말씀하시거든. ‘일면불 월면불’ 그 뜻이 어디에 있는고?

 

하거든. 그렇게 밝게 답이 나오다가 거기에는 꽉 막혀버리는 거야. 그걸 가지고 5년간 또 씨름을 했습니다. 5년간 씨름하다가 거기서 해결이 돼가지고 전법(傳法)의 인증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부처님의 세계에 진입을 하면 모든 법문을 한 꼬챙이에 다 꿰어버립니다. 그게 호왈(號曰) 견성이요, 진리의 도를 알았다는 겁니다. 거기에 진리를 묻는데 있어서 척척 나가야 되지, 거기에 막히면 허락을 안 합니다. 진리의 도를 깨달으면 그 후에는 모든 아상, 인상, 중생상, 공포, 불안, 초조, 갈등, 불평, 불만이 싹 없어집니다. 그래서 깨달을 것 같으면 항시 여여하고, 변함이 없다. 변함이 없는 가운데 생(生)도 없고 사(死)도 없다. 옴도 없고 감도 없다. 이러한 활발발지를 수용하는 것이 부처님의 진리의 도요, 깨달은 경계를 억만년토록 수용하는 겁니다. 이 도를 깨달아놓으면 이 몸뚱이 버리는 것을 이집에서 저집으로 이사하는 것 같이 자유의 분(分)을 갖춥니다. 그저께 동화사에서 했던 방거사 일가족의 법문, (딸 영조는 아버지 좌복에 딱) 앉아서 가고, 아버지 방거사는 ‘네 시신을 화장하기 위해서 나는 일주일을 연기해야 되겠다.’ 하고는 일주일 후에 마누라 보살이 있건마는 간다온다 말 안하고 딱 가고... 왜 그렇느냐? 본시 진리의 도를 알면 가고, 오고, 죽고, 나옴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보살이 일생 도반(道伴)이지만 간다온다 말 안하고 가버리거든.

 

이러한 자재의 수양의 도력이 나오려면 도를 알아야 됩니다. 다른 종교에는 이렇게 활발발지(活鱍鱍地)의, 생사안두(生死岸頭)에 가서 자유의 분(分)을 척척 나투는 그런 게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인류는 인간의 모든 갈등에서 초연하고 대자유인이 되고자 할진댄 참나를 발견하는 이 선 수행을 일상생활 가운데 꾸준히 닦고 닦아라 하는 원인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갈등과 투쟁이 다 없어지고 편안한 나날이 있습니다. 물질풍요가 그게 풍요가 아닙니다.

 

PD : 얼마 전에 한국 연평도에서 포격이 있었습니다. 전쟁의 위협이라는 불안에 시달렸는데요... 그 뿐만 아니라 두 분이 만나신 것도 결국 기독교와 불교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상생법을 찾고자 이렇게 만나신 것 같은데요, 종교간의 갈등이나 전쟁의 위협 이런 것들이 왜 생기는 건지, 또 그걸 해결하려면 나 개인은 어떻게 해야되는 건지,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대해 대담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폴 니터 : 개인 사이에 나라 사이에 전쟁과 분쟁이 있을 때, 불교에서 배운 사성제(四聖諦)를 가지고 해결합니다. 모든 분열과 갈등의 근원에는 '자기를 주장하려는 마음', 그게 있다고 합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더 중요하고, 내가 저 사람보다 더 훌륭하다... 이런 자기를 주장하려는 마음 때문에 모든 갈등이 생기는데, 그것은 무지함이고 또 어떤 면에서 인생에 대해서 알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이런 게 나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공격을 당하거나 했을 때, 항상 두 가지 방법을 택합니다. 첫 번째는, 연평도처럼 누가 우리를 쏜다든가, 아니면 누가 나를 개인적으로 공격하고 있다든가 그럴 때 나를 보호해서 공격당하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하고, 그 다음에는 저 사람이 왜 저랬을까 이해하는 마음, 북한이 왜 우리를 쏘았을까. 아니면 9ㆍ11 사태 일어났잖아요. 그때 부시 대통령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왜 저 사람들은 우리를 이렇게 미워하는가?’ 질문을 했지만, 그 미국을 왜 미워하는가에 대한 진짜 답은 발견을 못하고 그냥 다른 나라를 공격만 했다는 거에요.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을 이해를 못하고 공격만 하면, 그건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는 거지요. 더 큰 두려움과 더 큰 불안과 갈등을 만들어내고, 더 큰 공격성을 만들어내는데, 우리가 이러한 자기방어 같은 것을 할 때 항상 기억해야 될 것은, 나의 원수들도 원래는 나쁜 인간이 아니다, 그들도 불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도 하느님의 자녀다, 하느님의 형상을 갖고 있다, 그러나 무지해서 저런다... 그것을 이해해야 된다는 거지요. 그것을 이해를 하게 되면, 공격했을 때 나를 보호하지만 동시에 그 사람들을 어찌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말한 '원수를 사랑하라', 아니면 부처님이 말씀하신대로 '미움을 미움으로 갚지 말고 자비와 사랑으로 갚아라' 이걸 항상 기억하면서 갈등해소를 하려고 노력합니다.

 

큰스님 : 종교인 입장에서 타당성이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다 아시다시피, 6.25도 벌어졌고, 오늘날 또 그러한 갈등이 벌어졌는데, 7천만 국민이 크게 눈을 떠야 됩니다. 7천만 국민이 크게 눈을 떠야 되는데, 손바닥만한 이 땅덩어리를 가지고 남북이 갈라진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민족입니다. 그리고 남쪽에는 풍요를 누리고 잘 살지만, 저쪽에는 서민들 비참하기 짝이 없거든요. 모든 분들이 눈을 크게 뜨고 시비갈등이 없어야 됩니다. 시비갈등이 없기 위해서는 ‘나’라는 허상을 다 놓아버려야 됩니다. ‘나’라는 허상을 다 놓아버리면, 위(북측)에부터 세습정치 다 양보하고, 철조망 다 걷어버리고. 또 남쪽에도 이론(異論)가지고 여야가 그럴 게 아니라 모든 국민의 대의를 좇아서 멋진 정치를 하시고. 앞으로 평화로운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중국 대륙을 무시 못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아주 중국 지도자들과 친밀해가지고 어떻게 하든가 남북통일을 풀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열쇠는 중국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치하는 분들은 크게 마음을 열고 잘 풀어서 조화를 이루면 남북통일이 되어서 잘 살리라 봅니다.

 

PD :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들 때 어떻게 해야 풀어집니까?

 

큰스님 : 그것은 중생의 많은 생에 지은 습기(習氣)입니다. 중생의 근본 업(業)이다. 중생의 근본 업인데, 이 근본 업을 없애는 데는 참나를 밝히는 선 수행을 해야 된다, 바로 그겁니다. 그러면 아집과 허세가 싹 없어집니다. 그러면 온 세계가 평화를 이뤄버리지요. 아집과 ‘나’라는 것을 뿌리뽑는 데는 참선밖에 없습니다. 진아(眞我)를 발견해서 진아 가운데 생활하면 거기는 갈등과 시비가 없습니다. 서로 양보하고 미(美)뿐입니다.

 

PD : 지금까지는 폴 교수님께서 질문을 하시는 걸로 했는데, 큰스님께서 간단하게 하실 질문이 있으신지요?

 

큰스님 :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셔가지고 한국 간화선과 동양정신문화를 접하게 된 줄 압니다. 그래서 얼마만큼 마음에 흡족하게 받아들여가지고 서구에 가셔서 멋진 동양의 정신문화를 펼칠 수 있는 그러한 여력을 갖췄는가 궁금합니다.

 

폴 니터 : 이번에 와서 간화선, 화두에 대해서 많이 배웠습니다. 마음은 이것을 서양에 가서 정말 널리 알리고 싶은데 제가 아는 게 너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제가 몰라서 스님한테 첫 배움을 배웠는데, 이게 서양 사람들에게 어떻게 효과가 있을까 그걸 모르겠습니다. 가르치기에는 제가 너무 모릅니다. 가르칠 마음은 한량이 없되 몰라서 못 가르치겠습니다. 많이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 가실 때 내 법어집 가지가지 다 보내드려야겠습니다.

 

폴 니터 : 스님이 책을 보내주시면 저희가 열심히 같이 공부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서로 소통을 하면서 서로 배워가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간화선과 한국 전통에 대해서 열심히 배우겠지만, 한국 불교에서도 서양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좀 배워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서로 알아야 소통이 되니까 서로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대중일동 : 감사합니다.

 

폴 니터 : (동시통역하는 가운데 영어로 뭐라고 하심.)

 

큰스님 : 예, 예. 이번 방문에 우리 대한민국 모든 국민에게 마음의 선물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큰 공덕을 짓고 돌아가시지 싶습니다. 백수를 누리시고 항시 건강하시고 다음에 또 만날 날을 기약하면서 건강하십시오.

 

폴 니터 : 저도 백 살까지 살고 싶습니다. 저도 큰스님께 더 많이 배우고 수행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니까요.

 

대중일동 : 감사합니다. 큰스님 카메라 샷을 위해 차 드시면서 교수님께 덕담 한마디 해 주십시오.

 

큰스님 : 장수의 비결은 마음이 편안한 데 있습니다. 마음이 편안하게 가지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한국 간화선 참나를 찾는 수행이야말로 장수의 비결입니다.

 

폴 니터 : 의심을 항상 가지고 있겠습니다.

 

대중일동 : 감사합니다.<끝>

 

 

(KBS 다큐팀 촬영 - 2011. 1. 3 오전8시, 해운정사 금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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